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제의 시대- 심볼리 루돌프 본기(本紀)*1
■1981년 3월 13일생. 수컷 . 갈색(鹿毛). 심볼리 목장(몬베츠) 산.
■아버지 파르톨론, 어머니 스위트루나(외조부 스피드심볼리) .노히라 유우지 마방(미호).
■통산 성적은 16전 13승( 舊 3-6세). 1984년, 1985년 JRA 연도 대표마. 현창마.
■주요 승리는 1985년 아리마 기념(Gl), 1985년 재팬 C(Gl), 1985년 천황상・春(Gl),
1984년 아리마 기념(Gl), 1984년 킷카상(Gl), 1984년 일본 더비(Gl), 1984년 사츠키상(Gl),
1985년 닛케이상(Gll), 1984년 세인트 라이트 기념(Glll), 1984년 야요이상(Glll).
제1장:「마성의 말」
★현역 당시의 마령 표기에 따라, 구 연령(한국식 나이)으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절세의 미녀가 한 명 밖에 없어서, 그녀의 곁에 두 명의 남자가 있던 것과 같았습니다. 쌍방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상 최강마」
1932년 4월 24일, 지금은 사라진 도쿄의 「메구로 경마장」에서 일본의 경마 역사에 남는 대레이스를 했다. 「동경우준대경주東京優駿大競走」…그렇게 이름붙여진 이 레이스는, 「일본에서도 영국의 더비와 같은, 2400 m의 세대 최강 결정전을 만들자」라고 하는 것으로, 많은 경마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1번 인기의 와카타카가 인기대로 이겨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이 레이스는, 당초는 「제1회」라고 주장할 것도 없었고, 다음해 이후로도 계속할수 있을지는 불투명했었지만 이윽고 일본 클래식 전선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매김되어 이윽고 「동경우준」, 즉 「일본 더비」로 발전해 갔다. 그것이 영국 경마를 모범으로 해 클래식 삼관을 경마의 체계의 중심으로 꽃피울 수 있던 일본 경마의 여명기였다
.
일본 경마는, 이 「동경우준대경주」의 개최로부터 세어도, 이미 약 70년의 역사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일본 경마에는 많은 강호와 한층 더 많은 무명마, 그리고 극히 소수의 명마들이 나타고 사라져 갔다. 그들의 싸움의 축적은 이윽고 역사가 되어, 일본 경마의 커다란 흐름으로서 지금 더 경마계에 맥동하며 숨쉬고 있다.
그러한 역사 안에서, 우리 경마 팬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 떨어지지 않는 영원의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 경마계 사상 최강의 말은 어느 말인가?」라고 하는 질문이다.
일본 경마가 시작된 이후, 어느 시대에도 각각의 시대의 최강마는 있었다. 개중에는 톱 클래스의 말들의 실력이 엇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말이 최강마였는가 분명히 판명되지 않는 시대도 있지만, 그런데도 70여년의 일본 경마의 역사를 풀어내면, 「시대의 최강마」들은 적게 추측해도 수십마리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 중에서도 한층 더 가장 강한 말을 1마리만 골라내라면, 그 문제의 곤란함은 터무니없는 것이 된다.
살았던 시대가 겹치고 있는 말끼리라면 그 직접 대결의 결과 혹은 직접 대결이 없더라도 그 양쪽 모두와 대결한 말과의 대전 성적, 혹은 각각의 소유 타임이나 후속마 도착 시간과의 차이 등에서 어느 정도의 짐작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았던 시대가 완전히 다른 명마의 강약을 비교하게 되면, 그 비교는 너무 많은 가정을 세운 후밖에 성립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한명한명 팬 각각이 자기 자신의 상상력을 가지고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내친김에 말한다면, 실제로는 한번도 대결했던 적이 없었던 말끼리를 비교해 「어느 쪽이 강했던 것일까」라고 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원래 불가능하고 넌센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많은 팬의 사이에서는 최강마 논쟁이 계속 전개된다. 이것은, 빠르고 격렬한 사이클 안에서서 항상 새로운 최강마를 계속 추구하는 경마계에 있어 이 질문이야말로 경마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인 본질이며 경마 그 자체의 매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넌센스인 것을 알면서 영원히 끝이 없는 질문의 대답을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넌센스인 질문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많은 팬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최강마」는 차치하고 「최강마 후보」에 대해서라면 많은 팬이 어느 정도 공통 인식을 가지고 다. 「시대의 최강마」는 많아도, 「사상 최강마 후보」의 이름에 적합할 정도의 명마는 많지 않다. 올드 팬들로부터 「사상 최강마 후보」로서 이름이 오르는 것은 신잔, 카부라야오, 텐 포인트, 토쇼 보이의 근처이며, 또 헤이세이 초기의 경마 붐으로 경마에 관심을 가진 층은, 오구리 캡이나 메지로 맥퀸의 이름을 들 것이다. 비교적 젊은 팬에게서는, 나리타 브라이언이나 TM 오페라 오쯤의 이름이 나올 것이 틀림없다. 각개인의 깊은 생각이나 세대에 의한 약간의 차는 있겠지만, 단지 「시대의 최강마」였다는 것으로는, 여기에 이름을 올릴 자격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름을 들 수 있는 명마들이더라도 단 1마리도 자칭하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 칭호를, 현재까지도 1마리, 독점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이, 일본 경마계 사상 유일한 「불패의 삼관마」심볼리 루돌프다.*2
심볼리 루돌프는, 그레이드 제도가 도입된지 얼마 안된 1984년(쇼와 59년)에, 클래식 삼관왕을 무패로 제패한 명마중의 명마이다. 그리고 유례없는 「불패의 삼관왕」이란 금자탑조차 심볼리 루돌프의 영광을 말하는데 있어서는, 그 이야기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심볼리 루돌프는 클래식 전선에서 동세대의 말들을 무적의 힘으로 걷어차 버렸던 것뿐 아니라, 그 후도 윗 세대를 패배시키고 아랫 세대의 도전을 물리쳤다. 렇게 해 당시 존재한 모든 말들과의 승부를 결정한 심볼리 루돌프는 그 압도적인 실력을 스스로 증명하는 시에, 명마로서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독점했다.
