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세엔 지나를 롤모델삼아 율령제와 불교 철학을 취사선택해 문명이 생성되었고, 센고쿠 시대엔 대항해시대 타이밍과 겹쳐서 내항한 스페인 포르투갈인과의 교역을 통해 철포가 유입되면서 군사상의 혁신이 가능해졌으며, 열도 통일의 단서가 마련될 수 있었지.

도쿠가와의 쇄국으로 다시 세계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내부 역량이 소진되어갔지만, 쿠로후네가 와서 세계사 무대로 편입된 덕에 메이지 유신도 가능했던 것. 쿠로후네가 오지 않고 그대로 놔뒀더라면 일본은 자체 개방은 커녕 북센징급의 폐쇄국가로 남았을거다.

대동아전쟁에서 패망하고, 버블 붕괴의 판을 키운 것도 서방의 견제라는 외압 뿐만 아니라, 제국 시대부터 축적한 역량을 스스로 케어하지 못한 점, 성장한 만큼의 체급에 걸맞는 정치외교 방면의 철학적 기반 or 노하우가 부재했다는 내적인 요인과 모순 또한 커다란 지분을 점했음을 직시해야 함.

한마디로 '외압'이라는 트리거가 없으면 일본이란 나라와 그 종족은 스스로 변혁을 주도할 만한 창의력이나 진취성이 대단히 박약하다는 것. 막말 개항기에 왔던 러시아 작가 이반 곤차로프가 아무리 유익하고 바람직한 일이라 할 지라도 전례가 없으면 결코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 어린애처럼 인위적인 여건에 안주하는데 급급한 민족이라고 간파했던 그대로임. 저때나 지금이나 매뉴얼 패치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봄.

히틀러가 지적했듯이 일본은 타문명의 유산을 카피해 벌어먹는 문화 지지적인 재간은 갖추었을지언정, 그걸 연착륙시키고 장기적으로 리드해나갈 내면의 뿌리, 사상적 기초가 될 만한 문화 창조성은 간직하지 못했음. 전근대의 스승이었던 지나가 몽골 침략으로 리셋당한 것처럼 근대화의 스승인 서구도 칼리 유가 시대의 징후를 드러내며 자멸해가는 가운데, 일본이 예전만한 활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쇠락해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