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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 薛仁貴: 한문번역판 )

契來慕愛彛吐glamorato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9.10 02:4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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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 薛仁貴 )는 당조( 唐朝 )의 명장으로 강주( 絳州 ) 용문( 龍門: 지금의 산서(山西) 하진(河津)) 사람이고 이름은 예( 禮 ), 자( 字 )는 인귀( 仁貴 )로 자로써 행세하였으며 수( 隋 ) 대업( 大業 ) 9년( 613년 )에 태어나서 당( 唐 ) 영순 2년( 683년 )에 졸( 卒 )하였으니 주요 사적은 당 태종( 太宗 ), 고종( 高宗 ) 시기이다.

설인귀는 어려서부터 빈한( 貧寒 )하였으나 글을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였으며 팔에 힘이 있었고 장성하여 농사일을 하였으며 류씨( 柳氏 )를 처로 맞아들였다.

당 정관( 貞觀 ) 후기, 당 태종이 친히 고려( 高麗 )를 징벌하려 하니 정관 18년( 644년 ) 가을부터 개시, 즉 군자( 軍資 )와 양초( 糧草 )의 이동 집결과 군사를 모집하여 전쟁준비를 적극 진행하자 설인귀는 장군( 將軍 ) 장사귀( 張士貴 )가 있는 곳으로 도달하여 응모하고 그 부하가 되어 받아들여졌다. 머지않아 당 태종이 고려를 징벌하여 장사귀군이 이동해 안지( 安地 )에 이르렀을 때, 낭장( 郞將 ) 유군인( 劉君印 )이 현지에서 무장부대에게 포위된 바, 설인귀가 소식을 들은 후 단기( 單騎 )로 나아가 구원하여 적장을 쳐서 베고 그 머리를 말안장에 걸자 남은 무리는 항복하고 군인( 君印 )을 구하여 군영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설인귀가 삼군( 三軍 )에 알려졌다.
    
당 정관 19년( 645년 ) 4월, 당군 선봉으로 나아가 고려와 겨루어 부단히 고려 수비군을 쳐부쉈으며 6월, 안시( 安市 )에 이르니 고려 막리지( 莫離支 )가 보낸 장수 고연수( 高延壽 )가 통솔하는 군대 20만이 산에 의거하여 주둔하고 당군에 항거하였다. 당 태종이 지형을 시찰한 후,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분담하여 군을 통솔하게 하고 진격하였다. 이때 설인귀는 용맹함에 기대어 특별한 공적을 세우려고 하니 즉 뭇 사람과는 상이한 백색 옷과 갑옷을 입고 손에는 방천극( 方天戟 )을 들고 허리에는 장궁( 長弓 ) 둘을 차고 크게 부르짖으며 진( 陣 )을 함몰시키자 고려 장사( 將士 )가 분분히 쓰러졌으며, 피의 길이 한 줄기가 되도록 죽이기 시작하였다. 당군이 따라서 계속 나아가니 고려군은 대패하는 타격을 입었다. 높은 곳에 서 있으면서 관전하던 당 태종이 보기를 희망하여 전쟁 후 특히 설인귀를 불러 보고 말 두 필( 匹 ), 비단 40필, 인구 10인을 노비를 삼아 하사하였으며 아울러 유격장군( 遊擊將軍 ), 운천부과의( 雲泉府果毅 ) 황궁( 皇宮 ) 현무문( 玄武門: 북문(北門))의 직무로 올렸다. 당이 고려를 징벌하고 군대를 돌이키니 당 태종이 귀환하며 특히 설인귀에 대하여 “ 짐( 朕 )의 옛 장수는 이미 늙었으매 용맹한 이를 발탁하여 바깥일의 전권을 넘겨주려 하였는데 경( 卿 )만한 자가 없노라. 짐은 요동( 遼東 )을 얻어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도다. ” 말하였다. 아울러 설인귀를 우령군랑장( 右領軍郞將 )에 더하여 봉( 封 )하였다.

