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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연방님아 님글보고 지리고 합중국일본이라는 나라만들었는데 평가좀

합중국일본(121.177) 2011.11.27 13:50:57
조회 2345 추천 0 댓글 1

합중국일본의 역사는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차

1. 개요
2. 일본제국의 패망
3. 열도의 분단
4. 일본내전
5. 일본 연방 공화국 정부수립
6. 도약
6.5 한일 기본 조약

다시 6. 도약

7. 중화민국 건국
8. 1963년
9. 후쿠시마 프로젝트
10. 64\' 도쿄 올림픽
11. 핵보유 선언과 2차 중일전쟁
12. 홍콩, 마카오 할양과 북일본 통일, 합중국 선언, 영세 중립화
13. 내치(內治)
14. 빅토르 벨렌코 망명 사건
15. 갑작스런 주요인물의 서거와 냉전의 종말, 헤이세이 시대와 21세기
16. 현대의 일본


1. 개요

원래 아시아사에서 그렇게 두곽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른나라에선 왜(倭)라고 불리던나라 일본, 1864년 메이지 유신을 이룩한 이후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길러 한반도와 대만을 식민지 삼고 일본은 국제적인 강대국으로 인정받게된다.

그리고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과시하며 중국을 침공했고 미국의 압력에도 굴하지않았다.




2. 일본제국의 패망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중심의 일본해군 연합함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기지 진주만에 공습을 하러 원정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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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로소쿠-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학을 졸업했으며 1919년에 미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연수를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21년부터 23년에 걸쳐 워싱턴에서 열린 해군군축회담 관계로 미국을 자주방문하였다. 이떄 그가 직접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친미파로 성장하였으며 삼국동맹에 반대하였으며 진주만 공습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군부측에서 강경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시행함에 따라,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쿠테타를 계획했고, 나구모 주이치, 도고 후미마로 (도고 헤이하치로의 가상아들)와 함께 계획을 구성했다. 그들의 계획은 진주만 해군기지까지 접근한후, 진주만에서 맥아더 장군, 루즈벨트 대통령, 니미츠 장군과 전보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호소 (신일본 건국)하고 미국과 같이 일본을 공격하는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매우성공적이었으며 일본 전체 해군의 40%에 달하는 함대와 미 태평양함대는 서로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미정부는 야마모토를 대통령으로하는 일본연방공화국을 정식일본으로 승인했다.

그리하여 일본제국 본토 공격작전 최종 계획 작전명 \'구원\'이 구성되었다.
전일본의 말살을 위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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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구원의 구상도-

작전명 구원의 지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더글라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가 맞았다. 총함대사령관을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하며 더글라스 맥아더를 부사령관을, 체스터 니미츠를 미군 총사령관으로 하는것으로 결정이되었다. X-day는 1942년 1월 1일, 신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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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연합함대

항공모함 : 6척
전함 : 2척
순양함 : 3척
구축함 : 9척
전투기 : 441대
육군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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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합함대

항공모함 : 75척
전함 : 24척
순양함 : 40척
구축함 : 400척
호위함 : 400척
폭격기 : 7500대
전투기 : 파악불가
육군 : 101만명의 보병


1942년 1월 1일, 큐슈남부와 도쿄만으로 100만명의 보병이 상륙하였으며 상륙지를 제외한 일본의 군사지역은 7500여대의 폭격기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신일본의 재건을 위해 민간지역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 공격이 가해진지 약 3일만에 일본열도 50%이상이 신일본-미국 연합군에 의해점령당했으며, 대부분의 일본제국군은 신일본군에 투항하였고 일본국민들또한 일본제국이 아닌 야마모토 이로소쿠의 신일본을 지지하여 사실상 일본제국은 패망한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공격 4주일만에, 천황 히로히토가 일본제국 국가원수자격으로 무조건 항복하였고, 즉시 일본군 항모 아카기에서 패전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의 이름은 "도쿄만 조약"으로 이조약으로 인해 합중국 일본건국기반이 마련된다.

일본제국군은 경제력에 비해서 국방비가 5%수준만나가도록 유지하게되었고 나머지 군대는 예비역으로 보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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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닮아서 논란이된 사키히토-

쇼와천황은 국가원수로써의 우대를 통해 사형은 면했으나 천황직을 박탈당했다. 그후 쇼와천황의 사촌관계인 사키히토가 "헤이와"로 즉위하였다.

