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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죄ㅇ의 전ㅈ 4 5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75.223) 2020.11.27 23:00:50
조회 230 추천 23 댓글 6





31.
ㅇㅊ는 새벽 일찍 도착해서 먼저 업무를 시작했지만 쌓일 만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음. 공판에 시간을 지체하니 그만큼 처리해야 할 다른 일거리들 역시 불어난 거였음.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보내고 겨우 한숨을 돌릴 때 쯤, ㅇㅊ에게 문자가 하나 왔음.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그 문자를 본 ㅇㅊ는 피곤함이 가시는걸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음. 나랑 또 생각이 통했네, 라고 생각하면서.


32.
살인사건 재수사부터 간밤에 벌어진 방화사건까지 겹쳐서 형사과는 정신이 없었음. 다행히 방화사건은 용의자와 원한관계로 인한 동기가 뚜렷해서 금방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음. 다만 피해자도 범인도 모두 죽어버려 남아있는 사람들만 딱하게 됐을 뿐이었음.

관련 조사인들이자 유족들이 엉엉 울면서 난리를 치고 있을 때 ㅇㅇ은 조용히 형사과를 빠져 나왔음. 어쨌든 ㅇㅇ이 담당한 사건은 방화가 아닌 살인사건이었고, 지금은 검사와 함께 현장 재수사를 나가기 전 겨우 생긴 쉬는 시간이자 점심시간이기 때문이었음. 건물을 빠져나온 ㅇㅇ은 바로 옆 청사를 향해 걸었음.


33.
오전까지 잠같지도 않은 잠을 잔 ㅍ은 출근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음. 일을 하긴 하지만 뭔가 영혼없이 일하는 느낌이었음. 다행히 오늘 해야 할 검시는 새벽과 오전중에 다 끝나서 행정 업무만 있긴 했지만 영 집중을 할 수 없었음.

ㅍ은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지만 자신이 어디에 정신 팔렸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 ㅍ은 컴퓨터로 업무를 하면서도 그 옆에 놓인 휴대폰에 자꾸만 시선이 갔음.


34.
ㅅㅅ은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를 반갑게 맞아주었음. ㅅㅅ은 ㅇㅇ과 함께 근처 한식당 맛집에 갔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둘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음. ㅅㅅ은 이제 곧 프로파일러 대학원 과정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했고, ㅇㅇ은 이전에 개고생해서 강도를 거의 혼자 다 잡았지만 수갑은 다른 선배가 채워버리는 바람에 진급을 놓쳐버린 안타까운 얘기를 했음. 둘은 그렇게 서로의 얘기에 하하 웃다가 ㅅㅅ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음.

그래서 오늘은 왜 찾아 온거야? 한창 바쁠텐데.
그게 말이죠. 하하..

ㅇㅇ은 머쓱하게 웃으며 잠시 목을 가다듬었음. 그리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음.

예전에... 선배 다쳤던 사건 있잖아요. 그때 선배가 찾았던 놈들하고 이번에 맡은 사건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근거는?
아직 없어요. 그냥 감이긴 한데, 그, 뭐라 하지. 일처리 하는 방식이 너무 비슷해요. 용의자도 떠먹여주는 것처럼 뚜렷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조작된 것 같은? 그 알잖아요...

ㅇㅇ이 웅얼거리는 것을 ㅅㅅ은 계속 웃는 채로 보고 있었음. ㅇㅇ은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더 웅얼거릴 뿐이었음.

그래서 날 찾아 온거야? 단서라도 있을 까봐?
네, 그것도 그렇고. 그냥 선배가 보고 싶기도 했고.

ㅇㅇ이 해맑게 웃는걸 ㅅㅅ은 여전히 웃으며 보고 있었음. ㅅㅅ이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ㅇㅇ은 참 열심히 일하는 후배이자 동료였음. 경찰일을 하며 만난 귀한 인연 중 하나였음. ㅇㅇ역시 예전 ㅅㅅ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밝아지기도 했고, 그래서 ㅅㅅ은 더 걱정이 되었음.

