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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60 - 대책회의

■x 2019.06.24 10: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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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마녀사냥


60


대책회의


서울 을지로의 공구상 골목 안의 오래된 불고기집 우래옥 2층에 김씨가의 사람들이 모였다. 가문의 서열에 따라 제일 상석은 종손인 김병휘(金炳徽) 학장이 앉아 있었다. 그 다음부터 삼양사 그룹의 김윤(金鈗) 회장, JB금융그룹의 김한(金翰) 회장, 다시 그 아래로 항렬과 나이에 따라 앉았다. 김씨가의 자손이자 삼양사 그룹 내의 회사 사장들이었다. 김연수 회장이 처음 일으킨 경성방직의 사장도 있었다. 경성방직은 김연수 회장에게서 매제인 김용완(金容完) 회장으로 이어져 다시 그 아들 김각중(金珏中) 회장을 거쳐 지금은 손자가 경성방직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제일 끝자리에 김씨가의 집사 역할을 하는 김재억(金在億) 감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연수 회장 생존 시 입사해서 40년을 근무했다는 김씨가의 먼 친척이 된다고 했다. 

“엄(嚴) 변호사가 여기 앉아요.”

사회를 맡은 김한 회장이 상석의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 변호사가 오늘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우리들이 뭘 해야 할지를 말해 주는 자리니까 그렇게 해줘요. 그게 우리들의 마음도 편하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사회자인 김한 회장이 제일 하석(下席)에 있는 김재억 감사에게 말했다.

“김 감사님도 위로 올라와 앉으시죠? 같은 집안이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60대의 김 감사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의 사장단은 40대쯤으로 보였다. 사회를 보는 김한 회장이 김씨가의 40대 사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나에게 소개했다. 악수를 하면서 그들에게서 오는 독특한 느낌이 감지됐다. 나서려 하지 않고 조심하는 겸손한 태도였다. 김씨家 전체를 흐르는 공통된 조류이기도 했다. 그 자리는 김씨가에서 오랜만에 보는 집안 4촌 형제들끼리의 모임이기도 했다.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조용히 소근거렸다.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가스테이블 위에 올려 달구어진 놋쇠쟁반에 육수가 부어지고 고기와 야채 그리고 당면이 들어갔다. 소주가 한 잔씩 돌았다. 삼양사 그룹의 김윤 회장이 종손인 김병휘 학장과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그 사람 어떻게 보세요?”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말은 부드럽지만 당사자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는 중요한 질문 같았다. 

“나는 모르지.”

종손인 김병휘 학장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든지 아니면 비평을 하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랐다.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떠냐는 말씀입니다.”

김윤 회장이 재차 물었다.

“나는 모르지.”

김병휘 학장이 다시 웃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 표정에서 비로소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칭찬이나 좋은 평가라면 주저 없이 바로 할 인품이었다. 그게 안 되니까 그 정도로 절제해서 대답하는 것 같았다. 김윤 회장이 다시 확인했다.

“그 사람이 어려서부터 형님 댁에 자주 놀러갔었다고 그러던데요?”

“우리 집에 수시로 왔었지. 그런데 함께 놀지는 않았어. 우리들 정서와는 달랐지.”

“그럼 안 끼워줬다는 얘기네.”

김윤 회장이 비로소 대답의 취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인 인물평이나 비난을 하지 않는 가풍(家風)이 들여다 보였다. 

“형님은 요새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옆에 있던 금융지주의 김한 회장이 물었다.

“내년이면 정년퇴직을 하지. 요즈음은 주말이면 스크린 골프장에 가. 거기서 한나절 놀지. 근처에서 갈비탕을 시켜먹는데 고기도 많이 주고 국물도 아주 좋아. 하루에 120그릇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요? 나도 한 번 가서 먹어봐야겠네.”

문중(門中)회의가 어느새 친척형제들이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명문재벌가의 문중회의 치고는 소박했다.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평화스러웠다. 그늘이나 심각한 표정을 한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는 삼양사 그룹의 김윤 회장과 금융지주의 김한 회장이 속삭이는 얘기소리가 들렸다. 

“전에 내게 말한 일은 내 선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김윤 회장이 마주앉은 김한 회장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었던 것 같다. 

“금융 쪽의 일은 나도 힘을 다 썼어.”

집안 형제들의 업무협조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놋쟁반 위에서 고기와 야채가 끓고 있었다. 대충 식사가 끝나고 음식이 치워지자 김한 회장이 나한테서 들은 그동안 진행된 상황들을 김씨가 문중에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내가 위원회에 제출한 서류들의 복사본을 경성방직과 삼양사 그룹 쪽에 건네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집안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좌익세력이 우리 할아버지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없애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 집안을 꺾어버리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김씨가 문중이 그런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삼양사 그룹의 김윤 회장이 담당 변호사인 나를 보면서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그들은 나보다 현실을 훨씬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재벌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용병(傭兵)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의 전략을 듣고 싶어 그 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 정도의 재벌 그룹 같으면 벌써부터 진상규명위원회의 위원장과 위원 그리고 조사관들까지 포섭대상으로 삼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계획을 진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김윤 회장은 오히려 내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본심이 어떤 것인지 의문이 들어 반문했다. 

