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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즐겁게

운영자 2023.03.21 09:42:53
조회 87 추천 1 댓글 0

오후에 해변으로 나갔다. 진공 같은 적막한 공간이었다. 푸른 바다 쪽에서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고운 모래위에 거품을 내며 스며들고 있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이런 시간을 즐긴다. 늦은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모래에 꽂은 채 천으로 된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낚시꾼들은 고기를 잡지 못해도 괜찮은 것 같다. 하루 종일 바다를 본 게 더 큰 수확인지도 모른다. 노년을 혼자 즐겁게 사는 방법은 여러가지인 것 같다.

내 머리 위로 갈매기 한마리가 다리를 뒤로 접고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며 유유히 솟아오르고 있다. 문득 ‘갈매기 죠나단’이 떠오른다. 죠나단은 다른 갈매기들이 포구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거나 물고기를 훔쳐먹거나 어부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거부한다. 죠나단은 그런 갈매기 떼에서 벗어나 매일 같이 조금씩 더 공중으로 올라가는 연습을 한다. 마침내 죠나단은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높이 오른 갈매기가 멀리 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삼십대 말 직장에서 빈 시간에 읽었던 책이었다. 그걸 읽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새는 떼를 지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종달새는 혼자 공중높이 날아오르면서 노래를 한다. 독수리는 높은 하늘 위에서 유유히 선회하고 있다. 벌과 나비도 사는 형태가 달랐다. 벌은 집단에 봉사해야 하지만 나비는 이리저리 혼자 날아다니면서 꽃을 즐긴다. 나는 나비같이 갈매기 죠나단 같이 살고 싶었다.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이제 그 소원을 이루게 됐다. 나는 텅빈 바닷가의 파도 소리와 죽음 같은 적막 사이에 혼자 서서 새로운 환희를 맛보고 있다. 거대한 바다의 풍요한 푸르름이 그대로 눈으로 들어와 가슴속으로 콸콸 거품을 내며 쏟아져 내린다. 나는 보랏빛 노을 같은 외로움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인 고독을 발견하고 즐긴다. 바닷가를 걷는데 품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이제는 나와 진정한 인연을 맺은 소수만이 내게 전화를 건다.

“나야 강 선생이야.”

고등학교 은사였다. 정이 많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팔십대 중반인데도 먼저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그는 고등학교 십오년 선배이기도 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걷고 있습니다.”

“허허, 나도 요새 낙원동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지 모르겠어. 근처에 시뻘건 국물이 끓고 있는 국밥집이 있는 데 한그릇에 이천오백원이야. 나는 참 행복한 것 같아.”

그 분은 빈곤한 사람이 아니다. 교사직을 비교적 일찍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큰 생수공장과 정수기공장을 성공시키고 부자가 됐다. 그런데도 노숙자가 단골인 싸구려 국밥집을 찾는 분이다.

“요즈음 어떻게 삶을 즐기세요?”

“내가 원래 역마살이 있잖아? 젊어서부터 혼자 봉고차를 몰고 다니면서 차에서 먹고 자고 했지. 차박에는 내가 원조지. 엊그저께도 신안군에 있는 섬에 가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차박을 했지. 팔십 중반 내 나이에 천키로를 운전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분은 선생이 되는 것도 또 다른 신화였다. 그가 소년시절 인쇄소의 식자공이었다. 혼자 공장 구석에서 밥과 간장으로 끼니를 때웠다. 사흘을 굶고 기절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명문이던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년간 공사장에서 노무자로 일하다가 서울사대에 합격하고 교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조용히 선생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죽음이라는 걸 생각해 봤는 데 이제 알겠어. 죽음이란 별 게 아니야. 그냥 졸리운 거야. 깊은 잠에 빠져 들어드는 거지. 그러니까 하나도 겁날 게 없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성경 속 어디에선가 사도 바울도 죽음은 잠드는 것이라고 했다. 한번 선생님은 늙어도 선생인가보다. 팔십대 중반의 선생은 칠십대의 제자에게 늙어서도 혼자 즐겁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실체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자기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수를 내가 묵는 실버타운에 선물로 보내고 있다. 감사한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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