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6번부터 짤렸네 다시올림

합중국일본(121.177) 2011.11.27 13:55:54
조회 83 추천 0 댓글 0

6.5 한일 기본 조약


c0039224_4981b09f6bd92_rpg9746.jpg

-한일 기본 조약에 일본국 국가원수자격으로 사인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통령-


1960년 11월 25일 일본의 협상 대표단이 동아연방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한일간 협상은 미국이 중재하였고 양측 대표단이 지지부진한, 하지만 동아측에 유리한 협상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사실 중재라고는 해도 미국은 동아측에 유리하도록 협상을 이끌어나갔고 결국 동아측의 요구가 대부분 관철되었다.

 

마침내 60년 12월 2일 협상이 타결지어졌다.

 

한일기본조약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동아와 일본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양국간 외교.영사관계를 회복한다.

 

2. 한일합병 이전의 모든 한일간의 조약은 무효로 한다.

 

3. 간도문제에 있어 일본은 한국측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도록 한다.

 

4. 대일 청구권에 관해서는 일본은 한국에 10억불을 배상하도록 하며, 추가로 10억불을 무상차관의 형태로 지급한다.

 

5.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조속히 반환하도록 하며 이는 한일 양국이 조사단을 구성하여 철저히 반환하도록 한다.

 

6. 일본 내의 재일교포에 대하여 영주권을 부여한다.

 

7.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국령임을 인정하고 독도를 조속히 반환토록 한다.

 

8.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30년간의 식민지배를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앞으로 전범숭배를 금하도록 한다.

 

 

한일기본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대표단은 일본으로 귀국하여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얼마후에 천황 사키히토와 야마모토 대통령을 비롯한 내각이 방한하여 한국민에게 공식적으로 고개숙여 사과하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일본의 천황이 고개를 숙인다는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지주이며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인간선언을 했다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가 천황이었다.

 

야마모토 내각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동시에 기존 행정구역의 재편을 실시했다.

지금까지 시-정-촌 단위를 사용했었는데 전국이 슬슬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미국식 행정구역인 현(주)-카운티(군)-시 행정구역으로의 편입을 결정한 것이다.

 

다시 6. 도약


4_rpg9746.jpg

1960년대 도쿄, 이미 세계선진국수준의 도시를 일궈냈다.-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 일본.

 

정부가 수립된지 겨우 2년차의 말그대로 갓난아기와도 같은 나라였지만 일본이 보여주는 저력은 대단했다.

 

먼저 외교적으로도 큰 마찰없이 동아연방과 화해를 하고있는 큰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세계 각국과의 관계정립에 있어서도 유연한 외교적 센스로 좋은 관계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큰 성과를 보이고 있었는데 정부주도의 계획적 경제성장정책과 근면한 국민성이 시너지효과를 이끌어내면서 향후 경제성장의 발판을 착실히 다져나가고 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경제에 있어 문제가 없다고는 할수 없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통화문제였다.

 

아직 일본은 제국주의시절 사용하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에 야마모토 내각은 일본은행법을 제정하여 중앙은행으로 일본은행을 지정하고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시작한다.

 

먼저 기존의 제국 엔 통화를 사용금지하고 새로 발권되는 \'신일본 엔\'으로 교환하도록 하였으며 통화단위는 \'엔\'으로하였다.

이번의 화폐개혁으로 잠자고있던 지하자금이 많이 드러나면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있었고 또한 숨겨져있던 제국잔당 재산이 상당수 발견되어 모두 몰수조치되면서 정부의 재원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화폐가치가 안정되면서 물가도 다소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 이번의 화폐개혁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1961년 5월 1일. 전세계 노동자들의 날이었다.

일본도 노동절을 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노동절에 오사카에서는 역사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도고 후미마로의 사회민주주의가 서구 비공산 사회주의 정당에서 심도있게 연구되면서 인정을 받게되고 급기야는 오사카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선언하고 사회주의자의 국제적 활동과 평화적 투쟁을 결의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피의 혁명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노동자의 해방을 꾀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는데 그 물결의 중심이 일본의 도고 후미마로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큰 자랑임에 틀림없었다.

 

같은달 15일에는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위해 한국측 조사단이 일본으로 와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며칠뒤에는 야마모토 내각과 사키히토 천황이 방한하여 일본의 식민지배를 사과하고 앞으로 양국간의 평화, 우호적 관계를 또다시 부탁하였다.