ㅇㅇ아. ㅅㅅ이 입을 열었음. 차분한 목소리에 ㅇㅇ은 ㅅㅅ에게 집중했음. ㅇㅇ아,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

넌 형사 안 어울려.

예상치 못한 말에 ㅇㅇ의 눈이 커졌음. 그 모습을 보며 ㅅㅅ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음.

너 이번 사건 나 때문에 더 신경 쓰는 거잖아. 예전부터 느꼈지만 넌 타인한테 이입을 너무 잘 해.
선배...
그래서 난 솔직히 걱정돼. 네가 다칠까봐. 또 만약에 이번 네 추측이 맞다고 해도 걱정돼. 너도 나처럼 될까봐. 혹시 누가 몰래 따라오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

ㅅㅅ의 말에 ㅇㅇ은 뭐라도 말을 하려다가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음. 그 모습을 보고 ㅅㅅ은 쓴웃음을 지었음. ㅅㅅ의 다리는 이제 거의 완치되긴 했지만 예전처럼 형사과에서 달리는 것은 힘들 것이었음. 그것도 운이 좋아서 그정도로 끝났지, 잘못했으면 다리를 평생 쓰지 못할 수도 있었음. 당시 ㅅㅅ은 정말 힘들었고 그 경험을 ㅇㅇ이 겪지 않기를 바랐음.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고 곧 주문했던 식사가 나왔음. 단체손님들이 많이 와서 준비가 늦어 미안하다는 아주머니의 변명도 있었음. ㅅㅅ과 ㅇㅇ이 아주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ㅇㅇ의 전화가 울렸음. ㅇㅊ가 이따 점심시간 끝나고 현장에 나갈 때 차로 데리로 오겠다는 내용이었음. ㅇㅇ이 씩씩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음. ㅅㅅ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음.

아, 검사님이 이따 현장까지 같이 가자고 데리러 오겠다시네요.
그래? 친하게 지내네.
네. ㅇㅊ 검사님이 잘해주세요. 유머스럽기까지 하시고.
유머스럽다고?
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재밌는 것 같아요.

ㅇㅇ의 진지한 말에 ㅅㅅ은 잠시 웃는 것을 잊어버리고 할말을 잃었음. ㅇㅇ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음.

그래도 잘 해나가고 있으니까 선배는 걱정 마세요. 수사하는 사람들 팀워크도 좋고 이번 사건은 잘 풀릴 것 같으니까.

ㅇㅇ의 씩씩한 말에 ㅅㅅ은 결국 두손을 들기로 했음. ㅅㅅ이 예전에 조사했던 자료는 업무 이메일로 보내준다는 말도 덧붙이자 ㅇㅇ의 얼굴은 더 환해졌음. 그 모습을 보며 ㅅㅅ은 그저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음.


35.
담당 검사ㅇㅊ와 담당 형사ㅇㅇ은 살인사건 현장에 도착했음. 아까 차에서 웃고 떠든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둘은 진지한 얼굴로 현장을 차근차근 조사해 나갔음. 감식반도 출동해 현장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새로 밝혀진 증거는 딱히 없었음. 그나마 인근 가게에 설치된 cctv를 쥐잡듯 뒤져서 피해자와 피고인이 탔을거라 추정되는 택시 번호를 찾았음. 정보과에 넘겼으니 내일쯤이면 그 택시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였음.

해산 명령에 모두 분주하게 짐정리를 할 때 ㅇㅇ이 ㅇㅊ에게 다가가 넉살좋게 웃으며 물었음. 형님, 오늘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드실래요? ㅇㅊ는 반갑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미안해하며 거절했음.

