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경무차별 폭격에 관한 전시
(1) 중경 무차별 폭격
남경함락 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 중경에
대해서 일본군은 항공기에 의한 장기간의 대규모적인 도시폭격을 감행했다. 1938년 12월부
터 1943년 8월까지 5년에 걸친 기간에 중국 측 자료(『중경항전기사』)에 따르면 218회의
폭격이 행해져, 연 9,513 (機) 투하된 폭탄 21,593발에 의해서 소실가옥 17,608동, 부상자
14,100명, 사망자 11,889명과 같은 피해를 주었다.
2)
이 중경폭격의 특징은「중경시가를 폭격하고 장정권(蔣政權) 사람들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라고 하는 1938년 12월 25일의 육군 제 1비행단장의 공격명령이 이미 나타내고 있
는바와 같이 도시에 대한 대규모적인 폭격이었던 것이다. 1939년 5월 3일, 4일의 폭격(「5․
3, 5․4 공습」)이나 1940년 6월부터 9월에 걸쳐서 해군의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오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郎)등에 의해 입안되어 실행된「101호 작전은 1937년 4월의 독․
이군에 의한 게르니카 폭격(사망자 1654명)보다도 훨씬 대규모로 독일이나 영국에 의한
「런던과 베를린에 앞서서「수도말살」전략폭격의 착수가 일본군에 의해서 행해진 사실을
나타내었다.
3) 」또, 1941년 7월부터 8월의 「102호 작전」은 보다 더 대규모로 이 작전만
으로 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었고, 또 공습이 한창인 때에 다수의 피난민이 질식 등에 의
해 사망한 「대수도 질식참안(大隧道窒息慘)案」사건이 발생했다. 돌계단에 겹겹이 쌓인 그
시체 사진은 당시 라이프지에 게재되어 널리 세계에 알려졌다. 뒷날 동경공습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공격에 이르기까지의 대규모적인 도시무차별 폭격은 일본군이 본격적
으로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2)육군폭격대 발상지 비석과 유례기
한편 이 중경 무차별 폭격은 자위대 관계 전쟁 박물관에 있어서 어떻게 전시되고있을까.
한 예를 검증하자. 항공자위대 하마마츠(浜松) 기지 내에 하마마츠기지자료관이 있다. 그 옆
에「육군폭격대 발상지」비석이 있는 것이 나타내고 있듯이 이 지역은 중경을 비롯해 중국
각지를 폭격한 많은 육군 폭격부대의「원부대(母隊)」가 되었던 곳이다. 자료관의 전시를
보기전에 이 비석들 둘러싼 문제를 살펴보자. 오른쪽 측면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다음과 같
다.
「이 비석은 이전에 육군 폭격대의 원 부대였던 비행 제 7연대의 정문 문기둥이다. 유일
한 상징적 유물로서 초석과 함께 여기로 옮겨 전몰자 및 순직자를 그리며 경건한 진정성을
바치며 육군폭격대 관계자의 마음의 고향으로서 영원한 기념비로 한다. 1974년 2월 9일 오
가와 코지로(小川小次郎) 삼가 씀.」
비석의 왼쪽에 유례기 라고 제목을 붙인 작문을 세긴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발췌하면
1925년 육군항공의 발족에서 1930년 제 7비행연대 편성완료, 다음해의 만주사변의 즈음해
서 재만(在滿)폭격대의「골간(骨幹)」으로 되었던 일, 1933년에 하마마츠 육군비행학교 개
설이라고 서슬하고, 중일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중일전쟁의 진전에 따라
때마침 대망의 97식 중경(重輕)폭격기의 양산 체제도 갖추어져 노몬한 및 대륙전선에서는
전장 폭격의 용감하게 싸우고 혹은 장구오지(長軀奧地)에 침공하여 적 전투기의 연격()을 동
력으로 배제하여 전략폭격을 감행했다. 」이후 노몬한, 싱가포르, 미얀마, 인도, 라바울, 뉴
기니, 레이테, 오키나와, 사이판, 유항도등에서의 폭격 및 특공공격의「분전」의 모습을 기
록하고 특히 레이테 섬의「타클로반도우라크 적 비행장에 대해 정진대원(挺進隊員)40명과
함께 착륙을 강행해서 돌격대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유고한 대의에 따르다, 정말로 귀신을
울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돌이켜 보면 만주사변의 이례 십 수 연간 조국의
존망을 짊어지고 북쪽으로 남쪽으로 편할 날도 없었던 폭격대 장병에 있어서 이 산방원(三
方原) 비행장은 항상 모함적(母艦的) 역할을 다하여 전력회복의 본거지였으며 우리들 폭격
관계자의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땅에 기념비가 걸립된 것을
「하늘의 도움(天佑)」라고 쓰고 「뿐만 아니라 비석 걸립의 제반에 걸쳐 항공자위대의 심
대한 협력을 받았던」것에 감사를 표하며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영령이여, 바라옵건대
세계의 평화와 일본민족의 변영을 지켜주십시오. 여기에 삼가 여러 병사의 소속 부대명을
비석 뒤에 새겨 영원히 충혼을 조문하고자 한다. 1974년 2월 9일 육군폭격대 생존자 일
동」라고 끝을 맺고 있다.