고려를 징벌한 후에 당 고종시기에 이르러 설인귀는 계속해서 현무문을 수위( 守衛 )하였다. 영휘( 永徽 ) 5년( 654년 ), 당 고종이 만년궁( 萬年宮: 지금의 섬서(陜西) 인유현(麟遊縣) 서쪽에 있다. )으로 행행( 行幸 )하였는데 첫날밤에 바로 산의 홍수를 만나 폭발하여 곧장 만년궁 북문에 부딪히자 위사( 衛士 )들이 물의 기세가 흉맹( 兇猛 )함을 보고 각자 흩어져 가매 설인귀는 문에 올라 궁궐 안을 향하여 물이 이르렀다고 외치니 당 고종이 큰 소리로 외침을 듣고 급히 궁을 나가 달려서 높은 곳에 이르렀다. 꼭대기에서 당 고종이 머리를 돌려 볼 때, 큰물이 이미 그의 침전( 寢殿 )을 뚫고 나아갔다. 큰 어려움을 피하였던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감격하여 특히 어마( 御馬 ) 한 필을 하사하였다.

현경( 顯慶 ) 3년( 658년 ), 당 고종이 정명진( 程名振 )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토( 征討 )하게 하니 설인귀로써 그 부장( 副將 )을 삼았다. 설인귀는 귀단성( 貴端城: 위치는 지금의 요녕(遼寧) 혼하(渾河) 일대 )에서 고려군을 쳐부수고 3천여 급( 級 )을 참수하였다. 다음해, 설인귀와 또 양건방( 梁建方 ), 계필하력( 契必何力 ) 등이 고려 대장( 大將 ) 온사문( 溫沙門 )과 횡산( 橫山 )에서 싸웠다. 당시 설인귀 손에 활과 화살이 들렸는데 한 말로 먼저 적진에 부딪혀 들어감을 담당하니 쏘는 자에 불응함이 없이 시위에 땅에 거꾸러진 바였다. 이어서 또 고려군과 석성( 石城 )에서 싸우니 활을 잘 쏘는 적장을 만나 당군 10여 인이 살해되매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설인귀는 상황을 보고 대노하여 단기로 돌입하여 적장을 곧장 취하였다. 그 적장은 설인귀의 무용에 두려워하여 활을 쏠 틈도 없이 곧 설인귀에게 생포되었다. 머지않아 설인귀는 신문릉( 辛文陵 )과 흑산( 黑山 )에 있으면서 거란( 契丹 )을 쳐부수고 거란왕 아복고( 阿卜固 ) 이하 장사를 사로잡으니 전쟁 후 그는 공으로 인하여 좌무위장군( 左武衛將軍 )에 임명되었고 하동현남( 河東縣男 )에 봉해졌다.

용삭( 龍朔 ) 원년( 元年: 661년 ) 줄곧 당에게 우호적인 회홀( 回紇 ) 수령 파윤( 婆閏 )이 죽고, 비속전( 比粟轉 )이 지위를 계승하면서 당과 적이 되었다. 당 고종은 조서( 詔書 )로 정인태( 鄭仁泰 )를 주장( 主將 )으로 삼고, 설인귀를 부장으로 삼아 병사를 영솔하고 천산( 天山 )으로 나아가 구성( 九姓 ) 회홀을 쳤다. 출발할 때가 되자 당 고종이 특히 내전( 內殿 )에 연회를 베푸니 연석( 宴席 ) 사이에 당 고종이 설인귀에 대하여 “ 옛적에 활을 잘 쏴서 일곱 가지 예( 禮 )를 꿰뚫는 자가 있었으매 경이 시험 삼아 다섯 갑옷에 쏴보면 어떻겠는가. ” 말하였다. 설인귀가 명에 응하여 갑옷을 놓고 활과 화살을 취하여 쏘니 하나 활시위가 울렸음을 들었는데 화살은 이미 다섯 갑옷을 뚫었다. 당 고종이 크게 한바탕 놀라 즉시 사람을 불러 명하여 설인귀에게 견고한 갑옷을 하사하였다.

정인태, 설인귀가 군을 통솔하고 천산에 나아간 후 회홀 9성은 무리 10여 만을 가지고 서로 항거하며 아울러 용맹한 기사 수십 인에게 다가와서 도전하도록 명령하였다. 설인귀가 진에 임하여 세 화살을 발사하여 세 사람을 쏴 죽이니, 그 남은 기사가 설인귀의 신위( 神威 )에 두려워하여 모두 말에서 내려 항복을 청하였다. 설인귀가 기세를 타고 군을 지휘하여 엄살( 掩殺 )하매 구성 회홀이 대패하고 항복한 전 부락을 갱살( 坑殺 )한 바였다. 이어서 설인귀는 또 모래벌판을 넘어갔으며 북으로 패한 무리를 추격하여 그 수령 형제 세 사람을 사로잡았다. 설인귀가 군사를 거둔 후, 군중( 軍中 )에는 “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가 길게 노래하며 한관( 漢關 )에 들어가네. ” 노랫말이 전해졌다. 이로부터 회홀 9성은 쇠미해져 변경에 우환이 다시 생기지 않았다.