헤이와 천황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 시스코에서 1900년 12월 5일 태어났으며 1928년 하버드대학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엘리트였다. 그는 즉시 일본에 있는 동경제국대학에 들어갔지만, 일본이 제국주의화 됨에따라 일본을 벗어나 다시 미국으로 갔다.

일본이 민주화됨에따라 귀국하였고, 당시 아키히토가 나이가 무척어렸으므로 당연히 미국에서 출생하여 미국교육을 받은 사키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1942년, 일본은 중일전쟁로 인해 중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점령한 모든 점령지를 반환했으며, 동남아시아 점령지도 모두 반환하였다. 그리고 매년 국가예산의 15%에 대한하는 금액을 매년 조선에 지원함에따라 조선이 자립할수있도록 지원했으며 일본사회가 안정되고 조선이 자립할수있을정도로 성장하자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독립을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사회가 안정되자마자 일본은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3. 열도의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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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분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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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연방 공화국 (FRN) 과 일본 왕국 (KOJ)
일명 "중일본", "도호쿠일본"

수도 : 동경 / 니가타
정치체제 : 대통령 중심제 연방 공화국 / 입헌군주제
대통령 :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연방 공화국)
천황 : 사키히토 (일본 왕국)
원수 : 더글라스 맥아더 (일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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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2차세계대전 이후 내륙으로 뻩은 연방국외 외해를 아우르는 친미연방국가의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일본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부유한 지역인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연방공화국을 제안했고 친미성향의 야마모토 이소로쿠하에 있던 일본은 쉽게 일본연방공화국을 승인했으나 맥아더의 \'덴노가 사라지면 일본사회는 큰혼란에 빠질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미국의회의 결정에따라 기존 계획을 유지하는 \'일본 연방 공화국\'은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1946년 6월 6일 설립되고 맥아더가 직접통치하는 입헌군주제 국가 \'일본 왕국\'은 1946년 6월 25일 도호쿠지방에 설립되었다. 오키나와또한 연방정부와의 교섭을 했고 연방의 건의를 받아들여 \'류큐 왕국\'으로 자치국가로 독립한후에 1947년 1월 15일 일본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되었다. 상씨 왕조또한 부활하게 되었다. 대만은 국가는 되지못했으나 후에 1952년 장제스와 국민당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장제스가 추방되자 대만으로 망명해 \'중화민국\'을 건국해 일본연방공화국에 합류했다.

일본 연방 공화국은 영문국명으로 유일하게 Nippon을 사용하는나라였다. 일본 연방 공화국과 일본 왕국은 그태생이 미국인지라 서로 긴밀한 관계를맺은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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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 (LDRJ)
일명 "남일본" or "자민공"

수도 : 나가사키
정치체제 : 총독 중심제 연방 공화국
총독 : 아널드 맥밀란 로렌
대군 : 제레미야 아쉴리 키브스
대통령 : 사토 미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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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맥밀란 로렌-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은 1946년 7월 4일 영국령과 중국령으로 나눠진 칸사이 지방, 치고쿠 지방, 시고쿠지방, 큐슈지방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탄생하였다. 처칠은 이땅에 공화정부를 세울려했지만 모종의 협의로 로렌가를 군주로 추대해 입헌군주제를 택하려고했으나, \'자유 민주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유지하기위해 로렌가를 총독으로 삼고 그 총독직위를 영구적으로 대물림할수있는 방식을 채택했다.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은 최초에는 홍콩과 연합국을 세웠으나 홍콩과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의 이념의 차이로 분리되었다.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은 최남단에 위치한탓에 전쟁의 위협이없이 안정적인 발전을 누리며 50만명의 구 일본군을 재취역시키고 6척의 항공모함중 3척을 자국 해군에 편입시킴에 따라 국가중 최고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으나 육군면에서는 일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보다 열세에 노이게 되었다. 이 군대는 차후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은 노골적인 친영, 친유럽정책을 펼쳤으며 영국에게 무역항과 해군기지를 제공하였다. 20세기의 나가사키는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나가사키는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써 활용되는 자유무역항으로 선언되었고 여러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전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에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일본문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국정을 제대로 수행못한 국왕은 왕족이나 영국 귀족중 한명을 자신의 대리인인 대군으로 임명했다. 그 직위는 대통령보다 막강한 실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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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SPRJ)
일명 "북일본" or "사민공" or "소비에트일본"

수도 : 삿포로
정치체제 : 인민사회주의
주석 : 타카하시 히데키
총서기 : 야마모토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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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일본 건국당시-