2) 前田鉄男「전략폭격의 사상」(아사히신문사, 1988년), 415쪽.
3) 동경대공습․전재(戰災)자료센터편『동경․게르니카․중경』(이와나미서점, 2009년), 20쪽.
(3) 국회질의
이「육군폭격대발상지」비석의 건립에 대해서 당시 그 지역 시즈오카의 사회당 중의원이
었던 사이토 마사오(斉藤正男) 씨가 국회에서 거론하며 철거를 요구한 일이 의사록에 남아
있다.
4) 「제 72회 국회 예산 위원회 제 1분과회 제4호 1974년 3월 8일」, 즉 건립이 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자위대 관계의 심의 중에서 나라자키 야노스케(楢崎弥之助) 의원이
「최근 매우 자위대 교육문제로 소위 복고사상이라고 할까요, 역코스라고 할까요 그러한 경
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사이토의원에게 관련 질문을 요구했다. 사이토의원
은 「국가방위의 근간에 관련되는 일은 아닙니다만, 한 지방에서 발생한 자위대로서 심상치
않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질문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 2월 9일의
제막식 초대객, 출석자, 건립주최, 보도규제, 그리고 유례기의 비문내용, 자위대 협력내용 등
을 야마나카 사다노리(山中貞則)방위청 장관 및 마루야마 방위청 장관방장에게 질문을 했
다. 특히 비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이 단계에서 이와 같은 비문을 기지 내에 건립하는 것과 같은 일은 시대착오도
보통이 아니다. 바로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아시아 침략을 당연한 것과 같이 구
가를 하며 그리고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것과 같은 비문으로 밖에 우리들에게는 여겨지지 않
습니다」그리고 비석 건립에 대한 자위대의 협력 문제를 추궁했다. 비석건립에 즈음해서 자
위대가 행한 증원조성과 관련해서 「이러한 종류의 비석에 귀중한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는
것은 저는 동의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위대가 국비를 사용해서 협력했던 점을
문제시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자료관과의 관계도 언급했다. 「게다가 비문의 내용이 그러한
내용이라고 한다면, 여기는 자료관 부근입니다. 남쪽기지는
5)홍보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소
풍, 피크닉, 단체여행 등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안내양을 고용하고 있기도 합니
다. 또 이러한 문장은 최근의 초중학생에게는 알 수가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자료관 가까이
에 이러한 것을 만드는 것은 저는 역시 자위대의 위험성 또는 군국지의 고취라고 하는 것에
큰 역할을 미래에도 남기는 비석이라는 점에서 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비석입니다. 이상해요 그러한 것을 세우는 것은.」이러한 사이토의원의 추궁에 대해서 야마
나카방위청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것은 생존한 분들이 돌아가신 전우를 생각하며
자신들의 창설이례의 제2차 대전 후에 알게 된 그러한 것을 기지 안에 세워달라고 하는 것
에 대해 구 폭격대 문기둥의 하나인 듯한데,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들로써는 문장
이 라던지 혹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주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비석은 다른 각 지역에
서 예를 들면 나라시노에서는 구 전시 중에 만들어진 석고상으로 만들어진 낙하산병상이(落
下傘兵像) 지금은 동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만 이 모두는 그러한 생존자들이 세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 자위대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이는 헌법상으로도 있을 수 없
는 것입니다 (후략)」
즉 비문의 내용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문제도 관여하지 않으며, 헌법에도 언급을 하면
서 비문의 내용과 자위대의 생각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제시했다.「오늘날 자위대는 제 2
차 세계대전에서 각각의 목적에 종사한 대원중 생존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
다만 그러한 일에 관련해서 좌우되는 자위대는 아닙니다.」라고도 답변을 했다. 그리고 철
거 요구에 대해서는 건립위원회의 의사를 수용했기 때문에「우리들이 철거해 주십시오, 나
가주십시오, 라고 같이는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사이토의
원은 마지막으로 「시민감정은 이러한 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나라자
키 의원은 「역시 지금의 문제는 조그마한 구멍에서 점점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를
했고, 「유구한 대의(大義)」등과 같은 말을 비석 가운데 새기는 것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서 국회로부터의 주위를 요구하면서 질문을 마치고 있다.