아, 미안. 오늘은 약속 있어서.
오오? 누구랑요?
그건 비밀이야.
헐. 웬일이래. 혹시 애인이라도 생기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그것보다 더 깊은 사이야. ㅇㅊ의 말에 ㅇㅇ은 눈을 반짝이더니 음흉하게 웃었음. 검사님 바쁜 줄 알았더니 할 건 다 하고 계셨네. 나도 본받아야 하는데, 으아아... ㅇㅇ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걸 보며 ㅇㅊ는 그냥 말없이 웃었음. 이제 ㅇㅊ에게 남은 건 야근할게 분명할 ㅇㅇ을 청에다 데려다주고 최대한 빨리 국1과수에 가는 거였음. 정말 오랜만의 칼퇴근이었음.


36.
ㅍ은 하나도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검시실로 발걸음을 향했음. 컴퓨터랑 씨름하느니 검시실에서 보고서를 검토하고 물품 정리하는게 나을 것 같았음. 검시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반대로 계단을 오르던 ㅇㅊ와 만났음. ㅍ이 못 본 사이에 왜이렇게 얼굴이 상했냐고 농담하자 ㅇㅊ는 난 너 보고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다고, 왜 이렇게 하얗게 떴냐며 되받아 쳤음. 물론 지난 밤 둘 다 잠을 못 잔 것은 사실이었음.

근데 한창 바쁘실 분이 왜 여기까지 오셨대요? ㅋㅌ수사원님 보러 오신건가.
잘 아네.
어떻게 더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인 나보다 더 자주 보러 갈 수가 있어요.
야. 너랑 나 사이가 굳이 얼굴을 봐야 하냐? 또 어제 우리 법정에서 봤잖아.
됐어. 이미 삐졌어.

ㅍ이 삐진 척하자 ㅇㅊ가 하하 웃었음. 그 모습을 보다가 ㅍ은 지나가듯 툭 하고 말을 내뱉었음.

그나저나 어제 재수사 명령 받았던 거는 어떻게 되가요?
어떻긴. 오늘 하루종일 고생해서 뭐 하나 찾긴 했는데 그거 밖에 없어.
오, 그래도 진보가 있긴 했네요.
응.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증인들도 다시 조사해보고.

증인이란 말에 ㅍ이 살짝 움찔했음. 그 모습을 ㅇㅊ가 이상하게 보다가 아, 하더니 웃었음. 너는 제외니까 걱정하지 마. 하여간 예전부터 겁은 많아가지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ㅍ은 자신도 증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둘은 조금 더 티격태격하다가 곧 인사하고 갈길을 갔음. 계단을 내려갈수록 ㅍ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점점 더 무표정으로 굳어져갔음. 안그래도 오늘 국1과수에서 특별반이 만들어지고 그 팀에 ㅍ 역시 들어가게 되었음. 오늘 나눴던 회의에서 제3의 인물은 거의 확정시 되고 있었음. ㅍ은 초조한듯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음.


37.
ㅋ.ㅌ는 컴퓨터 앞에서 일하고 있었음. 집중하며 꼼꼼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메신저로 요청이 왔음. 외부인이 찾아왔으니 나와보라는 경비의 안내였음. ㅋ.ㅌ가 있는 곳은 국과1수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외부인의 출입을 절대로 금지하는 곳이었음. 물론 사용하는 장비들 역시 가장 비싼 것도 당연했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몰랐던 ㅋ.ㅌ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 흰 가운을 벗었음. 주변 동료들에게 미리 말했던대로 먼저 퇴근하겠다고 말한 후 ㅋ.ㅌ는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밖으로 나갔음.

긴 복도를 따라 걷고 걸어 로비로 나가자 긴 코트를 입은 익숙한 사람이 보였음. 그 사람 역시 ㅋ.ㅌ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음. 뭐 먹으러 가고 싶어요? ㅇㅊ는 신난듯이 물었지만 ㅋ.ㅌ는 그런 ㅇㅊ의 묘하게 지친 얼굴을 보며 답했음. 검사님은 밥이 아니라 잠을 좀 자야 할 것 같은데요.