“위원회의 결정은 결국 다수결로 납니다. 위원들이 우리 쪽에 유리하게 표를 찍는 건 집안에서 움직여 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이 위원 노릇을 하고 있나요?”

김윤 회장이 다시 물었다. 그때 종손인 김병휘 학장이 나서서 말했다.

“상당수가 역사학자고 나머지는 법률가지. 법률가는 그런대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게 있는데 역사학자들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또 명단을 살펴보니까 좋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제대로 된 학자는 없어. 3류 학자들에게 완장을 둘러준 셈이지.”

김병휘 교수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의 기자가 엄 변호사를 인터뷰해서 우리 문제를 보도하려고 했어. 인쇄까지 다 해놨는데 마지막 순간 사장이 그걸 빼라고 지시했다는 거야. 자기네도 친일파로 몰릴 걸 걱정해서 그런 것 같아. 일제시대부터 조선일보와 우리 집안의 동아일보는 함께 일을 해왔어. 또 친일 혐의도 공통적으로 받고 있지.”

사실이었다. 조선일보의 방(方)씨 집안도 내게 법률상담을 여러 차례 했었다. 

“조선일보 집안이나 우리 집안이나 서로 도와야 하지 않나요?”

김윤 회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글쎄 말이야.”

김병휘 학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김한 회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엄 변호사, 전체한테 뭐 부탁할 거나 지원 요청할 일 없어?” 

“위원회 위원들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그 사람들에게 할아버지 김연수 회장이 어떤 분인지를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직접 그들에 대한 설득공작까지는 사양하고 싶었다. 법정에서 논리와 글로 싸우는 게 내가 할 역할이었다. 듣고 있던 김윤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들은 대부분이 사학자(史學者)인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우리야 그저 기업을 하는 사람들일 뿐인데.”

내가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그룹 내에 큰 장학재단이 두 개나 있지 않습니까? 연구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하면 위원들의 표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학재단을 통해 연구비를 댈 능력은 있습니다만 그렇게 연관짓는다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타협이나 흥정은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배어 있었다. 사회자인 김한 회장이 이렇게 덧붙였다.

“삼양사 그룹은 여기 있는 집안의 회장이나 사장들이 모두 잘 알 듯이 할아버지 김연수 회장 때부터 절대 비자금 같은 걸 만들지 않아. 그게 본질적으로 기업을 부패하게 하는 요소니까 말이야. 일제시대 경성방직을 할 때부터 군사정권까지 정치권에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기업 비자금이 아닌 개인 돈을 내놨어. 돈을 내놔도 절대 다른 청탁을 하지 않아. 한번 부탁하면 그 다음부터 그런 관계가 계속돼야 하니까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룹에서 청탁받고 재미를 보는 건 여기 있는 사장이나 회장보다 공장장이 더 세력을 부릴지 모를 걸? 아무튼 그게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가풍(家風)이야.”

이어서 김한 회장이 그 자리에 처음 참석한 사촌동생 김정에게 말했다. 

“엄 변호사가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수집 중인데 뭐 기억나는 거 없어?”

계열사 부사장을 하고 있는 김정 부사장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키가 크고 옆으로 길게 뻗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강인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잔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려서 방학동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잠시 같이 살았죠. 할아버지가 워낙 말이 없으신 분이라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요. 항상 한복을 입으시고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죠. 식사하실 때는 독상을 받으셨는데 더러 나를 불러 반찬을 떠먹여 주셨어요. 그게 대구같은 질 좋은 생선이라고 기억해요. 그 외에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낮이면 근처 논에 가서 놀던 일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어느새 밤 10시가 넘었다. 문중회의가 끝이 났다. 주차장에는 회장이나 사장을 기다리는 차들이 빽빽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손인 김병휘 학장이 차를 타지 않자 모두 가만히 서서 그가 떠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에 서 있는 차들 안에서 운전기사들이 이쪽의 눈치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김병휘 학장이 문중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갈게. 먼저들 가. 그리고 차는 순서를 정하지 말고 맨 앞에 서 있는 차부터 출발하지. 엄 변호사는 차를 가지고 왔죠?”

김병휘 학장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안 가지고 왔습니다. 강남 쪽으로 가는 차가 있으면 얻어 타고 갈랍니다.”

“그러면 김 감사님 차가 제일 먼저 떠나세요.”

그렇게 명령이 떨어졌다. 제일 앞쪽에서 눈치를 보던 차가 미끄러져 앞으로 나왔다. 김 감사와 내가 차에 타고 먼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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