이 국회 질의에도 불구하고 현재도「육군폭격대발상지」비는 자료관 옆에 있으며 더욱이
「유구한 대의」를 포함해서 비문도 그대로 있다. 그리고 2008년 10월 23일의 제 35회 육
군 폭격대 발상지비「비전제(碑前祭)」에는 우에다 항공교육집단막료장, 히라마츠 기지사령
관을 비롯해 기지소재 부대장 등이 참석했다.
6)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있었던 이 국회 질의의 한 장면을 회상할 때에 발상지비의 비문
의 기초자 였던 하마마츠육군비행학교 교장을 역임한 오가와 코지로씨도 사이토 마사오씨도
야마나카 사다노리씨도 이미 사망했지만 새삼스럽게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유례기 비문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전몰장병기념비에 전형적인 심정 및 역사관의 표현이 보
인다. 한발의 폭탄도 일본에 투하한 적이 없는 중국에 대해서 상해, 남경에 거치치 않고 중
경이나 더 나아가 오지(奧地)와 난주(蘭州) 등에 까지 일방적으로 폭격을 하고「전략폭격을
감행했다」라는 기술 그대로 시가지 폭격을 감행하여 수많은 중국시민을 살상시킨 육군폭격
대의 행동을「조국에 존망을 짊어지고」등과 같은 말로써 정당화하고 중국을 비롯해서 아시
아 여러 국가들의 인민들에게 끼친 피해를 전혀 뒤돌아보지 않는 사고, 한편으로 아군의 전
사 만에 강한 관심을 기울이며 의심하지 않는 심정 그리고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는 「세
계 평화」라고 하는 말 등이다.
만주 사변에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끝날 때까지의 일본군의 행동에 대해서 한조각의 반
성에 대해서 볼 수 없는 이 역사관이 구군 관계자 가운데에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그것이
이와 같은 비석이나 비문을 통하여 자위대에 전해져 가는 모습의 일예를 우리는 볼 수 있
다.
또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국회의원에 대해서 생존한 사람들이 전우를 그리워하는 것이
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고 처리한 방위청장관의 자세도 전우보수당의 기본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현재와 관련된 문제로서는 이와 같은 사상과 자위대의 사고방식이 무관계하다
고 하는 답변이 과연 그러한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항공막료장
이라는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 같은 류(流)의 사상을 가지고 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역사
관을 갖도록 요구했던 일이 명백히 밝혀졌다. 나라자키의원이 말한 것과 같이 삼십 수년을
거쳐「작은 구멍이 점점 크게」되어 버린 모습을 우리들은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4) 국립국회도서관 국회의사록검색시스템
<U>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72/0384/main.html</U>5) 하마마츠기지는 1958년 8월부터 1989년 동안 남북기지가 분립하고 있었다.
6) 「츠바사(날개)회」(항공자위대OB조직) 홈페이지「하마마츠지부 뉴스(2008년 10월
26일)」,http://www.tsubasakai.com/hamamatsu201026.htm
(4) 하마마츠 기지자료관
사이토의원의 질문에 관해서 지금 새삼스럽게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질문에 있었던 자료관에 관한 것이다. 사이토의원은 기념비가 자료관 곁에 있는 것
을 문제시했지만 자료관의 전시내용 그 자체에 대해서는 웬일인지 문제시 하지 않았다. 그
런데 이 하마마츠기지자료관의 전쟁사 전시는 기본적으로 그 유례기의 비문과 동일한 사상
과 입각해 있다. 그리고 이 자료관은 자위대가 설치하고「혈세」로 유지, 관리하고 있는 것
이다. 「시설관리 책임자」로서 제1항공사령부 관리부장이라고 입구에 명기하고 있다. 그
렇다면 앞서의 국회질의 중에서 비문의 사상이 자위대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방위청장의 답
변이 통용될 수 있는지 라고 하는 문제이다.
