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경대학살에 관한 전시
(1) 후쿠치야마(福知山) 주둔지 사료관 「원장집관(垣將集館)」
남경 공략전 및 그 후의 남경성 내에서의 「잔적소탕」작전의 중심이 되었던 부대의 하나
인 제16사단의 보병 제 20연대 의 전사(戰史)가 경도부 후쿠치야마시에 있는 육상자위대
후쿠치야마 주둔지 내의 사료관 「원장집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후쿠치야마주둔지의 홍
보 팸플릿에는 「주둔지의 소개」로써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 주둔지는 옛날에는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서 용맹한 부대로써 수만
은 무공을 세우고 용맹을 떨친 구 육군 보병 제 20연대, 전후에는 경찰예비대에서 보안대
그리고 자위대로의 역사를 걸어온 「그리운 주둔지」로서 전국 각지에로부터의 견학자도 끊
이지 않는다」
구 일본군의 전사와 전후의 자위대사(自衛隊史)가 하나로 연결되어 자랑스러운 역사로서
전시되고 있다.
한편, 그 사료관의 전시내용(2009년 7월 현재)중에 남경 공략전에 관한 전시는 어떤 것으
로 되어 있을까. 전시실 왼쪽의 공간이 구 군관계, 오른쪽이 향토사 관계로 나뉘어 있는데
그 군 관계의 전시오른쪽 벽면에 낡은 일장기가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중산문(中
山門)에 최초로 세운 일장기 (1937년 12월 13일 오전 3시 10분) 오오노(大野)부대 츠네히
로(恒廣)대 사방대(四方隊) 일소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 벽면 상부에 크게 걸려
있는 「보병 제 20연대사」의「중일전쟁」의 1937년 11월 25일부터 12월 13일「남경공략
전」의 항목아래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9일 남경동방고지 일대에 있어서 격전을 치르게 될 남경을 눈앞에 두고 적과 격투하다.
선두의 요시다(吉田)오장 이하 45명의 용사가 적진 일각으로 돌격하여 수류탄을 던져 산정
상 부근은 하얀 연기로 충만했고, 아수라와 같이 용맹하게 싸웠다. 요시다 오장은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10일 남경성 공격이 개시된 후 8시 30분에 적의 피바다를 따라서
대화산맥을 넘어 남경평지로 전진하다. 13일 중산문에 제일처음 다다라 사방대․일장기를 펄
럭이며 남경포위진은 완성되고 수도 남경은 함락되었다.」
이처럼 격전과 아군의 죽음을 넘어「중산문에 제일처음 다다른」공적을 간결하면서도 구
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남경점령후의 일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1938
년 1월 23일「남경출발 대련에 상륙」의 항목 아래에,「연대는 남경부근소탕 및 경비에 임
하고 있었는데 화북으로 전진(轉進), 24일 신노마루(神農丸)의 성선, 28일 대련상륙 성운대
(星雲臺)의 숙사에 들어가다」
1개월 반동안의 남경체재중의 일은「남경부근소탕 및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보병 20연대의 병사들은 난경에서 무었을 하고 있
었던 것일까. 전시내용 전체를 통해서도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간의 행동에 대해서는 시
모사토 마사키(下里正樹) 『은폐된 연대사』(1987년), 동『속『은폐된 연대사』』(1988년),
이구치 가즈키(井口和起), 키사카 준이치로(木坂順一郎), 시모사토 마사키 편『남경사건 경
도 사단 관계 사료집』(1989년), 아즈마 시로(東史郎)『나의 남경 플라톤』(신장판, 1996
년) (모두 아오키서점)등에 수록된 하급병사의 진중일기 및 증언에 의해서 명백히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해행사(偕行社)발행의『남경전사자료집(南京戰史資料集)』(1989년)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로부터 일부 인용한다. 우선, 제3 기관총 중대 상등병 마키하라 노부오(牧原信夫)
의 일기의 일절,
「◇12월 14일 오전7시 기상하다. 오전 8시 반 1분대는 12중대에 협력, 마군(馬群)을 소
탕하러 가다. 남은 적들이 먹을 양식이 없기 때문에 비틀비틀 걸어 나왔기에 즉시 자동차로
출발하다. 그리고 도착 했을 때에는 소총중대로 310명 정도의 적을 무장해제를 시키고 기
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즉시 가서 전부 총살하고 돌아왔다. [후략]」(511쪽)
다음으로 제 4중대 제2소대 제3분대장인 오장 마스다 로쿠스케(増田六助)일기로부터 마
찬가지로 12월 14일의 일부,
「잠시 뒤에 위원회의 완장을 찬 중국인에게「중국 군인들이 없나?」라고 질문하자 반대
편의 큰 건물을 가리키면서 「매우 많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 집에 들어가 보니 피난
민들로 가득 했다. 그중에서 수상한 자 1000명 정도를 골라내고 마지막으로 300명 정도를
묶었다. 돈을 주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자도 있었지만 돈에 욕심이 없는 우리들은 10엔 지폐
3장 또는 5장을 포갠 채로 찍찍 찢어서 휙 던져 버렸다. 또 시계 등을 주는 자가 있으면 태
연하게 땅에 내동댕이치고 구두 뒤축으로 밟아 뭉개면서 태연한 얼굴을 했다.
