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89년, 히로히토가 뒈짖하고 아키히토가 천황에 오르면서 연호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바뀐 시점.

일본 경마계는 한창인 버블에 올라탄 채로 지방 출신의 아이돌 호스 오구리캡을 띄우는데 성공, 그야말로 꿀을 빨고 있었다. 아리마 기념에서 타마모 크로스를 마침내 이겨내고 왕위 계승까지 했으니 매우 적절한 세대 교체였지. 그 인기의 여파로 담배 꼬나물고 예상지를 한손에 쥔 아재들로 가득하던 경마장이 '오구링~'을 외치는 여성군단(오구리 걸즈)과 가족 단위의 방문객으로 가득했고.

89년에도 이 인기는 단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필두에는 당연히 현역을 지속중인 오구리캡이 있었지만, 타마모 크로스가 떠난 대신 새로운 강자 둘이 나타나 그 자리를 대신해. 타마모 크로스처럼 넘어야 할 '벽'이 아니라 마주서서 서로 원펀치를 주고받는 맞수의 느낌으로.

슈퍼 크릭(スーパークリーク), 타케 유타카의 운명을 바꾼 말. 오구리캡과는 동갑.

다른 말과 비교해서 유독 빵빵한 대두로도 유명했던 이 말은 스피드는 줘도 못먹을 정진정명 스태미너형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돌연변이였는지 스피드도 출중해 대박을 친 케이스. 골절로 더비를 거르고 88년 가을의 킷카상을 노렸지만 출전신청마중 상금순위가 19등이라 출전하지도 못할뻔 했는데, 얘 말고도 세 마리를 골라 탈 수 있었던 타케 유타카가 '크릭이 아니면 아예 안 타겠다'라고 고집을 부리고, 이에 두 마리가 출전을 포기하면서 간신히 출전, 5마신 차이의 압승을 거뒀다.

이 승리는 19세 꽃띠 타케 유타카가 거둔 첫 GI 승리. 이를 계기로 기수도 말도 대 출세 로드를 달리게 된다.

오구리캡이 타마모 크로스를 꺾었던 아리마 기념에서도 3위로 골인했지만 진로방해로 실격.

89년 상반기의 왕도 노선 GI이라면 당연히 5월의 천황상(春)과 6월의 다카라즈카 기념, 여기서 오구리캡과 슈퍼 크릭이 정면으로 부딪힐 거라 모두가 기대했지만, 오구리캡이 염좌에 계인대염, 슈퍼 크릭은 근육통으로 상반기 일정을 홀라당 날려 먹는 바람에 대결이 무산되었고, 이 틈을 다른 한 마리가 치고 들어온다.

이나리원(イナリワン). 앞의 두마리보다 한살 많은, 또 하나의 지방 출신 경주마.

가사마츠 경마장에서 뛰었던 오구리캡과 달리 도쿄 오오이 경마장에서 데뷔, 87년 도쿄 왕관을 포함 7승.  88년 끝자락엔 도쿄 대상전을 제패하고 중앙으로 이적했으나, 미호 트레이닝 센터로 옮겨오자 가뜩이나 난폭한 성격에 환경 적응조차 실패해 4착, 5착의 연패행진을 기록. 곁에서 지켜보던 오카베 유키오가 '원래 저정도 말입니까?'하고 오오이 관계자에 물어봤다는 일화도 있다. 오오이에 있을때 게이트에 머리를 들이박고 출주 취소된 적도 있고, 뒷발차기가 특기라 마방엔 다다미를 사방에 둘러놨었다고.

그러나 중앙 이적후 3전째인 천황상(春)에서 기수를 슈퍼 크릭이 없어 예정이 비어 있던 타케 유타카로 교체하자 완전히 다른 말처럼 표변해.

코스 레코드를 세우며 천황상 우승. 중앙 경마 첫 승을 GI 우승으로 장식하고,

다카라즈카 기념에서도 승리, 상반기에만 GI 2승을 쓸어담았다. 이쯤 되자 오구리캡과 슈퍼 크릭에만 집중하던 사람들은 이나리원을 포함해서 이 셋을 헤이세이 3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그리고 이나리원이 강하긴 하지만 저 둘이 돌아오는 하반기는 또 모를 일이라고, 그때 저 셋의 우열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라고 떠들썩했어.

9월 올커머에서 복귀해 승리를 거둔 오구리캡은, 10월 초 마이니치 왕관을 거쳐 10월 말의 천황상(秋)로 가기로 했고, 하반기 복귀전을 마이니치 왕관으로 택한 이나리원과 맞부딪힌다. 오구리캡은 작년 타마모 크로스의 주전 기수였던 미나이 카츠미가, 타케 유타카가 슈퍼 크릭으로 돌아가서 안장이 빈 이나리원은 베테랑 시바타 마사토가 기승.

직선에서 두 마리가 귀신같은 추입을 보여주며 머리를 나란히 하고 골인, 사진 판정 끝에 오구리캡의 코차 승리. 오구리캡의 승리 중 드라마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명승부로 따지면 이 경주가 최고라는 평.

같은 날 교토 대상전에서는 다시 콤비를 짠 타케 유타카와 슈퍼 크릭이 낙승을 거뒀다.

천황상(秋), 처음으로 세 마리가 모두 모인 대결. 슈퍼 크릭은 작년 아리마 기념의 패배를 설욕할 찬스였고, 이나리원은 오구리캡에게는 직전의 패배를, 슈퍼 크릭에게는 기수를 뺏아간 원한을 동시에 갚을 찬스. 오구리캡은 헤이세이 3강 같은 수식어 떼고 단독 1강의 입지를 굳힐 기회.

