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연재해 보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하게 되네.
본격 연재에 들어가기 전에 당부 사항 한 가지를 미리 말하자면,
본인 사학과를 졸업했고,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 행적을 가감없이 서술하고, 평가하는 훈련이 되어 있음.
그래서 가끔 내가 글 쓸 때 오해하는 분들이 조금 있더라고. 그 사람 좋아하냐? 싫어하냐?
내가 기계도 아닌데, 당연히 사심이 없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좋아한다고 행적을 부풀리고, 반대로 업적을 깎거나 하지는 않아.
오늘 서술하는 선조도 당파 싸움을 부추기고, 심화시킨 측면에서 싫어하는 사람이고, 이 점 유념해줬으면 좋겠음.
* 선조의 이순신 질투론, 의병 홀대론은 사실 전공자나 역사 관련자들 중에서도 동조하는 사람이 꽤 많음.
역사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의병을 홀대해서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고, 황현필도 비슷한 얘기를 한 바 있음.
이순신 장군이 노량에서 죽지 않았으면 선조에게 죽었을 거란 음모론(?)은 유명한 얘기일 거고.
의병 홀대론부터 반박하자면, 신하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지멋대로 공신 등급을 높게 준 점, 공을 세운 공신들 보다 선조를 호위한 공신이 더 많은 점,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이 빠졌었나?) 등 유명 의병장들 중 일부가 선무공신에서 빠진 점 등은 지적할만 하지만,
뜯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고, 공신 책봉과 관계없이 계속 관직을 한 인물도 많음.
이 시절 의병 중에는 한명련, 신충원 등 천민 출신이 면천되어 무관이 된 경우가 있고, 정충신이라는 인물도 면천 되어 무관이 됨.
면천된 인물은 주로 무관에 한정하고, 올라갈 수 있는 품계 또한 제한을 두었으나
그러나 평시였으면 면천된 인물은 당대에는 과거 응시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인 게지.
선조는 과거 신립에게는 자기 옷을 벗어준 사례가 있었고, 사돈까지 맺었으며, 이순신은 첫번째 백의종군(녹둔도 전투)에서 목숨을 살려줬었고, 관례 무시하면서 파격 진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니, 능력 있거나 맘에 드는 무관을 우대하고 아끼는 버릇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저 셋이 그런 경우였고.
조선판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한명련의 경우만 놓고 봐도,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 이후에도 사고 쳐도 실드 치고, 신하들이 처벌하자는 건 막아주고 했었음.
아무래도 삶의 궤적이 관직과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 사대부 양반 문관들이 보기엔 참 기행적인 인물이었거든.
한명련이 한번은 절차를 무시하고 역참의 말을 무단으로 뺏어 타고 간 적이 있었는데,
중죄였는데도 유배라도 보내라고 상소가 빗발치는 걸 비망기(왕의 의견을 승지에게 문서로 내림)까지 내려 막아줌.
당시 선조 왈 -
"한명련은 장사로서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적을 수없이 베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을 힘을 다해 나라에 보답했는데, 이번에 차질이 생겨 유방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그 사이에 깊은 실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이 없어 잘못하여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장차 죽게 된 어미를 버려두고 멀리 부산으로 유배 간다면 모자가 각각 한쪽 하늘가에 있게 되어 오직 꿈속에서나 오갈 뿐일 것인데, 나는 그에게 차마 그러한 처지가 되게 하지 못하겠다."
그럼 임진왜란 때 면천된 사람들이 왜 더 후대까지 이어지지 못해 홀대론 소리가 나왔느냐?
조선시대 특성상 어느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면, 그 아들들까지 똑같이 그 일을 시키는데,
(최무선의 아들은 화포 제작에, 이순신 아들, 자손 또한 무관의 길로~)
저 사람들 아들까지 무관을 시켜놓고는 왜 저들 집안이 유력 무관 가문으로 성장하지 못했을까?
(고려 말 이성계 가문이 유력 가문으로 성장한 것과는 참 대조적)
그건 바로 극심한 당쟁과 그 뒤로 이어진 격변의 시대 때문임.
그게 바로 선조가 푸짐하게 싸놓은 똥이기도 하고.
컴플렉스까지는 모르겠는데, 선조는 조선 왕 중 최초의 방계 출신으로,
선대 명종이 아들이 없는 데다가 평소 이뻐하던 조카라 왕이 된 케이스.
권력욕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나날이 강성해지는 신권을 견제하기 위한 고육책이라 해야 할지,
양쪽을 줄타기하면서 당파 싸움을 조장하다가 사화를 통해 한쪽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했고,
선조 다음으로는 광해군, 인조반정까지 이어지는데,
광해군 때 고변에 말려 죽거나 인조반정 때 죽거나 운 좋게 살아도 이괄의 난 때 죽거나 그 다음 호란까지
문관도 마찬가지겠지만, 무관 입장에서는 이때 역사적 함정이 너무 많음.
그래서 이런 인물들이 공교롭게 당쟁에 말려 다 죽었다. 이런 말씀.
다시 의병 얘기로 돌아와서.
왕조 국가에서 사병을 부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거고.
(예컨대 반역죄로 자결한 정여립)
이성계처럼 별초를 끌고 다니려면 왕의 허가나 묵인이 필요함.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전직 문무 관료 출신이나 지역 유력자들(임진왜란)인 경우가 제법 있었고.
