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기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건 1급 취득 1년 후인 2012년이었다.
그러나 결심 후 완전 속탈까지는 1년이 소요되었다.

개인사 썰은 신분노출이 위험하기도 하고
또 흑역사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서
훗날 갤을 떠나기 직전에 뿌리고 싶긴 하다만.. 조심스레 써 본다..

누구나처럼 나 또한 속기 제외하곤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는 놈이었다.
열정 없는 채로 사회의 부품이 되어 살아간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상상을 안 했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생각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들을 위해 돈을 번다는 건,
C협이나 S협처럼 사기질로 돈 버는 게 아닌 이상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것이다.

내가 2급을 취득한 후로는
1. 속기 실력
2. 맞춤법

이 2가지는 죽을 때까지 가져갈 내 재산이라고 생각했다.
두 가지 모두에 열정이 차고 넘쳤다.

그래도 더 이상의 티키타카는 없으니 참고 바람.

특히 나는 4학년 1년을 허송세월하여 성적이 매우 안 좋았고
그래서 더더욱 속기 외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인증 화면을 눈여겨보면
2급과 1급 사이에 워드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컴활도 1급 필기까지는 취득했었다.
타 속기사들과 차별을 두려
문서 관련 자격증은 모두 섭렵해 놓으려 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 자각과 함께 그 행진은 멈춰섰다.

이미 속기에 깊이 발들인 상황에서, 나라고 단칼에 포기가 되었을까?
현실에 오지게 뼈 맞고, 캄캄한 앞날이 두려운 상황이 지속..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고민에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다가..
29살.. 더 이상은 도저히 안 될 지경에 와서.. 속탈하게 되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사회의 부속품, 씹던 껌이 되어도 좋으니
이 한 몸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날.. 내 결심을 얘기하던 날..

나는 와이프와 함께 울었다.
내가 속기를 얼마나 열심히, 진지하게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더라.
물론 지금은 속기의 속 자만 얘기해도 먼지 나게 털린다.^^
속기 암흑기 4년이면 적어도 5천은 저축할 기간인데..

속기를 포기해도 미련은 남아 맞춤법은 포기 못 해서
몇 개월은 출판사 공고만 찾아봤었고
웃긴 건 이과 출신인 내가 한 군데 면접도 봤다.
"이과인데 왜 오셨죠?"
"(미친 놈아. 오라고 하니까 오지.)아, 저는 이과생이지만
속기사로 근무했었고 누구보다도 교정교열에 대한 열정이 쩝니다."
"예. 수고요~"

출판인이 되겠노라 파주 문발동 출판단지도 몇 번이나 방문했다.
여담이지만 여기 이쁜 건물 많으니
롯데아울렛과 세트로 구성해서 놀러가도 괜춘..

띄어쓰기 하나 병적으로 지키려고 발악하고,
문장 하나 쓸 때 구조나 순서, 쉼표 위치를 고민했던 내가 지금은 좀 자유롭다.
그래도 아직도 당시 습관들이 조금 있지만.

내가 잘하는 것,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당장 놓기는 어렵다.
뼈와 살을 깎아내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다.


막상 다른 상황이 닥치면 다른 무언가에 열정이 생기고
다른 무언가가 내 실력과 능력이 되기도 한다.
그 세계를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면,
그 세계에 속해서 아등바등했던 내 능력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시바 쓰고보니 또 이불킥 각인데
여튼, 1급 현직 속기사가 속기를 정리하는 것 자체에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