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檀)ㆍ기(箕)가 국호(國號)라는 데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4)
대체로 국호(國號)를 두 가지로 하는 것은 곧 오랑캐 족속들의 풍속이지 중국(中國)에는 이런 예가 없다. 우리나라의 단군(檀君)ㆍ기자(箕子)가 아무리 조선(朝鮮)으로 국호를 하기는 했지만, 단군이다 기자다 하고 일컬었으니, 단과 기는 곧 국호요, 조선이라는 것은 바로 지명(地名)이다. 그리고 진(辰)과 한(韓)도 국호로서 진은 곧 진(秦)이요, 한은 곧 삼한(三韓)이다. 이 모두가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 동사(東史)를 편찬한 자가 여기에 대해 전혀 논변(論辨)하지 않았는데, 그 실적(實跡)을 상고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대략 이를 변증하고자 한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자 단군(檀君)의 후손이 당장경(唐藏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당장은 문화현(文化縣)에 있는데 여기서도 단군이라 호칭하였으니 단(檀)은 곧 국호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건대 '단궁(檀弓)은 낙랑(樂浪)에서 생산된다.' 하였으나, 단(檀)이 활[弓]을 만드는 나무가 아니고 보면 국호인 단을 붙여 활의 이름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
기자가 봉작(封爵)을 받아 자작(子爵)이 되었으니, 기(箕)도 곧 국호이다. 생각건대, 성토(星土)의 분야(分野)로 보아 기성(箕星)이 그곳에 해당하므로 국호를 기라 이른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란 한사군(漢四郡)의 통칭으로서 마치 중국을 제주(齊州)라고 이른 것과 같으니, 아마도 역대(歷代)의 국호는 아닌 듯하다.
한수(漢水)의 남쪽은 또 별다른 지역으로서 당시에 삼한(三韓)이니 오한(五韓)이니 하는 명칭이 있었으니, 한(韓)은 바로 국호이다. 진한(辰韓)은 진(秦) 나라 사람이 와서 세운 나라이므로 한(韓)에 진(辰)을 더하여 구별한 것이고,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에서 또 나누어진 나라이므로 변(弁)을 더하여 진한과 구별한 것이다."
하였고, 또 《성호사설》에 이렇게 되어 있다.
"은(殷) 나라 제도는 아무리 왕자(王子)일지라도 반드시 그를 먼 곳으로 내보내어 민간(民間)의 고난을 체험하게 한 일이 있으니, 무정(武丁)의 사적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다짐하겠는가. 기(箕)라는 나라는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분야(分野)로 따져보면 우리나라가 기성(箕星)ㆍ미성(尾星)의 분야에 해당되고, 서도(潟) 지역이 기성의 분야가 된다. 생각건대, 단군 왕조(檀君王朝)의 말기에 기자가 이 기성 분야의 지점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봉작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朝鮮)의 제봉(提封)을 상고해 보면, 요동(遼東)을 포함해서 서쪽으로 연(燕) 나라와 접경이 되어 융적(戎狄)들과는 같지 않으므로, 기자가 이 때문에 봉작을 받게 된 것이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9년에 주왕(周王)이 첨환백(詹桓伯)을 시켜 진후(晉侯)에게 꾸짖기를 '무왕(武王)이 상(商) 나라를 이긴 후로 숙신(肅愼)과 연(燕)과 박(亳)은 모두 우리 북쪽 땅이 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숙신이라는 나라는 또 요(遼)의 동쪽에 있었으니, 조선도 그 번병(藩屛) 안에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상고하건대, 조선이 기성(箕星)의 분야이기 때문에 조선에 봉작됨으로써 기자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호)의 말은 옳지 않은 듯하다. 중국의 사책(史策) 및 경전(經傳)에서 기자(箕子)와 미자(微子)를 모두 상(商) 나라 시대의 인물로 일컬어 놓았다. 《서경(書經)》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의하건대, 미자(微子)가 주(周) 나라로부터 대체로 나라[國]만 받고 작호(爵號)는 받지 않았으니, 나라를 받은 것은 선왕(先王)의 제사(祭祀)를 단절시키지 않고 받들기 위해서였으며, 작호를 받지 않은 것은 주 나라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절조(節操)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미자(微子)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미자지명(微子之命)의 공씨(孔氏 공안국(孔安國)을 가리킴) 전(傳)에,
"미(微)는 기내(畿內)의 국명(國名)이요, 자(子)는 작호(爵號)이다."