 

방한중에 분을 참지 못한 몇몇의 시민으로부터 습격당할 위기도 몇차례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또하나의 굵직한 사건으로는 도쿄-나가사키, 도쿄-후쿠시마 도쿄-오사카 고속도로의 동시착공이었다.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엄청난 수의 중장비와 제국잔당 재산 몰수로 마련된 재원이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는데 이 거대 국책사업은 국민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되어 경제활성화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소련은 아직 잠잠했지만 긴장을 늦출수가 없었다.

이에 미국은 일본측에 주변국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의 무장 강화를 위해 무기를 대량으로 공여하게 된다.

그랬다. 이때까지 일본군은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무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기갑전력은 미군에서 공여받긴 했으나 미약한 수준이었다.

해군력 같은경우는 10여척의 항공모함과 10여척의 전함, 50여척의 호위함을 운영하고있었으니 별다른 문제는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군수물자 공여는 일본 정부로서도 정말 반가운 일이었고 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국방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먼저 광활한 혼슈지역을 지키기 위해 1개 기갑사단이 편성, 배치되었고 3개의 기계화보병사단이 뒤를 받쳤다.

그리고 기타 섬들의 수비를 위해 4개 기갑여단이 큐슈와 시고쿠에 배치되었다.

 

해군의 경우 기존 운영하던 군함들을 현대화 시키는것으로 사세보, 마이즈루, 슈리, 타이베이를 모항으로 하는 함대가 편성되었고 공군기는 1차로 40기가 일본에 인도되어 공군사관생도들의 훈련에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실로 엄청난 수의 무기가 지원되어 일본군은 70만의 정규군을 가진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증강된 군사력으로 인한 국방비 지출은 일본으로서도 다소 부담되는 일이었고 주변국에도 긴장을 불러일으켰지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큰 마찰이나 어려움은 없었다.

 


7. 중화민국 건국


image_rpg9746.jpg

-1963년 3월 3일 신 중화민국 건국-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때는 1962년 10월이었다.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해내어 어느새 이웃 동아연방의 경제력을 추월해버렸고 서구 여러나라에서 장기차관을 들여와 후쿠시마에 대규모 제철소를 착공하고 니가타에는 조선소를 세움으로써 중공업이 남부에 치우쳐있는 남북불균형상태를 다소나마 해소하고자 하였다.

 

옆나라 자유중국의 상황은심각했다.

국민당이 분열됨에 따라 장제스파가 대만으로 도피했고 일-중 해상국경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일본정부는 전 국경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중국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국과의 갈등도 어느정도 마무리 되어가던 62년 7월.

 

1962년의 일본은 상황이 그리 좋다고는 할수 없었다.국경지역에서는 중국의 분열로 인하여 연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아닌 대만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대만의 신중화민국의 건국을 요청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하고있었다.. 허나 국민당의 인하여 장제스파는 비밀리에 대만으로 도피했고 이는 중국 정부에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장제스의 일본 방문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장제스의 방문으로 일본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렇지않아도 국내외적으로 산적해있는 문제가 많은 상황에서 외국의 문제까지 신경쓰는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군사적으로도 큰 성장이 있었다고는 하나 새로 들여온 장비에 대한 숙련도나 훈련 문제로 아직 중국과의 대립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문제였다. 이에 일본은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대만 문제를 UN에 상정하기로 결정한다.

미국 또한 갑작스런 중국의 분열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상황이었고 중국을 견제하는 측면에서도 대만에서의 신 중화민국 건국은 득이되면 득이 되었지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허나 미국도 일본과 동아연방을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UN을 통한 해결을 원하고 있었다. 이는 UN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된 국가라면 쉽사리 침공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계산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 문제는 UN에 상정되었고 소련의 기권을 제외한 44개국의 승인을 얻어 대만의 신중화민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였으며 신중화민국은 일본 연방 공화국의 일원으로 UN 가입 또한 승인되었다. 더불어 중화민국(新은 생략한다.)의 일, 미 양국의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혹여나 있을 중국의 침공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큰 반발을 예상했지만 성명을 통해 우회적으로 항의했을 뿐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 또한 국가의 혼란이 이제 갓 마무리된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의 마찰은 원치 않는 문제였다.

 

중화민국은 UN에 의해 정식 국가로 승인되자마자 일본과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감사를 표했고 외교관계 또한 수립하였다. 이에 일미 양국은 중화민국에 지원단을 파견하여 중화민국이 하루빨리 제대로된 국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기로 하였다.


