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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이웃집 가이드 - 15

벼와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4.12.05 08:02:15
조회 1630 추천 49 댓글 17

*이전 이야기

 

 

 

 

 

 

 

 

 

 

 안나랑 데이트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옷을 못 입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사는 만약 아무렇게나 입고 데이트를 나간다면, 안나가 불쾌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용모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애인이 용모에 심드렁한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의 관심사가 부정당한 것 같아 불쾌할 수 있지 않을까?


 '...!'


 엘사는 무릎을 탁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 패션과 미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패션과 미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프의 생김, 옷차림을 욕하던 안나는 개인적이고 소소로운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나는 적어도 가꾸기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긍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를 지나치게 좋게 포장하는 거 아닌가?'


 제동장치가 엘사를 막아섰지만, 부모님의 뜻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일부러' 꺾은 적이 많은 엘사는 '분명한 자기표현'은 설령 그것이 약간 비뚤어진 방식이더라도 최소단위의 정의실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욕구에 충실한 습성은 뒷담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방출시켜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정말 심각한 정의가 필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할 것이다. 엘사는 분명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안나가 기특했다. 기특해서 사랑스러웠고, 사랑스러운 안나와 같은 곳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엘사는 데이트를 다음 주로 미루고 일주일간 용모를 가꾸는 데에만 열중하며 학업에 치여 무뎌진 미감을 다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날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이 가꾸는 데 쓰는 열과 성에 대해 칭찬하는 센스도 필요해. 하지만 너무 진지한 칭찬은 민망한 분위기를 만들 거야.'


 한편, 데이트 약속이 일주일 뒤로 미루어진 것은 안나를 약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일주일이 지나 약속장소에 나타난 엘사의 '예쁘다'는 칭찬은 안나의 불안을 잠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말에 딸려온 지적이 다른 파동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량해 보여."


 이 말을 들은 안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비유하자면... 데이트를 13년 뒤로 미루겠다는 말도 안 되는 통보를 들은 것처럼 충격적이고 황당했다. 안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불량해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별로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불량해보인다'는 말이겠지. 그러고 보면, 엘사한테 '무책임하고 멍청해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안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느껴지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알기 어려웠다.


 '무책임한 건 모르겠고... 욕 많이 해서 불량하게 느껴지나? 공부 못해서 멍청해 보이고?'


 중딩 때 좀 '놀았던' 것도 걸렸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의 중딩 시절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을 불량하게 느끼는 걸까? 욕은 많이 줄였고, 공부도 중학생 때보다는 열심히 하는데. 안나 생각에 자신은 불량하지도, 무책임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아니지. 엘사 기준엔 내가 멍청해 보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엘사가 특출난 것이지 내가 멍청한 것은 아니야. 어떻게 모두가 1등일 수 있겠어. 엘사 기준이 너무 높은 거야.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다니. 게다가 그런 말은 뭣하러 한 거지?'


 안나는 기분이 나빠졌지만,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데이트를 망칠 순 없었다. 안나는 이에 대한 의문은 일단 접어두고, 흥겨움에 취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엘사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불량해 보여, 불량해 보여...'
 결국, 데이트도 안나의 기분도 최악으로 흘러갔다. '이건 다 엘사 탓이야.' 안나는 엘사가 원망스러웠고, 원망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데이트 내도록 작은 응징을 가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괜한 트집을 잡거나, '그런 행동은 불량해보여' 하고 들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기도 했다. 그럼 엘사는 그냥 '그런가?' 하고 웃어 넘겼다.


 엘사는 데이트가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안나에게서 안나 본연을 느낀 엘사는, 안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달콤하기만 했다. 주말이 끝났고, 데이트는 무한할 수 없으며, 내일부턴 평범하고 성실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때는 어둠과 추위가 햇볕을 대신하는 저녁이었다. 오감이 행복에 마취돼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엘사는 이 낭만적인 타임워프가 만족스러웠다. 다만, 안나와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패션에 대한 이야기가 자기 턴에서 끝나 버린 점은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불량해 보여.'