하였다. 미자가 죽자 그의 아우 연(衍)을 세웠으니, 이가 곧 미중(微仲)이
다. 그러나 연(衍)은 그의 형(兄) 미자를 이어 송(宋)을 계승한 것이지, 미(微)를 계승한 것은 아닌데도 미중(微仲)이라고 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바로 미중의 마음이 미자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衍)의 아들 계(稽)에 이르러서는 댓수가 이미 멀어졌으므로 비로소 송공이라 칭한 것이다.
《서경(書經)》 홍범(洪範)에는 '십유삼사(十有三祀)'주D-001 라 하였고, 미자지명(微子之命)은 구대(舊代)의 작호로 편(篇)을 명명하였으며, 홍범의 '기자내언왈(箕子乃言曰)'이라는 것 역시 구대의 작호를 존속(存續)시킨 것이니, 여기에서 남의 지조를 억지로 빼앗지 않은 무왕(武王)ㆍ주공(周公)의 어진 마음을 알겠다. 그러니 미자와 기자는 똑같은 경우이다. 기자(箕子)의 묘정비(廟庭碑) 주(注)에,
"기자의 이름은 수유(須臾)인데 은실(殷室)에서 기(箕)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 호칭한 것이다."
하였으니, 기자에 대해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호이다.' 한 말이 어찌 은대(殷代)에 받았던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기(箕)씨 성(姓)은 기자의 후예(後裔)로서 나라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주(周) 나라 시대에 기정(箕鄭)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 문공(晉文公)이 그에게 주린 백성 구제하는 방법을 묻자, 그는 신(信)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대답하였으니, 이것도 기(箕)를 국명(國名)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만하다.
진(辰)은 진(秦)과 같은 음(音)이니, 《춘추전(春秋傳)》에 보이는 진영(辰嬴)주D-002이 바로 그 증거이다. 서서(書序)에,
"성왕(成王)이 이미 동이(東夷)를 정벌했다."
하였는데, 그 전(傳)에,
"동이는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인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맥(馯貊)의 무리이다."
하였고, 정의(正義)에는,
"《한서(漢書)》에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은 있으나 한(馯)은 없다. 한(馯)은 곧 한(韓)이다."
하였다. 한(馯)은 한(犴)으로도 쓰고 혹은 한(寒)으로도 쓴다.
마한(馬韓)이란 기자(箕子)의 41세 손(孫)인 기준(箕準)이 한 혜제(漢惠帝) 원년(서기전 194)에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금마저(今馬渚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마한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준을 속(俗)에서는 무강왕(武康王)이라 호칭한다. 《후한서(後漢書)》에,
"기준이 위만에게 침공(侵攻)을 받자, 좌우(左右)의 관인(官人)들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을 쳐부수고는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하였다. 《위략(魏略)》에,
"기준의 아들과 친족으로서 그 나라에 남아 있는 자들이 한씨(韓氏)로 성(姓)을 삼았다."
하였으니, 이 또한 국호(國號)를 빌어서 성을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기준의 족속이 멸망하자 마한(馬韓) 사람이 스스로 임금이 되어 진왕(辰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진(秦) 나라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쫓겨서 한(韓)으로 들어오자, 마한에서 그들을 위해 동쪽 지경을 떼어 주었으니, 이것이 곧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들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고 자기들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곧 유랑인(流浪人)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진(秦) 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진한(辰韓)이라 한 것이다. 변한(弁韓)은 변한(卞韓)이라고도 하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변진(弁辰)으로 되어 있다. 《후한서》에,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진한(辰韓)과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이렇게 말했다.
"육국(六國)주D-003 중에서 한(韓) 나라가 가장 진(秦) 나라와 가까웠기 때문에 진 나라를 피해 망명하는 일은 반드시 한 나라에서 먼저 시작했을 것이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즉묵대부(卽墨大夫)가 제왕(齊王) 건(建)에게 「삼진(三晉)주D-004의 대부(大夫)들이 진 나라를 피하여 아(阿)ㆍ견(甄) 등지에 와 있는 자가 수백 명에 이릅니다.」 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증거를 삼을 수가 있다. 장량(張良)은 한(韓) 나라 사람으로서 진(秦) 나라를 복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동해(東海)로 달려와 창해군(滄海君)을 만나보았을 것이다. 이 창해로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한수(漢水)로 경계를 삼았을 것이니, 지금의 황해(黃海)ㆍ평안(平安) 양도는 당시 삼조선(三朝鮮 단군 조선ㆍ기자 조선ㆍ위만 조선)의 땅이었고, 한수(漢水) 이남은 처음부터 통솔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에서 창해(滄海)라고만 명칭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韓) 나라 사람들이 진(秦) 나라를 피하여 동으로 와서 이곳에 웅거하였으므로 그들이 자칭 그곳을 한(韓)이라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장량이 그들과 함께 진 나라에 복수를 하려 했던 것이다.
