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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와 십자가

운영자 2020.03.16 09:50:36
조회 162 추천 1 댓글 0
명문 신학대학의 교수가 있었다. 목사이기도 한 그는 소년시절부터 성실한 믿음을 가진 모범생이었다. 그는 신학대학을 지망했다. 그의 길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안정적이고 평탄했다. 유럽의 신학대학을 유학하고 돌아와 교수로서 또 성직자로서 평생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그는 마침내 대학 총장이 됐다. 사탄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학교재단의 돈을 뒤에서 횡령하던 직원이 그를 배임죄로 고소했다. 모략이었다. 사탄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마음을 휘저어서 학내분규를 일으켰다. 평생 상아탑의 온실에서 살던 그는 갑자기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검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고소장을 접수하면 사실을 확인해 보려는 일상의 절차였다. 검사실 철의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는 질겁했다. 그의 명예가 추락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사표를 냈다. 변호인으로서 도왔던 나는 안타까웠다. 남들보다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바람은 일상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면서 소란을 피하려고 하는 건 바다 위에 떠서 파도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둘만 있을 때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평생 존경받는 신학자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오셨다면 피하시지 말고 십자가를 지시면 어떨까요? 이 정도는 가벼운 십자가 같은데요.”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 예수는 죄가 없어도 예수는 도피하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대광야로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침 뱉음을 당하고 얻어맞고 군중의 야유를 받으면서 사형대인 십자가 위에 올랐다. 그는 오늘도 성경 속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돈과 지위나 명예를 얻는 게 아니라 고통과 모욕이 가득한 어둠침침한 세상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가 내게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이제 노인이 됐어요. 아내와 함께 여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연금과 아파트가 필요해요. 제가 곱게 나가면 상대편이 그건 보장해 준다고 했어요. 신학적 논리로는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이해가 갔다. 그 역시 인생의 겨울바람 앞에서 떠는 약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평생 걸어온 성직자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도 바울도 야윈 몸에 맨발로 가는 곳마다 끼니를 얻어먹으면서 전도 여행을 했다. 절실한 생존 앞둔 사람을 관념으로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갔던 한 기도원에 그가 고용되어 설교하는 모습을 봤다. 그의 설교에서는 생수가 넘쳐흐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이런 소식을 전했다.

“그 대학 총장님 실명하신 것 같더라구요. 부인의 팔을 잡고 따라가시더라구요. 앞을 보지 못하시는 데도 안 그런 척 하시고 미소를 짓는데 참 안됐어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거부하면 더 무거운 십자가가 등에 얹히는 것 같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본 적이 있다. 나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큰 가구점 사장이 있었다. 믿음 깊은 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내게 세금을 법대로 내고는 도저히 가구점을 운영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탈세를 인정했다. 어느 날 그의 밑에 있던 사람이 장부를 빼돌려 가지고 있다가 공갈을 했다. 그는 공갈로 돈을 뜯기기보다는 이 기회에 가구점 문을 닫고 빈털터리 죄인이 되겠다고 했다. 두 팔을 벌리고 당당하게 처벌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그는 세무서와 경찰에 소환되어 가서도 흔들림 없이 그렇게 말했다. 변호사인 나는 그가 법적 책임을 면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짐작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사회적 파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징역을 살지도 않고 가구점 문을 닫을 정도로 세금을 추징당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업장은 불이 붙듯 다시 활짝 일어섰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지려는 무거운 십자가를 어떤 존재가 대신 들어준 것 같았다. 크고 작은 환란의 파도로 출렁거리는 게 세상이다. 우리는 그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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