1962년의 동아시아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태였다. 중국의 분열과 일본의 군사대국화로 말미암은 긴장감 조성이라든지 소련의 핵실험 성공, 동아의 연합에 자극을 받은 신강-동투르키스탄-지역의 무장봉기 등 동아시아는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아시아는 미국, 소련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닿는 냉전의 무대였고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곧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일만은 막아야했기에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이, 그러나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8. 1963년


265_rpg9746.jpg

-일본의 경제부흥을 가져온 도쿄-나가사키 고속도로-


시간은 흘러 때는 63년 4월이었고 일본에서는 국가불안으로 인해 2년 앞당겨 제 2대 연방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럿의 후보가 입후보했지만 야마모토, 나구모, 후미마로의 3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야마모토가 아무래도 현직 주석의 자리에 있었기에 선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 83% 투표율에 57%의 지지를 얻어 제 2대 대통령에 연임되었다. 8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력은 뛰어났고 그동안 일본은 눈에 띄게 성장했기에 쟁쟁한 후보를 물리치고 연임에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7년간 (안한 2년포함) 또다시 일본을 이끌게 된 야마모토 내각의 당면한 문제는 중국의 위협에 대한 대처였고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였다. 지난 60년부터 농업생산력증대, 에너지원 확보, 수출증대 등을 골자로 시행되었던 1차 경제개발계획은 지난 3월에 달성을 선언한 상태였기에 후속 계획이 시급했다. 이에 마련된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은 앞으로 5년간 수출증대, 산업 고도화, 고용증진, 기술수준향상, 산림녹화 등을 목표로 시행하기로 하였다. 매년 10%대의 고도성장을 기록해온 일본이었고 아직 발전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개발에 따르는 재원 또한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지원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그동안의 경제성장으로 재정 또한 많이 건전해진 상태였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도쿄-나가사키, 도쿄-후쿠시마 도쿄-오사카 고속도로까지 개통된다면 물류와 인력의 소통이 한층 원활해져 경제개발이 가속될 터였다.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야마모토 내각은 새로운 국민 교육 정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른바 1차 교육 과정의 제정이었다. 건국 직후 단순히 교수 요목만을 제시하고 교육 과정 운영에 있어서는 학교장 재량에 맡김에 따라 학교마다 교육 과정에 차이가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건국 직후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있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학생들의 지적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었기에 새로운 교육 과정의 제정은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1차 교육과정을 제정하여 체계적이고 현실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였고, 여기에 소학교, 중학교 9년간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배움의 기회를 가질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해 소학교 입학률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또한 문교부 산하에 과학기술청을 새로 창설하여 기초과학 연구 및 기술 개발을 장려하도록 함과 동시에 수많은 젊은 인재들을 국비로 유학시켰다. 이들이 귀국한다면 과학기술분야에서 많은 성장이 있을 것이었다.


교육과정의 정비와 더불어 정부가 손을 본 것은 바로 대학이었다. 국내에는 해방직후 동경제국대학을 모체로 새롭게 출범한 국립 동경대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대학이 설립되어 고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후 경제력의 상승과 높아진 교육열로 말미암아 대학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늘어만 갔고 현재 있는 대학으로는 많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해서 야마모토 내각이 추진한 것은 국립대학교의 설립이었다. 먼저 홍콩대학을 국립대로 승격하고 각 현에 1개씩 국립대를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더해서 각 직할시에는 국립공대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68개의 국립 종합대학과 6개의 국립 공대가 설립되어 고급인력의 국내 양성을 도모할수 있게 되었고 정부는 이들 국립대학에 엄청난 예산을 할당하여 최고수준의 교육을 제공할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각 대학 공과대와 동경, 타이베이, 홍콩의 국립공대에 지원되는 예산은 어마어마해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연구, 실습시설을 갖출수 있었고 서구 여러 나라와도 대학간 협정을 체결하여 신설된 대학이 빠른 시간안에 뿌리를 내릴수 있도록 하였다