저녁 어두움이 다가올 무렵 600명에 가까운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현무문(玄武門)에 이
르러 그 부근에서 함께 총살해 버렸다.」(522쪽)
이러한 기술은 채포되어 무장해 제된 무저항의 중국병 및 「패잔병」으로 간주된 중국인
을 대량으로 살해한 것을 노골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 앞에 말한「보병 제20연대사」의 전시 중의「만주사변 파견」의 항목에는「비적토
벌」라고 하는 말이 무반성적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만주사변」이 일본군에
의한 모략에 의해서 개시되었다라고 하는 사실도 전혀 무시되고 있다.
(2) 히사이(久居)주둔지「자료관」
마찬가지로 제16사단 지휘하의 제 33연대의 전사가 미에(三重)현 히사이에 있는 육상 자
위대 히사이주둔지「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주둔지에는 현재 육상자위대 제 33보통
과 연대가 설치되어 있으며,「전국에서 유일하게 제국육군 시대와 동일한 장소에 있으며,
동일한 연대번호를 가진 전통이 깊은 주둔지입니다.」라고 주둔지 홍보실 발행의 책자
(「100년의 역사와 전통 육상자위대 히사이주둔지」)는 그「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거기
에는 또한 보병 제 33연대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사이 연대는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만주주둔, 중일전쟁(남경공략․무한공략․양동<襄
東>공략), 대동아전쟁 등의 전력(戰歷)을 거듭했다. 특히 러일전쟁에 있어서는 봉천회전 삼
헌가(三軒家) 전투에 있어서 제6대(代) 연대장 요시오카 유아이(吉岡友愛)대령의 지휘 하에
장렬한 사투를 거듭하여 봉천회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동아전쟁에 있어서는 남방방면에서 연합군과 수많은 격전을 치루고 1934년 10월 23일
레이테결전에서 다대한 손해를 입고 제24대 연대장 스즈키 류노스케(鈴木龍之介)대령은 레
이테섬 파로지구에서 군기를 불태운 뒤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여 연대장 이하 옥쇄를 하였
다. 여기에 러일전쟁이래의 육군최고의 명연대라고 불리어진 보병 제33연대 영광의 건군
50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문자 그대로 「영광의」역사로서 제33연대를 찬가하고 있다.