1946년 소련령 일본 (북해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자 소련령 일본은 일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후 공산주의 체제의 안정을 위해 신헌법을 채택, 시행하면서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 다음가는 부국으로 성장 전세계의 좌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었으며 소련에서는 \'사회주의의 승리\'라며 대외적으로 엄청난 홍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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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일본군-

일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은 다른 일본들과 달리 단일한 섬을 혼자 차지하고있어 방위적인 측면에서 이점을 얻었다. 일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은 제대로된 사회주의를 실현해 사실상 빈부격차가 없어지자 전일본에서 많은사람들이 이민을와 순식간에 전일본의 25%에 해당하는 인구가 홋카이도에 밀질하게되었다. 일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은 1946년 9월 15일 결성 되었으며 또한 1946년 11월 11일에는 일본 소비에트 헌법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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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KOR)

동중국해 남동쪽 작은 섬나라인 류큐 왕국은 원래 일본과는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진 나라로 오히려 중국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었다. 특히 류큐는 일본 보다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다리 역활을 해 일본 전통 무술이라는 가라데도 원래 류큐의 전토무예였지만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것이다.

1424년 호쿠산, 츄잔, 난잔이 삼국이 츄잔왕국의 쇼하시왕의 의해 하나로 삼국이통일 되어 이름을 류큐국(琉球國)으로 갬여하고 오키나와 제도와 아마미 제도를 영토로 삼고 북쪽으로 사쓰마 번과 대립했다. 이후 사쓰마의 침략을 받아 영토가 빼앗기는 수모를 겪지만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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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기록도-

19세기 중엽 청국과 일본의 개항으로 중계무역의 이권이 퇴색하었고 경제가 악화되었다. 이때 일본은 류큐에 다한 야욕을 보였고 청국은 일본의 류큐에 대한 이권을 인정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무력으로 청국을 몰아내고 일개 번으로 격하 시킨뒤 1887년 류큐처분을 통해 류큐를 병합했다. 그리고 내지에 편입시킨뒤 오키나와 현을 설치해 사실상 류큐의 종말을 선언했다.
일본의 일개 현으로 전락한 류큐는 이후 일본의 태평양 전진기지가 되어 오키나와 항에는 일본 항공모함이 자주 입항했다. 그리고 2차세게대전에도 휘말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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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미군-

1942년 1월 1일 미국이 구원작전과 별개로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일본제국은 대패하였다. 수세에 인한 일본제국군은 류큐인들에게 옥쇄를 강요하였고 그로인해 수많은 류큐인들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결국엔 류큐는 독립하였으나 미국의 수중에 들어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미국이 통감부를 세워 통치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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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연방 공화국 건국기념 군행사-

이후 1946년 일본 연방 공화국이 설립되고 류큐는 귀속되었지만 조선이 일본에게 독립한것에 대해 자극을 받아 독립을 위해 일본 연방 공화국 정부에 대한 무력 행위를 가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야마모토가 회유책을써 아마미제도를 류큐국에게 반환하고 류큐에게는 초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해 실질적인 독립국행세를 할수있게하며 공용어를 류큐어로 쓰되 제2 외국어로 영어나 일본어를 택해야 한다는 중도책을 제시했고 류큐는 받아들여 1948년 정식으로 일본 연방 공화국에 가입해 일원이 되었으나 60년대 일본열도가 통일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독립국으로 지내었다.




4. 일본내전

1950년 6월 25일, 동북아전쟁이 발발하고 1951년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연합군은 궁지에몰리게 되었다, 이때 남일본만 영연방 소속으로 3척의 항공모함과 50만명의 군인을 파병한다.

1954년 동북아전쟁이 종전되고 1년이지난 시점, 1954년 5월 15일 동북아전쟁의 영향을 받은 북일본이 소련의 지원을 등에업고 도호쿠일본을 침략했다. \'일본내전\'의 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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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일본 연합 군대-

일본내전의 발발로 동아연방에 주둔중이던 미군의 80%가량인 4만여명이 일본을 향해 떠나갔고 동아연방은 소련의 도발을 예의주시하는 동시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내전의 소요될 군수물자 일체를 전담하기로 하였다. 당초 전투병 지원까지 바라고 있던 미국은 동아 연방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고 동아연방 정부도 전투병 파병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자유중국, 소련 양국의 무력시위와 경고로 인해 직접적인 참전을 어렵게되었다. 해서 군수물자 보급만 전담하는 동시에 약간의 의료병력 지원선에서 합의를 보려고했으나 이승만정권의 강경대책으로 1개 사단급의 규모가 일본에 파병이 나갔다.

