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검색하면 검은사막 인물열전 - S 검은사막 편 있으니 먼저 보고 오는 걸 추천. 검은사막 세계관에 대해 대충 안다면 안 봐도 무방함!)

시작하기 전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검은사막의 세계관 자체는 썩 괜찮다고 본다. 아직 공개되야 할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직까진 세계관에서 치명적인 오류나 어색함을 볼 수 없었고, 스토리보드도 나름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인기몰이를 위해 각종 타 콘텐츠와 제휴 아닌 제휴를 해가며 이벤트로 스토리 갈아엎는 여타 mmorpg들과 비교해봐도 꽤 준수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접 홈페이지 찾아가며 세계관에 관한 글을 읽어본 유저가 아니고서야 그 내용을 접할 일이 없는 구조이다 보니 게임 내에서 살짝 건드려주는 스토리만 접하게 되고 몰입도와 개연성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대부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눈치챘는가? 칼페온스토리 진행까지는 집중도 안 되는 이상한 성우들 데려다 꾸역꾸역 만들기라도 했던 컷씬이 메디아와 발렌시아로 넘어가면서 거의 종적을 감췄다. 스토리를 짜놓긴 했으나 그를 게임 내에서 풀어낼 능력이 부족했고, 하도 욕을 먹어서 이젠 그냥 포기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하긴 김치rpg하면서 스토리에 집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기업 입장에선 스토리 없어도 인기만 끌면 되니 컷씬 만들고 스토리 다듬을 시간에 다른 콘텐츠 개발이라도 시켰나보다. 솔직히 너희들도 메인퀘 깰 때 R연타하잖아!

 지금까지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업데이트를 거쳐오면서 세계관에 '변동'이라 부를만한 수정은 캐릭터 각성 업데이트가 전부이다.

메디아나 발렌시아, 앞으로 나올 신규 지역에 관한 스토리는 이미 테스트 시절부터 틀이 잡혀있었고,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들의 개연성을 보면 후에 나올 스토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본다. (물론 최근의 스토리를 보면 아예 개발진이 바뀌어서 개연성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이미 스토리는 완성되어 있길 기대해보자)

 대중들에게 친근하면서 검은사막과 비슷한 형식의 캐릭터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게임으로는 던전앤파x터를 들 수 있는데, 게임 시작과 동시에 캐릭터별로 직업과 스토리가 정해져있는 게임이다. 검은사막도 이처럼 성별고정이라는 그리 호평을 받지 못 할 직업선택 방식을 고수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해나가게 되는데, 이 자체로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던전앤파x터가 그러했듯 각 캐릭터별로 고정된 스토리를 설정하고 게임 시작에 배경 스토리를 만화나 컷씬, 퀘스트 형식으로 설명해주면서 해결했으면 되는 것이다. 검은사막도 이 원칙을 잘 지켜가면서 각성 스토리를 새로 만들어나가는 듯 했다.

 워리어는 단델리온 기사단에게 배신당한 '고옌 용병단'의 한 일원으로 고옌의 혼이 담긴 '고옌의 대검'을 찾으며 각성한다. 

소서러는 타리프 마을의 스토리와 연계해 카르티안이 남긴 '사신낫'을 찾으며 각성한다.

자이언트는 게아쿠와 탄투, 거인족의 스토리와 연계해 고대 드워프들이 남겨준 '철장갑포'를 받으며 각성한다.

레인저는 카마실브의 후손으로 힘을 봉인한 '정령검'을 얻으며 각성한다.

발키리는 칼페온 신성 대학 발키리 부대의 한 일원으로 엔슬라의 정신을 계승하며 각성한다.

금수랑은 동방의 한 섬에서 태어난 아기로 설정되었고 새끼흑랑과 함께 서방으로 피난을 왔다는 스토리가 생겨났다.

무사는 서련방의 무신이자 초대 무신 해암의 아들로 간신들을 피해 서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매화는 최연소 화선곡주를 지낸 자로 화월의 비급을 연마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문제점을 알겠는가? 