심볼리 루돌프가 은퇴까지 이긴 Gl의 수는 무려 7개에 달한다.이 숫자는 심볼리 루돌프의 은퇴로부터 15년이 지나 간신히 TM 오페라 오가 동렬에 섰지만, 결국 넘을 수는 없었다. TM 오페라 오는 Gl을 7승 했다고는 해도 그것은 약 3년간 15전의 Gl을 싸운 결과인데 비해, 심볼리 루돌프는 약 2년간 레이스 9전에서의 결과인 것을 생각하면, 심볼리 루돌프의 위대함과 그 빛은 전혀 퇴색하지 않는다.
심볼리 루돌프의 힘에 대해서, 이 말을 관리한 조교사 노히라 유우지는
「경마에 절대는 없다. 하지만, 루돌프에는 절대가 있다」
라고 평했다. 이 평은, 심볼리 루돌프의 전적에 비추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 심볼리 루돌프가 출주한 레이스에서 다른 말들은 처음부터 승리를 바라지 않고 입상 목적만으로 가는 게 대부분이었고, 또 아무도 그것을 꾸짖지 못했다. 것을 떳떳이 여기지 않고 심볼리 루돌프에 정면에서 싸움을 건 말들은, 모조리 결정적인 좌절로 보답받았다. 어떤 레이스서도 빈틈없이 경마에서 으레 좋은 위치에 올랐고, 골의 순간에는 당연히 선두에 서 있던 그의 모습에 팬은 「이 말에 「패배」의 두 글자는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심각한 의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팬들은, 그들이 목격한 진정한 명마를 존경이라기보단 두려움을 담아 「절대 황제」라고 불렀다.
심볼리 루돌프가 출현할 때까지, 일본 경마계에서 최강마라고 하고 있던 것은 5관마 신잔이었다. 「신잔을 넘어라」는 최강마의 탄생과 육성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호스맨들의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의 출현 이후, 이 슬로건은 , 「루돌프를 넘어라」로 바뀌었다. 심볼리 루돌프 이후도 경마계에는 많은 명마들이 나타났지만, 「루돌프를 넘어라」를 대신할 표어는 아직도 출현하고 있지 않다.
「절대 황제」라고까지 불린 사상 최강마 심볼리 루돌프는, 어느 날 갑자기 신의 은총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말이 출현할 때까지의 경과에는 몇가지 행운이 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심볼리 루돌프를 최강마답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의 재능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는 사람들의 고심과 노력의 결과에서도 있었다. 그 정통파 경마에서 「위대한 상식」이라고도 불린 심볼리 루돌프의 탄생은, 역사의 필연이기도 한 것이다.
「심볼리의 결정」
심볼리 루돌프가 이 세상에 태어난 곳은, 홋카이도의 몬베츠에 있는 심볼리 목장이다. 심볼리 목장이라고 하면, 일본 굴지의 명문 목장인 것과 동시에, 긴 역사를 가지는 오너 브리더*3이다.그리고 그 중에서도 당시의 심볼리 목장의 총수였던 와다 토모히로씨는, 아버지로부터 계승한 심볼리 목장을 크게 길러낸 경영 수완 뿐만이 아니라 말에 대한 독자적인 생산 이론이나 조교 스타일에 의해서 경마계의 존경, 선망, 그리고 때로는 질투와 외경심도 모으는 존재였다. 또 와다 씨는 당시의 경마계에는 드문 국제적인 시야를 가진 호스맨이며, 지금보다 세계가 훨씬 멀었던 시대에 자신의 소유마를 해외에서 데뷔시키거나 또 일본에서 달리게 한 소유마를 해외 원정에 데려가거나 한 적도 있었다.그런 와다 씨의 시점이 일본 경마의 국제화에 한 역할은 너무도 크다.
심볼리 루돌프의 혈통은, 아버지가 파르톨론Partholon, 어머니가 스위트 루나라는 것이다. 파르톨론은 와다 씨가 일본에 수입해 씨수말로 성공시킨 말이다. 또, 심볼리 목장의 말은, 수컷 말은 「심볼리」, 암말은 「스위트」라고 하는 관명을 붙이는 특징이 있어, 스위트 루나는, 그 관명이 나타내는대로 와다 씨 자신의 생산마였다. 그녀 자신은 1승만으로 경주 생활을 은퇴해 버렸지만, 그녀의 아버지, 즉 심볼리 루돌프에 있어서 외조부에 해당하는 말은 스피드 심볼리이며, 심볼리 루돌프 이전의 심볼리 목장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진 명마였다.
이처럼 심볼리 루돌프는 심볼리 목장, 그리고 와다 씨의 말 생산의 하나의 도달점이라고도 할 존재였다. 거기에서 심볼리 루돌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돌프의 혈통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
「파르톨론」
심볼리 루돌프의 아버지인 파르톨론은, 1960년(쇼와 35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3세부터 4세까지 달려 14전 2승이라고 하는 성적을 남겼다.불과 2승만 올리긴 했지만, 그 2승은 3세때의 아일랜드 내셔널 S(터프 1400 m)와 4세 때의 에보어 H(터프 2800 m)이며, 이들은 현지에서 일류의 레이스로서 통하고 있다. 또 이기진 못했지만, 아일랜드 더비에서 6착, 아일랜드 세인트 레저에서 4착이라고 하는 실적도 있어, 숫자만 보면서 상상되는 이미지 정도의 이류마였던 것은 아니었다.