공산진영 측에서도 불편한 심기만 표할 뿐 더이상의 도발행동은 해오지않았다. 그들로서도 동아연방의 전면적인 참전을 막은것만해도 큰수확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7월 1일 주한미군의 도착으로 그동안 밀리기만했던 일본 연방 공화국과 도호쿠일본은 전세를 가다듬고 도호쿠와 간토지방의 경계를 방어선으로 어렵사리 구축하게된다. 이와더불어 북일본을 제외한 모든 일본이 일본연방공화국 아래에 일시적으로 단결하게되었고 예비역으로 보관중이던 10척의 전함과 7척의 항공모함등을 재취역함에 따라 본격적인 무장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한시적이나마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징병제도를 부활하였다.

주한미군이 보유한 기갑, 포병전력으로 북일본의 진격을 어찌어찌 막고는 있었으나 언제까지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도그럴것이 북일본은 북한은 상대도안되는 공산주의 국가중에서 소련다음으로 강력한군사력을 보유하고있었으며 북해도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힘을 키워오던 상태였다. 그동안 구일본제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냉대를받아왔던 남일본과 도호쿠일본, 중일본의 허접한 군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여기에 동아연방에서의 평화롭고 나태한 일상속에서 군기가 빠질데로 빠져버린 주한 미8군과 주일미군만으로는 북일본의 공세를 막아 내기는 힘들었다. 현재 미군의 최대관건은 영연방을 끌여들이는것이었다. 그때까지는 현재의 니가타-이와키 방어선을 유지하는것이 일차목표였다.

동아연방은 일본 내전으로 때아닌 호황을 맞고있었다. 개전초기여서 많은 물량을 생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벌써 부산, 인천등 주요 조병창의 생산라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일각에서는 이번 전쟁이 금방끝나지 않을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있었다. 벌써 몇몇 방위산업체는 동아연방정부에 미국제 무기 면혀 생산및 동아 현지 공장 설립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타진해올정도였다.

일본열도의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어렵게 구축한 관동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한것이다. 주한미군의 도착과 구일본제국군 재취역으로 병력상으로는 북일본측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기갑전려의 현저한 열세로 전설을 돌파당하는곳이 여러곳 생겨났다. 결국 이는 북일본의 기갑전력을 가볍게 여긴 미 8군 예 24 보병사단의 궤멸적 타격으로 인해 사기마저 크게 떨어지고야 말았다.

겨우 5일만에 100km가량을 후퇴한 미군은 동경까지 내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져들었고 미국본국에서도 병력을 대대적으로 소집하기에 이른다. 종전 9년만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된것이다.

사실 개전 초기 미군은 우세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북일본의 예기를 꺾어놓으면 자신들이 등장만해도 겁을먹고 퇴각할것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크나큰 오판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들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민족이었지만 미국 국방부장관인 맥아더는 일본인들이 그동안 보여왔던 지나칠정도로 순종적이었던 모습과 그 국민성을보고 북일본의 군대를 너무 얕잡아본것이었다. 지휘관의 오판은 뼈저린 패배를 가져다 주었고 이는 일본 연합 정부 (일본연방공화국, 도호쿠 일본, 남일본)와 미군으로 하여금 보름도 안되어 수도를 내주어야 할 상황에 까지 내몰게 되었다.

전쟁은 점점 누구도 알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그동안은 해군, 공군의 황약으로 북일본군대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만은 피할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소련측에서 북일본에 지원한 전투기와 조종사 들로 인해 점점 제공권 우세도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있었다.거기에 치하전차중심의 일본연합군대에비해 T-34와 스탈린탱크, 차후 1955년도가 넘어가자 지급되기시작한 T-55등에 훨씬 열세였고 보병도 일본연합군대가 볼트액션식 아라사카가 주력이었지만 북일본군대는 파파샤와 AK-47이 주력이었다. (당시 북일본군은 7명중 4명이 파파샤나 AK-47을 장비한, 세계최대의 자동소총 보유국이었다.)

개전 7개월만인 1955년 2월 15일, 결국 일본 연방 공화국의 수도 동경은 함락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동경 함락전에 오사카를 임시수도로 결정하고 주요 시설과 내각인사들이 대피를 하였기에 지도부에 혼란이 덜하다는것이었고 미국본토의 군수공장에서 생산된 증원군 도착이 얼마 남지않았다는것이다.