 안나가 좋아하는 가학적인 유머로 운을 뗀 것인데, 안나는 저 말을 들은 뒤로 입을 닫아버렸다. 아주 짧은 순간, 히스테릭한 주름이 안나의 미간을 스쳤고 '안나의 찡그린 미간'을 분명히 포착한 엘사는 잠깐이지만 걱정에 빠졌다.


 '혹시?'
 '설마...'
 ''불량하다'는 말이 안나의 속을 긁은 건 아닐까?'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안나가 언제 찡그렸냐는 듯, 밝은 얼굴로 데이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해맑음과 천진함, 유흥에 대한 열정은 엘사가 이제껏 봐온 안나의 모습과 똑같았다. 설마 그 밝고 정열적이던 모습이 일부러 만들어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말하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엘사는 생각했다.


 '만약 안나가 불량해 보인다는 말에 불쾌감을 느꼈다면 불쾌하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거야.'


 엘사는 확신했다.


 '안나는 불량해 보인다는 말 때문에 인상을 찡그렸던 게 아닐 거야.'


 하지만 확신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거지?'


 열심히 추측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만 생각하자. 이건 안나의 속을 함부로 재는 행동이야.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거라구. 안나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정 때문에 미간을 찡그린 것일 수도 있어.'


 오버하자면, 안나가 미간을 찡그렸던 모습조차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엘사는 안나가 직접 표현해주기 전엔 속단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나의 찡그린 미간이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엘사는 다시 생각했다.


 '난 안나가 미간을 찡그렸던 것을 신경 쓰고 있어. 그래서 안나에게 왜 미간을 찡그렸냐고 묻고 싶어. 하지만 그런 질문을 했다가 엄청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갈등하고 있는데 직설 소통의 맹세가 떠올랐다.


 '우린 직설적으로 소통하기로 맹세했어. 안나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맞는 것 같아.'


 엘사는 '예민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소심함 때문에 안나와의 맹세를 어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물었다.


 "안나, 아까 왜 얼굴 찡그렸어?"
 "어? 내가 그랬나?"
 "아까 아침에 만났을 때."
 "아...왜? 이상했어?"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왜 찡그렸는지."


 안나가 어딘지 씁쓸한 표정으로 뒷목을 쓸었다. 엘사 눈엔 그래 보였다.
 엘사 때문에 온종일 심란했던 안나는, 엘사의 질문 때문에 짜증을 담아둔 둑이 넘칠 것 같다는 신호를 받았다. 그러니까 사실 안나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참는 중이었는데, 엘사는 안나의 묘한 표정에서 어딘지 청순하고 가련한 인상을 받았다.


'만난 순간부터 불량해 보인다더니... 얼굴 찡그린 것도 불량해 보이나?'


 안나는 억울했다.
 나는 불량하지 않다는 억울함과 엘사에게 찡그린 표정을 보였다는 미안함, 이 모든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싸우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안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중딩 때 같았으면 발끈해서 몰아붙였을 테지만...'


 싸우는 건 질색이었다.
 안나는 차근차근 자신의 감정을 설명해보기로 했다.


"언니. 내가 예전에 좀 엇나간 건 맞는데... 지금은 안 그래. 언니가 나 그렇게 안 봤음 좋겠어."


 한편, 엘사가 예상하고 있던 안나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냥 집에 우환이 있어서.'
 '언니가 이상하게 입고 와서.'
 '찡그린 적 없는데?'
 따라서 안나의 대답은 예상 밖의, 무척 뜬금없는 고해성사였다. 욕이랑 뒷담화를 많이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엇나간 적이 있었구나! 당황한 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엇나갔었어?"


 엘사가 표현한 당황은 안나도 덩달아 당황하게 했다.
 '엘사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눈만 끔뻑이는 지금의 엘사와
 '불량해 보여' 하며 뜬금없는 핀잔을 주던 오전의 엘사 사이의 갭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안나는 이 짜증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안나가 가진 인내력의 한계를 아주 약간 초과하는 일이었다. 안나는 결국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불량해 보인다며!"
 "아."