건봉( 乾封 ) 원년( 666년 ), 고려 막리지 천개소문( 泉蓋蘇文 )이 죽자 천남생( 泉男生 )이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아우 천남건( 泉男健 )에게 구축( 驅逐 )되어 특히 사자를 보내 당을 향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당 고종은 방동선( 龐同善 ), 고품( 高品 )을 파견해 위로하여 받아들이고 앞으로 가서 천남건에 대항하게 한 바, 이리하여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군을 통솔하고 방동선, 고품을 원조하여 호송함을 명하였으며 방동선, 고품이 이동하여 신성( 新城 )에 이르러 방동선이 고려군에게 습격당하니 설인귀가 안 후 군을 통솔하고 제때 서둘러 도착하여 쳐서 적의 머리 수백 급을 베고, 방동선을 구출하였다. 방동선, 고품이 진격하여 금산에 이르자 또 고려군이 습격하니 설인귀가 소식을 들은 후 군장( 軍將 )을 통솔하여 고려군을 막고 분격( 奮擊 )하여 둘로 자르니 5천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아울러 승세를 타고 고려 남소( 南蘇 ), 목저( 木底 ), 창암( 蒼岩 ) 두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천남생과 만났다. 이에 대하여 당 고종이 특히 조서를 내려 설인귀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어서 설인귀는 또 2천인을 통솔하고 고려 중진( 重鎮 )인 부여성( 扶餘城 )을 진공( 進攻 )하니, 이때 부장이 모두 병력이 적음으로써 그에게 가벼이 나아가길 원치 않는다고 권하였다. 설인귀는 “ 병사는 ‘ 잘 운용함에 있지 많은 사람에 있음이 아니라 ” 말하면서 이리하여 군을 통솔하고 출정하매 이번 전역( 戰役 )에서 그 몸을 사졸( 士卒 )보다 선행하여 모두 적 만여 인을 죽이고 부여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니 일시에 명성과 위엄을 크게 떨쳐 부여천( 扶餘川 ) 40여 성이 분분히 소문만 듣고 항부( 降附 )하였다. 이때 당이 또 이적( 李績 )을 대총관( 大總管 )으로 삼아 파견하여 다른 길로 기회를 타고 고려를 진공하였다. 설인귀도 연해( 沿海 )로 계속 진격하여 이적과 평양성( 平壤城 )에서 병사를 합쳤으며 고려가 항복한 후 당 고종이 설인귀와 유인궤( 劉仁軌 )에게 병사 2만을 통솔하여 남아서 평양을 지키도록 명하였고 아울러 설인귀에게 우위위대장군( 右威衛大將軍 )을 제수하였으며 평양군공( 平陽郡公 )에 봉하였고 안동도호( 安東都護 )를 겸하게 하였다. 설인귀는 명을 받은 후 치소( 治所 )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그는 안동도호를 맡은 기간에 고아를 어루만져 사랑하고 노인을 살펴 부양하였으며 도적을 처벌하고 현량( 賢良 )을 발탁하여 절의지사( 節義之士 )가 칭찬하니 고려 사민( 士民 )이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하였다.

설인귀가 안동도호를 역임할 때 토번( 吐蕃 )이 점점 강성해져 강족( 羌族 )이 건립한 토욕혼( 吐谷渾 )을 격멸하였으며 또 당 서역( 西域 ) 지역을 침략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은 설인귀를 전임시켜 나파도행군대총관( 邏婆道行軍大總官 )으로 삼고 아울러 아사나도진( 阿史那道真 ), 곽대봉( 郭待封 )으로써 부장을 삼아 군 10여만 인을 통솔하고 토번을 정토하게 하였다.