와다 씨가 파르톨론을 찾아낸 것은, 본래 다른 말을 노리고, 그 구매 협상을 위해서 유럽에 건너 갔을 때였다.그런데, 와다 씨가 주목하고 있던 말은 와다 씨가 오자 마자 예상외로 큰 레이스를 이겨 버려, 씨수말로서의 가치, 구체적으로는 구매 가격이 단번에 폭등해 버렸다. 그 때문에 와다 씨는 노리던 말을 살 수 없어 실망했다. 그런 때에 와다 씨가 만난 것이, 모처럼 일본에서 오셨으니까-라고 보여진 말들 중에 있던 파르톨론이었다.
후에 왜 무수히 있는 말들중에서 파르톨론에 주목했는지를 추궁받은 와다 씨는, 「말에서 나오는 전파같은 것을, 나의 감수성이 포착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감각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 보는 눈을 널리 인정받는 인물은 많든 적든 보통사람은 모르는, 혹은 다른 각도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 와다 씨의 기묘한 표현에 대해서도, 어쩌면 혈통, 마체 등의 모든 요소를 와다 씨 나름의 시점에서 본 다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독특한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패하는게 당연하다」라고 말해지는 씨수말의 선정에는, 이치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영감, 그리고 운도 필요하다. 이는 경주마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관점, 영감을 갖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의 고도의 관점에서 많은 명마의 생산, 육성을 실현시킨 와다 씨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며, 「말 생산의 예술가」라고도 불린 그의 진수를 말하는 것이다.
와다 씨는, 파르톨론이 4세를 마지막으로 현역을 은퇴하자, 곧 바로 일본에 수입해 씨수말로서의 공용을 개시했다. 당초 파르톨론은, 말 생산의 중심지인 홋카이도가 아니고, 당시 심볼리 목장이 본거지를 두고 있던 치바로 공용 되게 되었다.그 때문에, 폭넓게 우수한 번식 암말을 모은다고 하는 관점에서는, 파르톨론은 결코 유리한 상황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파르톨론의 새끼는 잘 달렸다. 파르톨론 출생말은 마무리가 빨라, 3세때부터 잘 달려 상금을 확실히 벌어 온다고 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초년도 출생말이 데뷔한 파르톨론은, 금새 3세마 리딩 사이어에 빛나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파르톨론의 초기의 출생말은, 3세전에서는 잘 달리지만, 4세 이후의 큰 레이스에서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 한때는 「마무리는 빠르지만 성장력이 없다, 4세 이후 특히 중장 거리에선 쓸모없음」이라고 하는 평판도 섰다. 그러나, 이윽고 메지로 아사마가 천황상을 이기더니, 그 다음은 재미있게 중장거리에서도 큰 레이스를 이기는 출생말이 속출해, 그런 풍문은 금방 사라졌다. 암말보다는 수말이 달리는 것이 많은 가운데 , 파르톨론 출생말은 암말도 잘 달려, 1971년(쇼와 46년)의 카네히무로로부터 1974년(쇼와 49년)의 토우코 엘자까지의 사이, 무려 4년 연속으로 출생말이 오크스를 제패한다는 쾌거까지 달성했다.
이렇게 해서 명 씨수말의 지위를 확립해 간 파르톨론은, 이윽고 심볼리 목장이 말 생산의 중심을 홋카이도로 옮겼던 것에 따라, 씨수말 생활의 도중에 치바에서 홋카이도로 이동했다. 파르톨론은, 그 무렵이면 이미 심볼리 목장이 아닌, 일본 경마계의 대들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명 씨수말이 되고 있었다.
와다 씨도 파르톨론에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파르톨론은 14세가 되었을 때, 한 번 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사태에 빠졌다. 그 때 와다 씨는, 큰 돈을 털어 명의로 소문난 수의를 도쿄로부터 불러와 수술을 시켰을 뿐 아니라 무려 그 자신이 수술후 전신 마취의 후유증에 괴로워하는 파르톨론을 시중들어 침식을 잊는 간병을 하고, 그 결과 파르톨론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는 일화도 남아 있다.
파르톨론이 일본 경마에 미친 공적은, 스태미너 경마가 중심이었던 일본 경마에 세계의 스피드를 들여온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지로 아사마, 그리고 심볼리 루돌프와 같은 중장 거리의 초일류마도 낸 것, 브루드메어 사이어*4로도 지극히 우수했던 일 등, 헤아리려 들면 끝이 없을 정도다.
파르톨론의 혈통은, 달리 아라비안의 자손이 석권 하고 있는 서러브레드 가운데, 세계적으로 보면 이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얼리 터크의 계통이다. 일본 이외로는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도 말해지는 바이얼리 터크의 직계이지만, 그 계통은 오랫동안 경마 후진국이라고 한 일본에서는 오늘까지 면면히 전해지며 튼튼히 뿌리박고 있다. 「씨수말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았던 일본에서 세계적으로도 드문 이계의 피를 뿌리내린 것은, 파르톨론의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공적으로서 칭찬할만하다.