 안나는 불량해 보인다는 말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맞았구나. 엘사는 머쓱해져서 왼쪽 손으로 오른쪽 손등을 그러쥐듯이 쓸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준 안나가 고마웠다. 엘사는 안나에게, 그 말은 신경 쓸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네 옷차림에 대한 관념적인 표현이었어. 너무 진지하게 칭찬하면 이상하잖아... 네가 그런 유머 좋아하니까. 장난으로 덧붙인 말인데."
 "정말?"


 정말? 하고 되묻긴 했지만, 안나는 '엘사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건 틀림없이 진심이었다. 엘사는 이전에도 안나에게 '멍청하고 철없어 보인다'며 비난한 적이 있다. 게다가 대체 '불량해 보인다'는 말의 어디가 장난이란 말인가. 안나가 알고있는 '장난'이란 '웃기고 재밌는 것'이다. 하지만 엘사의 장난은 하나도 웃기지 않다!
 그래도 안나는 '장난이었다'는 엘사의 해명을 믿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엘사 말대로라면 고작 장난 때문에 온종일 심란했던 것이 된다. 사실 엘사가 먼저 속을 긁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인데! 안나는 자신이 속이 좁아 따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싫었다.


 '장난이면 뭐든 다 넘겨야 해? 어쩜 사과 한마디를 안 하네!'


 이대로 얘기를 끝내자니 억울해진 안나는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와 그럼 난... 언니 장난 하나 때문에 종일 짜증 났던 거네."
 "진짜? 계속 짜증 났었어? 말하지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무안해진 엘사가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엘사의 웃음소리는, 엘사의 사과를 바랐던 안나를 자극했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고 당당하지...?'


 안나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아무래도 안나가 화 난 것 같아.'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엘사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안나는 화났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고 있다. 이 또한 엘사의 느낌일 뿐이었지만, 안나의 표정이 굳었다는 점이 안나의 분노를 근거했다. 엘사는 안나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의 분노가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엘사는 생각했다.


 '난 장난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그게 왜 화가 나지? 옷차림에서 풍겨오는 뉘앙스를 관념적으로 표현했던 것뿐인데.'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아냐. 난 장난이었지만 안나에겐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거지. 인정하자, 내가 실수한 거야.'


 장난이라는 말로 안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잘못이 사라질 순 없을 것이다. 난 장난이었는데, 왜 기분 나빠해? 하고 따지는 건 몹쓸 행동이다. 사이코패스들이 '사람을 괴롭히는 건 그저 장난일 뿐이에요' 하며 소름 끼치는 너스레를 떠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엘사는 사이코패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안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미안한 일이니까.


"안나, 미안해. 난 정말 장난이었어. 그리고 그게 설령 진심이었다고 해도... 네가 불량해 보이든 어떻든 신경 안 쓰니까 기분 풀어."
"언니 말은 어쨌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긴 한다는 거잖아.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하지만 엘사의 말은 안나를 자극할 뿐이었다. 엘사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치는 안나의 눈엔 핏발도 서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은 장난이라고 했잖아. 난 네가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 들이는지 모르겠다."