설인귀가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니 군은 대비천( 大非川: 지금의 청해(青海) 공화현(共和縣) 서남쪽 절길(切吉) 평원, 일설에는 지금의 청해 호서포합하(湖西布哈河)에 이르러 오해( 烏海: 지금의 청해 광해현(光海縣) 서남쪽 약해(苦海))로 나아갔으며 설인귀는 아사나도진과 곽대봉을 대하고 " 오해는 땅이 험하고 기후가 매우 나빠 우리의 사지( 死地 )로 위태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으매 그러한즉 빠르면 공적이 있으며 더디면 패하리라. 이제 대비령이 넓고 평평하니 두 울타리를 설치하고 안의 군수품에 진력하여 1만인을 머물러 수비하게 하고 나는 길을 배로 빨리가서 도적을 덮쳐 질서정연하지 못하게 하고 멸하겠다. " 말하였다. 곽대봉이 자원하여 남아서 지켰으며 설인귀는 또 다른 경거망동은 절대 불가라고 분부하였다.

설인귀가 역할을 나눈 후, 부대를 통솔하고 오해에 나아가 강 입구에 이르러 토번 수비군 수만 인과 만나니 설인귀는 군을 통솔하여 한바탕 부딪혀 죽이고 거의 다 참획하였다. 설인귀는 그 소와 양 만 여두( 頭 )를 거둬들였으며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곧장 오해성( 烏海城 )을 핍박한 연후에 천여 기병을 대비천으로 돌려보내 운반하는 군수품을 접수하려 파견하였으나 이때 곽대봉이 이미 토번에게 쳐발렸다. 설인귀는 군수품 보급이 없으므로 인하여 대비천으로 퇴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토번이 40만 대군을 이동 집결시키고 다가와서 진공하매 당군은 적에게 저항할 수 없어 대패하였다. 단 토번이 그다지 극단적으로 핍박하진 않아 당군에게 철저하지 않은 조건을 삼음으로써 당군과 강화하니 설인귀는 부득이 승락한 연후에 패군을 통솔하고 동쪽으로 귀환하였다. 전쟁 후 그는 대패로 인하여 서인( 庶人 )이 되었다.

머지않아 고려 지역에서 당에 반역함이 잇다르매 당 고종은 설인귀를 기용하여 계림도총관( 雞林道總管 )에 삼음으로써 요동을 경략( 經略 )하게 하였다. 임기 안에 설인귀는 일이 법을 어김으로 인하여 상주( 象州 )로 폄출( 貶出 )되었으며 후에 사면을 만나 귀환하였다,

설인귀 만년에 토번세력의 발전 향배는 과( 瓜: 치소는 지금의 감숙(甘肅) 안선(安選) 남쪽 ), 사( 沙: 치소는 지금의 감숙 돈황(敦煌))를 막았으며 동시에 돌궐( 突厥 )도 부단히 당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어지럽혔다. 이 때, 당 고종은 설인귀의 공로에 생각함이 미쳐 그를 불러본 후 그를 과주장사( 瓜州長史 ), 우령군위장군( 右領軍衛將軍 ) 겸 대주도독( 代州都督 )에 임용하매 설인귀는 군을 통솔하고 운주( 雲州: 지금의 산서(山西) 대동시(大同市))로 나아가 돌궐을 쳤다. 돌궐은 설인귀가 도로 일어나 장수가 되었음을 듣고 모두 매우 두려워하여 그 예봉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설인귀는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돌궐을 대파하였으며 만여 급을 참수하였고 2만인과 소와 양 3만여 두를 사로잡고 획득하였다.

설인귀는 영순( 永淳 ) 2년( 683년 ) 사망하였으며 향년 70세였다. 사후 조정( 朝廷 )에서는 좌효위대장군( 左驍衛大將軍 ), 유주도독( 幽州都督 )을 증여하였고 관부( 官府 )에서 상여( 喪輿 )를 특별히 제조하여 환송하였다. 상여가 고향으로 귀환하매 호위하였다.

설인귀는 당조의 명장으로 분전할 때에는 용맹하였으며 병사를 운용함이 뛰어나고 모략이 깊었다. 혁혁한 전공을 건립하였으며 당 전기의 강성함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 때로 군을 다스림에 엄하지 않았으며 병사의 노략질을 방임하고 뇌물을 수수( 收受 )하였으며 또 왕왕 과다하게 참살하여 잔혹함이 그 과실이었다. 설인귀는 또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그가 안동도호를 역임하였을 때의 정황을 보아도 정치를 다스리는 재능이 있었다.