「스피드 심볼리」

한편, 파르톨론이 수입되는 약 반년 전에, 몬베츠의 심볼리 목장에서는 1마리의 흑갈색黒鹿毛의 수말이 태어났다. 그것이 후에 심볼리 루돌프의 외조부가 되는 스피드 심볼리이다. 심볼리 목장의 관계자가 입을 모아 「루돌프는 파르톨론보다 스피드 심볼리의 피를 보다 진하게 계승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 말은, 8세까지 달려 통산 43전 17승이라고 하는 전적을 남겼고 그 승리에는 아리마 기념 연패 외에도 천황상, 다카라즈카 기념과 같은, 현재에 말하는 Gl급의 레이스가 4개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천황상은 1번 이기면 그 후 두번 다시 나올 수 없는 규정이 있었지만, 5세 봄에 천황상마가 된 스피드 심볼리는, 8세까지 계속 된 경주 생활속에서 이후 두번 다시 천황상에 출주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시 천황상에는 한 번 이긴 말도 몇 번이라도 출주할 수 있다는 현재와 같은 규정이었다면, 스피드 심볼리는 천황상 제패의 영관을 몇개인가 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명마 스피드 심볼리의 출현에 이른 혈통의 심오함도, 범인에게는 계산할수 없는 것이 있다. 반적으로 인브리드(근친 배합)는 명마의 장점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허약 체질이나 다리 불안의 새끼를 내기 쉽다고 말해져 일반적으로 인브리드의 한계라 하는 것은 3×4, 18.75%의 「기적의 혈량」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스피드 심볼리의 어머니 스위트 인의 인브리드는 대단하게도 하이페리온의 2×3, 37.5%로, 한계로 여겨지는 그것의 2배의 혈량이었다. 이 숫자만으로,도 너무 위험한 배합으로 이해된다.
와다 씨는 이 너무도 섬세하고 너무도 여린 혈통을 가지는 암말에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피를 가지는 씨수말을 배합했다. 와다 씨는 유럽에서 말들을 둘러본 경험으로부터, 스위트 인의 외조부였으며, 후에는 스스로 씨수말로서 수입한 라이징 라이트의 딸들과 명 씨수말 로열 차저는 닉스, 즉 궁합이 좋은 계통간의 배합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라이징 라이트의 피를 가지는 스위트 인에, 로열 차저의 아이로, 일본에 수입된 로열 챌린저를 배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 태어난 스피드 심볼리는, 이른 시기부터 큰 그릇으로 기대되는 소질마였다.와다 씨는 오래 전부터 연구해,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실현할 구상을 꾀하고 있던 「삼원三元육성」을 이 말로 시험하기로 했다. 스피드 심볼리는, 출생 후, 성장 단계, 그리고 계절에 따라 장소를 바꾸면서 육성하는 이 방법으로 재능을 꽃피운다. 3세 봄의 단계로부터, 조교로 3펄롱(=600m) 34초의 타임을 내고 있었다 하니, 이 시점에서 이미 보통 물건은 아니다. 게다가, 스피드 심볼리는 그 흉포한 재능과는 정반대로, 성격은 상냥하고 영리한 말이었기 때문에, 조교로 고생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스피드 심볼리는, 데뷔 3전째의 미승리전을 이기더니 , 그 기세로 3연승해 단번에 클래식의 유력 후보가 되었다. 이 때 와다 씨에게 「스피드심볼리를 800만엔으로 팔면 좋겠다」라고 하는 제의가 있었다. 800만엔이라 하지만 지금과는 화폐 가치가 완전히 다르다. 당시의 더비의 우승 상금이 1000만엔이던 시대이다. 지금이라면 대체로 1억엔 남짓일까. 적어도, 이만큼의 가격을 매길 수 있는 말은 그다지 없다고 하는 레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와다 씨는 그 제의를 차갑게 거절했다. 스피드심볼리는 이대로 소유하고 있으면 그 이상의 상금을 벌어 와 준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다. 그때까지 자신이 추구해 온 이상의 서러브레드로 가까워질지도 모른다…와다 씨는, 그런 기대를 스피드 심볼리에 걸고 있었다.
와다 씨가 거기까지의 기대를 건 스피드 심볼리는, 그 다음은 상태가 나빠져 사츠키상 21착, 더비 8착으로 참패가 계속되었다. 또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인기가 낮은채로 킷카상에 나서 나스노코토부키를 맹렬히 습격해 사진판정까지 갔지만, 결과는 코차이로 2착으로 졌다. 참고로 이때의 사진판정은 약 20분간, 「사상 최소의 코차이」라고 불렸다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도착 차이가 작아도 패배는 패배, 스피드 심볼리는 클래식 무관에 그쳤다.
하지만, 그 후 스피드 심볼리는 만성마의 본령을 발휘하고, 순식간에 강해져 갔다. 킷카상 후의 아리마 기념에서는, 4세마면서 3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5세가 되고 나서는 천황상을 포함해 중상重賞을 4연승했다.미국의 워싱턴 DC국제 레이스에도 일본 대표마로서 초대되어 5착으로 건투했다.
그리고 스피드 심볼리의 훌륭한 점은, 이 정도의 일류 말이면서 8세까지 계속 달린 것이다. 7세에는 유럽 원정도 감행해, 킹 조지 6세&퀸 엘리자베스 다이아몬드 스테이크스에서는 직선 반까지 선두에 서 어쩌면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5착이 되어 있다. 최대 목표였던 개선문상은 10착으로 대패했지만, 귀국후 숨돌리지 않고 임한 아리마 기념을 제패했다. 게다가 8 세에는 다카라즈카 기념과 아리마 기념을 이김으로써, 사상 최초 아리마 기념 2 연패, 그리고 다카라즈카 기념, 아리마 기념의 그랑프리 연패를 달성했다.