38.
ㅇㅊ와 ㅋ.ㅌ는 같이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갔음. 음식을 앞에 두고도 둘은 얘기를 나누느라 먹는 걸 잊은 듯했음. 서로 근황얘기를 하다가 ㅇㅊ는 이번 사건을 재수사하게 되었다고 말했음. ㅋ.ㅌ도 알고 있다고, 검찰측의 요청으로 전담팀이 꾸려졌다고 얘기했음.

혹시 수사하면서 더 찾은 것 있어요?
오늘 cctv에서 피해자랑 피고인이 탄 걸로 추정되는 택시를 찾았어요. 아까 그 택시 기사님 찾았고 내일 청에 나오라고 요청했다고 형사님한테서 보고가 왔고요.
수사 결과를 그렇게 자세히 말해도 돼요? 수사 비밀 지켜야 하잖아요.
에이, 우리끼린데 뭐.
그래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죠.

ㅋ.ㅌ가 진지하게 혼냈지만 ㅇㅊ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기만 했음. 그 모습을 보던 ㅋ.ㅌ는 고개를 젓고 말았음. ㅇㅊ는 유난히 ㅋ.ㅌ 앞에서 허물어지는 사람이었음.

그 전담팀에서는 얼마나 진전 됐어요?
내일 보고서로 받아 보시겠지만... 제3자의 개입이 확실한 걸로 보여요. 그 정체모를 흉기가 피해자를 즉사시킨 것도 거의 확실하고요. 정말 교묘하게 가렸더라고요.
그런데 현장에 그렇게 흔적을 안 남겼다고요? 사건 정말 복잡해지겠네...

ㅇㅊ가 진심으로 앓는 소리를 하자 ㅋ.ㅌ가 웃으며 바라봤음. 아무리 다들 고개부터 숙이고 보는 검사라지만 ㅇㅊ는 알고보면 참 애같은 사람이었음. ㅋ.ㅌ가 증거만 더 가져오라며 뭐든 다 찾아주겠다고 차분하면서도 힘있게 말하자 그제야 ㅇㅊ는 웃었음. ㅋ.ㅌ 역시 ㅇㅊ의 힘든 소리에 유난히 약하다는건 ㅇㅊ 혼자 아는 사실이었음.

ㅇㅊ는 아까 ㅇㅇ에게 찐한 관계라도 생겼냐며 농담을 듣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거창한 관계는 아니었음. 둘은 만나면 그저 서로 대화를 나눴고 상대를 이해해주며 웃을 뿐이었음. 하지만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살면서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ㅇㅊ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 ㅇㅊ는 절대로 이 순간을 포기할 수 없었음.

ㅋ.ㅌ는 이제 화제를 돌려 최근에 관심을 가졌던 취미에 대해 말하고 있었음. ㅇㅊ는 빙그레 웃으며 ㅋ.ㅌ가 하는 말에 좀 더 집중했음.


39.
어느덧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ㅍ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증거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검토했음. 이젠 범인을 찾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ㅍ 스스로도 알 수 없었음.

시간은 더 흐르고 밤이 되었음. 새벽 근무를 하고 잠도 제대로 못잔 주제에 연이어 야근까지 하는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ㅍ은 스스로 한심하다고 여겼음.

슬슬 퇴근하기로 마음먹고 가운을 벗었을 때. ㅍ의 휴대폰이 짧게 한 번 진동했음. ㅍ은 휴대폰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화면을 켰음. 상태창엔 문자가 하나 와 있었음.

모르는 번호로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적혀져 있었지만 누가 보낸건지 알 수 있었음. ㅍ은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난 후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음.


40.
청으로 돌아가서 야근을 하다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ㅇㅇ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음. ㅇㅇ은 구석에 위치한 좌석에 앉아 지친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았음.

시간은 금방 흘러 벌써 ㅇㅇ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음. 버스에서 내린 ㅇㅇ은 찬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걸었음.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조명은 점점 어두워지고 ㅇㅇ의 터벅거리는 발소리만이 들릴 뿐이었음.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 ㅇㅇ은 자신의 보금자리인 낡은 빌라에 도착했음.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마침내 도착한 ㅇㅇ은 제 집 현관문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음.

