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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우승작] 얼어붙은 이방인 - 3

엘사v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0 00:5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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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아토할란 - 19211222


나는 눈의 여왕. 겨울의 여제. 차가운 심장은 날 보는 모든 이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나의 마법은 날 찾아오는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며 그 추위를 이기지 못한 자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얼어붙은 왕좌 위에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얼음들이 솟아있고 나, 눈의 여왕은 그곳에 앉아 또다시 피를 흘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의 매력에 반한 희생자는 언제든 찾아올지니. 크리스털 빛으로 빛나는 이 얼음 성은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이끄는

나는 여기까지 하다 말고 칼날과도 같은 차가운 왕좌 옆에 놓여있는 눈의 여왕동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지. 나는 깊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손을 놀려 그 존재만으로도 세계를 정복할 것만 같은 왕좌부터 없애버렸다. 얼음을 매끈하게 만들어 작은 손거울을 만들고 거기에 비친 날 자세히 뜯어보았다. 얼굴마저 얼음으로 감싸서 창백한 빛이 손끝과 발끝에도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멋대가리 없이 뾰족함만을 강조한 왕관. 피부색과 구분도 되지 않는 얼음인지 털옷인지 모를 졸부 같은 드레스. 정리된 듯 안 된 듯 묘하게 풀어헤친 산발한 머리.

나는 이 센스 없이 날 감싸고 있던 드레스부터 없애고 평소에 입던 편한 옷 그러니까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파자마 같은 으로 갈아입었다. 얼굴도 원래대로 돌렸다. 아무리 머리를 풀어도 그렇지 이렇게 산발까지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생각했다.

비욘! , 이거 진짜 못하겠어. 안데르센이 크게 착각한 게 분명해.”

나는 기억의 돔에 서서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비욘에게 다가갔다.

눈의 여왕을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비욘이 여전히 아토할란의 기억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즉각 대답했다. 꽤 오래전 내가 안아 들 수 있던 비욘은 이제 열 살짜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아이 엄마는 몇 년 전 죽었다고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마냥 귀여웠던 그 아이는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커졌고 흑발의 잘생긴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어쩐지 젊은 시절의 크리스토프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코는 그 사람보다는 작았다. 그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십여 년 전 처음으로 비욘이 내가 만들어 준 배지를 들고 정말로 찾아왔을 때, 나는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비욘은 내가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나 보다. 그 당시 막 성년이 된 비욘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히 고르며 긴장한 게 바짝 느껴졌었거든. 어디까지 가나하고 골려 줄 심산으로 부정적인 언사를 내비치자 비욘은 이런 상황에 모두 대비했다는 듯이 각종 이유를 댔다. 이를테면 이 중요한 문화유산은 전 인류를 위해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던가, 기억이 모여드는 이유를 밝혀내면 역사 연구의 학 획을 그을 거라든지. 심지어 이게 자기가 태어난 이유라고 말하기도 했다. 벌벌 떨면서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못 이기는 척 허락을 해준 이후로 매년 1222일이 되면 이곳을 찾아와 말 그대로 아토할란을 연구하고 있다.

아렌델이 사라지고 노르웨이라는 큰 나라로 흡수되었을 때 선대왕과 백성이라는 관계는 조금 모호해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인과 손님. 아렌델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친구 같은 관계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끝까지 여왕으로 남을 걸 그랬지. 그랬으면 이 녀석의 딸을 위해 눈의 여왕을 연기해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거기다가 내 얼음성도 기억을 지울 때 함께 없애 버려서 그 분위기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너무한다. 정말. 카이와 겔다라니. 카이는 내 비서였다고.”

나는 동화책 중간 부분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소문이 참 무섭지 안 그래?”

나는 책을 탁 소리 나게 접고 비욘에게 돌려주었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는 못 해. 아니, 안 해.”

비욘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뚱한 표정으로 책을 내 쪽으로 밀었다.

누가 그렇게 하래? 이건 그냥 생일 선물이야.”

?”

“’?’ 라니? 너 설마 여기 나온 걸 따라 해 본 거야?”

비욘은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킬킬거렸다.

! 상상이 안 가는데? 막 왕좌에 앉아서 아랫것들 보듯이 눈 내리깔고? 고독한 여왕처럼 한 손으로 턱도 괴고? 이따 나도 좀 보여줘.”

“...”

너 얼굴 빨개졌어. 그리고앗 차거!”

얼음 속에 갇힌 비욘은 간신히 얼굴만을 내밀고 입을 오물거렸다. 한 사람쯤 얼려버리는 건 아직도 내게 쉬운 일이다.

계속 말해 보시지?”

죄송해요. 여왕님. 이거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1222일은 매년 이런 식이다. 그 배지를 만들어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날 잊지 않고 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니까. 눈의 여왕, 기억의 강, 이런 것들은 이제 동화에서나 나오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옛 기억을 찾지 않았고 아토할란을 찾는 사람은 비욘 말고는 없었다. 내게 있어 이날은 생일 그 이상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때는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이후로 나는 줄곧 이곳에 박혀 있었다. 아렌델이 그러했듯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았기에. 이곳은 내 동생 안나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곳, 비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건 확실했다. 말하자면 여긴 내 최후의 보험인 셈이었다. 그때 안나의 말대로 할 수 있었던 건 이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안나를 불러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건 기억일 뿐, 이제 그 애를 볼 순 없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나는 매끈한 소파 하나를 만들어 그곳에 앉았다. 몸이 닿는 부분을 섬세하게 조절해 푹신한 눈으로 덮고 그 포근함에 몸을 맡겼다. 돔에는 여러 기억이 펼쳐졌다. 언제든 어디서든 물이 닿는 곳이라면 이곳에 기록되고 또 영원히 기억된다. 시대도, 장소도 다양했다. 한쪽 면에서는 한 작가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또 다른 면에서는 최근에 있었던 전쟁의 참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안나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내 모습도 비친다.

