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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49 - 大東亞共榮

운영자 2019.06.10 18:15:17
조회 68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49


大東亞共榮 


여름방학을 맞아서 김연수는 시모노세키에서 유학생 김준연과 함께 관부(關釜)연락선에 올랐다. 유학생 강연단의 조선유학생들이 사정에 따라 각자 배를 타고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쿄제국대학에 다니던 김준연은 한 살 어린 영암 출신의 수재였다. 그는 많은 책을 읽고 깊은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와 김연수는 선표(船票)를 사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달랐다. 김연수는 2등표를 사자고 하고 김준연은 3등표를 사자고 했다. 김연수가 2등표를 사자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경찰의 취급이 달랐다. 3등선실을 타면 트렁크를 열어야 하고 몸수색을 당해야 하고 귀찮은 질문들을 받아야 했다. 그럴 때는 굴욕감이 들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 신분만 밝히면 됐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창고 같은 방에 짐짝같이 실려 가기 싫었다. 김준연은 이왕 관부연락선을 탈 바엔 그 악명이 높은 3등선실에 타야만 민중과 함께 연락선을 탄 체험을 할 수 있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3등선실을 구경하겠다는 건 센티멘털리즘이지.”

김연수가 의견을 제시했다. 

“2등선실을 타려는 건 설익은 귀족취미는 아니고? 열차에서고 배에서고 2등선실을 타는 사람들처럼 아니꼬운 족속은 없어. 꼭 그렇다면 1등선실을 타야 하지 않아?”

“1등선실은 일본의 귀족신분을 가진 사람이나 고위고관이 아니면 탈 수 없어. 우리는 그런 집안은 아니야. 나는 말이야, 엽전 한 닢을 밤길에서 잃고 호랑이가 나온다는 산 속에서 밤을 새운 할아버지의 손자다. 알았지? 그런 구두쇠집안의 돈으로 당당하게 2등표를 사는 거다. 엽전 한 닢이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돈 일전의 10분의 1의 가치밖에 없는 거야.”

결국 의식의 차이였다. 현실과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김연수의 생각과 개결(介潔)한 자존심의 김준연의 인생관이 다른 것이다. 시모노세키의 부두에는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옅게 별이 깔린 여름밤 하늘 밑을 뱃머리에 가득 전등불을 켠 7500톤의 ‘코안마루’호는 밤 10시20분 정각 기적을 높이 울리면서 시모노세키의 부두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배가 출항 직후에는 갑판에 있는 게 금지됐다. 김연수와 김준연은 2등선실로 들어갔다. 2등선실이라고 해서 별반 시설이 잘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3등선실은 선저(船底)에 널찍하게 다다미를 깔아놓았을 뿐 칸막이가 없는데, 2등선실은 방 하나에 7~8명씩 수용할 수 있도록 칸막이를 해놓았다. 갑판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3등선실은 너무나 혼잡해서 손님들이 포개서 앉아야 할 정도인 데 비해 2등선실은 약간 여유가 있었다.

한가운데서 몇 사람이 출발부터 술자리를 벌여놓고 있었다. 

“어이, 거기 있는 학생들!”

갑자기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 서로 쳐다보았다. 

“거 학생들 이리 좀 오라구. 배를 탔으면 여행길에 함께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털투성이의 굵은 팔다리를 드러낸 일본인 남자가 소리쳤다. 벌써 취기가 돈 목소리였다.

“이리 오시래도….”

남자는 다시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엉거주춤 그 남자의 옆에 가서 앉았다. 나이가 사십은 넘어 보이는 그 남자는 배에서 빌린 유리잔을 김연수에게 주며 맥주를 가득 따랐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기린맥주였다.

“나가타라고 하오. 아시아를 여기저기 다니며 사업을 하죠.”

일본인은 옆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 소개했다. 

“이분은 조선인으로 박 선생이란 분입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수재인데 곧 군수(郡守)로 가신답니다. 그리고 이분은 만주철도회사 조사부의 혁혁한 간부라고 하시구요.”

박 선생이라는 조선인은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학생들, 만철(滿鐵) 조사부가 뭔지 알아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일본인이 물었다. 두 사람의 대답도 듣기 전에 그가 말을 계속했다. 