어제 만났던 그 아이였음. 그는 ㅇㅇ이 손수 매줬던 목도리를 후드 위에 두른 채 큰 눈을 껌벅이며 ㅇㅇ을 보고 있었음. 둘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서로를 바라만 보았음.

그렇게 둘 사이에 잠시 대화가 없다가, ㅇㅇ은 아무렇지 않은 듯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었음. 그리고 문을 열고 그에게 말했음. 많이 기다렸지? 빨리 들어가자.







41.
함께 저녁을 먹고 카페까지 가고 나니 벌써 시간은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음. ㅇㅊ는 ㅋ.ㅌ를 집까지 데려다 준 후 밤길운전을 하는 중이었음. 평소같은 날이면 ㅋ.ㅌ네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떼를 썼겠지만 요즘처럼 바쁠 때에는 ㅋ.ㅌ의 온전한 휴식을 존중해주는 ㅇㅊ었음. 그래도 뭔가 아쉽긴 했지만 나중에 한가해지면 ㅋ.ㅌ네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억지 부릴 생각을 하니 벌써 웃음이 나왔음. ㅋ.ㅌ는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순순히 받아줄 것이 뻔했음.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오늘 ㅋ.ㅌ를 만난 것은 잘한 선택이었음. 거의 잠을 못잤고 오늘도 몇 시간 못 잘 터였지만 ㅇㅊ의 피로는 벌써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음.


42.
ㅍ은 밤도시의 화려한 조명 속에 서 있었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사람들이 근처에 늘비했음. ㅍ은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어색했지만, ㅍ의 전혀 0무원처럼 보이지 않는 긴 머리카락과 까리한 분위기는 이 도심과 충분히 어울려 보였음. 지나가던 여자들이 ㅍ에게 은근히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음. ㅍ은 그 시선들을 피하면서 그가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건지 알 수 없었음.

그러던 중 ㅍ의 눈에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음. 그의 지난 날 법정에서 만난 모습과 사뭇 다른 옷차림은 또 색달라 보였음. ㅍ은 다시 제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음.

ㅍ씨, 이 시간에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ㅍ은 남자의 첫 마디에 자신의 이름이 나와서 놀랐지만 이내 자신이 직접 그에게 명함을 줬던 사실을 상기했음. ㅍ이 어색하게 괜찮다고 답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남자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리드했음. ㅍ은 그와 함께 도시의 좀 더 깊은 곳으로 따라 들어 갔음.


43.
ㅇㅇ은 별말하지 않고 ㄱㄴ를 집안으로 들인 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음. 홀로 남겨진 ㄱㄴ는 어색하게 거실에 서 있다가 천천히 집 안을 구경했음.

지난번에 정신없이 잠을 잤던 거실은 전반적으로 깔끔하다못해 휑했지만 자세히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음. 우선 거실에는 ㅇㅇ이 오면서 외투를 벗어놓은 행거와 낡은 서랍장들이 있었음. 구석에는 박스들이 조금 쌓여 있었고 서류뭉치들이 있었음. 걸음을 옮겨 거실과 이어진 작은 부엌에 가보니 오래되어 보이는 주방기기들과 좋게 봐줘야 2인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식탁이 있었음.

이제 ㄱㄴ는 가장 궁금했던, 이 집의 하나밖에 없는 방 앞으로 다가갔음. 지난번 ㅇㅇ 혼자서 들어가버린 공간이었음.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자 낡은 경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음. 손을 더듬어 불을 켜니 어둠에 가려졌던 작은 방의 형체가 나타났음. 방의 크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마 ㅇㅇ의 키 때문에 큰 사이즈로 고른 것 같은 제법 큰 침대와 뭔가 법전같은게 가득 꽂혀있는 책장이 있었음. 노트북 한 대와 각종 서류들이 가득 올려진 책상도 있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벽 한면에는 각종 포스트잇과 메모들로 가득 덮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음. 벽전체가 마치 커다란 화이트 보드 같았는데, 메모들이 묘하게 질서을 이뤄서 마치 거대한 생각 프로세스를 보는 것 같기도 했음. 벽면을 빠르게 살펴보고 낯익은 회사명과 이름들로 중점을 캐치한 ㄱㄴ는 ㅇㅇ이 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파악했음. 그들이 ㅇㅇ은 제거하려 한 이유를 알았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ㅇㅇ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접근해 있었음. ㄱ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음.