薛仁貴,唐朝名將,絳州龍門(今山西河津)人,名禮,字仁貴,以字行世,生於隋大業九年(613年),卒於唐永淳二年(683年),主要事跡在唐太宗、高宗時期。

    薛仁貴自幼貧寒,習文練武,有臂力,長成務農,娶妻柳氏。

    唐貞觀後期,唐太宗想親徵高麗,從貞觀十八年( 644年)秋開始,即調集軍資糧草和招募軍士,積極進行戰爭準備。薛仁貴就到將軍張士貴處應募,被收為部屬。不久,唐太宗親徵高麗,張士貴軍行至安地時,郎將劉君印為當地武裝所圍,薛仁貴聞訊後,單騎前往營救,擊斬敵將,係其頭於馬鞍,降伏餘眾,救君印回營。從此,薛仁貴名聞三軍。

    貞觀十九年( 645年),四月,唐軍前鋒進抵高麗,不斷擊敗高麗守軍,六月,至安市,高麗莫離支遣將高延壽率軍20萬依山駐紮,抗拒唐軍。唐太宗視察地形後,命諸將率軍分頭進擊。這時,薛仁貴自恃驍勇強悍,想立奇功,即穿上異於眾人的白色衣甲,手持方天戟,腰挎兩張弓,大呼陷陣,高麗將士紛紛倒伏,殺開一條血路。唐軍隨之繼進,高麗軍被打得大敗。站在高處觀戰的唐太宗望見,戰後特召見薛仁貴,賜馬二匹,絹40匹,生口10人為奴,並提升為遊擊將軍,雲泉府果毅,職守皇宮玄武門(北門)。及唐徵高麗還軍,唐太宗還特對薛仁貴說:“朕舊將皆老,欲擢驍勇付之外事,莫如卿者。朕不喜得遼東,喜得虎將。”並加封薛仁貴右領軍郎將。

    徵高麗後到唐高宗時期,薛仁貴一直守衛玄武門。永徽五年( 654年),唐高宗行幸萬年宮(在今陜西麟遊縣西),第一天夜裏就遇山洪暴發,直衝萬年宮北門,衛士們見水勢兇猛各自散去。而薛仁貴登門向宮內呼叫水至,唐高宗聽到喊叫,急忙出宮跑到高處。當唐高宗回頭看時,大水已經涌進了他的寢殿。躲過大難,唐高宗感激薛仁貴,特賜薛仁貴禦馬一匹。

    顯慶三年( 658年),唐高宗命程名振征討高麗,以薛仁貴為其副將。薛仁貴於貴端城(位於今遼寧渾河一帶)擊敗高麗軍,斬首三千餘級。第二年,薛仁貴又和梁建方、契必何力等,與高麗大將溫沙門戰於橫山。當時,薛仁貴手持弓箭,一馬當先,衝入敵陣,所射者無不應弦倒地。接著,又與高麗軍戰於石城,遇善射敵將,殺唐軍十餘人,無人敢當。薛仁貴見狀大怒,單騎突入,直取敵將。那個敵將懾於薛仁貴勇武,來不及放箭,即被薛仁貴生擒。不久,薛仁貴與辛文陵在黑山擊敗契丹,擒契丹王阿卜固以下將土,戰後他因功拜左武衛將軍,封河東縣男。

    龍朔元年( 661年),一向與唐友好的回紇首領婆閏死,繼位的比粟轉而與唐為敵。唐高宗詔鄭仁泰為主將,薛仁貴為副將,領兵赴天山擊九姓回紇。臨行,唐高宗特在內殿賜宴,席間唐高宗對薛仁貴說;“古善射有穿七札者,卿試以五甲射焉。”薛仁貴應命,置甲取弓箭射去,只聽弓弦響過,箭已穿五甲而過。唐高宗大吃一驚,當即命人取堅甲賞賜薛仁貴。

    鄭仁泰、薛位貴率軍赴天山後,回紇九姓擁眾十餘萬相拒,並令驍勇騎士數十人前來挑戰。薛仁貴臨陣發三箭射死三人,其餘騎士懾於薛仁貴神威都下馬請降。薛仁貴乘勢揮軍掩殺,九姓回紇大敗,所降全部坑殺。接著,薛仁貴又越過磧北追擊敗眾,擒其首領兄弟三人。薛仁貴收兵後,軍中傳唱說:“將軍三箭定天山,壯土長歌入漢關。”從此,回紇九姓衰敗,不再為邊患。