그 구 33연대가 소속되어 있던 제 30여단의 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건물에 현재「자료
관」이 설치되어 있다. 남경공략전 및 남경대학살에 관한 전시(2009년 3월 현재)로서「남
경공략전에 있어서의 33연대의 자금산(紫金山)공격(중일전쟁)」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큰 패
널이 걸려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일본군의 무도함으로써 세계에 알려진 소위「남경학살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12
월 13일부터 15일 사이의 소탕전 단계에 발생한 것으로 시민사망자 1만 수천여명 혹은 수
십만 명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당시 남경시내에는 시민은 거의 없었고 점령 후에는
시내에 부대를 투입하지 않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수의 유기된 시체는 패주한 중국병의 시
체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1월 13일의 연대행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3일 33연대는 사단명령에 의해 하관(下關)방면으로 진출, 남경성으로부터 탈출하는 중
국병에 대한 소탕에 임하는 동시에 17일의 남경성 입장식에는 2대대가 대표로서 참가했
다.」
우선 자위대 관계 전쟁박물관에 있어서 남경대학살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
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단 그 언급하는 방법은 매우 소략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시민사망자」만의 대상을 한정하고 무저항의 포로나 패잔병의 학살을 도외시 하고 있
다. 그리고「남경시내에 시민은 거의 없었다.」라든지, 발견된 시체는 시민이 아니라「중국
병 이었다.」라든지, 남경대학살 부정파의 견해만을 기술하고 있고 「남경학살사건」을 존
재하지 않았던 사건인 것처럼 인상을 주는 서술을 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남경
시내에는 많은 시민이 있었다. 국제안전구(安全區)만으로 2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수용되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난민도 학살이나 강간의 대상으로 되었다. 나아
가 중국병의 유기된 시체이외에 일본군에 의한 많은 포로나 학살된 시민 시체가 있었던 것
은 군의 공식 기록「전투상보」나 많은 병사의 진중일기나 증언에 의해서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뿐만 아니라 기묘한 것은「점령 후에는 시내에 부대를 투입하지 않는 조치를 취했다.」라
고 하는 한 구절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제 16사단 제 33연대는 남경점령후의 성내
소탕작전의 중심이 되었던 부대의 하나이었다. 그 33연대는 무었을 했을까? 잘 알려진 일이
지만 해행사발행의 『남경전사자료집(南京戰史資料集)』에 수록되어 있는「보병 제 33연
대」『남경부근전투상보』의「제3호부표(附表)」(499쪽)는 12월 10일부터 14일 사이의「보
병 제 33연대 노획표」인데, 거기에는「포로로서 장교 14명, 준사관․하사관병 3802명」라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비고」란에「1, 포로는 처단함.」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3천명
이 넘는 포로의 살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제16사단장 나카지마 케사고(中島今朝吾)
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던「대체로 포로를 삼지 않는 방침인바 모조리 그들을 처단한다.」라
는 방침이 실제로 지휘 하에 있었던 부대에서 실행되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이「비고」에는「3, 적의 유기시체」로서 4일간 합계 6830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
다. 그리고 그 옆에「비고 12월 13일의 처분은 처형한 패잔병을 포함한다.」라고 주기(注
記)하고 있다. 즉「패주한 중국병의 시체」가 아니라 스스로가「처형」한 시체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처형」라는 표현은 통상 전투 중에 쓰러진 적병이 아니라 전투능력을 상실
한 무저항 병사살해를 시사하고 있다. 13일의「유기시체」의 수는 5500명에 이른다.
전투상보에 기록된 포로의 대량학살과 무저항의「패잔병」의「처형」등「소탕」의 잔악한
실태는「자료관」의 전시에서는 일체 표시되어 있지 않다. 12월 13일의 하관(下關)에서의
33연대의 행동에 대해서 정치에서는「남경성 내로부터 탈출하는 중국병을 소탕하는 임무에
임하다」라고 한마디로 처리되어 있다.
또 중국인 여성에 대한 수많은 강간 및 살해가 동연대의 하급병사들에 의해서 증언되어
있다. (마츠오카 타마키<松岡環>) 『남경전(南京戰) 폐쇠된 기억 - 구 군인 102명의 증언』
(2002년 사회평론사 및 기록영화『남경 찢겨진 기억』(감독, 다케다 토모카즈<武田倫和>,
촬영, 마츠오카 타마키 외, 2007년)). 그러나 전시에서는 일절 무시되고 있다.
히사이주둔지 자료관에는 그 외에 33연대의 레이테섬에서의 전멸, 51연대 및 151연대의
임팔작전에서의 괴멸적인 패배의 경과가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무참한 많은 죽
음에 대해서 일본군의 작전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전혀 결여한 서
술로 되어 있다.