계속 벽을 살펴보던 ㄱㄴ 뒤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 어? 너 방에 들어갔어? 거기 더러운데. ㅇㅇ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태연하게 걸어 방 안으로 들어왔음. ㄱㄴ가 ㅇㅇ을 쳐다보자 ㅇㅇ이 웃으며 말했음. 너 몰랐냐? 나 형사야, 짜샤. 탐정같지? 집에 있는 거 다 써도 되는데 여기는 건들면 안돼. 알았지? 알았다고 빨리 대답해. ㅇㅇ의 말에 ㄱㄴ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음.

ㅇㅇ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며 거실에 있는 서랍장에서 옷을 꺼내 ㄱㄴ한테 줬음. ㄱㄴ는 뭐지 싶어 ㅇㅇ을 쳐다봤지만 ㅇㅇ은 손으로 화장실을 가리켰음. 칫솔 아직 안 버렸으니까 양치 잊지 말라는 잔소리도 빼먹지 않았음. ㄱㄴ는 그런 ㅇㅇ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얌전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음. 하여간 저 집주인은 자기 전에 씻는 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같았음.


44.
ㅍ이 남자와 도착한 곳은 어느 지하에 위치한 술집이었음. 어둡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곳은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드는 청년들보다는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어른들이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곳 같았음.

두 남자는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음. 가볍게 맥주랑 안주를 주문하는데 ㅍ은 오늘 하루종일 변변한 음식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달았음. 사실 이 순간도 꿈을 꾸는 것 같았음. 꿈속에서 계속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 광경은 아직도 비현실적이었음.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정말 미안해요. 오늘 일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려서.
저도 전화받았을 때 퇴근하려는 참이었어요. 괜찮아요.
늦게까지 일하시네요. 정말 많이 바쁜가봐요.

ㅍ은 대답대신 어색하게 웃었음. 사실 요즘 특히 바쁜 이유는 그 남자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음. ㅍ은 대답대신 남자에게 이름을 물었음. 남자는 아직 말 하지 않았냐며 웃다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음. 그에 대해 한가지 더 알게 된 ㅍ은 속으로 만족하는 자신에 놀랐음.

주문한 맥주가 나왔음. 빈 속에 맥주를 마시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ㅍ은 내색하지 않았음. 함께 맥주를 홀짝이던 ㅁ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음. 자신은 사실 피해자와 먼 친척인데 최근에 연락을 했다가 그것 때문에 증인으로 조사받게 되었다고 말했음. 그때 법정은 당시 피해자의 사망 전 행적에 대해 증언하려고 출석했다는 말도 했음. ㅍ은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수사기관이 알아낸 정보들과 비교해가며 머릿속으로 입력해 나갔음. ㅁ은 당시 피해자와 있었던 시시한 일을 계속 얘기했고, 그 말을 계속 듣던 ㅍ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음.

그럼 그 이후 ㅁ씨는 무얼 하셨나요?
...그냥 집에 돌아가 있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알리바이가 없구나. ㅍ은 속으로 탄식했음. 그런 ㅍ의 마음도 모르고 ㅁ은 고개를 숙이고 맥주를 홀짝였음.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ㅍ은 숨을 한 번 쉰 다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음.

...그때 법정에서 내린 재조사 명령으로 처음부터 다시 수사할 것 같아요. 현장에는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 거의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요. 아마 증인들도 새로 조사할 거예요.