아리마 기념 연패를 달성한 마지막 기념촬영에는, 스피드 심볼리를 중심으로 와다 씨와 아버지 코이치로 씨, 그리고 자식 타카히로 씨(현 심볼리 목장 오너)가 부자 삼대로 고삐를 쥔 기념 사진이 남아 있어 와다 씨에게 있어서는 이 말도 파르톨론과는 다른 의미로 인상 깊은 말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스피드 심볼리는, 씨수말로서는 자신을 넘는 새끼를 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와다 씨는 미출주에 끝난 스피드 심볼리 자마인 암말 스위트 루나에 은밀한 기대를 걸었다. 스위트 루나는, 경주마로서는 대성 할 수 없었지만, 와다 씨는 「이 말과 파르톨론을 배합하면, 반드시 굉장한 아이가 태어난다」라고 예언하고 있었다.이탈리아의 명마 생산가를 모방해 「일본의 페데리코 테시오」라고 불린 와다 씨의 말 생산자로서의 감이, 명마의 탄생을 고하고 있었다.
「광기의 피」
하지만, 와다 씨가 기대를 건 이 배합은, 최초부터 잘 된 것은 아니었다.스위트 루나는 심볼리 루돌프의 앞에 2마리의 파르톨론의 아이를 낳앗지만, 이 2마리는 모두 대성과는 거리가 먼 성적으로 끝났다.
첫 자마인 심볼리 프렌드는 적당히 활약했지만, 이 말은 타고난 성질 나쁨이 화근이 되어, 가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중상 승리는 게이오배 SH 하나만으로, 31전을 달려 통산 5승 밖에 하지 못하고, 마침내 레이스 중의 사고로 안락사가 되어 버렸다. 다른 자마도 격렬한 성격이 공통되어 마치 배합 안에 광기가 잠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오너 브리더는 같은 배합을 몇 년이나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목장의 혈통이 치우치기 때문이며 형이나 누나가 대활약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와다 씨는 스위트 루나와 파르톨론의 배합에 절대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복 배합하고 있으면 반드시 거물을 내 줄 것이라고.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루나」
형과 누나는 생각하는 성적을 남길 수 없었지만, 와다 씨는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파르톨론과 스위트 루나의 교배를 고집했다. 와다 씨의 의향으로 스위트 루나는 매년 파르톨론이 교배된 것이다. 그리고 스위트 루나는, 3마리의 파르톨론 자마를 낳았지만, 4년째는 수태하지 못했다. 와다 씨는, 그래도 그 이듬해 또 스위트 루나를 파르톨론과 교배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지나 파르톨론은 벌써 20세를 맞이했다. 씨수말로는 이미 노경에 있다고 해도 좋을 나이다. 파르톨론에 대한 집착이 깊어진 와다 씨의 모습은, 마치 이 배합이 가능한 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거물을 내려는 집념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했다. 와다 씨가 그만큼까지 집념을 태운 배합에서 태어난 최고 걸작, 즉 스위트 루나가 낳은 4번째의 파르톨론의 자마야말로, 후의 「절대 황제」심볼리 루돌프였다.
심볼리 루돌프가 태어난 것은 1981년 3월 13일로 공교롭게도 「13일의 금요일」이었다. 모색은 갈색으로, 「명마가 많다」라고 여겨지는 좌후일백(왼뒷발만 흰) 이 말은,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말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말이라면 태어난 후에 일어설 때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지만, 이 말은 겨우 20분 정도로 일어섰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이마에는,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의 유성이 빛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밤, 목장의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름다운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덧붙여서 어머니의 이름도 「스위트 루나」라는 것은 운명적이다. 마치 꾸며낸듯한 진짜 이야기이지만, 심볼리 목장의 사람들은 이처럼 몇개나 겹친 우연을 재미있어하고, 태어난지 얼마 안된 망아지에 「루나」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마의 초승달
그렇지만 갓 태어난 후의 절대 황제 심볼리 루돌프, 아명 루나는 목장의 사람들들의 기대를 그 나름대로 모으는 말이었지만, 한 몸에 모은달 정도는 아니었다. 당세(0세)때 마체는, 얼마 전에 심볼리 목장이 생산한 더비마 사쿠라 쇼우리가 훨씬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나는 매우 천성이 강한 말이었다. 다른 명마들의 새끼 때가 그렇듯, 루나는 동기의 망아지들의 리더격이었다. 다만 보통 리더가 그렇듯이 다른 말을 힘으로 굴복시켜 리더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루나는 별다른 싸움을 할 것도 없이 목장의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에는 어느새인가 리더 노릇을 하고 있었다.
루나는 심볼리 목장의 기대주의 1마리로 심볼리 목장의 독자적인 조교 시스템에서 성장했다. 카이도의 몬베츠에서 태어난 그는, 당세의 가을부터는 약 1년간 이와테의 육성장에서, 그 다음은 경마장과도 가까운 치바에 옮겨져 경주마가 되기 위한 조교를 받았다.
「보이지 않는 굉장함」
드디어 입구의 시기를 맞이한 루나는, 심볼리 목장과의 관계도 깊은 노히라 유우지 마방(미호)으로 입구 하게 되었다. 노히라 조교사는 조교사에 전직하기 전의 기수 시절 스피드 심볼리의 주전 기수도 맡아 와다 씨와는 오랜 친분이 두터웠다. 「그 두 명은 형제같다」라는게 주위가 본 당시의 와다 씨와 노히라 조교사의 관계이다.