비욘은 얼음에서 풀려나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어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비욘을 얼리는 이유도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여길 연구한 게 몇 년인데 아직도 뭐가 남았어?”

그는 대답 대신 내 옆으로 와서 털썩 널브러졌다. 나는 그를 위해 내 것과 비슷한 소파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소파의 높이만큼 그가 불쑥 올라왔다. 비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래 연구란 게 끝이 없는 거야. 이제 끝났다 싶으면 뭔지 모를 게 또 튀어나오거든. 다만.”

다만?”

필요한 건 거의 끝난 거 같아.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

그래? 필요한 게 뭔데?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말한 적도 없다. ?”

그는 갑자기 손을 머리 뒤로 모으더니 하품을 한번 쩍 하고는 편하게 누웠다.

글쎄. 우리 여왕님을 정신 차리게 돕는 거?”

?”

그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돌아보자 그의 눈이 내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푸른빛의 그 고혹적인 눈은 무언가 평생 담아둔 것을 꺼내서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마치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맹수와도 같이. 나는 내 머리를 강하게 누르는 것처럼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정이었기에 나는 그냥 거기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기억을 비추고 있던 영상들은 모두 눈 내리는 기억들로 바뀌었다. 돔 가득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하늘, 맑은 하늘, 흐린 하늘, 함박눈, 진눈깨비, 싸락눈, 날린 눈, 가루눈그 소리 없는 가상의 눈은 마치 이곳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비욘은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 하나를 뻗어 한 장면을 가리켰다.

저건 처음으로 눈의 여왕을 찾으러 가던 길에 내리던 눈이야.”

나는 자연스레 비욘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막 성년이 되어 풋풋한 비욘이 어선 하나를 타고 있었다. 조타를 잡은 그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만들어준 배지는 목걸이가 되어 있었다. 눈이 내렸다. 갑판은 눈에 뒤덮이고 앞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지만 정작 비욘은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저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다가 깡패 놈들한테 처맞았을 때 내리던 눈.”

다른 쪽에서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는 십 대의 비욘이 눈 내리는 아렌델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이었다. 가방에 가득한 책이 무거울 법도 한데 그의 발걸음은 아주 경쾌했다. 신나는 그 걸음만큼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처맞던 그는 책 몇 권을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안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책을 빼앗기게 되고 책의 제목은 곧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눈의 여왕’, ‘눈의 여왕 해제 엘사 선왕과 눈의 여왕’, ‘마법이 사라진 시대 엘사 선왕의 행보이 밖에도 다른 몇 권의 책이 내는 조소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펼쳐진 책 위로 눈이 한두 개씩 떨어지면서 페이지를 적셔갔다.

또 저건 안나 여왕 장례식 전날에 내리던 눈.”

또 다른 쪽에서는 더 어린 비욘이 아렌델에 검은 조기가 올라가는 걸 보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회색 크로커스를 배경으로 새까만 기가 아렌델 성 여기저기에서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은 하얀색 눈이 기를 가릴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비욘은 집 앞 공터에서 눈을 맞으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슬픔도 뭣도 아닌 그저 꼬맹이의 궁금함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제야 돔에 새겨진 기억들을 쭉 훑어보았다. 모두 눈 내리던 날의 비욘이 그려져 있었다. 눈의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의 환희, 눈의 여왕의 존재에 관한 불안감. 아렌델을 떠나는 날의 좌절. 마지막까지 배지를 보면서 느끼는 희망.

운명이라는 걸 믿어?”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둘은 각자의 소파에 누워서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 돔에 펼쳐진 눈과 비욘만이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한참 만에 그는 갑자기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놀리는 것도 재미없네. 이제.”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지금 분위기 이렇게 만들어 놓고 도망가는 거야? 진짜 최악이다. .”

그는 벌떡 일어나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네 표정을 한 번 봐야 해. . 맞다. 여기서 볼 수 있지. 보여줄까?”

평소대로 라면 내가 녀석을 얼려버리고 입만 살은 비욘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동안 날 많이 놀리긴 했어도 이렇게 자신의 기억들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비욘의 그런 눈빛을 본 건 처음이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다. 아마도 비욘의 평생에 담긴 것이겠지. 그리고 아직은 때가 아니니 말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메시지도 녹아있었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정말로, 넘칠 정도로. 당연히 나는 기다릴 수 있었다.

비욘은 이제 완전히 실없는 농담 따먹기 하던 그로 돌아갔다. 그는 영원히 웃을 것처럼 쉴 새 없이 낄낄거렸다. 한때 여왕이었던 권한으로 그만하라고 명령을 해야 할까. 하지만 웃음으로 무언가를 덮으려는 수작 같아 보였기에, 나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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