ㅍ의 말에 ㅁ은 고개를 들어 쳐다봤음. ㅍ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말했음.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셨죠. 저한테 무엇을 부탁하려고 하신 거예요?

대화는 어느새 본론으로 들어가 있었음. ㅁ은 입을 열지 않고 계속 ㅍ을 보았음. 두 남자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잠시동안 바라보았음.


45.
ㄱㄴ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중이었음. 이렇게 집중해서 몸을 씻고 있자니 자신의 몸에 상처와 흉터가 많았다는 사실도 알았음. 이 수많은 상처들이 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음.

ㄱㄴ는 이제 아까 둘러봤던 집을 생각했음. 집 구석 어디에도 ㅇㅇ의 가족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음. 휴식을 위한 물건이라고는 그나마 침대가 유일했음. 그저 일만을 위해 사는 사람의 집 같았음. 도저히 ㅇㅇ의 이미지와 매치되지 않았음.

그런 사람이 왜 나를 집에 들였지?
자길 해치려고 했던 사람한테 어째서 저렇게 밝게 웃어줄 수 있는 거지?

ㄱㄴ는 순수한 의문이 들었음.


46.
두 남자 사이엔 여전히 말이 없었음. ㅍ은 빈 속에 맥주를 마셔서인지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음. 심장은 남자를 만났을 때부터 쿵쿵거렸지만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음.

...이것부터 말해주세요. ㅍ씨는 왜 절 순순히 도와주겠다고 한 거예요?

ㅁ은 대답 대신 또다른 질문을 했음. ㅁ의 은은하게 짓고 있던 미소는 어느순간부터 사라져 있었음. ㅍ 역시 어색했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답했음.

그냥... 도와주고 싶었으니까요.

그 말에 ㅁ은 살짝 움찔했음.

제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선뜻 말해도 되는 거예요?
뭘 하는 사람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아서 하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저한테 말 건 거 아니었어요?

ㅁ의 말에 ㅍ은 차분하게 답하려 노력하며 말했음. ㅁ은 ㅍ의 대답에 굳은 얼굴로 쳐다봤음. 멀쩡한 척 말하긴 했지만 ㅍ은 계속 쿵쿵거리는 심장에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음.

다시 두 남자 사이엔 말이 사라졌음. 시간이 흐를수록 ㅍ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음. ㅁ은 ㅍ의 표정을 계속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음.

...저는 사실 일종의 무역일을 해요. 이번에 사망하신 분은 저희 회사의 주 거래 고객이었고요.

ㅁ은 갑자기 딴 소리를 했음. ㅍ은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도 ㅁ의 말에 집중했음.

저희가 취급하는 물건은 최근에 만들어진 고가상품이어서 아무나 접근할 수 없어요. 그만큼 효과는 굉장하죠. 또 현재 한국에 있는 기술로는 그걸 섭취한 흔적을 찾을 방법도 없어요. 그래서 대기업이나 고위직 사람들이 많이 찾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금 ㅍ씨가 제정신일때 해두는 소리예요. 나중엔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ㅍ은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온몸에 확 퍼지는 느낌을 받았음. ㅍ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동공이 커졌음. 열기가 순식간에 ㅍ의 이성을 지배하는 것 같았음. 그런 ㅍ의 모습을 보며 ㅁ은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음.

원래 ㅍ씨를 새 고객으로 만드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앞으로 절 찾고 싶으면 이곳으로 와서 바텐더에게 얘기하세요. ㅍ씨와는 거래일보다는 사적으로 만나게 될 것 같으니까요... 물론 그 약에 ㅍ씨가 중독되지 않을 거라는 가정하에요. 미안해요. 미리 바텐더에게 말해둬서 ㅍ씨의 술에 약을 조금 탔어요.

말을 마친 ㅁ은 자리에서 일어났음. ㅍ이 겨우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ㅁ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음. ㅍ은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무력하게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음. 아마 저게 그의 원래의 표정이겠지. ㅍ은 점점 사라져가는 의식속에서 생각했음.