자발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최초에는 관에서 독려하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여 줌.
선조나 분조(광해군)에서 관심 갖는 경우도 있었지만, 권율, 이순신, 도체찰사였던 이원익 등이 의병장 임명첩 같은 것을 써주기도 함.
물론 자기 돈을 내고 식량(보급)을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에서 일정 부분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 너무 잘 싸우면?
한명련, 곽재우처럼 중용받을 수도 있는 거지. 곽재우의 경우는 중간에 조선이 왜랑 협상하는 것에 실망해서 자기 마음대로 낙향하고. 나중에 기회를 다시 얻었을 때도 왕 명령 무시하고 낙향하는 것을 반복하여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말야.
그럼 왜 정유재란 때는 의병이 임진왜란에 비해 뜸해지고, 호란 때는 많이 없었느냐?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단 정유재란은 명군의 참전 때문임.
명나라 대군이 조선에 넘어온 상황이고, 조선은 이 사람들 보급 대기도 빡 셈. 그러니 의병에 신경 쓸 여력 있음?
지방의 장터에서도 곡식을 구하기 어렵거나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이라,
그래서 이미 일어났던 의병장들조차도 오히려 자신들이 작전에 방해가 될까봐 자진해서 해산함.
특히 정유재란 때는 조선의 곡창지대가 너무 많이 파괴가 되어 보급을 해준 게 기적일 정도,
그래서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 자기 자랑을 좀 써놨어도 그러려니 하는 거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조총의 보급과 일본군 전 병종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숙련병화 되었다는 점이야.
특히 조총과 장창, 말 타고 쓰는 긴 칼 등이 문제였는데,
조총은 당시 조선이 주력으로 쓰던 개인화기인 소승자 총통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었고,
가까이에서는 갑옷을 뚫는 파괴력을 지녔음.
즉, 고거전 ~ 임진왜란 전까지의 시기만해도 훈련 덜 된 농민일지라도 대충 갑옷만 입혀 내보내면 시간은 끌었는데,
갑옷 짱짱하게 입은 장군들조차도 조총 잘못 맞으면 죽는 거고.
창 들고 보병 돌격? 자 한번 드가자!!
어? 장창병들이 갑자기 투구 위에서 창을 내려치네. 뇌진탕으로 사망.
거기에 훈련 잘된 부대는 그 긴창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얼굴, 겨드랑이처럼 취약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함?
거기에 말을 탄 사무라이들은 긴 칼을 쓰는데, 어? 우리는 오랜 평화로 인해, 그리고 활과 같은 다른 무기도 동시에 쓰느라 장수들 칼이 좀 짧네.
즉, 고려 말 '홍건적' 침입 때처럼 유력 가문 사병들 일부 + 유생, 노비, 농민 어중이 떠중이 다 모아 딱 10만만 모으면 밖으로 몰아낼 수 있던 때처럼, 그들의 적은 더 이상 오합지졸이 아니었던 거.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전투가 바로 용인 전투임.
개요를 말하자면 조선군 약 8만이 일본군(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명에게 대패해서 끔살당한 전투였음.
혹자는 임진왜란 때 신립의 탄금대 패배 이후, 조선군이 병력이 없었다고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음.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8만(징비록에서는 5만이었다고 함),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때 삼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총 13만이었다고 함.
전체로 따지면 오합지졸이 맞긴 한데, 주력 병력의 경우는 잘 훈련된 기마병이었음.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가 생김.
여기 관련된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과거에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었고(조선군 주력은 항상 함경도였음), 거기에 뒤에서는 선조와 조정에서 자꾸 싸우라고 독촉하니 퇴로도 없는 상황.
앞에 있는 장수들은 실전 경험도 있거나 각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고,
각지에서 모은 근왕병과 피난민들 중 장정만 추려도 얼추 10만이 되었으니, 이제 자신감이 과하게 넘칠 수 밖에.
전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앞에 있는 작은(?) 부대 궤멸시키고 수도 탈환할 생각에 들떠버렸고,
권율이 차분하게 싸우자며 만류해도 자꾸 앞서나가다가 결국 대패하는 거.
실록에서는 이때 3만이 살아남았다고 함(총 병력이 8만이면 5만이, 5만이면 3만명이 죽은 상황)
이 전투 이후로 이제 근왕병들이 관군 밑에 모이는 것이 아닌 의병으로 싸우는 계기가 되고, 의병이 근왕병이 되고, 근왕병이 의병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보면 됨.
그래서 정유재란 때는 근왕병 중 잘 싸우는 사람들은 다시 다 관군으로 징발이 되고, 굳이 훈련 안 된 사람들까지 영끌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지. 가뜩이나 명군 곡식 대기도 바쁜 판에. 차라리 훈련 안 된 사람들은 일꾼으로 부리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정묘호란 때는 주로 평안도에서 무관 출신들이 국지적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고, 남쪽에서 서인들이 의병을 일으키려는 찰나 전쟁이 끝나버렸고,
병자호란은 삼도 근왕병 모으느라 바빴고, 이제 승병들이 일어서려는 찰나, 삼전도에서 머리 박고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고.
* 의병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렸네. 이제 1-2부는 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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