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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lip: 존 블로, 인디게임 개발 이전 이야기
https://youtu.be/YdSdvIRkkDY조너선 블로우는 2008년, 악명 높은 인디 플랫폼 게임 <브레이드>를 출시하며 비디오 게임계의 시대정신(Zeitgeist)에 강렬하게 등장했다그리고 그는 후속작으로 1인칭 퍼즐 게임 <더 위트니스>를 발표했는데, 이 게임은 신비한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며, 게임 전문 언론이 자주 인용하기도 하지만, 정작 조너선 블로우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그래서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미션 디스트릭트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몇 블록 떨어진 한 갤러리에서 noclip 다큐멘터리 팀이 그와 만났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약 4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어린 시절, 그가 참여한 수많은 게임들 속의 코드, <브레이드> 이전까지 이어진 10년에 걸친 커리어, 그리고 <더 위트니스>가 성공하기 훨씬 전부터 그가 품고 있던 흥미로운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있게 들을 수 있었다조너선 블로우(이하 JB):제가 처음으로 비디오 게임을 접한 것은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집 근처 델리 가게에 <아스테로이드>같은 게임기가 하나씩 있곤 했습니다. 또는 <스크램블> 같은 게임도 있었죠. 지금 기준에서는 별로 좋은 게임은 아니었지만요.
그 당시 부모님은 제가 조용히 놀 수 있도록 동전을 하나 쥐여주셨고, 저는 그걸 들고 몇 블록 떨어진 가게로 달려가 게임을 하고, 다시 돌아와 동전 하나만 더 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그리고 나서 집에 아타리 2600 게임기를 들이게 됐습니다. 그 콘솔로 게임하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물론 지금 기준으로는 아주 원시적인 게임들이죠
저는 <어드벤처>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건 조금 나중에 구한 게임이었고요. 초반에는 <컴뱃>이나 <Air Sea Battle> 같은 걸 했어요.그렇게 콘솔 게임은 잠시 접고, 6학년 때 운 좋게도 컴퓨터 수업이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죠. 캘리포니아 북부 샌디에이고 지역이었는데, 그 수업에 Commodore VIC-20 컴퓨터가 잔뜩 있었어요. 지금 보면 별로 성능 좋은 컴퓨터는 아니었지만, 그게 학교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전 그걸 곧바로 이해했고, 부모님도 제가 컴퓨터에 푹 빠진 걸 보시고 결국 집에 컴퓨터를 사주셨어요. 미국에서는 TRS-80 컬러 컴퓨터라고 불리던 모델이었고, Radio Shack에서 나왔습니다. 그걸로 저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그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어셈블리어로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었어요. Radio Shack에 가면 “BASIC 언어로 배우는 프로그래밍” 같은 책을 팔았는데, “한 달치 분량의 연습문제!” 이런 식으로 홍보했지만, 저는 그걸 4~5일 만에 다 끝내곤 했죠. 그다음엔 두 번째 책을 샀고, 그 이후엔 더 이상 배울 게 없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다른 정보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는 시대였어요. 다른 책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던 거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간단한 게임 같은 것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 독창적인 게임 아이디어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보다는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개 다른 게임을 따라한 버전 같은 걸 만들었죠.
가장 게임다운 걸 하나 들자면, 일종의 <팩맨> 패러디였어요. 점수를 터무니없이 크게 만드는 게 컨셉이었어요. 왜냐면 당시에 아케이드 게임들의 점수가 계속 부풀려지는 걸 보았거든요.
그래서 알맹이를 하나 먹을 때마다 점수가 15자리 숫자처럼 쭉쭉 올라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스크린이 대충 28자 폭이었는데, 점수가 막 화면을 넘칠 정도로 늘어나는 식이었죠. 그 외에는 그냥 평범한 팩맨이었습니다.인터넷이 없던 시절, 조너선은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결심한다그는 북쪽, 베이 지역의 UC 버클리로 향해 컴퓨터 과학과 창작 글쓰기를 복수 전공하기 시작했다그곳에서 자신이 찾던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JB:대학에서는 스스로 배우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프로그래밍을 가르칩니다.