이쯤 되자 미군은 세계최강이라는 자존심에 큰 상터를 입으며 일본 연합 군대 또한 동경을 빼았겼다는 처참함에 사로잡혀 미군, 일본 연합 군대모두 악에 받혀 북일본군과 싸우게된다. 그덕분에 동경을 잃긴했어도 노토반도-요코하마를 잇는 방어선을 굳게 지킬수 있었고 더이상 후퇴를 하지 않아도 될 저도였다.

그러던중 1955년 3월 1일이 되면서 미군 본토의 증원군이 도착하게 되었고 드디어 북일본군에 대해 공세로 전환이 되는가 싶었지만 북일본 측에도 소련으로부터의 대규모 지원이 이루워지었다. 기존 북일본측의 2천여대의 전차 왜 추가로 2천여대가 더 지원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T-55초기형이었고 무기와 탄약, 그리고 병력이 지원되었다. 소련측 병력 15만명이 연해주를 거쳐 북해도로 진입해갔다. 미국으로서도 두눈뜨고 지켜볼수 밖에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을 통해 견제하고는 싶었으나 수송함대가 사할린 연안을 통회 우회하는지라 어쩔수없었고 그들 또한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한 병력파견인데다 어차피 전쟁중인마당에 뭐라한다고 들을리도 만무했다. 예전같으면 핵무기로 위협이라도 했겠지만 소련도 핵을 보유한 상황에서 핵무기는 절대 지양해야만했다.

그렇게 전선은 고착되어갔고 한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고지전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하나 다행인건 양측둘다 경제적손실을 무척두려워해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과 약탈등이 전혀없었다는것이다. 덕분에 일본내전이후 일본열도는 거의 모든 경제시스템을 보존해 빠른발전을 이룰수있었다. 하여간에 양측 군대에게 있어 확실한 반전의 교두보가 필요한상황이었다.

1955년 9월 15일, 맥아더 장관과 야마모토 대통령의 직통 아래 북해도와 도마코마이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성공울 거두고 북일본 수도 삿포로를 향해 진격을 결정하나 소련과 북일본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다. 북해도 각지에 건설된 비행장과 방공시설로 인해 제공권확보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분더러 미군은 차량보급이 힘든지형에서는 전투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향이있었다. 여기에 점점 추워지는 날씨 또한 야마모토는 몰라 맥아더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수없었다.

결국 북해도 상륙은 큰성과를 거두기는 커녕 오히려 전선이 둘로 나누어 전력이 분산되는 악영향과 야마모토와 맥아더라는 명장이 본토에서 빠져나갔다는것이다.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면 혼란에 빠진 북일본군을 몰아내고 동경을 수복했다는것이다.

전쟁은 경제적 피해는 주지않았지만 전일본에게 실패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북일본 측에서는 단기간에 수도를 점령하여 전쟁을 끝내고자 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많은 인구와 소 락쿠시마 제도의 천혜의 자연에서 나오는 자원덕분에 자체보급이 가능하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북일본 측의 배후 세력이었던 소련또한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자국내에 보급되야할 최신형 AK-47과 T-55가 북일본에 지원되었고 동아연방에서 핵을 개발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첩보도 들려오고있었다. 특히나 대부분의 군수생산라인이 유럽지역에있었고 서유럽과 정통으로 대치중이었던 소련으로써는 동아연방이라는 잠재적 적국이목에걸린 가시처럼 거슬리기 짝이없는 문제였다. 만일 동아연방과 전쟁을 수행하게된다면 극동지방은 동아연방에게 넘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특히 블라디보스톡같은경우 극동 최고의 요충지였기때문에 소련으로서는 포기할수 없는 지역 이기도했다.

일본 연방 공화국의 경우 일본 자유 민주 공화국과 달리 전장을 직접끼고있었기때문에 아무리 경제적 약탈이나 공격이없다고해도 피해가 발생한건사실이었고 수도를 잃고 국민들은 야마모토라는 명장만을믿고 있었기때문에 속수무책일뿐이었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당시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군대의 망령에 시달리며 세계최강국이라는 자존심에 큰 흠집을 얻게되었다. 이는 자유진영의 결속력에 악영향을 끼칠수있는 문제였다.