 엘사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불량해 보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말하자면 '안나 네가 여자든 외계인이든 좋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안나는 '불량해 보인다'는 말 자체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전혀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장난이라고 설명했고, 불량해 보여도 신경쓰지 않는다고도 말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언닌 사귀는 사이에 그런 말 들으면 기분 좋겠어?"
 "어떤 말."
 "불량해 보인다는 말."
 "사람 마다 들었을 때 기분 나쁜 말이 다르겠지. 그리고 어떤 특정한 말이 불쾌감을 준다기보단... 말하는 사람이 악의를 가졌는지 아닌지에 따라 듣는 사람 기분도 달라지는 거 아닐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예를 들어 너네 할머니가 네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어이구 우리 강아지, 우리 개새끼 하는 건 괜찮지만...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네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어이구 우리 강아지, 우리 개새끼 하면 무섭고 싫겠지? 무슨 다른 의도가 있나 의심도들테고."
"그...렇지, 그게 왜?"
"그러니까 말하자면 난 네 할머니인 입장인데, 넌 지금 날 지나가는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거 같아. 장난이라고 말했잖아. 악의없었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지?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장난으로 한 말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건가?
 엘사는 안나의 분노에서, 서로 간의 신뢰가 무너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애정이 안나에게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안나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마다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장난이라고 해명했는데 어쩜 이렇게나 발끈할 수 있을까? 안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날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섭섭함에 한숨을 쉬는데, 순간 어떤 발상이 엘사의 뇌리를 스쳤다. 그 발상은 어떤 여과도 거치지 않고 신속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혹시... 불량해 보인다는 말에 자격지심 같은 거 느끼는 거 아냐?"


 ...자격지심이 뭐지?
 안나는 자격지심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 못 했지만, 전체 문장을 보고 뉘앙스를 파악했다. 아마 이 말은 여태 엘사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재수 없는 말일 것이다. 안나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아직 분노로 표출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 있는 이성 몇 톨들이 안나를 붙들고 말했다.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하지만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슬프다기보단 너무 짜증이 났다. 안나는 엘사가 눈물을 보기 전에 성큼성큼 앞질러 걸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애인의 몸짓에 놀란 엘사는 후다닥 안나를 쫓아갔다.


 "너 울어?"


 안나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아니긴. 우는 거 다 보이는데.
 안나의 눈물에 무척 당황한 엘사는 생각했다.


 '자격지심 느끼는 거 아니냐는 추궁이 울 정도로 슬픈 건가?'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던 엘사는 안나의 입장을 이해해보기 위해, 차근차근 오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엘사는 안나에게 '불량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건 일말의 진심도 없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안나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여기서부터 엘사의 사고가 꼬이기 시작했다.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령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게 그토록 이나 기분 나쁘단 말인가? 엘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지만, 눈물까지 터뜨린 안나에게 그게 왜 기분이 나쁘냐고, 설명해보라고 닦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엘사는 입을 떼기에 앞서 생각을 다듬었다.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는데, 불량하다는 말을 들어서 화가 난 걸까?'


 그렇다면 그것이 왜 화가 나는 걸까?
 스스로 선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고 떳떳하다면. '안나 너 불량해 보인다'는 말은 안나의 정신에 흠집을 낼 수 없는 것 아닌가? 엘사가 '안나는 불량하다' 하고 동네방네 헛소문을 낸 것도 아니고, 설령 헛소문을 냈더라도 헛소문은 참이 아니므로, 안나에게 어떤 진실된 타격도 줄 수 없다. 안나 스스로만 떳떳하다면 '불량해 보인다'는 말은 그저 덧 없는 평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덧없는 평가에 이토록이나 동요한다는 것은 엘사 생각에 너무 이상했다.
 엘사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아니면, 평소에 자기 스스로 불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불량하다는 말을 들어서 화가 난 걸까?'


 이 경우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 자기 스스로 '나는 불량하다'하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면 '불량해 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화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기도, 타인도 인정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이게 왜 화가 나지? 예를 들어 엘사는, 나쁜 성적을 받고 부모님께 혼났을 때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었다. 비록 아버지가 지나치게 성을 내시긴 하셨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고, 나쁜 성적을 받는 것이 좋은 일일 순 없었다. 엘사는 자신이 나태했고, 나빴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불량해 보인다는 말 자체가 부정적인 뉘앙스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걸까?'


 하지만 엘사는 그 말이 장난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결국 생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내겐 장난일 수 있지만, 안나에겐 불쾌할 수 있지... 하지만 왜?' 엘사는 계속해서 도돌이표를 찍다가, 다른 쪽으로 생각을 옮겼다.