《한서》 교사지(郊祀志)에 '곡영(谷永)이 상(上)에게 아뢰기를 「진 시황(秦始皇)이 막 천하(天下)를 겸병(兼倂)하고 나서 서복(徐福)ㆍ한종(韓終) 등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많이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이내 도망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서복 이외에도 한종이 있었으니, 한종은 반드시 한(韓) 나라의 후예로서 장량과 함께 똑같이 진 나라를 원수로 여긴 자였을 것이다."
전진(前秦)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에,
한 효무제(漢孝武帝) 2년에 만방(萬方)이 모두 천하(天下)가 통일된 것을 칭송함은 물론, 천하가 태평하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머나먼 나라들이 여러 나라를 거쳐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이때 한종(韓終)의 후예로서 한치(韓稚)라는 성명을 가진 도사(道士) 역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는 곧 동해의 신선(神仙)으로서 천자의 성덕(聖德)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음에 감복되어 온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과 같다면 곡영(谷永)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변진(弁辰)도 반드시 그 뒤에 온 사람들이 세운 것인데, 그들이 모두 진(秦)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辰)이라 이름한 것이다. 구한(舊韓)은 이미 기씨(箕氏)에게 쫓겨났는데, 마한(馬韓)ㆍ진한(辰韓) 두 나라 사이에 별도로 변진(弁辰)이라고도 일컫는 변한(弁韓)이 있었다. 예컨대 마한(馬韓)이라는 이름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함으로써 얻어진 이름이고 보면, 쫓겨서 옮겨간 나라도 의당 별도로 그 국호가 있어야 할 것이요, 그렇다 치더라도 한(韓)이란 이름은 필연코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아마도 이 변한이라는 것이 바로 기씨(箕氏)에게 쫓겨간 구한(舊韓)의 후신(後身)이 아닌가 싶다. 변(弁)이라는 것은 혹 그 지명(地名)에 따라 지어진 이름으로서 마한과 구별하여 마한에 신속(臣屬)되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고하건대, 한(韓)의 땅은 낙랑(樂浪)의 남쪽 지역으로서 한(漢) 나라 때에는 판도(版圖) 안에 들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한(韓)이라 칭하게 된 것은 기씨(箕氏)에게서 비롯된 것인 듯하며, 기씨가 한이라 칭한 것도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혁장(韓奕章)에,
저 웅장한 한 나라 성을 / 溥彼韓城
연 나라 군사가 다 쌓았네 / 燕師所完
왕은 한후에게 / 王錫韓侯
추와 맥을 맡기셨네 / 其追其貊
하였고,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 선왕(周宣王) 때에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의 나라가 연(燕)나라와 가까웠다. 그런데 뒤에 위만(衛滿)의 침공(侵攻)을 받아 해중(海中)으로 천도(遷都)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해 왕응린(王應麟)과 고염무(顧炎武)가 모두 그 설(說)을 옳게 여겼으니, 그렇다면 한후(韓侯)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가 바로 기씨(箕氏)이다. 또 한혁장(韓奕章)의 '그대 선조를 잘 계승하게 하노니[讚戎祖考]' 한 대문과 '선조로부터 명을 받아 이 오랑캐들의 군장이 됨으로써[以先祖受命 因時百蠻]' 한 대문만 보더라도 여기서 말한 선조가 어찌 기자(箕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한(韓)이 과연 희성(姬姓)의 나라로서 진(晉)에게 합병(合倂)되었다면 연(燕) 나라 군사가 그 성(城)을 쌓았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정현(鄭玄)의, 평안(平安)한 시대에 백성들이 쌓은 것이라고 한 말은 천착이다. 왕숙(王肅)은,
"탁군(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
하였으니, 그의 의도는 정현의 말을 비난함과 동시에 한(韓)이 맥(貊) 등과 서로 연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왕부(王符)의 설에 의거하면, 한(韓)이 연(燕)의 동쪽에 위치하여 맥(貊) 지역을 통솔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추(追)는 전유(前儒)들도 자세히 알지 못한 이가 많기는 하나, 이것이 예맥(濊貊)의 부속(附屬)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 시(詩)의 맨 첫장에 '양산(梁山)'을 일컫고, 이어서 '환히 트인 그 길을 따라 한후가 와서 명을 받네.[有倬其道 韓侯受命]'라는 대문에 대하여 의당 '한후가 왕에게 나아가 조회(朝會)하고 명을 받아서 이 길을 따라 돌아갔다.'고 해석했어야 할 터인데, 정현은 양산(梁山)을 가리켜 한(韓) 나라의 진산(鎭山)이라 하였고, '환히 트인 그 길을 따라'라는 대문의 길[道]에 대해서는 모씨(毛氏)ㆍ정씨(鄭氏)가 다같이 도덕(道德)의 도(道)로 해석하였으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조선(朝鮮)에 대해서는 《사기》에,
"해가 뜨는 동녘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호칭한 것이다."