그런 노히라 마방에 입구 한 루나의 경주명은, 이윽고 「심볼리 루돌프」로 정해졌다.
심볼리 루돌프에 대해서는, 후세 많은 전설이 전해지게 되어,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과장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그런 전설 중에는
「루돌프는 데뷔 전부터 이미 삼관왕이 의식되는 재목이었다」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과장이다. 확실히 심볼리 루돌프는 입구한 시점에서 이미 심볼리 목장의 그 해의 생산마 중에서는 기대의 1마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가 1승을 올린 후의 잡지의 인터뷰에선, 와다 씨는 「루돌프는 아직이군. 진짜 기대마는 앞으로」라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심볼리 루돌프는 후세에 전해지는 정도로 최초부터 연승이 숙명지어져 보였던건 아닌것 같다.
심볼리 목장의 현장에서도, 심볼리 루돌프의 평가에는 상당한 온도차가 있었다. 심볼리 목장에서는 육성을 위해서 기수 출신의 스탭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지만, 심볼리 루돌프를 절찬한 것은 주로 조교를 담당한 그들이었다. 그 한편, 와다 씨와 같이 날마다 직접 말에 타는 것은 아닌 사람들의 사이에서는, 아직 그만큼 굉장한 말이라는 실감은 없었다.
이 시점에서의 심볼리 루돌프의 평가의 차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고찰이 있다. 「경마의 신」으로 사랑받은 경마 평론가 오오카와 케이지로씨는, 심볼리 루돌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추억을 말했다.
오오카와 씨가 모 POG(페이퍼 오너 게임)에서 심볼리 루돌프를 「소유」하고 있던 일은 유명하다.오오카와 씨가 심볼리 루돌프를 선택한 계기는, 데뷔전의 3세마를 보다가, 관리사에게 끌려 걷던 1마리의 수말이 캔터(구보)를 하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굉장한 재목이다!」라고 느낀 오오카와 씨가 그 말은 누구냐라고 물어보니 노히라 마방에서 데뷔할 예정의 심볼리 루돌프라는 말이란다.
그 무렵, 오오카와 씨는 마침 POG에서 「소유」하는 3세마를 골라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POG라고 해도, 그것은 현재 여기저기의 경마 잡지에서 하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형식의 그것과 달라, 라이벌은 그 동료인 경마 관계자들, 즉 세미프로라고 해도 좋은 멤버뿐이었다. 이 정도의 말은 아마 선객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POG의 간사에 「노히라 마방의 심볼리 루돌프는 누군가 골랐어?」라고 물어 보았다. 대답은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심볼리 루돌프는 아직 아무도 선택하지 않다고 한다. 오오카와 씨는 매우 기뻐하며 이 말을 선택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오카와 씨는 심볼리 루돌프의 사진을 차분히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오오카와 씨가 받은 인상은,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기서 본 인상은 「어째서 그 때는 이 말에 그렇게 반했던 걸까」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굉장한 것인지 이번은 사진을 아무리 봐도 몰랐다. 확실히 마체만을 보면 그보다 잘 달릴 것 같은 말은 많이 있다. 이것으로는 다른 멤버가 누구도 심볼리 루돌프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오카와 씨는 처음으로 실물 심볼리 루돌프를 봤을때 느낀 충격이 단순한 착각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한 오오카와 씨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
「이 말의 굉장함은, 선 모습이 아니고, 걷는 모습을 볼때 처음 알게 되는 거다」
이처럼 심볼리 루돌프의 굉장함은 누구라도 알만한게 아니었다. 물며 경마계에서는 매년 몇십마리의 「기대마」 「소질마」가 데뷔한다. 그렇다면, 경마 매스컴이 심볼리 루돌프의 소질을 간파할 수 없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경마 매스컴의 심볼리 루돌프의 취급은, 좋아도 예년의 「기대마」라고 차이가 있는 대접은 아니었다.그 뿐만 아니라, 전형(全兄)*5심볼리 프렌드의 성질 나쁨을 지적해 「머리가 이상한 혈통」이라고까지 단언한 곳도 있었다.
「운명의 장난」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를 맡은 노히라 유우지 조교사는 이 말이 남다른 재목이라는 것을 즉시 간파한 것 같다. 최초로 와다 씨한테서 심볼리 루돌프를 부탁받았을 때, 노히라 조교사는 우선 스스로 심볼리 루돌프에 승마해 마장을 1바퀴 돌고 왔다. 그 때 그가 말한 것은, 「스케일이 큰 말이군요, 보통의 3세마와는 다릅니다. 차분히 소중하게 기릅시다」라고 하는 말이었다. 입구 한 지 얼마 안되는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를 했던 것은 처음엔 후지사와 카즈오 조교 조수(현 조교사)였지만, 그러던 중 노히라 조교사는 스스로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를 했다. 노히라 조교사는 조교사가 되기 전은 기수, 그것도 「미스터 경마」라고까지 말해졌을 정도의 명수였지만, 그런 그가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로는, 「재미있다」라고 밖에 표현할수밖에 없는 기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노히라 조교사의 모습이 너무 기쁜 듯해서, 후지사와 조교 조수는 물론 후에 주전 기수가 된 오카베 유키오 기수도 조교로는 심볼리 루돌프를 타는 것을 사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히라 조교사는, 심볼리 루돌프의 엄청난 스케일과 장래성을 즐기는 것과 동시에, 이 말이 안에 숨긴 「광기」라고도 말해야 할 성질의 격렬함도 감지하고 있었다.