 '어쨌거나 그 말이 화내고, 울 만큼 속상했다면... 왜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은 거지? 우린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안나에게 그 약속은 아무 의미 없는 약속이었던 것일까?'


 엘사는 심란해졌고, 기분이 나빠졌다.
 엘사에게 있어 '무엇이든 솔직히 말하자'는 약속은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엘사는 이 두 가지 사실 간의 괴리가 무척 섭섭하게 다가왔고, 섭섭함은 안나에게 당장 묻고, 따지고 싶은 충동을 데려왔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는 사실을 왜 이리 뒤늦게 말해?'
 '내가 '왜 인상을 찡그렸어?' 하고 먼저 묻지 않았다면 계속 말하지 않을 셈이었니?'
 '데이트하면서 보여줬던 활기찬 모습은 사실은 다 꾸며낸 모습이었어?'
 '나는 그 꾸며낸 모습을 보고 행복했던 것이니?'
 '장난이었다는 말은 왜 믿지 않는 거니?'


 엘사는 한숨을 쉬며 충동을 참았다. 엘사는 결국 자신의 한마디가 상황을 이렇게 끌고 왔다고 생각했다. 엘사는 이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꼈고, 애인으로서 안나가 느낀 불쾌함을 보상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나, 울지마. 네가 아침에 했던 말은 그냥 관용적인 표현이었어. 장난이었다구. 악의없었어. 좀 믿어주라. 그게 너한테 진지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 그 말을 진지하게 듣고 화가 난 것이라면 사과할게. 하지만 네가 불량하든 아니든 어떻든 난 신경 쓰지 않으니까..."
 "아니이, 신경을 안 쓸 게 아니라. 난 안 불량 하다니까? 내 어디가 불량해 보인다는 거야?"


 애석하게도 엘사의 화술은 안나를 위로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안나는 TV 애니메이션 아따맘마의 담비처럼 울먹이며 따졌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기도 모르게 급웃음이 터진 엘사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뒤 차근차근 말했다.


 "그건 정말 장난이었긴 하지만... 그 말과 별개로 네가 불량해 보일 때가 있긴 하지."
 "언제!"
 "언제냐니... 뒷담화를 하는 게 선량하기라도 하단 말이니?"
 "무슨 뒷담화. 내가 누굴 뒷담화 하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까잖아. 선생님들부터, 지나가는 사람이랑... 심지어는 산책하는 강아지들까지 이상하게 생겼다고 비웃잖아. 수업이 재미없다, 저 사람은 못생긴 거 같다. 여친이나 남친 없게 생겼다... 끝도 없이."
 "그건...!"


 안나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누그러지더니


 "그건 내가 언니를 좋아하니까 그냥 내 감정을 다 얘기한 거지..."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엘사는... 엘사는,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안나에게 실망해야 했다.


 '대체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을 뒷담화 해도 된다는 사실에 어떤 연결점이 있지?'


 엘사는 또다시 안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가 무척 멀게 느껴졌다.
 이제까지의 '이해불능'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강한 불쾌감이 딸려왔다는 점이었다.


 '우리 둘 사이는 친하니까 우리 둘끼리는 남을 비방해도 된다는 말이야? 그 따위 유치한 짓이 안나의 사교관이고, 안나의 연애관이라니! 그런 생각을 갖고 뒷담화를 일삼았던거라니! 어떻게 그런 질 낮은 행동을 사랑라고 포장할 수 있지? 이건 우리 둘 사이의 관계를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어. 뒷담화가 연애질에 동반되는 필수요소라면 난 연애를 그만두겠어!'


 물론... 당장에 안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안나에겐 사랑스러운 점이 많았다. 사랑스러운 점이 순전히 착각이고 콩깍지라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엘사는 안나를 사랑했고, 그 감정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사는 안나의 유치한 연애관을 고쳐서라도 안나와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뒷담화도 일종의 자기표현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아주 나쁜 거라고 생각해."


