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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싸운 용감한 대법관

운영자 2022.04.25 10:11:41
조회 144 추천 0 댓글 0

천구백팔십년 일월말경이다. 양병호 대법관이 소속된 형사3부로 김재규 사건이 배당됐다. 대법관 네 명이 박정희대통령을 죽인 김재규에 대한 마무리를 짓게 됐다. 상식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사형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대법원에서 재판을 확정 시켜야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계엄상황이라 군과 대법원을 이어주는 연락관인 육군 소령이 양병호 대법관의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

“신군부의 이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잠시후 양병호대법관이 사십대 중반쯤의 군인과 마주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달 전 신군부의 군인들이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참모총장을 체포했다. 그리고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군사반란이었다.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주역이 찾아온 것이다.

“상고를 기각해 주시죠.”

찾아온 군인은 짧게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김재규사건을 빨리 확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바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군인이 덧붙였다.

“협조해 주시면 그 공을 저희가 잊지 않을 겁니다.”

채찍과 당근이 동시에 포함된 말이었다. 바로 그 사건에 대한 대법관들의 회의가 있었다. 주심인 유태흥 대법관은 군사법원의 판결이 적법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양병호 대법관은 군사법원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한 명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 사건은 대법관 전원이 모여 결정하는 전원합의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양병호 대법관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사형집행이 늦추어지게 됐다. 양병호 대법관은 기록이 방대하고 법적인 쟁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심리가 급속히 진행되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양병호 대법관은 김재규가 정권을 잡을 것을 결심하고 거사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구체적인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반면 김재규는 유신체제에 대한 혐오가 온 국민의 마음속에 팽배해 있어 핵심인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항변했다. 평생 박정희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충성한 전력을 보면 그 항변도 변명같았다. 장군출신인 김재규는 대위출신인 차지철을 계급으로나 나이로나 한 참 아래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이유인지 차지철만 끼고 돌았다.

김재규가 모멸감을 느낄 팩트들이 많았다. 육군참모총장을 사건현장 근처에 불렀지만 사전에 계엄선포등 어떤 상의도 없었다. 범행이후 김재규는 구체적인 사후 계획은커녕 육본으로 갈지 근거지인 중앙정보부로 갈지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김재규는 정권을 탈취할 목적이 없다고 판단했다. 양병호 대법관은 사건의 동기를 김재규의 순간적인 분노의 격발로 보았다. 양 대법관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어떤 목적이든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다른 대법관들이 말했다. 그러나 양병호 대법관의 생각은 달랐다. 내란 목적이었다면 신군부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김재규의 명령을 받아 도운 그 부하들을 사형을 선고하지 않아도 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엄격히 따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대법원은 그런 법률적용의 잘못을 바로 잡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묵살됐다. 바로 최종합의가 마무리되고 선고한 나흘 후에 김재규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신군부의 힘을 상징하는 국가보위 입법회의는 양병호 대법관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사회정화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기관에서 대법원장에게 그의 비리에 대한 통보를 했다. 그가 6.25전쟁당시 여자관계가 있었고 그 사이에 사생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모략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주기를 원하는 압력이 있었다.그는 사표를 쓰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양대법관이 가족과 식사를 하는데 보안부대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데리고 갔다. 그가 깜깜한 방에 갇혀 사흘간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틀후 그가 쓴 사직서가 대법원에 전달됐다. 그가 대법원장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그가 탁자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마시려고 할 때였다. 맞은 편에 앉았던 대법원장의 눈에 그의 이상한 모습이 들어 왔다.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와이셔츠 위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얼마 후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는 이천오년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최고법원의 판사에게 판결내용을 문제 삼아 고문을 가하는 세상은 법치주의가 아니었다. 신군부에 협조한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어느날 한강다리에서 투신을 해서 생을 마쳤다. 그 원인은 우울증이라고만 발표됐다. 나는 그들에게 찾아가 압력을 가했던 군사반란의 핵심을 만나 당시의 상황을 직접 얘기들은 적이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뒤집어 놨는데 세상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예요. 김대중을 구속했다고 광주에서 들고 일어났죠. 김재규의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라는데 동조하면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우리는 겁을 먹었어요. 전두환 사령관까지 겁먹고 한 발 빼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 우리는 다 죽는거죠. 김재규부터 빨리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대법관을 찾아가서 부탁했어요. 나중에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말이죠.”

나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귀중한 증언 한마디를 들은 셈이었다. 내게 말한 그 군사 반란의 주역인 인물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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