노히라 조교사는, 일찌기 심볼리 루돌프의 전형인 심볼리 프렌드를 맡고 있었다.노히라 조교사는 최초, 심볼리 프렌드에도 소질은 초일류의 것이 있다 느껴, 기대하고 있었다. 이 말에 기대한 것은 특별히 노히라 조교사만은 아니고, 이 말의 승마를 의뢰받은 많은 일류 기수가, 처음에 조교로 승마했을 때에는 언제나 「옳거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다음 레이스는 따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볼리 프렌드는 실제 레이스에선, 조교로 보인 능력의 절반도 보이지 않았다. 형의 소질은 그 엄청난 천성의 격함 때문에 인간도 말 자신도 그것을 컨트롤하지 못한채, 어둠에 묻혔던 것이다.
심볼리 루돌프도 또한 하나 잘못되면, 불우함 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형과 같이 간단하게 망가져 버릴수 있는 섬세한 곳이 있었다. 노히라 조교사는, 이 실패에 대한 후회가 있었기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심볼리 루돌프에 신경을 썼다.
우선, 조교 때는 심볼리 루돌프가 달릴 기분을 해치지 않는 것을 제일로 하며 몰았다. 다음에, 와다 오너로부터 「어떻게든 여름 동안에 1전 사용하고 싶다」라고 하는 요망을 받아 데뷔전을 삿포로로 할까 니가타로 할까 고민한 노히라 조교사는, 심볼리 프렌드가 삿포로에서 앞의 말이 차는 모래를 뒤집어쓰고 레이스 싫어하게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해 내, 니가타에서 데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때 노히라 조교사의 심중에서는, 심볼리 루돌프의 안장에 올릴 주전 기수의 후보로 오카베 유키오 기수와 시바타 마사토 기수가 있었지만, 시바타 기수는 그 무렵 쭉 삿포로에서 기승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해 심볼리 루돌프의 안장은, 오카베 기수로 정해졌다.
노히라 조교사로부터 기승 의뢰를 받은 오카베 기수도, 이 말에 타는 순간 「정말로 3세마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역시 실제로 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루돌프의 굉장함을 나눈 행운의 1인이 되었다.
「3세때부터 고마처럼 완성된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이, 이후 오카베 기수가 말한 심볼리 루돌프 평이다. 그런 오카베 기수에 노히라 조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맡깁니다. 이제 자네가 스스로 이 말을 길러요. 그 만큼의 가치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카베 기수는 데뷔전부터 은퇴까지, 끝내 한번도 심볼리 루돌프를 다른 기수에 양보하지 않았다.
「신화의 개막」
심볼리 루돌프의 데뷔가 니가타로 정해진 것의 배경에는, 오너인 와다 씨한테서의 요망도 있었다고 한다. 심볼리 루돌프의 데뷔에 대해서는, 딱히 여름 동안에 끝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데뷔를 늦추어 중앙 개최까지 기다린다고 하는 선택사항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노히라 조교사는, 와다 씨에 대해서 「무리하지 않고 4세 데뷔로 갑시다」라고 건의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와다 씨는 노히라 조교사에 「여름 동안에 쓰면 좋겠다」라고 요청, 노히라 조교사도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심볼리 루돌프의 니가타 데뷔, 그리고 오카베 기수의 주전 기수 기용이 정해졌다.
와다 씨가 심볼리 루돌프를 여름 동안에 사용하는 것에 집착한 것은 지인과 경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류마는 여름에는 써서는 안된다. 유럽도 그렇다」라고 하자「아니다. 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사용법이다」라고 대답한 게 논쟁이 되어, 그 지인에 고집을 보이기 위해서 심볼리 루돌프를 사용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어떻게 보면 와다 씨의 고집이 오카베 기수와 심볼리 루돌프의 황금 콤비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담은 이쯤하고, 니가타의 신마전에서 데뷔하게 된 심볼리 루돌프이지만, 노히라 조교사는 이때 오카베 기수에 하나의 과제를 주었다.
「1000 m로 1마일의 경마를 할 것」
보통 1000 m의 신마전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좀처럼 닿지 않는다. 더구나 이 날의 니가타 잔디 코스는 불량 마장이라고 발표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히라 조교사는 데뷔전에서 지는 것보다, 말에 이상한 경마, 즉 말이 갈 기분에 맡긴 전력질주의 경마를 배우게 해 버려, 심볼리 루돌프의 장래성을 망치는 것을 무서워했다.
오카베 기수도 노히라 조교사의 지시의 의미를 이해해 1000m전임에도 불구하고, 심볼리 루돌프에 중단에서 뻗어가는 경마를 시키기로 했다. 성격이 어린 3세마의 경우, 본능대로 앞에 가고 싶어하는 말이 많다. 하지만 노히라 조교사와 오카베 기수는 무리를 해 앞으로 앞으로 가지 않아도, 마지막에 선두에 서기만 하면 좋다는 것을 심볼리 루돌프에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는 이 레이스를 절대 능력만으로 낙승 했다. 노히라 조교사나 오카베 기수가 준 「핸디캡」은, 심볼리 루돌프의 능력 앞에선 전혀 영향이 없었다.
니가타의 신마전을 이긴 말의 로테이션으로서는, 니가타 3세 S(Glll)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는 이 로테이션을 쓰지 않았다.심볼리 루돌프의 다음 경주는, 3개월의 휴양을 사이에 둔 500만 이하 특별이 되었다.