자료관은 육군비행학교 당시의 목조 1층 건물을 이용하여 입구 정면 안에 쇼와천왕의 사
진과 관련된 자료 등을 진열하는 조그마한 방이 있으며, 오른쪽이 구 일본군에 관한 전시,
왼쪽이 군기(軍機)를 중심으로 한 항공기 역사의 전시(항공자료실)이다. (2009년 10월 현
재) 구 일본군의 전시는 세계의 방이며 순차적으로 육군폭격대의 전사(戰史), 특공대 관계의
전사 등, 그리고 전몰장명의 사진 및 유품 등의 전시실(「영광의 방」) 로 설치되어 있다.
그 제 1실 입구에 전시취지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게재되어 있다.
「육군최초의 폭격대, 비행 제7연대(1928년 비행 제 7전대로 개칭)는 1926년(대정14년 )
다치카와(立川)에서 새롭게 편성되어 다음해에 여기 하마마츠시 미카타하라로 이주하여 하
마마츠 육군비행학교, 비행 제12전대 기타, 많은 폭격대가 분리 편성 되었다. 이들 폭격대
는 중국대륙, 남방전선 등의 전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조국의 위급을 구
하려고 분투했는데 많은 장병이 순국의 기둥이 되어 1945년 8월 대동아전쟁 종결에 의해
그 역사를 마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평화와 번영은 자기의 욕망을 일체 끊고 한 목숨을
가지고 조국방위에 임한 사람들의 순고한 희생위에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후세에
계속 말 해야만 한다. 이 코너에서는 유족 및 생존자로부터 기증된 물품 등에 의해서 영령
의 유덕을 기리며 평화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비행 제 7연대 (비행 제 7전대),
하마마츠 육군비행학교 및 각 폭격대의 전적을 전시합니다」
전 문장을 굳이 인용한 것은 이 문장에 이 자료관의 전시사상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오지 등의 많은 도시에 대한 일방적인 무차별 폭격을「조국의 위급을 구하려고 분투했
했다」등과 같이 정당화 하고 있는 점, 폭격 하에서 죽어간 중국시민의 일을 한 번도 되돌
아보지 않았던 점, 오로지 죽은 일본 장병의 추도와 현창으로 시종하고 있는 점, 그리고 왜
그와 같이 많은 일본군 장병이 무참하게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를 포함해서, 일본군
의 전쟁행위에 대한 한조각의 반성도 비판적 검토도 볼 수 없는 점, 마지막으로 「평화의
숭고함」이 내실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점, 이러한 여러 점은 앞에 소계하고 사이토의원이
국회에서 문제로 삼은 육군폭격대 발생지 비의 유례기의 비문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다. 그
리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역사관은 「우리나라는 멀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
쳐 전쟁의 길로 들어가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서 많
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없게 하기위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여기에 새삼스럽게 통절한 반성의 마음을 표시하고, 가슴으로부터 사죄의 마음을 표합니다
」라고 하는 일절을 포함해 현재도 정부의 공식 견해인 소위 무라야마담화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다.「정부의 행위에 의해서 다시금 전쟁의 참화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결의하고」
라고 하는 헌법 전문의 정신에도 반한다.
구체적인 전시내용은 하마마츠기지에서 편성된, 또는 거기를「원부대」로서 편성된 주요
한 폭격부대에 대해서 전투경과의 설명과 부대원과 전투개의 사진, 유서, 부대사(部隊史)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비행 제 7연대, 하마마츠 육군비행학교, 비행 제 12전대,
비행 제 60전대, 비행 제 61전대, 비행 제 98전대 등의 전투사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전시
로서는 이 제 1실이 중심이 되어 있다. 구름 위를 비행하는 폭격기의 사진은 수많이 전시되
어 있지만 지상에서 피해를 받은 중국시민 등의 사진은 한 장도 없다. 또 거기에 대한 언급
도 없다. 즉 중경을 비롯한 무차별 도시폭격 등의 사실은 완전히 무시ㆍ은폐되어 있다.