9. 후쿠시마 프로젝트


111111_rpg9746.jpg

-핵개발에 큰도움이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도호쿠 후쿠시마. 이곳에는 일본 최대규모의 질소비료공장가 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비료의 약 90% 이상을 생산하는 곳으로 2차대전중에는 일본이 비밀 핵실험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제국 수도에 있던 이화학연구소가 미군에 의해 폭격당하자 핵개발 관련 자료의 상당수를 이곳 후쿠시마로 옮겨왔으나 야마모토의 정변으로 인해 연구는 중단되었고 많은 자료가 소실되거나 미 군정청에 의해 압수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아까운 문제긴 했지만 당시 정부는 후쿠시마 공단의 핵관련 연구 시설에 대해 아는바가 거의 없었고 (야마모토는 일본 내에서도 반전을 주장한 위험인물으로써, 이런 극비사실을 군정이 알려줄리가없다.) 설령 알고 있었다 해도 미 군정청보다 먼저 후쿠시마 공단을 접수한다는것 또한 어불성설이었다. 한술 더떠서 만약 일본이 핵 연구자료를 노획했더라도 거기에 따르는 연구인력의 확보는 요원했고 당장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게 관건인 상황에서 핵 연구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헌데 이렇게 갑작스레 후쿠시마 공단과 핵연구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것은 1963년 말에 있었던 국립대학 건설이 그 시초였다. 63년부터 진행된 정부의 국립대 설립사업으로 말미암아 후쿠시마에 후쿠시마 대학교를 건립함과 동시에 후쿠시마의 질소비료공장에 대학 학부생들을 위한 산학협동연구시설을 설치하는데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후쿠시마대 산학연구소는 과거 일본제국이 사용하던 연구소 건물을 그대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어차피 본교의 분연구소같은 개념이었고 후쿠시마 공단 내의 건물들 또한 굳이 건물을 신축할 필요도 없이 깨끗한 상태여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해서 건물의 개, 보수 작업만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와중에 벽속에 숨겨져있던 비밀금고를 발견하였고 금고 안에는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던 핵개발에 대한 자료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이는 굳이 핵개발이 아니더라도 일본 물리학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자료였고 천만다행히도 이것을 일본의 중앙정보부가 먼저 입수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즉시 내각에 보고되었고 긴내각회의가 소집되어 토의가 진행되었다. 회의는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지지부진함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핵이라는것이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2차대전 당시 보였던 가공할 위력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도 핵의 확산은 자신들이 가진 중요한 열쇠 하나를 잃는것과도 같았기에 어떻게든 막고싶은 문제였다. 하지만 1950년 8월 29일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해버렸고 맨하탄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던 영국 또한 핵개발을 하였으며 프랑스도 종전 직후 실험용 원자로를 가동하여 핵개발을 하였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자유진영의 동맹국이니 그렇다 쳐도 소련의 핵개발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중국의 민주화로 동서 냉전이 시작된 이때, 소련이 핵 카드를 쥐게 됨으로써 힘의 저울추가 평형을 이루게 되어버렸고 이른바 \'공포의 균형\'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는 세계 유일의 핵 보유국인 미국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것이 사실이었다.


어찌보면 소련의 핵 개발이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데 있어 명분이 되어줄수도 있었다. 이미 소련이 핵개발을 한지는 13년이지났지만 미국의 방위 전략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위상은 컸다. 일본은 알래스카~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 극동방위선의 중심이었고 지정학적으로도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교두보로서의 중요성이 크다 할수 있었다. 해서 일본의 건국 초부터 막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군사력 증강을 위해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무기를 제공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 일본이 붉은 물결에 잠식되어 버린다면 미국으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수 없었고 일본이 무너지는것은 미국의 공고한 방파제 하나가 무너지는 셈이었기에 절대로 막아야 할 문제였다.


몇일간 계속된 내각회의 끝에 일본은 미국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조심스럽게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 타진해보는데 결과는 \'No\'였다. 내각의 상황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핵개발만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야마모토 대통령이 직접 방미하여 존슨 대통령과의 비밀회동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야마모토 대통령은 소련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대치중인 상황과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인한 안보 위협에 대하여 역설하고 일본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미국이라는 협박아닌 협박과 프랑스는 되는데 왜 일본은 안되느냐는 반박까지 곁들여 존슨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동양의 가난한 소국이었건만 어느새 유럽 국가를 뛰어넘는 세계 5위권의 경제력까지 성장해버린 탓에 쉽사리 무시하기도 힘든 문제였다. 거기에 일본이 무너지면 동아시아 전역으로 공산주의가 확산될것은 자명한 문제였고 일본의 위치상 미군이 전력을 투사하기에는 최적의 위치였기에 일본을 잃게 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일본의 핵개발을 승인한 것이다. 허나 미국으로서도 핵심 기술의 공유는 꺼려지는 일이었다. 해서 초기 인력의 교육과 연구용 원자로 건설 지원 정도에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정도로도 일본이 얻은 수확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차피 핵무기 개발이라는것이 이제 겨우 4개국에서 진행되었고 후쿠시마 공단의 일본제국 연구시설에서 노획한 자료 또한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였기에 후발주자로서의 부담감 또한 덜한편이었다. 여기에 연구를 담당할 고급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은 큰 힘이 될 터였다.