결과는 직선에서 먼저 가속을 시작한 슈퍼 크릭의 승리. 오구리캡 2착, 이나리원 6착. 타케 유타카의 팬들은 환호했고, 오구리 팬들은 슈퍼 크릭과 타케 유타카를 오구리의 승리를 빼앗아간 빌런 취급해서 항의 편지를 한트럭 보냈다고.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친 오구리캡의 미나이 기수는 진로를 찾지 못해 직선 가속이 늦었던 것을 자책하며 마일 챔피언십에서 오구리캡을 우승시켰을때 '이제야 절반 빚을 갚았다'고 눈물의 인터뷰를 했다.

이어진 11월의 재팬 컵에서도 3두가 모두 출전. 경주는 1800m 통과 기록이 당시 일본 1800m 기록을 넘는 초 하이페이스로 진행됐고,

뉴질랜드의 홀릭스와 오구리캡이 나란히 2분 22초 2, 당시 터프 2400m 세계 기록을 세우며 골인. 간발의 차이로 홀릭스가 우승. 슈퍼 크릭은 4착. 이나리원은 11착 대참패. 오구리캡은 천황상에서의 패배를 우승은 아니지만 되갚을 수 있었고, 이나리원은 '마이니치 왕관은 정말 대단했는데...하지만 역시 상반기는 빈집털이인가...'하는 평을 받게 되지.

그리고 89년을 마무리하는 아리마 기념. 팬 투표 1위로 뽑혔던 오구리캡은 단승 인기로도 1.8배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9월부터 이미 다섯번이나 출주한데다 마일 챔피언십과 재팬 컵을 2주 연속으로 출전하는 하드 로테이션 덕에 피로가 축적된 상태. 슈퍼 크릭은 3.1배로 2위, 이나리원은 저 둘과는 한참 떨어진 16.7배로 단승 4위를 기록.

레이스는 다이나 카펜터의 선행. 4코너에서 오구리캡이 먼저 나섰지만 피로의 여파인지 곧 슈퍼 크릭에게 뒤쳐지고, 그대로 슈퍼 크릭이 우승하나 했지만 100미터를 남겨두고 이나리원이 폭풍처럼 달려들어 승리를 채갔다.

슈퍼 크릭에 타고 있었던 타케 유타카는 이나리원이 아닌 오구리캡이 쫓아오는거라고 착각했다고. 2분 31초 7은 아리마 기념 신기록. 이 승리로 이나리원은 89년 GI 3승을 거두면서 연도 대표마에 뽑혀. 오구리캡 못지 않은 지방 출신의 성공 스토리를 쓴 거지. 오구리 걸즈와 유타카 걸즈가 붙은 다른 두 마리에 비해 인기는 미묘하게 없었지만..

이 셋의 대결은 90년 상반기까지도 지속되지만, 셋이 모두 모이는 레이스는 이뤄지지 못했어. 천황상(春)에선 오구리캡이 복귀 일정에 차질이 생겨 결장,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이나리원과 슈퍼 크릭의 맞대결이 되었고,

슈퍼 크릭이 자기 혈통의 본령은 장거리라는 것을 강조하듯 이나리원의 추격을 떨쳐내고 우승.

1주 뒤인 야스다 기념에선 처음으로 타케 유타카가 오구리캡에 타서 우승.

다카라즈카 기념에선 슈퍼 크릭이 근육통으로 빠지고 오구리캡과 이나리원이 출주했으나

둘다 한끗 부족한 추입을 보이며 접전조차 벌이지 못하고 오사이치 조지에게 패배. 오구리캡이 2착, 이나리원이 4착. 이 경주를 끝으로 헤이세이 3강끼리의 대결은 끝나게 돼. 이나리원은 가을 복귀를 목표로 조교했으나 다리의 불안정으로 그대로 은퇴, 슈퍼 크릭은 교토 대상전에서 우승 후 천황상(秋)로 갈 예정이었으나 계인대염 재발로 은퇴해.

홀로 남은 오구리캡은 천황상에서 6착, 재팬 컵에서 11착을 거두며 쇠락이 눈에 띄었고, 마주에게 '(더 비참한 꼴을 보기 전에)은퇴시키지 않으면 네 집과 경마장에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협박장까지 날아들지만 아리마 기념을 은퇴전으로 정하고 출주를 강행, 드라마틱한 우승으로 커리어를 마무리짓는다. 천황상 6착, 재팬 컵 11착, 아리마 우승의 착순은 공교롭게도 전년도 이나리원이 기록했던 착순과 완전히 일치했다는 것도 이야깃거리.

헤이세이 3강은 모두 타케 유타카와 이야깃거리가 얽혀 있는데, 타케 유타카는 셋 중 슈퍼 크릭을 무조건 우선시했어. 첫 GI 우승을 안겨줘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정실 부인 취급. 인터뷰에서도 3강 중 이상형에 가까운 거라면 슈퍼 크릭이라고 얘기하기도 했고. 이나리원을 타고 GI 2승을 했는데 슈퍼 크릭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쪽으로 돌아간 것도 그렇고. 야스다 기념에서 오구리캡에 기승할때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구리캡의 최고 악연에게 맡기다니 제정신인가' 하는 팬들의 반발도 굉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퇴전인 아리마 기념에서 기적같은 우승을 이끌어내면서 삽시간에 유타카 팬과 오구리 팬(둘다 여자가 절대 다수)의 대화합이 일어났다던가.  

당시 경마 붐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영상인 오구리캡의 은퇴식. 여성들 목소리가 앱-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