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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기도

운영자 2017.04.13 09:46:00
조회 382 추천 0 댓글 0
노년의 일은 기도입니다. 

  

  

금년 들어 변호사로서 처음 가는 법정이었다. 몰려오는 일들이 싫어 빨리 늙어 은퇴했으면 했는데 막상 늙으니까 일거리만 있어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오랜만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내가 좋아하는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는 모직 쟈켓에 손때 묻은 노란 가죽가방을 들고 서초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경노석이 텅 비어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어색했지만 세상적으로는 그 자리에 앉아도 되는 나이가 됐다. 좌석에 앉아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성인 토마스 아 캠피스의 책에서 요약한 문장들을 수첩에 담아 놓았었다. 컴퓨터와 달라 사람의 머리는 정말 입력시키기 힘든 것 같았다. 좋은 글들은 끊임없이 반복해야 머릿속에 들어가 간신히 접착되는 것 같았다. 진리의 글들은 영혼에 담아 피 속에서 수런거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늙어도 계속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일하러 가는 기쁨도 있었다. 대학동창인 친구의 변호를 하게 됐다. 25년 전의 일이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낸 친구는 필리핀으로 도망을 갔었다. 그 사회의 그늘에서 불법체류자로 생활을 하다가 노인이 되어 잡혀왔다. 경찰서 수사과의 수은등 아래서 본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인생도 재산도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 늙은 그의 주머니조차 텅 비어 있었다. 고립무원의 상태인 그를 변호할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즈음 나는 늙은 변호사가 할 일을 찾아냈다. 은발을 반짝이며 고독하고 힘든 사람들을 찾는 일이었다. 30년의 직업적 경험을 살려 촉촉한 감성이 들어가 있는 탄원서 한 장이라도 써주는 일이었다. 덩치가 좋은 노인 한명이 다가와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가 보는 수첩에 한참 시선을 던지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제가 83세입니다. 글씨가 적힌 걸 읽으시는 걸 보니까 정말 부럽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검은 뿔테안경에 콧망울이 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돋보기를 쓰고 보는 건데요 뭘”

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래도 이제 책을 못 봐요.”

노인의 대답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경로석에 앉았는데도 아직 일이 있는 분 같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그의 표정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젊은 세대는 노인의 이런 심정을 모를 것이다. 나는 지하철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느긋하고 편한 얼굴은 거의 없었다. 삶에 쫓기고 초조한 표정들이었다. 거의 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게임들을 하거나 카톡 문자 들을 보내느라고 정신들이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이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청춘이 인생의 행복한 시절이라는 건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청춘시절은 인생의 가장 괴로운 시절들이었다. 노인인 지금이야 말로 훨씬 행복한 것 같다. 공공의 무대에서 한 발 물러나 덕스러운 휴식의 계절을 가지는 것, 현세와 내세 사이에 일종의 신성한 틈을 두는 것은 가치 있는 지혜의 일부가 아닐까. 

그 기간 동안의 일은 일이 아니라 기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하철이 어느새 법원 근처의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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