 안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무척 부정적인 신호로 느껴진 엘사는 한껏 긴장했다. 애정을 갖고 한 충고였지만, 안나가 이 충고에서 요만큼의 애정도 느끼지 못했다면 역효과일 것이다. 두 학년 위라며 위세를 떠는 것처럼, 선생질을 한 것처럼 느꼈으면 어떡하지? 초조해진 엘사는 어투를 완곡히 바꾸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뒷담화에도 순기능이 있다고 봐. 우정을 두텁게 만드는 촉매제 같은 역할도 하고... 뒷담이 당사자 귀에만 닿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 스트레스 해소하는 데 좋을 거야. 그리고 뒷담도 일종의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해서 어떤 면에서는 좋게 봐. 감정을 꾹꾹 참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잖아. 그치만 그런 식으로 우정을 다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기표현을 하는 버릇을 들인다면 오히려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응..."
 "나한테 네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겠지만, 난 네가 그런 버릇 고쳤으면 좋겠어. 당장 고치길 기대하는 건 아니야. 그냥 서서히, 조금씩만 나아져도 돼. 고친다는 마음을 먹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응..."


 건성으로 추임새를 넣던 안나는 솔직히 말해서 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뒷담화 좀 그만해.' 라는 말 같은데, 그 말이 이토록 공격적으로 표현될 이유가 있을까? 안나는 애인한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엘사에게서, 분노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또 싸울 것 같았다. 안나는 엘사의 숨김없는 말투가 자꾸만 싸움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사에게 청했다.


"근데 좀 다정하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다정하지 못했어?"
"어, 지금 완전 짜증 내는 거 같애."
"미안. 난 완곡하게 말한다고 한 건데..."


 엘사가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며 사과했지만, 이미 오래전 이성을 상실한 안나에겐 무척 형식적이고 건조한... 말 뿐인 사과로 들렸다. 심지어는 비아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나는 참담할 정도로 짜증 났다. 뒤따른 엘사의 질문은 간신히 남아있던 안나의 이성 몇 조각을 다시 산산조각으로 분해했다.


 "화 났니?"
 "화 난게 아니라...!"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니, 이가 빠드득 거렸다.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을 끊고 잠시 심호흡했다. 짜증이 나면 눈물도 나는. 이 유치한 습성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바뀌질 않는다. 안나는 지나치게 풍부한 자신의 감수성을 원망하며 마무리했다.


"그냥 언니 지금 나 완전 싫어하는 거 같애."


 가로등 불빛이 머물던 안나의 눈망울에 물기가 번졌다. 그래서 아까보다 훨씬 반짝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안나를 보자 다시 말문이 막힌 엘사는 한숨을 돌리며 안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싫어하는 거 같다니. 내가 뒷담화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지적했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느끼는 걸까? 안나는... 정말... 1차원적인 구석이 있구나.'


 싫으면 지적한다.
 좋으면 칭찬한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엘사는 안나의 사고회로가 너무 단순하고 유아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멍청할 정도로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을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나의 단순함은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자기 방식으로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하는구나.'


 엘사는 안나를 몰아세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느슨한 말투로 운을 던졌다.


 "내가 널 싫어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아?"