전술한 부대 중에 비행 제 12전대, 비행 제 60전대, 비행 제 98전대는 해군과 공동으로
행한 중경폭격의 육군 측 중심 부대였다. 하마마츠와 연관이 있는 육군 폭격대의 만주사변
에서 중일전면전쟁에 있어서의 행동의 상세한 내용과 중국 측 피해의 양면을 꼼꼼하게 추적
한 하마마츠주재의 다케우치 야스히토(竹内康人)씨 등의 여러 논문에 의거하여 그 유례기비
문과 자료관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역사의 사실을 일별 하고자 한다.
7)중경폭격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1938년 12월 26일의 실질적으로 최초의 폭격에서 1938
년 8월 23일의 최후의 폭격에 이르기 까지 하마마츠에 유래하는 육군폭격대가 실행했다.
그중에서도「비행 제 60전대는 육군 비행 폭격대의 중심이 된 부대」로 「중국에서의 폭격
횟수가 가장 많은 부대」로 알려져 있다. 중경에 대한 폭격회수는 비행 제 12전대가 4회,
비행 제 60전대가 17회, 비행 제 98전대가 5회로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1회, 1940년
8월 19일과 20일, 비행 제 60전대는 해군과 공동으로 중경시가지를 폭격했다. 그 19일,
「60전대는 250kg 폭탄 90발․소이탄 53발을 투하했다. 시가지인 대량자(大梁子)․중화로(中
華路)․임삼로(林森路)․화과자(花街子)․후자가(厚慈街)․화평로(和平路)․백자항(百子港)․어시가(魚
市街) [중략] 등 70여개소와 강북의 료가대(廖家臺)가 피폭을 당하고 화재가 발생했다. 시
가지인 「신민보(新民報)」․천동사범학교(川東師範學校)․국민당 군사위원회․정치부․중앙조직부․
소련․영국․프랑스 대사관․인애의원(仁愛醫院) 등 많은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181
명, 부상자는 132명, 집을 잃어버린 사람은 2000명에 다다랐다. 이 비석의 폭격은 「8․19
대 폭격」라고 부르고 있다.」다음날인 20일에는 시가지의 번화가에 대량의 소이탄이 투하
되어 사망자는 123명, 부상자 148명에 이르렀다. 이틀간의 투하된 폭탄 수는 800여발, 사
망자 314명, 부상자 280명, 파괴 가옥 8,145채로 기록되어 있다.
8) 이 폭격은 전술한
「101호」작전시기에 해당한다. 시가지에 대량의 소이탄을 투하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일반 시민을 살해하는 작전은 훗날 동경대공습은 미군이
실행한 것과 규모는 다르지만 성질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미츠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등에서 생산된 97식 중폭격기의 대편대(최대 36기
편성)에 의해서 도시 무차별 폭격이 반복되었다.
이 무차별 폭격은 하마마츠 기지자료관의 비행 제 60전대의 전시(展示)에 있어서는 어떻
게 표현되어 있을까. 「비행 제 60전대」로 제목이 붙여진 패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37년 중일 전쟁과 함께 파견된 비행 제 7연대, 비행 제 6연대가 1938년 중국에서
비행 제 60전대로서 편성. 란주, 중경 진공 지상 작전에 협력, 1937년 남중국 항공작전에
참가했다. [중략] 1934년 뉴기니로 옮겨가 호란지아에 진출, 동방면의 항공작전에 참가. 7
월 우츠노미야에 귀환 후 9월 남경에 진출해 중경, 곤명방면의 작전에 참가 / 1945년 2월
사이판, 유황도 공격 작전에 참가 후 오키나와전에 참가하여 구마모토현 건군(建軍)에서 종
전을 맞이했다」
중경작전에 참가한 것은 기술되어 있는데, 그 실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비행 제 60전대의 용사에게 바친다」라고 하는 표제 하에 「비행 제 60전
대가(戰隊歌)」가 게재되어 있다. 말하기를 「404주(四百四州)의 하늘 종횡무진으로 비행하
고, 유쾌하게도 만리(萬里)를 정벌하는바 필승불패의 거친 독수리의 흔들리지 않는 맹세는
굳건하며 명예는 높은 우리 전대(戰隊)」라고 기술되어 있다.
무차별 폭격으로 여자와 어린이도 포함해서 많은 시민을 소이탄으로 태워 죽이고 「명예
는 높은 우리 전대」라고 하다니.
덧붙여서 말하면 하마마츠 육군비행학교에서 항공 독가스전의 연구와 실험이 행해져
1944년에는 항공 독가스전을 위한 비밀 부대로서 미카타하라교도비행단이 편승된 것에 대
해서도 실험중의 사망자나 전후의 폐기독가스에 의한 사망자의 일도 포함해서 전시에서는
일절 은폐되고 있다.