48.
집으로 돌아온 ㅇㅊ는 자기 전에 메신저로 날아온 수사 문서에 다시 심각해졌음. 내일 일정은 피고인을 새로 조사하는 거였음. 아마 피고인은 변호인을 데리고 피의자 신문에 응할 것이 뻔했음. ㅇㅊ는 또다시 흔들리려는 마음에 스스로 채찍질했음.

그냥 평소와 다름 없는 일일 뿐이야. 또 어차피 다 지난 일이야.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애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야.

ㅇㅊ는 애써 과거를 외면하려고 했음. 힘든 시기에 기적처럼 ㅋ.ㅌ를 만나 겨우 되찾은 행복한 일상이었음. ㅇㅊ는 침대 옆에 켜 두었던 스탠드 불을 껐음. 또 불면증이 도지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지만, 오늘 ㅋ.ㅌ와 나눴던 얘기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안정되었음. 오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되짚어보다가 ㅇㅊ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음.


49.
ㅁ은 새로 불러낸 타겟에게서 의외의 정보를 들어 속으로는 동요하고 있었음. 일처리는 완벽했을텐데 어떻게 수사로 알아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음. 어쩌면 ㅍ이 자신을 흔들어보려고 거짓정보로 유도한 것일 수도 있었음. 하지만 정말로 수사가 생각보다 꽤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들었음.

어쨌든 ㅍ은 고객으로는 부적합했음. ㅁ은 ㅍ을 예의주시하기로 판단했음. 아까운 약만 날렸다고 생각하면서 ㅁ은 바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음

그리고 그 순간 ㅁ의 손은 강한 힘으로 붙잡혔음.

뒤돌아보니 ㅍ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음. 입술은 약으로 인한 쾌락에 벌벌 떨면서도 두 눈은 날카롭게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음. 그 검은 눈동자는 약기운에 살짝 풀려있음에도 어딘가 애달파보였고,

너무나 명백하고 강렬하게 욕망이 서려있었음.

그간 수많은 경험으로 ㅁ은 사람이 약에 취해 무의식 상태에 빠지면 그 사람의 본연의 모습이 나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 누군가는 주변의 물건을 부수며 화를 냈고, 또 어떤 이는 슬프게 꺼이꺼이 울곤 했음. 어쨌든 이건 ㅍ의 수많은 가면을 벗겨낸 진짜 모습이었음. 그 날것의 모습에서 ㅁ은 ㅍ이 진정 원하는 것을 눈치챘음.

...그래서 날 도와주겠다고 한 거였구나. ㅁ은 잠시 고민하다가 희미하게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음. 아무래도 ㅍ을 데리고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았음.


50.
ㅍ은 처음 느껴보는 경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음. 마치 우주에 간 것처럼 중력 없이 온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만져지는 온기 역시 느낄 수 있었음. 마치 태아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어간 느낌이었음. 지금껏 살면서 느낀 감각 중 가장 편안하면서도 벅차는 쾌락이 자꾸만 ㅍ을 괴롭혔음.

그러면서도 문득 어지럽고 토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곤 했음. 발작하려는 것처럼 괴로워할 땐 또 따뜻한 무언가가 ㅍ을 안아주었음. 그러면 다시 마법처럼 평온해지는 순간이 찾아왔음. 또다시 몸은 두둥실 떠오르고, 편안함을 느끼고, 다시 쾌락이 찾아오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사이클의 반복이었음.

점점 더 덮쳐오는 쾌락은 이제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들었음.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였음. ㅍ은 반사적으로 공중에 손을 뻗었음. 누구를 향한 손짓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곧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ㅍ의 손을 잡아주었음. 동시에 흐릿하게 한 사람의 형체가 시야에 보였음. 꿈속에서 끊임없이 ㅍ을 괴롭히던,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토록 갈망하던 얼굴이었음.

가지고 싶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ㅍ은 또렷하게 생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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