 워리어부터 발키리까지의 스토리는 어떠한 단체나 조직의 '일원'이 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금수랑과 무사,매화는 과거에 존재했던 어떠한 '특정 인물'을 캐릭터로 삼고, 잊었던 힘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에 작성한 검은사막 세계관 게시글을 봤고, 평소 게임 내에서 흑정령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면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사막 내에 존재하는 모험가들은 의지의 탑 사건 이후 갑자기 기억을 잃고 올비아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 때 자신의 몸에 흑정령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되는데,

세계관 내에서 흑정령이 깃드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당장 플로린 마을 옆 카프라스 동굴만 가도 흑정령이 깃든 모험가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공식 홈페이지 세계관의 가장 마지막 구절은 '벨리아에 이방인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이 들렸다.'이다.

게임 내에서 설명해주는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우리들, 유저들은 세계관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유저로 대체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메인 스토리 퀘스트와 게임 플레이의 연계가 굉장히 떨어지는 것도 한 몫을 했고, 올비아 튜토리얼 퀘스트에서마저 요즘들어 이방인들이 자주 정신을 잃고 목격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캐릭터들은 모두 특정성이 없는, 그저 어떠한 기술을 잘 다뤘었던 일반인 중 하나인 것이다. 

 그 일반인 중 두각을 드러내고 그 힘으로 에단과 오로엔, 야즈와 함께 세계를 우연히 돕게 된 것이 검은사막 메인퀘스트의 기본 골자로 여겨졌는데, 금수랑 각성을 시작으로 그것이 완전히 깨져버린 것이다. 

 사실 성별,직업고정형 게임에서 이와 같은 비판은 꾸준히 나온다. 그런데 던전앤파x터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냐고? 아예 게임 시작부터 '이 게임의 주인공은 너다.'라는 것을 유저들의 머릿속에 박아버리면서 이런 비판을 종식시켰다. 스토리 설명을 위해 만화와 컷씬을 새로 만들고 초반 퀘스트의 내용도 갈아엎었다. 이후에 진행되는 퀘스트들도 거의 홀로 진행되게 했고, 초반 퀘스트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짧으며, 퀘스트가 캐릭터의 성장 자체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완료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검은사막은 메인퀘스트 npc들의 대사부터 이미 유저의 주인공적인 설정을 배제한 채 작성되어버렸고, 퀘스트 사이사이의 간격도 굉장히 넓어 스토리의 흐름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든데다, 쉽디 쉬운 흑정령 필수 퀘스트 몇 가지만 깨면 중간 퀘스트를 생략한 고레벨 캐릭터도 만들 수 있게 되어있다.

 물론 이런 성별직업고정형 게임이 가진 근본적 문제, '나랑 똑같은 주인공들이 도처에 돌아다닌다' 라는 세계관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게임은 유저에게 '그래도 네가 진짜 주인공이다. 너만의 이야기를 진행하면 된다.'라는 것을 꾸준히 어필했고, 다른 한 게임은 npc들의 대사부터 내가 주인공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들어두었다.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갈지는 스토리보드의 역량에 달려있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스토리는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개발진이 많이 빠졌다고 들었는데, 각성이 원래 계획에 없다가 유저들의 성화에 급히 만들어낸 탓인지 이런 점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았나보다. 

 슬프지만, 어떻게 보면 이게 오직 개발진만의 책임이 아니라 유저들의 관심이 부족한 탓도 있다. 당장 각성GM노트 댓글만 보더라도 스토리에 관한 댓글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밸런스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유독 우리나라 게이머들의 정서가 스토리에 무관심하다보니 개발진도 스토리의 완성도보다 눈앞의 흥행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이런 문제들을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야 사람마다 다른 것이니 유저가 스토리에 무관심하다는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스토리를 즐기는 유저의 입장에서, 일주일만 더 고민하고 작성하면 밀도 있고 무게감 있는 스토리의 재미를 다른 유저들도 게임의 재미와 함께 느낄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게임을 즐김에 있어 강화나 전투 뿐만 아니라 무대 뒷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즐기는 기쁨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