“만철 조사부란 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관이죠. 그쯤 알면 돼요. 그 이상은 필요 없죠. 그런 점으로 미루어 이분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때 옆 구석에서 그들을 보는 열댓 살의 일본인 소년이 있었다. 털보가 그 소년을 보고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가니?”

“만몽(滿蒙)개척단이 되어 만주로 갑니다. 만주의 벌판을 개척해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단체입니다.”

“훌륭하구나. 네가 그곳을 개척해서 대일본제국을 만드는 거야.”

박 선생이라는 조선인이 김연수와 김준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학생들은 어느 대학에 다니시나?”

“교토제국대학입니다.”

김연수가 먼저 대답했다.

“과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박의 얼굴은 순간 무슨 뚱딴지같은 경제학을 공부하느냐고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옆에서 일본인 털보가 끼어들었다.

“대학을 다니기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대학물을 먹었다는 놈들이 우리 일본제국의 상층부를 차지하면서 아시아 경영에 지장을 초래하거든.”

그는 조선인들이 대학에 다니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은 어느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박이 점잖게 일본인에게 되쏘았다. 

“나요? 들어갔다가 나온 대학은 많지. 내가 열서너 살 때 일이지. 과자집의 심부름꾼을 했거든.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고 앞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오는 수도 있고 뒷문으로 들어가서 앞문으로 나오는 수도 있고.”

일본인은 속이 뒤틀린 표정이었다. 

“대일본제국은 너무 관대하죠. 조선인에게 최고의 교육혜택을 주고 있으니까. 나 같은 놈은 본토인이라도 돈이 없고 공부를 못했어요. 그게 자본주의가 된 일본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학교를 나오거든 대륙에서 웅비(雄飛)하세요. 거기에 이상(理想)이 있고 꿈이 있고 우리의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단련장이 있고 남아 일대의 포부를 보람 있게 할 무대가 있는 겁니다. 법률공부를 하고 좁은 내지인 일본이나 조선에서 관료가 되겠다는 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작은 시야일 수 있습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는 박을 의식하고 하는 말 같았다. 그 말에 박이 반박하고 나섰다.

“국가는 법치국가고 사회도 법치사회인데 법률을 부정하고 문화사회가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듣고 있던 김연수가 박이라는 남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조선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 선생의 법률관으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선독립을 위해서 운동하고 있는 자들은 거개가 상식결핍증에 걸린 사람이거나 정신착란에 가까운 사람들이오. 특히 상해임시정부라고 만들어놓고 있는 사람들은 해외에서 생활수단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거요. 핑계지.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봐야 해요. 조선이 철저히 일본이 되는 길 외에 우리가 살 길은 없소”

그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일본인 털보가 끼어들었다.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 되어 대륙으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일본과 조선에 있어서 노동과 자본의 충돌, 또는 모순도 대륙으로 진출하면 되는 거요. 앞으로 만주로 중국으로 진출해야 되는 거요. 일본의 목표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입니다. 동해에 일본국이 있다. 현해탄을 건너면 조선국이 있다. 압록강을 넘으면 만주국이 있다. 산해관을 넘으면 화북국이 있다. 그 남쪽엔 화남국이 있다. 운남, 청해, 귀주, 신강을 합쳐 화서국을 둔다. 안남은 그대로 안남국으로 하고, 태국은 그대로 두고, 버마는 독립시켜 버마국으로 하고, 말레이도 물론 독립시켜 말레이국으로 하고 거기에 필리핀국까지 포함시킨다. 이것이 연방체로 된 대동아공영국이오. 이 모든 연방이 일본 천황의 정신적 지배 밑에서 공존 공영하는 겁니다. 최고통치기관은 각 연방국에서 선출된 최고대표들이 모여 의회를 만드는 거지.” 

듣고 있던 조선인 출신 박이 단호하게 나섰다.

“천황폐하의 권한을 제한하는 독립국이나 최고의회의 관념은 현행 일본헌법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일본인 털보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조선의 군수를 하실 게 아니라 도쿄에서 추밀원(樞密院) 의장을 하시면 더 적합할 분 같군요. 제 말은 조롱이 아닙니다. 오늘 처음으로 조선인 박 선생을 만났지만 조선의 청년관리 가운데 박 선생 같은 분을 만났다는 건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죠.”

김연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와 갑판으로 갔다. 

밤바람이 찼다. 어두운 파도 저편에 떠나온 일본 도시의 등불이 희미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엔진소리와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바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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