    乾封元年( 666年),高麗莫離支泉蓋蘇文死,其於泉男生繼位,但為其弟泉男健驅逐,特遣使者向唐求救。唐高宗派龐同善、高品前去慰納,為泉男健所拒,於是,唐高宗命薛仁貴率軍援送龐同善、高品。行至新城,龐同善為高麗軍襲擊,薛仁貴得知後,率軍及時趕到,擊斬敵首數百級,解救了龐同善。龐同善、高品進至金山,又為高麗軍襲擊,薛仁貴聞訊後,率軍將高麗軍截為兩斷奮擊,斬首5000餘級,並乘勝攻佔高麗南蘇、木底、蒼岩二城,與泉男生相遇。對此,唐高宗特下詔慰勉薛仁貴。接著,薛仁貴又率兩千人,進攻高麗重鎮扶餘城,這時,部將都以兵少,勸他不要輕進。薛仁貴說:兵“在善用,不在眾”,於是率軍出征,這次戰役,他身先士卒,共殺敵萬餘人,攻拔扶餘城,一時聲威大振,扶餘川40餘城,紛紛望風降附。這時,唐又派李績為大總管由他道乘機進攻高麗。薛仁貴也沿海繼進,與李績合兵於平壤城,高麗降伏。之後,唐高宗命薛仁貴與劉仁軌率兵二萬留守平壤,並授薛仁貴為右威衛大將軍,封平陽郡公,兼安東都護。薛仁貴受命後,移治平壤新城。他任安東都護期間,撫愛孤幼,存養老人,懲治盜賊,擢拔賢良,褒揚節義之士,高麗士民安居樂業。

    薛仁貴任安東都護時,吐蕃漸趨強盛,擊滅了羌族建立的吐谷渾,又侵略唐西域地區。為此,唐高宗調任薛仁貴為邏婆道行軍大總官,並以阿史那道真、郭待封為副將,率軍十餘萬人,征討吐蕃。

    薛仁貴奉命西行,軍至大非川(今青海共和縣西南切吉平原;一說今青海湖西布哈河),將趨烏海(今青海光海縣西南苦海),薛仁貴對阿史那道真和郭待封說:“烏海地險而瘴,吾人死地,可謂危道,然速則有功,遲則敗。今大非嶺寬平,可置二柵,悉內輜重,留萬人守之,吾倍道掩賊不整,滅之矣。”郭待封自願留守,薛仁貴又囑咐他千萬不可輕舉妄動。

    薛仁貴安排好後,率部前往烏海,及至河口,遇吐蕃守軍數萬人,薛仁貴率軍一陣衝殺,斬獲殆盡。薛仁貴收其牛羊萬餘頭,鼓行而西,直逼烏海城,然後派千餘騎兵回大非川接運輜重,但這時郭待封已被吐蕃擊敗。薛仁貴因無輜重接濟,退軍大非川。至此,吐蕃調集40萬大軍前來進攻,唐軍抵敵不住,大敗。但吐善並不窮逼,以唐軍不深入為條件與唐議和,薛仁貴不得已應允,然後率敗軍東歸。戰後,他因敗績被免為庶人。

    不久,高麗地區相率叛唐。唐高宗起用薛仁貴為雞林道總管,以經略遼東。任內,薛仁貴因事違法,貶象州,後遇赦免而還。

    薛仁貴晚年,吐蕃勢力向北發展,阻斷瓜(治今甘肅安選南)、沙(治今甘肅敦煌),同時,突厥也不斷侵擾唐北境。這時,唐高宗念及薛仁貴功勞而召見他,之後,任用他為瓜州長史,右領軍衛將軍,兼代州都督,率軍前往雲州(今山西大同市)擊突厥。突厥聞薛仁貴復起為將,都非常害怕,不敢當其鋒,一時奔散。薛仁貴乘勢進擊,大破突厥,斬首萬餘級,俘獲兩萬人,及牛馬羊三萬餘頭。

    薛仁貴於永淳二年( 683年)去世,終年70歲。死後,朝廷贈左驍衛大將軍,幽州都督,官府還特造靈輿。護喪還歸故里。

    薛仁貴為唐朝名將,勇於力戰,長於用兵,深於謀略,建立了赫赫戰功,從而為唐前期的強盛做出了積極的貢獻。不過他在戰爭中有時治軍不嚴,縱兵擄掠,收受賂賄,又往往斬殺過多,失之殘酷。薛仁貴還忠於職守,從他任安東都護時的情況看,也有一定的理政才能