(3) 우츠노미야(宇都宮) 주둔지「방위자료관」
남경대학살에서의 포로의 대량살해경과를 기록한 것으로서, 제 114단 보병 제 66연대의
전투상보가 잘 알려져 있다.「보병 제 66연대 1대대『전투상보』「1937년 12월 13일의」
대대명령」의 1절.
「8, 오후2시 0분. 연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다.
다음
가, 여당 명령에 의해 포로는 전부 살해할 것. 그 방법은 십 수 명을 포박하고 차례로 총
살하는 것이 어떠한지「중략」
9, 위의 명령에 입각해 무기는 제 4중대에 명령을 하여 정리 집적시켜 감시병을 붙임.
오후 3시 30분 각 중대장을 소집해 포로의 처분에 대해 의견의 교환을 한 결과 각 중대
(제1, 제3, 제4 중대)에 분배를 하여 감시실로부터 50명씩 끌어내어 제 1중대는 야영지 남
방 계곡지대, 제3중대는 야영지 서남방 움푹 들어간 지역, 제4중대는 야영지 동남계곡부근
에서 총검으로 살해하기로 함.
단, 감금실 주위는 엄중하게 경비병을 배치하고 끌어낼 시에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의할 것.
각 중대 모두 오후 5시 준비를 마치고 총검으로 살해를 개시하여 대체로 오후 7시 30분
처형을 끝내고, 연대에 보고를 함. 제 1중대는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여 단숨에 감금을 하여
태워 죽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음. 포로는 체념을 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음. 군도(군도)앞에
목을 내밀자, 총검 앞에 끌려나와 조용히 앉아 있는 자 가 있었지만 그중에는 울부짖으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자도 있었다. 특히 대장(순시 시는 그러한 소리가 일어났음)」(해행사발행
『남경전사자료집』1989년, 673에서 674쪽)
매우 구체적으로 무기를 빼앗기고 감금된 무저항의 포로를 명령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살
해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포로의 숫자에 대해서는「전투상보 제 3호 부표」(678쪽)에
「포로」로서 장교 18명, 준사관․하사관병 1639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전투상보 본문
중에는 12일에「포로 1500여명」, 13일에 「300여명」이라는 기술이 있다.)
그 66연대에 관한 전사는 육상자위대 우츠노미야 주둔지 방위자료관에 전시되어 있
다.(2009년 12월 현재). 동 사료관에 「오오야마 원수 코너」,「자위대 코너」와 함께「구
제 14사단 코너」가 있다. 그「육군 우츠노미야 제 14단의 역사」라고 제목을 붙인 연표가
게재되어 있다. 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37년 6월」의 밑에 ,「제 114단을 편성, 우송 항주만의 적전상륙을 감행하고 더욱이
남경공략에서 부대 명을 떨치고 1939년에 개선하여 해산함.」이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입구에 걸린「방위자료관 건설취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관은 1939년 이례 오랜 세월에 걸쳐 운영된 우츠노미야 주둔지 향토관의 전통
을 계승하고 자위대 및 구 군 향토부대를 비롯한 각종 구군 자료를 후대에 영원히 보관함에
의해 수많은 선배들의 무훈을 찬양하고 아울러 자위대원의 수양 연창과 도치기현민 등에 대
한 방위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1986년 4월 방위자료관 건설위원회가 건
설한 것이다」
처음부터 역사의 진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수많은 선배들의 무훈을 찬양하는」목적을
가지고 건설되었다. 무저항의 포로를 대량으로 총검으로 살해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무
훈」이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은 미리 배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향토부대의 많은 장
병이 중국전선 외에 버마, 임팔작전, 뉴기니아, 파라오, 페리류 등에서 무참하게 죽음을 당
했다. 그러한 죽음을 단순히「무훈」라고 찬양하는 것만으로 좋은 것인가. 왜 그와 같이 많
은 젊은이들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비판적인 역사의 개선은 여
기에서는 볼 수가 없다. 향토부대의 전쟁역사에 관한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함 없이 진정한
의미해서의「자위대원의 수양 연창」이나 「현민의 방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없
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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