처음은 노히라 조교사, 와다 씨 모두 신마전에서 심볼리 루돌프가 보인 이기는 방법에 만족해, 니가타 3세 S로 말을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로테이션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 것이, 심볼리 루돌프 담당 관리사 이토 노부오 씨였다. 「루돌프는 여름을 타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당시의 관리사로서는 이례적인 4마리를 떠맡는 수완을 인정받고 있던 이토 씨는, 심볼리 루돌프의 마체 변화를 재빨리 깨달아, 이 정도의 큰 그릇에 이렇게 빠른 시기부터 무리를 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견은 노히라 조교사, 와다 씨가 수용하게 되었다. 노히라 조교사, 와다 씨에게 오카베 기수를 더한 세 명은, 심볼리 루돌프의 향후에 대해 회담을 가져, 신마전에서 루돌프의 그릇은 알았으니까, 3세때엔 루돌프에 절대 무리를 시키지 않는다고 서로 맹세했다. 이 맹세를 받아 루돌프는 1전 1승인 채 방목되었다.
「내일을 바라보며」
심볼리 루돌프가 경마장에 돌아온 것은 신마전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10월이었다. 심볼리 루돌프는 이 날, 도쿄 경마장에서 열린 이쵸오특별(500만하 특별)에 출주했다. 이번은 1마일의 레이스였지만, 심볼리 루돌프는 역시 중단에서부터 뻗어나오는 경마를 해 낙승 했다. 이것으로 신마전에 이은 2연승, 그것도 전혀 위기 없는 힘을 보인 연승이다.
이 레이스의 직전 최종 조교에는 시바타 마사토 기수가 심볼리 루돌프에 기승했다. 하지만, 최종 조교 후 시바타 기수는 「싫구만. 내년은 이 말에 전부 빼앗길지도 몰라」라고 토로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즈음에는 「그릇이 큰 심볼리 루돌프」의 평판은, 경마 서클내에 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10월의 단계에서 2전 2승, 오픈에 도달한 심볼리 루돌프는, 보통이라면 3세 왕자 결정전인 아사히배 3세 S(Gl)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와다 씨는 굳이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와다 씨가 다음 경주로 지시한 것은, 단순한 오픈전의 출주였다.
아사히배의 2주 전, 도쿄 경마장에서는 해외의 강호를 맞이해 재팬 C가 개최된다. 와다 씨의 목적은 오픈전에 있던 것이 아니고, 그 날에 심볼리 루돌프를 도쿄 경마장에 데려 가는 것에 있었다. 와다 씨의 목적은, 「해외의 경마 관계자에게도 장래 이 레이스를 이길 이 말을 보여 주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과연 프로그램표를 보면 분명 그 날은 3세의 오픈 평장전이 있다.
심볼리 루돌프에는 절대 무리를 시키지 않는다는 맹세도 염두에 있었을 것이다. 노히라 조교사는 「이 레이스를 쓰면, 아사히배는 못 써요」라고 와다 씨에게 다짐했다. 그러자, 와다 씨는 간단하게 「그걸로 좋아」라고 대답해 왔다.
생각해 보면, 이 선택은 말 자신에 있어서도 좋은것 같았다. 심볼리 루돌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여기서 아사히배에 쓴다면, 최대한으로 마무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3세때 한 번 그러한 마무리를 해 버리면, 말의 장래를 위해서는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심볼리 루돌프에 요구하고 있던 것은, 더 멀고 더 높은 목표였다.
그렇게 해서 심볼리 루돌프는 아사히배를 회피해, 그 대신에 재팬 C당일의 3세 오픈에 출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와다 씨의 말하자면 「장난기」가 낳은, 최강마의 이상의 로테이션이었다. 이렇게 해서 와다 씨의 소망대로, 심볼리 루돌프는 일년 빨리 세계의 호스맨들 앞에 선보였다. 와다 씨는 해외의 호스맨 중에도 지인이 많았지만, 심볼리 루돌프는 그들의 눈에도 맞는 듯 「와다는 훌륭한 3세마를 가지고 있다」라고 격찬된 것이다.
더구나 심볼리 루돌프의 로테이션 변경의 영향을 먹은 것은, 다른 말들의 진영이다.그들 입장에서 보면, 「루돌프는 당연히 아사히배에 갈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하필 그냥 오픈 평장에 나온다는 것은, 기대가 빗나갔다도 해도 좋은 것이다.「그 심볼리 루돌프」의 소문은 이미 관동의 조교사들의 사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회피하는 말이 속출했다. 이 날 실제로 게이트 인 해 온 것은, 심볼리 루돌프를 포함해 불과 5마리였다.
심볼리 루돌프는 여기에서도 완전히 무난하게 3연승을 장식했다.한편, 이 날의 메인 레이스인 제3회 재팬 C에서는 천황상(秋)를 제패한지 얼마 안된 노장 쿄웨이 프로미스가 격주해, 스스로의 경주 생명과 맞바꿔 일본말로는 첫 연대*6를 차지했지만, 역시 영광에는 한걸음 미치지 못했다. 그런 무념의 패배를, 오너로부터 세계 제패의 꿈을 맡게 된 3세마는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심볼리 루돌프는 3전 3승으로 3세를 마치고 이듬해 예정된 수말 클래식 전선을 향해 원기를 기를 수 있도록 방목되었다. 중상 경험은 없는 심볼리 루돌프가 다음에 전장에 돌아올 때는, 「클래식의 유력 후보」일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러나, 심볼리 루돌프에 있어서도, 클래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시점에서 그의 앞에 어떠한 라이벌이 나타나고 어떠한 싸움이 전개되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1. 본기란 사마천의 사기 이후 정립된 기전체 서술에서 천자의 기록을 의미한다. 그 외 주요 인물의 기록은 열전이다.
*2. 이후 딥 임팩트가 두번째의 불패 전적의 삼관을 달성한다.
*3. 마주도겸하는생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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