귀국한 야마모토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타이베이에 연방과학원을 설립하고 큐슈 후쿠오카에 대규모 원자로 시설 및 일본과학원 영변분원을 설치하여 핵물리학 및 핵무기 개발을 전담하게 하였다. 허나 아직은 소련에 알려져봐야 좋을것이 없었기에 중앙정보부와 얼마전 발족한 보안사령부를 통해 최대한의 보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번 핵개발 프로젝트의 이름을 후쿠시마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연구에 참가할 인원들의 기초지식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이 일행에 참가한 사람들중 일부는 혹여나 있을 타국의 위협이나 -일본에 호의적이기는 하나-미국의 공작이 있을까 우려되어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요원들이었다.


이로써 일본에 사쿠라꽃을 피우기 위한 한발짝이 시작된 셈이었다.




10. 64\' 도쿄 올림픽

1964s_poster_b_rpg9746.jpg
-도쿄 올림픽 포스터-

1964년 10월 10일,일본의 도쿄에서는 전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 올림픽은 서양 국가가 아닌 아시아권 국가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올림픽인지라 그 의미가 더욱더 컸다.

일본은 올림픽 준비에 20억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했는데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한 일본의 경제력은 그것을 뒷받침해주었다.

64\' 일본 올림픽에는 공산권 국가들도 대거 참가하여 올림픽 역대 최다 참가국인 130개국이 참가하였으며 동양적 철학과 작은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한 진행으로 성공적인 대회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일본 시민들의 친절함은 대회에 참가한 외국인 선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큰 찬사를 받았다.

이번 18회 일본 올림픽에서 일본은 금메달 22개로 금 32개의 미국, 29개의 소련의 뒤를 이어 3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성공적인 대회 운영과 전국민적인 성원으로 일본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이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5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은 것이었는데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일 정도로 그 성과가 대단했다.

64년 현재까지 2차에 이르고 있는 경제개발계획으로 말미암아 48년 당시 150달러를 약간 상회하던 1인당 GNP가 지금은 미국 GNP의 80% 수준인 2800달러를 넘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미국, 유럽등 서구권 국가에서 들여오는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외국에서 기술을 들여오는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로 기술국산화에 성공하여 몇몇 분야에서는 서구권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력의 성장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끊임없는 재투자를 불러왔는데 62년에 완공된 도쿄-오사카 고속철도와 뒤이어 완공된 도쿄-나가사키 고속철도가 대표적이었다.

고속철도는 시속 200Km/h를 넘는 속도로 일본 열도 지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어주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최고속도가 220Km/h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열차로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영광도 얻었다.

고속철도 외에도 도쿄-오사카간 고속도로가 완공되었고 전국의 도로와 철도가 정비되어 교통여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리고 후쿠시마 제철에 2기, 3기, 4기 설비가 완공됨에 따라 연간 900만톤의 철강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조선산업도 크게 발전하여 세계 조선산업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런 고도성장이 일본으로 하여금 올림픽 유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고 아시아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한 것이었다.

일본은 올림픽의 유치를 위해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올림픽 유치 홍보와 국민적인 열의로 도쿄가 제18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올림픽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도쿄시내의 정비였다.

낙후지역 재개발은 물론이고 도로를 넓히는 등 도쿄는 공사장의 작업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도쿄도 전체를 갈아엎고 새 도시를 건설하다시피한 재개발 사업이었으니 그 규모는 말로 표현할수 없을정도였다. 

도쿄의 도심이라 할 수 있던 시부야 지역이 이른바 일본의 \'센트럴 파크\'가 되어버리자 새로운 도심지로써 신쥬큐, 세타가야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는데, 도쿄를 X자로 관통하는 1, 3호선과 순환선인 2호선을 동시개통하여 눈길을 끌었다.