 엘사의 질문은 안나의 머릿속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안나는 '응, 언니 나 싫어하는 거 같아' 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야했다.
 안나가 바란 건 자신이 별로 불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엘사는 불량한 거 맞다고 박박 우기고, 그 근거도 얼척 없다. 수업이 재미없다는 걸 재미없다고 하지. 못생긴 걸 못생겼다 하지, 대체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재미없는 수업보고 재밌다면서 가식이라도 떨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말하자는 제안'에는 왜 응했단 말인가? 안나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부정 당했다고 생각했다. 자기감정을 부정 당했다고 생각했고,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다는 생각도 했다. 엘사가 좋아서 엘사한테만 솔직한 감정을 말한 건데 그걸 뒷담화라는 둥 고쳐 마땅한 악질적인 버릇처럼 표현하니 견딜 수 없게 섭섭했다. 자기 애인이 불량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뭘 해도 나쁘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애인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게 아닐까? 엘사 아렌델이 안나 벨벳을 좋아하긴 할까? 사귀기도 전 부터 '무책임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니 말 다했지. 엘산 날 안 좋아하는 거야. 한스처럼 나랑 억지로 사귀어주는 게 틀림없어!
 안나는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았다. 엘사가 아래와 같이 말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연애는 데이트 한 번 만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아냐. 난 너 너무 좋아해."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애정표현을 들으니 당황할 틈도 없었다. 안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덩달아 어색한 웃음을 지은 엘사는 분위기가 해빙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싫으면 아예 상종을 안 해. 네가 싫으면 이런 얘긴 하지도 않았겠지. 네가 좋으니까. 우리 관계가 오래갔으면 좋겠으니까. 내 개인적인 바람을 말한 거야. 서로 바라는 걸 솔직하게 말하고, 맞춰가는 게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거든... 아닌가?"
 "...그렇지. 솔직하게 말하는 건 중요하지."


 분위기가 풀어지고 있다는 엘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의 위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안나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맞춰가는 게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거든.'


 이 말이 결정타였다. 한스와는 솔직한 소통이 되지 않아서 헤어졌지만 엘사와는 솔직한 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건 단지 예상에 불과했지만, 또 엘사와 했던 직설 소통의 맹세가 무효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엘사는 예상대로 '솔직한 소통'을 중요히 여긴다는 점. 엘사는 여전히 솔직한 소통의 맹세를 소중히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엘사는 역시 나처럼 솔직함을 중요히 여기는구나.'


 안나는 자신과 닮은 엘사가 운명이 점지해 준 연인처럼 느껴졌다. 말다툼하던 동안 멀어졌던 엘사가 다시 가깝게 다가온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엘사는 늘 가까이에 있었던 게 아닐까? 아까 싸웠던 건 장님이 된 탓이다. 살아온 방식의 차이, 각자 선호하는 어휘의 정서 차이라는 안개에 시야가 가려져 잠깐 장님이 된 탓에 '엘사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엘사의 사랑을 확인한 안나는 엘사가 했던 비방과 모욕적인 말들에 대한 반감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엘사가 얼마나 학문을 사랑하는지. 또, 얼마나 도덕적인 인물인지를 떠올린 안나는, 엘사가 못된 마음을 먹고 '불량해 보인다'는 말을 한 건 아닐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치만 이건 내 개인적인 바람일 뿐이야. 너보고 바뀌라고 강요할 순 없는 거겠지. 뒷담화를 해야만 네가 행복하다면... 하도록 해. 이해할 순 없지만 존중할 순 있어."
 "아냐 아냐. 그러니까 언니는..."


 안나가 빨개진 얼굴로 뜸을 들이다 마저 말했다.


 "언니는 나 생각해줘서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그럼 괜찮아."


 안나는 알지 못했지만, 엘사는 이 말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긍정적인 충격이었다.


 '사랑만 전제되어 있다면 어떤 충고를 해도 괜찮다는 말일까?'


 안나의 수용적인 태도가 엄한 부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던 자신과 겹쳐 보인 엘사는 심히 놀라웠다. 이게 가능한 건가? 1개월도 안 된 연인 사이에 가족애에 가까운 수용적 태도를 보인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아니 어쩌면, 안나의 수용력은 혈육 간의 애정보다 훨씬 대단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엘사는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게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까 엘사는 노력으로 가족애를 쟁취했다.
 엘사는 부모님의 엄격함에 대한 서러움과 싸웠다. 부모님에 대한 의심과도 싸웠다. 부모님이 정말 날 생각해서 충고하는 게 맞는 걸까? 난 혹시 엄마 아빠의 욕망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올해 초까지도 계속됐던 의심들을 무시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널 위해 하는 말이라며 몰아세우던 부모님께 애정을 느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안나는...