원문출처: 구글 중국사이트
번역출처: 내( 契來慕愛彛吐glamorator )가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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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554 (서울신문) 전방후원분 시원은 한반도로 밝혀져(한일 시원논란 매듭) 수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4 27 0
2240552 재미교포가 알려준 '갓양 아동성애'= 앱스타인 [1] ㅇㅇ(77.111) 05.14 22 1
2240551 러우전. 우크라의 반러(내부 친러 주민학살)로 발발 ㅇㅇ(77.111) 05.14 17 0
2240550 18세기는 통역관이 어떻게 가능한거임 [1] ㅇㅇ(125.142) 05.14 21 0
2240549 역사저널 그날 MC 놓고 제작진과 이제원 본부장 갈등 조직스토킹파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4 22 0
2240548 고종은 얼마나 무능하면 자기 와이프 하나 못지키냐 역갤러(220.85) 05.14 18 0
2240547 혐한인구 90%, 혐한코너 서점의 일본이 반일에 놀라는게 [1] ㅇㅇ(77.111) 05.14 31 0
2240546 광개토대왕 "영토확장" vs 일본 한반도 "침략" 역갤러(218.55) 05.13 3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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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540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인도 소수민족이 있다 ■x(119.64) 05.13 37 0
2240539 NHK: 일본인의 상식을 뒤엎는 일본인 뿌리 ㅇㅇ(77.111) 05.13 33 1
2240538 (앵글로색슨) ARM 신사협정 위배. 삼전 미래는 ㅇㅇ(77.111) 05.13 25 1
2240537 2종 극초음속 : 1 고체로켓 2 스크램젯 [4] ㅇㅇ(77.111) 05.13 46 1
2240536 이 새끼 답 안 치는거 봐라. [109] 0)0(113.199) 05.13 43 0
2240534 유대인=흑인노예상인, 일본인=아시안노예상인 ㅇㅇ(77.111) 05.13 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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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531 中관영지 "韓中日정상회의, 韓외교방향 수정 기회…역할 기대" ■x(119.64) 05.13 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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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529 예술적 흥분과 감동이라는 미적 감각도 서양엔 자기만족,탐구라는 역갤러(61.109) 05.13 21 0
2240528 [속보] 백악관, 주한미군 철수 명령 [1] 연합뉴스(1.225) 05.13 49 0
2240526 역대 한국 지도자 [1] 호밀(211.214) 05.12 38 0
2240525 -- [27] 0)0(113.199) 05.12 36 0
2240524 중국 역사에서 지고 나라 세운게 가야국과 신라인데 ㅇㅇ(112.149) 05.12 37 0
2240522 어제 체포된 매춘녀(왜인) 1회 화대 130만원 ㅎ [3] ㅇㅇ(77.111) 05.12 60 1
2240521 ┌ 2021 한.미 (거대한) 극딜. (+북,중 극초음속) ㅇㅇ(77.111) 05.12 32 0
2240520 극초음속 미사일은 그 자체로 수입산 인데요 (웃음) ■x(119.64) 05.12 27 0
2240519 “한국 대통령 김정은” 바이든, 또 말실수(웃음) [1] ■x(119.64) 05.12 232 0
2240518 中·日 대사관 '한중일 정상회의' 준비 착수 (웃음) ■x(119.64) 05.12 36 0
2240517 (하) 유대족이 국제결혼을 k-미디어로 뿌리는 ㅇㅇ(77.111) 05.12 31 2
2240516 (상) 미.가 일.을 버린 시점은 ㅇㅇ(77.111) 05.12 26 0
2240515 공화당. 일본에 관계를 끊음 민주당. 전쟁으로 되살림 ㅇㅇ(77.111) 05.12 25 1
2240514 현대일본의 숨통을 끊은 놈은 아베 신조 ㅇㅇ(77.111) 05.12 53 0
2240513 전후 일본은 2번의 기회를 놓쳤어. ㅇㅇ(77.111) 05.12 47 0
2240512 아베가 관광일본 정책으로 한게 ㅇㅇ(77.111) 05.12 28 1
2240511 일.천황가 집안애들을 뭐라 부르겠니? [1] ㅇㅇ(77.111) 05.12 42 1
2240510 전 후 ,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노역해서 만든 탄광 (웃음) ■x(119.64) 05.12 2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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