물론 일정한 지식 체계는 전달되죠. 그중에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오히려 한계를 짓는 틀에 불과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게임 개발에는 잘 맞지 않는 전제에 기반한 개념도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건 정말 복잡하게 프로그래밍해야 하고, 성능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보통 웹페이지 같은 걸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그러다 보니 어떤 개념들은 게임 개발을 하면서 진짜 검증을 거치게 됩니다. 다른 프로그래밍 분야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게임에서는 반드시 효과적으로 작동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제가 스스로 버리게 된 개념들도 있었어요.
전 컴퓨터 과학과 창작 글쓰기를 복수 전공했지만, 사실 졸업은 하지 않았습니다.학교 다니는 게 지겨웠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게 주된 이유였어요.실망한 조너선은 대학을 중퇴하고, 친구의 소개로 들어간 기업용 프로그래밍 직장에서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일자리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진정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찾고자 조너선은 짧은 계약직과 단기 프로젝트 위주의 떠돌이 경력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첫걸음은 <실리콘 그래픽스>라는 기술 회사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게임 중 하나에 엮이는 기회를 얻게 된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엮였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JB:그 회사는 셋톱박스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그런 게 꽤 실험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죠.
그 셋톱박스를 플로리다랑 일본에서 시험 운용하고 있었고 전형적인 대기업 프로젝트였죠.
근데 이제 그 박스에서 돌릴 게임이 필요했던 겁니다.그래서 제가 한 일은 <둠>과 <둠 2>를 그 셋톱박스에서 실행 가능하게 포팅한 거예요.
두 게임은 기본적으로 실행 파일은 같고 데이터 파일만 다르면 됐기 때문에 가능했죠.
한편으론 멋진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좀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어요.
왜냐면 그걸 돌리는 컨트롤러가 1994년산 싸구려 TV 리모컨 같은 거였거든요.
고무 버튼을 꾹꾹 누르면서 둠 같은 빠른 게임을 조작하려면… 쉽지 않죠.
제 생각엔 솔직히 그다지 플레이 가능하다고 보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구동은 됐습니다.그 후, 1996년 2월 무렵, 조너선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게임 회사를 창업한다.JB:
사실상 창업하기에 최악의 시기였어요.
진심으로 말하건대, 우리가 더 안 좋은 시기를 골랐더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어요.그 당시 게임 업계는 "이제 무조건 3D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무도 제대로 몰랐어요.
다들 2D보다 좀 더 복잡하긴 하겠지 정도로만 생각했지, 진짜 얼마나 힘든지는 체감 못했죠.
게다가 개발 예산은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고요.그런 상황에서 게임 업계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두 남자가,
“우리가 기존 게임 회사들이랑 경쟁해서 이기겠어!” 하고 들어간 거예요.
정말 어려운거죠
우리가 딱 게임 개발이 진짜 힘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에 발을 들인 거였어요.게다가 우리가 만들려던 게임이 당시로서는 너무 앞서간 기획이었어요.
우리는 온라인 전용, 32인 플레이, 자유로운 입장과 퇴장이 가능한
SF 호버탱크 전투 게임을 만들려고 했거든요.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정말 도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왜냐면 9600bps 모뎀으로 32명 멀티플레이를 구현한다는 건…
그냥 그 자체로도 웃긴 일이었으니까요.그 게임은 1997년쯤에는 어느 정도 플레이 가능한 상태였고,
그 뒤로도 계속 개선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유저 수를 확보해서 망하지 않으려고 했죠.
결국 그건 끝내 성공하지 못했지만요.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금전적인 면에서는 실패한 게임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저는 프로그래밍 실력을 정말 많이 키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간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프로그래밍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냥 많이 해보는 거에요.
그래서 그 회사를 접고 나서는 컨설턴트로 활동했고,
다양한 게임 회사에서 몇 달씩 짧게 일했습니다.