북일본에 대한 결정타가 되어 줄줄알았던 북해도 상륙도 큰 효과를 거두지못하였고 북일본에 앞서던 항공전력도 소련의 적극적 개입으로 그다지 큰 격차를 벌리지못하는상황에서 전황은 어느쪽에서도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내전의 보급을 담당중인 동아연방 경제는 유래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투에 사용되는 탄약과 무기같은 풀수적인 물자는 물론 전투식량과 전투장구류 등 개인 보급품 부터 심지어는 전투기까지 생산해내고 있었다. (물론 단순 조립이긴해도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1956 년미국의 방위산업체들은 남서제도를 통한 수송이 용이한 제주항을 중심으로 군수공장을 설립했고 제주도지방이 중공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수산업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총 집중되는 산업이다. 농업부터 시작해서 중공업까지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쟁을 수행할수 없는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발전일로에있었던 동아연방은 이번전쟁이 하늘의 축복같았다.부터 1946년까지 시행된 전폭적인 야마모토 정부의 지원에 이어, 동북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일하게되었고 이번전쟁으로 전쟁에 소요되는 엄청난 물량을 생산함을 물론,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자본도 흘러들어왔다. 또한 군용 차량과 전투기를 면허생산 하게 되면서 최신 기술휙득이라는 부가적인 효과도있었다.

그렇게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채 11월달이 찾아왔고 북일본은 북해도에 상륙해있던 미군에 기습공격을 개시했고 북해도의 추위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미군은 힘도 써보지못한채 북해도 교두보를 잃고 다시 혼슈로 퇴각하게 된다.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어느쪽에서도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자 미, 소양국은 휴전에 대한 목소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현황은 미, 소양국의 모든 총생산이 북일본과 일본연합에 투자되 북일본이 AK-47로 전군이 무장한다거나 T-55를 중심으로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둥 엄청난일이 벌어지고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상황에서 한쪽은 자본주의, 한쪽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들이었고 서로 자존심이 내걸린문제여서 어느 한쪽이 먼저 숙이고 들어갈수는없었다. 그나마 소련은 일본의 절반이나마 공산화에 성공했고 태평양으로의 부동항을 확보한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달성했다고볼수있었지만 반면 미국은 두눈뜨고 일본열도의 절반을 공산측에 내준 상태여서 휴전은 하되 적어도 혼슈는 탈환해야만 했다. (애당초 북해도 자체가 소련령이었기 때문에)

미소 양측 모두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56년 새해가 밝아왔다. 한때 미군은 도호쿠 중부의 센다이까지 진격했었으나 북해도에 주둔중이던 소련군과 북일본 징집병의 인해전술과 소련의 전차 지원으로 인해 다시 원래의 37도선으로 퇴각한 상태였다. 전선이 북위 37도선에서 지지부진 고정되는 양상을 보이자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과 공산측은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회심의 일격이 될줄 알았던 북해도 상륙이 실패로 돌아갔고 한때 38도선까지 수복하여 혼슈 탈환을 눈앞에 두었다가 북일본과 소련의 대공세에 밀려 다시 37도선까지 퇴각하였으며 공산측은 전쟁 초기의 쾌진격으로 동경을 함락하고 관동지방을 거의 수중에 넣었었으나 미국 본토에서 병력이 증원되는 바람에 동경을 다시 내준 상태였다.
양쪽 모두가 일진일퇴를 맛본 상황에서 미소 양국은 더이상 치고 올라가는것도 내려오는것도 어렵다는 것을 인지한다. 아니, 그렇게 전선을 확대하여 미소 양국이 얻을 실익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는게 맞을 것이다.
 
양측 진영 모두에서 휴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전쟁이었기에 쉽사리 그만둘수도 없는 문제였다. 지리한 고지쟁탈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무수한 병력이 죽어나갔고 장비의 손망실도 엄청났다. 특히 양측 일본 징집병들의 피해가 두드러졌는데,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바로 전장으로 투입되다보니 피해가 엄청났다.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던 중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노령의 나이로 고혈압과 뇌졸증 증세가 심해지면서 제대로 된 업무를 보기 힘들어졌고 1인 독재 체제로 모든 명령권이 스탈린에게 집중되어있는 소련으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이때부터 정전의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의회가 전쟁 지속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갖기 시작하면서 정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전쟁을 적당한 선에서 끝내기로 결정하고 UN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협상을 제의하게 되고, 소련 또한 스탈린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기엔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인다.
 