7년간의 노력 끝에 올림픽이 개최되는 64년의 도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까지 공존하는 최고의 도시로 거듭났고 올림픽을 맞아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올림픽 개최로 인해 일본의 국가이미지와 발전상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일본은 올림픽 경제특수를 누리게 되었는데 수출이 급증하고 관광수입이 날로 늘어나는 등 올림픽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 60억달러에 육박했다.

게다가 공산 동구권 국가들과도 올림픽을 통한 관계개선에 성공하여 새로운 수출시장 확보로 인한 이익은 얼마가 될지 예측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11. 핵보유 선언과 2차 중일전쟁

nh_200601011_han_ds3%280%29_rpg9746.jpg

-초소형 전술핵 실험성공, 이당시 일본은 140kt수준의 전략핵을 개발할수있는 기술을 휙득했다.-


c_6_17722_rpg9746.jpg

-2차 중일전쟁-



1965년 6월 6일, 일본 연방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핵보유선언을 했으며 동월 10일 네바다 실험장에서 1kt 수준의 초소형 핵폭탄의 실험장면을 전세계에 생방송하였으며 동시에 일본은 140kt수준의 핵무기 개발기술까지 휙득했다고 밝혔다.


동아연방과 달리 일본은 친미권국가였지만 동아보다 미국의 입김이 적었고 경제력이 매우 우수했고 그에따른 국력또한 강성했기때문에 미국은 일본의 핵개발을 막을수없었다. 하지만 야마모토 내각의 뛰어난 정책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전혀 흐트러지지않았다.


일본의 핵보유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건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이미 대만에는 신 중화민국이 설립되었고 일부국가는 신 중화민국을 공식중국으로 인정하였으며 핵을 보유했으나 그 위력이 강력하지못하고 확신성도 없는 중국은 최대적대국 일본이 핵을 보유했다는것에 대해 치명적인 자존심에대한 상처와 전국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은 쿠테타가 일어났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중심부인 천안문 광장은 대국 자유중국의 수도이자 그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는 심장부같은 곳이었다. 1965년 8월 15일 중국에서 갑자기 발발한 군사정변은 내전으로 확산되기전에 종결되었으며 이번 정변을 주도한 국민당 과격파인 \'중화인민유신총회\'는 사설군인들과 자신들에게 가담한 군구의 군인들을 베이징에 투입하였고 소규모의 교전끝에 인민총회 의 군이 베이징에서 시가전을 치뤘다.


제남 군구와 심양 군구까지 기존의 정부를 지지하지않았고 베이징 군구까지 무장해제를 선언하면서 인민총회의 군은 손쉽게 북경내의 주요 행정기관을 점거했고 정부의 요인들을 검거했다.


그러나 주석과 부주석은 이미 인도로 망명한 상태였다.


인민총회는, 전국적인 불안감을 돌리기위해 대대적인 대만침공작전을 계획했다. 난징 군구와 상하이 군구의 병력수를 극대화 시켰으며 전투기와 폭격기를 전진배치하였으며 공수군 3개사단을 이동시켰으며 동해 및 남해함대 전투함과 재래식잠수함이 상시대기하였으며 제2포병부대발사기지가 이동하였다.