 '사랑만 전제되어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만큼 날 믿는단 말이야? 그만큼 날 좋아한단 말이야?'


 어쩜 이렇게 단순하고도 명료할 수가 있지.
 역시 안나의 단순함은 멍청한 단순함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한 엘사는, 안나가 보내는 엄청난 신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안나가 예전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처럼, 혈육 보다도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이 순간 서로가 무척 애틋했고, 가깝게 느껴졌으며, 사랑스러웠다.


 "왜 날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늦게 하는 거야. 난 언니가 날 싫어하는 줄만 알았어."
 "아닌데. 좋은데."
 "진짜?"
 "응, 진짜. 그러니까... 화 풀어."
 "내가 언제 화냈어."
 "너 아까 완전 화났었잖아."
 "그건 언니가 날 안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그런 거지..."
 "아닌데, 너 완전 화났었는데? 완전 한숨 쉬구..."
 "아닌데, 화 안 냈는데..."


 안나가 귓볼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영혼을 비비 틀면서 변명했다.
 인상 엄청 찡그리고, 울기까지 했으면서 화낸적 없다고 잡아떼는 안나가 귀엽게 느껴진 엘사는 작게 웃으며 추궁을 끝냈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멋대로 생각 안 할게."
 "그래. 나도 언니에 대해서 멋대로 생각 안 할게."


 서로에 대해 멋대로 생각하지 않기. 화해를 뜻하는 말이었고, 직설소통의 맹세에 이은 두 번째 맹세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엘사는 안나를 불량하거나, 무책임하다거나, 멍청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맹세한 것이고, 안나는 엘사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로 맹세한 것이다. 안나는 엘사와 한층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순전히 안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안나는 더없이 기뻤다. 엘사의 손을 잡음으로서 그 기쁨을 표현했고, 엘사는 두려울 정도로 위력적인 어떤... 충동에 사로 잡혀야 했다. 충동은 드라마적인 대사로 승화됐다.


 "앞으론... 이상한 생각 들면 바로 물어봐."
 "이상한 생각?"
 "내가 널 안 좋아하는 거 같다는 생각 같은 거."
 "그게 이상한 생각이야?"
 "엄청 이상한 생각이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일 거야."


 새벽 두 시에도 아낄법한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안나가 원하는 방식의 애정표현인 것일까? 그렇다면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엘사는 이토록이나 낯간지러운 대사를 창작하는 자신의 뇌가 낯설게 느껴졌다. 안나가 이 말들을 어떻게 느낄지 가늠할 수 없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웅얼댔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쉬지 않고 떠든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안나가 응수해준다는 것이었다. 무드가 과한 대화에 공범이 있다는 사실은 지나칠 정도로 든든했다. 엘사와 안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속도를 늦추면서 대화에 열중했다. 가식도, 가식에 대한 의심도 없는 데이트였기 때문에 돈을 쓰며 시간을 보냈던 낮보다 훨씬 진실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다투면서 앗아갔던 서로의 에너지를 되돌려준 두 사람은 각자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완전한 충만함을 느꼈다. 엘사는 안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왠지 안나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했다.


 "...우리집 올래? 지금 아무도 없는데. 괜찮으면."

 

 

 

 

 

 

 

 

 

 

────────────────────
11월 달에 완결내겠다 했는데
12월 달에 떨렁 한편 들고와서 설송하다
이젠... 익숙할 듯... 미안... ㅎㅎ;

 

 

계속 감정 진행이 안 돼서 읽는 설줌들 지칠 거 같다

표현하고 싶은게 있는데 재밌게 잘 안써지네...

재미는 고사하고 알아 보게 쓰고는 있는지 참 감도 안잡힘ㅋㅋㅋ
그래도 쓰는 나야 재밌는데 읽는 설줌들 지칠까봐 좀 걱정되는 부분...
재밌게 읽어주면 그저 고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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