1957년 3월 23일, 소련은 정식으로 휴전을 제안했고 소련의 제안에 북일본은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자신들의 물밑 교섭이 성공한것이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이어 4월 5일, 일본군 항모 아카기에서 정전 절차에 대해 협상을 시작하고 8일에는 본격적인 정전 회담이 개시되었다. 회담이 시작된지 보름이 넘어서야 겨우 의제를 잡을 정도로 회담에는 난항이 계속되었다. 회담의 최대 난제는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다. 소련은 현재 전선인 도야마-나리타를 잇는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고자 하였고 미국은 혼슈와 북해도의 경계를 주장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미국 본토에서 증원된 공군에 의해 연일 폭격이 계속되었다. 결국 양측은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순간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것에 합의하고, 군사분계선 남북 2Km에 비무장지대를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재발을 막는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정전협상이 개시된지 근 4개월만인 7월 26일의 일이었다.
양측은 이날을 기점으로 1개월간 전투행위를 중단하고 임시 휴전을 선포하였다. 모든 전선에서 총소리가 멎었고 전쟁도 끝날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차적으로 합의되었던 군사분계선 문제 외의 다른 문제(일테면 정전 감시단 구성, 포로교환 등) 에 대해 양측은 어떠한 협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순간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는 1차 합의문이 양쪽 군대를 다시금 전쟁의 포화로 밀어넣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회담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설전과 신경전이 계속되는 동안 미군, 소련군, 남북 일본군의 젊은이들은 혼슈끝자락 주변의 전선에서 수없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전략상 중요한 고지라는 이유로 이들은 무조건 기어 올라가라는, 죽음으로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전협상 전에 이루어졌던 고지전보다 훨씬 참혹하고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1958년 12월 31일, 일본 내전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전쟁 기간의 반도 넘는 시간이 지지부진한 정전 협정에 소모되었고 정전 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목숨이 산화되었다. 누구도 지지 않았지만 누구도 이기지 못한 이상한 전쟁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일본전쟁에서 양측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남일본연합측은 병력 16만이 죽고 50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 또한 사망자 6만을 포함, 총 5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북일본측은 85만의 병력이 죽거나 다쳤으며 소련이 입은 인명피해는 100만에 육박할 정도였다. 하나다행인건 민간인 지역의 피해가 없었다는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전쟁기간동안 세계 경제는 2차대전 후의 침체양상에서 벗어나 큰 호황을 맞이했다. 전쟁은 자국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군수물자의 소비로 생산과 소비가 촉진되고 이는 경제활성화로 이어져 실업이 감소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전쟁은 세계경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고 할수 있었다.
일본전쟁은 전쟁 당사자는 물론 주변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미국은 전쟁 특수로 큰 호황을 누리는 동시에 국방력 확충의 계기가 되었다. 2차대전 후 감소하던 국방 예산이 일본전쟁을 계기로 크게 증강된 것이다. 반면 전쟁을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결국 승리하지 못하면서 초강대국이라 자부하던 미국의 위신에 먹칠을하게 되었다.
소련은 크게 잃은것도 없지만 얻은것도 없었다. 그래도 챙긴게 있다면 태평양으로의 진출로를 확보하고 한국과 미국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미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일본의 주변국 중 가장 큰 수혜자는 동아연방이었다. 미군은 전쟁에 소모되는 모든 물자를 동아연방에서 생산했으며 군장비의 수리 또한 동아연방에서 이루어졌기에 동아연방은 이번 전쟁으로 막대한 자본은 물론 기술까지 획득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의 앞날은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5. 일본 연방 공화국 정부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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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연방 공화국 수립-

전쟁이 종결된지도 어언 4개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연합국 수뇌부 3개국 외상이 모여 전후처리를 위해 협상중이었다.

미국, 영국, 소련 삼개국의 외상이 협상을 벌인 결과 몇가지의 사항이 결정지어졌다.

협상내용은 동아연방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에 우선권이 있다는 것과 대일정책 해결을 위하여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이 참가하는 극동위원회의 설치, 자유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동유럽의 민주화, UN내 원자력관리위원회 설치가 골자였다. 또한 북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도호쿠 일본, 남일본은 일본 연방 공화국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전쟁 직후 일본 열도에는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였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정당이 생겨나고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3개 정당만이 큰 세력을 가지고 제대로된 정치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었는데

야마모토 이로소쿠를 위시하여 일본 연방 공화국 정부 요인들이 창당한 \'자유민주당\'

도고 후미마로 중심이 된 중도좌파계열의 \'사회 민주당\'

그리고 나구모 주이치와 사키히토 (천황이었지만 직접 정치를 할수있었다.) 중심이 된 우파계열 정당인 \'국민신당\'이었다.