보통 1개월에서 6개월 사이였어요.
예를 들어 <Oddworld>에도 잠시 있었고,Ion Storm Austin에도 있었어요.
엔진 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었고,
제 코드 중 일부가 <Deus Ex>나 <Thief 3> 같은 게임에
실제로 포함되어 출시됐을지도 모르겠네요또 좀 특이한 일들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armonix*가 MTV에 인수될 때,
제가 MTV 측 요청을 받고 가서 그들의 코드를 검토했어요.
법적인 문제나 지뢰 같은 게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말이죠.
이건 꽤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뭐…
그래도 Harmonix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재미있었어요.(*락밴드 개발사)그리고 thatgamecompany에서 <Flow> 개발 초기에도
프로그래밍을 조금 도왔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고,PS3로 게임을 출시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 콘솔은 프로그래밍이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에
단순히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죠.저는 파티클 시스템 관련된 작업을 도왔고,
그걸 PS3의 코프로세서에서 실행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게임의 핵심 코드는 물론 그들 팀이 다 만들었고,
저는 그저 작은 기여를 한 정도였죠.
그리고 PS3가 등장하기 전,
뉴욕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도 있어요.
당시 IBM, Toshiba, Sony가 공동 개발한Cell Processor가 있었는데,
Sony는 이걸 PS3에 쓰려는 명확한 계획이 있었지만,
IBM은 서버용으로도 활용해보려는 생각이 있었어요(해피케이크 프로젝트)그래서 우리는 이 칩셋을 활용한
3D 멀티플레이 액션 게임을 또 만들게 되었죠.
이번엔 호버탱크가 아니라,강화 슈트를 입은 병사가 주인공이었어요.기술적으로 꽤 멋졌습니다.
왜냐하면, 이걸 서버 기반으로 만드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그게 뭐냐면, 물리 시뮬레이션을 아주 무겁게 적용하면,
각 클라이언트들이 각자 서로 다른 결과를 내기 시작해요.
그럼 결과가 불일치하게 되죠.
그래서 결국 서버가 물리를 직접 계산해줘야 합니다.
클라이언트에서 예측하는 건 가능하긴 한데,
최종적으로는 서버의 결과로 조정해야 하거든요.그래서 우리는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거대한 로봇이 도시를 향해 걸어오고,
그 로봇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제로 관절에 힘을 가해서 움직이도록 만든 거죠.
그래서 관절 하나를 날려버리면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움직이려고 시도해요.부서진 상태로라도 말이죠.
이런 부분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결국 출시되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EA에 라이선싱하려고도 했는데,
PS3 출시 전이라 그런지 관심이 없더라고요.ㅡ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마이크로소프트가
클라우드 기반 물리 연산을 시도하던 것과 비슷한 개념이네요.<Crackdown> 같은 게임이 서버에서 전부 물리 연산을 처리하려 했듯이요.JB:네, 맞아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게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어요.그 당시는 저는 그냥 프로그래머로서 그런 작업을 했지만,
이제는 디자인적인 관점에서도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 방식은 굉장히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됩니다.
그냥 클라이언트 측에서 계산하게 두는 게 훨씬 싸게 먹히죠.그러니까, 서버에서 물리를 전부 계산하려면
그 결과물이 정말 압도적으로 좋아야만 해요.
우리가 만들려던 시스템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사실상 그걸 실행할 인력이 부족했죠.
우린 두 명뿐이었고,
그나마도 친구가 대학생 몇 명을 모집해서
모델링, 텍스처링 같은 걸 도와주게 했을 뿐이었어요.
그러니까 대형 프로젝트라고 보긴 힘든 규모였습니다.대학을 중퇴한 이후, 조너선은 실로 다채로운 이력을 쌓은
프로그래밍 전문 계약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거듭할수록,
그는 점점 깨닫기 시작한다.
프로그래밍이라는 일이 생각만큼 창의적인 만족감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은 점차 디자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계속...)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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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Hermione_Granger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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