다른 부대의 전시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이다. 대미 전쟁에서 차츰 패세로 되어가는 중에
「부악대(富嶽隊)」나 의혈공정대(義烈空挺隊) 등의 중폭격기에 의한 특공부대가 편성되어
많은 대원이 장열하게 또는 무참하게 죽어갔지만, 그것에 의해 중국 대륙 등에서의 시가지
무차별 폭격에 관한 전쟁 범죄가 불문에 붙여질 수는 없다. 「영광의 전시실」라고 부르던
방에 특공 등에 의한 전사자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는데 단순히 전몰장병을 찬양하는 것만으
로 전쟁사로부터 배울 수가 있을 것인가. 왜 이 수많은 청년들이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
던 것인가, 왜 그들이 도시무차별 폭격의 가담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가. 일본군
의 작전 및 행동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전몰장병의 진정한 추도도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리고 「영령」찬미는 바로 「국책을 그르친」자들이나 도시무차별 폭격을 입
안하여 명령한 책임자들을 면죄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중경폭격의 중심이 된 해군항공대에 관해서 해군과 연관이 있는 카노야(鹿屋)항공
기지사료관 및 사세보사료관에도 중경무차별 폭격의 잔악성과 범죄성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나 반성을 나타내는 전시는 볼 수가 없다.
7) 矢田優「하마마츠 육군비행 제7연대의 설치와 15년전쟁」(시즈오카현 근대사연구, 제12호, 1986년 9월), 竹内康人「하마마츠 육군비행학교와 항공독가스전」(시즈오카현 근대사연구, 제28호, 2002년 10월), 동「전쟁의
거점․하마마츠(1)-「만주」침략과 육군비행 제12대대-」(시즈오카현 근대사연구, 제29호, 2003년 10월), 동
「전쟁의 거점․하마마츠(2)-중국침략전쟁과 하마마츠 육군항공폭격대-」(시즈오카현 근대사연구, 제30호,
2005년 10월)
8) 竹内康人「전쟁의 거점․하마마츠(2)-중국침략전쟁과 하마마츠 육군항공폭격대-」(시즈오카현 근대사연구, 제
30호, 2005년 10월), 87쪽.
(5) 유취관형 전시
이와 같은 전시는 일본전국의 자위대 관계 전쟁 박물관에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
육참고관은 1925년 이래의 긴 역사를 가진 대규모 시설로서 2008년에 개장되었는데, 전시
의 기본사상은 계속 이어져, 도오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의 「유발(遺髮)을 안치하고 러
일전쟁에 있어서의 러시아 함대의 격파를 비롯한 해군의 「영광」의 역사를 현창하고 유서
나 사진들의 진열을 통해서 특공공격 등에 의해 사망한 전몰장병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등, 전시사상은 기본적으로 유취관과 마찬가지 이다. 또 이치가야 방위청에서는 이치가야
기념관을 중심으로 견학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그것은 구 육군사관학교 본부, 훗날 전쟁 중
은 육군성 등으로 사용되고 전후 극동군사재판이 개최된 건물로, 말하자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전쟁을 수행한 중심시설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
대해서 진지한 비판도, 반성도 없는 전시와 안내를 행하고 있다. 또 요코스가(横須賀)의 기
념함 미카사(三笠), 그리고 쯔치우라(土浦)의 예과련(予科練)기념관인 웅상관(雄翔館) 등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전시의 스타일은 지금은 이미 군관계는 아니지만 전전
은 육해군의 소관으로 일본 최대의 전쟁박물관이었던 야스쿠니 신사의 유취관전시와 기본적
으로 동일한 사상에 근거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유취관형 전시이다. 야스쿠니 신사가
종교법이나 즉 민간화가 되었어도 객관적으로는 유취관의 전시사상 및 내용은 지금도 전국
의 자위대 관계 전쟁전시의 모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혹은 지휘감독하고 있는 것처럼 역할
을 한다.
자위대의 자료관 전쟁사전시는 자위대의 역사관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져도 당연하
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불가결한 전
제의 하나가 전쟁의 역사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기본적인 공통인식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
다. 정부의 공식 견해에 완전히 배치되고 일본근대의 전(全)전쟁사를 무비판적으로 긍정하
는 이와 같은 역사전시를 국비에 의해서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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