 

때는 1959년 5월 7일. UN의 입회 하에 전국 총선거를 치르는 날이었다.

사실 미국은 일본 연방 공화국 정부의 조직을 그대로 옮겨서 신 일본 연방 공화국의 정부로 인정하고자 하였으나 야마토 민족의 나라는 일본 인민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며 총선거를 고집하였다.

 

그렇게 해서 총선거가 진행되게 된 것이었다.

이날 선출되는 제 1대 국회의원은 제헌의회라 하여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일본의 첫 민주적 선거 결과는 투표율 78%에 299개 선거구에서 299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정당별 의석 분포를 보면 야마모토 주축인 자유민주당이 114석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이어 사회민주당이 60석으로 두번째를, 국민신당이 28석, 공명당 17석, 친민당이 12석, 기타 무소속 포함하여 68석이었다.

 

사실 도고 후미마로의 사회민주당은 좌파계열 정당으로 정권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민족의 분열을 원치 않았던 야마모토 이로소쿠는 도고 후미마로를 직접 찾아가 절절히 호소하였고

도고 후미마로는 이를 받아들여 지금까지와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의 길을 모색하는데 이 결정은 훗날 도고 후미마로을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부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2년뒤 도고 후미마로의 사회민주주의가 유럽에까지 퍼져 사회주의의 새로운 활로로서 연구, 모색되고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각국의 사회당과 사회민주당들이 일본 오사카에 모여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을 창설하고 그 본부를 오사카에 두기로 결정하는데, 이로써 일본은 전세계 사회민주주의의 총본산으로 거듭나게 된다.

 

어찌되었든 총선거를 무사히 치른 일본은 제헌국회를 소집, 6월 20일에 헌법을 제정, 동월 25일에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7월 1일에는 국회의 간접선거로서 야마모토 이로소쿠를 5년임기의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일본 연방 공화국(新은 생략한다.)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야마모토 대통령은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사를 단행하였는데 이는 다소간의 이념충돌까지도 감수한 인사였다.

 

그리고 1960년 8월 15일.

 

일본열도에 정부가 수립되어 야마토 민족만의 나라가 세워지는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국호는 분단시절때부터 사용하던 일본 연방 공화국이었다.

 

정부수립 후 일본 연방 공화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구일본제국 잔당의 처리였다.

애초부터 의회내에 제국잔당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고 미국 또한 이를 승인하고 지원해주었기에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특별법은 일사천리로 통과되어 민족을 망친 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주어졌다.

또한 전국적으로 토지조사를 단행하여 제국잔당 명의의 토지와 제국잔당소유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였고 증빙할만한 자료가 있는경우에 한하여 원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다음으로 진행한 것은 일본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일이었는데 일본은 외무부장관 도고 후미마로를 파견하여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유럽지역과의 우호체계를 수립한다.

또한 자유중국에 대해서는 국민당과 큰 친분이 있던 사토 스즈키를 파견하여 앞으로의 우호관계를 약속하고 대만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논의를 하고 일련의 성과를 거둔다.

 

일본 정부수립 1년차.

일제잔재의 제거, 이념문제 해소, 피폐해진 경제재건... 일본 정부가 걸어갈 길은 멀기만 했다.




6.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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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힘을 합쳐 마을을 복구하던 1960년대-


일본은 큰 어려움 없이 순풍에 돛단듯 나아가고 있었다. 제국잔당의 숙청도 거의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경제에 있어서는 외무장관 도고 후미마로와 부대통령 사와다 준이치로가 미국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차관을 얻어와서 그 돈으로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었다

.

또한 군사력 면에서는 일본 연합 군대를 일본 연방군으로 재편하고 미국의 대 소련의 극동 방어선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해 상당수의 무기를 공여받아 다소간의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미약한 수준이었고 구 일본군의 무기를 사용하는 부대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귀국한 제국군 지휘관 일부와 미국 등 연합국의 지원으로 육해공군사관학교도 설립되어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의 입대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큰 어려움이 없을 뿐\'이었지 문제가 없다는것은 아니었다.

 

지하로 숨어든 박헌영, 김일성, 마오쩌둥 등 해외의 극좌 공산주의 세력이 분규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사회민주주의, 즉 수정공산주의를 제창한 도고 후미마로가 암살당할뻔하는등 굵직한 사건들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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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44 추축국간의 기술교류는 어떠했음? [8]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23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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