금문도는 대만의 부속도서지만 오히려 중국본토와 거리가 2km밖에떨어지지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95110 반딧불의 묘 vs 포카혼타스, 어떤 게 더 무개념한 애니인가? [4] 골빈사나이(121.167) 11.11.29 223 0
95108 일본군 투입전력이긴한데 [1]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126 0
95106 미드웨이 당시 미군 투입전력임요 [2]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159 0
95104 독일군이 대단하기는 대단했죠 [10]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355 0
95103 물량앞에 장사없다 [1]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132 0
95102 어느나라의 깡패들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118 0
95101 짤이나 올려봅세 레키시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9 71 0
95098 맥아더가 일본에 해준거 많은데... 1(121.169) 11.11.29 76 0
95097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략가는 누구야? [6] 1(121.169) 11.11.29 240 0
95096 내가 영화평론반인데말이야 형들 궁금증좀 해결해줘. [4] 흑인(112.147) 11.11.29 99 0
95095 천조국 만세!! [2] 12(124.254) 11.11.29 120 0
95094 세계사광이 이 글 좀 봤으면 합니다. [7] 히아킨토스(121.151) 11.11.29 180 2
95093 공산주의에 대항해 유럽이 단결하자란 나치스의 구호... [3] 히아킨토스(121.151) 11.11.29 204 0
95091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85세로 사망 스탈린(211.173) 11.11.29 270 0
95088 if 놀이에 대한 개인적 생각 [16] 어떤인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190 0
95086 노르망디의 조선인은 진짜다 ㅁㄴㅇㄹ(112.163) 11.11.28 115 0
95085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서양 민간인들 스펀지송 (119.75) 11.11.28 585 0
95082 2차대전 만화 [5] ddd(183.98) 11.11.28 350 0
95080 에도시대에 아츠히메사마와 사카모토 로마가 사츠마와 죠슈에서 근대화할때 [3] 타치나바긴(220.117) 11.11.28 124 0
95079 몽고메리가 온갖 병크를 저질렀음에도 아이크가 옹호해준 이유가 있음? [6]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273 0
95076 근데 이 갤 일빠들 퇴치하는데 실패했냐? [5] 서탈린개념돋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141 0
95075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2차대전 전투함을 말해 봅시다. [13]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327 0
95074 미국이 한국을 독립시켜줘???? [1] 훼리훼세군도(220.117) 11.11.28 91 0
95073 사실 김구의 치하포 사건은 강도 살인입니다. (당시기사 혼다 후타요(220.117) 11.11.28 582 0
95072 장제스는 한국 독립과 별 관련 없다 [1] 산요 미츠키(220.117) 11.11.28 102 0
95071 개인적 생각으로는 조선의 쇼비니즘 발생 원인은 핫산후루부쉬(220.117) 11.11.28 100 0
95070 독일이 중동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16] ㅅㄷㅇ(147.46) 11.11.28 396 1
95069 조선인이 일본에 그렇게 동조했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현상 이토 켄지(220.117) 11.11.28 48 0
95068 조선인들은 그렇게 일본제국주의는 싫어하면서 제국은 그렇게 좃습nika? 오히로식킨지(220.117) 11.11.28 42 0
95067 조선인들이 일본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2가지 방안 아데레발페또(220.117) 11.11.28 51 0
95066 일본군 항복만 안해도 우리민좃의 힘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위리엄느호크(220.117) 11.11.28 60 0
95064 대동아연방의 근현대사 [1] 아오이 키미(220.117) 11.11.28 87 0
95063 진짜 재일조선인들이 2차대전 후에 범죄를 많이 일으키긴 했구나 [1] 마르가나르제(220.117) 11.11.28 105 1
95062 우리나라에서 문화 팔이하고 자부심 느끼려고 애쓰는 거 너무 까지 마라 [1] 말고트나이트(220.117) 11.11.28 77 0
95061 대동아연방의 스레 아사마 토모(220.117) 11.11.28 110 0
95060 16명의 조선인 특공대원.jpg ㅇㅇ(58.79) 11.11.28 254 1
95059 한미 FTA와 관련해서 스토리가 나오는군. [3] 토산네신바라(220.117) 11.11.28 74 0
95058 현대 한국인이 조선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한글밖에는 없다라는 말은. [3] 혼다마사즈미(220.117) 11.11.28 87 0
95057 신채호가 말한거 틀렸는데? [6] P-01s(220.117) 11.11.28 114 0
95056 자 여기 도쿄의 주택가에서 목조가옥을 찾아봅시다. [2] 아오이 토리(220.117) 11.11.28 93 0
95054 대동아연방의 스레 ㅇㅇ(211.215) 11.11.28 76 0
95053 끝내 태국서 生 마감한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태국(211.173) 11.11.28 67 0
95052 책을보 다가 '나바호인디언'들 암호 봤는뎈ㅋㅋ [5]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423 1
95050 유럽형들은 보면 전쟁나가는거 존나 좋아하는듯 ㅇㅇ [4] 유럽(175.193) 11.11.28 160 0
95049 좆까고있네 백인 보낼애가 없어서 흑인을 보냈다니 뭔 헤르만 괴링같은소리야 [2] ㅇㅈㄷㄱ(175.193) 11.11.28 124 0
95048 "위안부 할머니에게 새 차를" 모금 운동 확산 할머니(211.173) 11.11.28 54 0
95047 정신병으로 3급 장애인되서 서울대 입학 [4] 크헤렉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143 0
95046 님드라 2차대전 글은아니지만(2차대전 이야기는 있다) [2] 탈영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82 0
95045 [시] 강제징용 [13] 2차대전비사(58.142) 11.11.28 167 0
95044 추축국간의 기술교류는 어떠했음? [8]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11.28 237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