하였고, 그 색은(索隱)에는,
"조(朝)의 음(音)은 조(潮)이고 선(鮮)의 음은 선(仙)인데, 거기에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동사보감(東史寶鑑)》에,
"조선(朝鮮)의 음은 조선(潮仙)인데, 산수(汕水)로 인하여 명명된 것이다."
하고, 또,
"선(鮮)은 명(明)의 뜻인데, 이 지역이 맨 동녘에 있어 해가 맨 먼저 밝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조선(朝鮮)은 열양(洌陽)의 동녘인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는데, 열양은 연(燕) 나라에 소속되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며, 열(洌) 또한 물[水] 이름이다."
하였다. 해내경(海內經)에는,
"동해(東海)의 안[內]이요, 북해(北海)의 한 귀퉁이에 조선(朝鮮)ㆍ천독(天毒)이라는 나라들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에게 무척 친근하고 남을 사랑한다."
하였고, 그 주에,
"조선이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요, 천독이란 곧 천축국(天竺國) 귀도해(貴道海)인데, 이곳에는 문자(文字)가 있고, 금은(金銀)ㆍ전화(錢貨)ㆍ부도(浮屠)가 이 나라에서 나온다."
하였다. 《사기》 화식전(貨殖傳)에,
"연(燕) 나라는 동쪽으로 예맥(穢貊)ㆍ조선(朝鮮)ㆍ진번(眞蕃)의 지리(地利)를 통괄(統括)했다."
하였다.
양웅(揚雄)의 《양자방언(揚子方言)》에 의하면, 연(燕)의 외비(外鄙)는 조선(朝鮮)ㆍ열수(洌水)의 사이라 칭하고, 연대(燕代)는 조선ㆍ열수의 사이라고도 칭하며, 연의 북비(北鄙)는 조선ㆍ열수의 사이라고도 칭하고, 연의 북교(北郊)는 조선ㆍ열수의 사이라고도 칭하며, 연은 조선ㆍ열수의 사이라고도 칭하고, 북연(北燕)과 조선의 사이라고도 칭하며, 연의 동북쪽은 조선ㆍ열수의 사이라고도 칭하여 대체로 조선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열수를 아울러 언급하였으니, 조선은 옛날에 연(燕)의 강역(疆域) 안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다른 외이(外夷)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자가 주(周) 나라를 피하여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조선은 옛날 영주(營州)의 외성(外城)으로 주(周) 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주었던 곳인데, 전국(戰國) 시대에는 연(燕)ㆍ진(秦)에 소속되어 요동(遼東)의 외요(外徼)가 되었다가 한(漢) 나라 초기에는 연(燕)에 소속되었다."
하였다. 지금 대략 이와 같이 변증하였으나, 인용한 고서(古書)가 매우 모호한 말들이 많아서 통창(通暢)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이를 보는 이가 잘 연구해 보면 그 대개(大槪)를 알게 되어 전사(前史)의 의심난 점들을 변석(辨釋)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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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자 단군(檀君)의 후손이 당장경(唐藏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당장은 문화현(文化縣)에 있는데 여기서도 단군이라 호칭하였으니 단(檀)은 곧 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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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단군 조선과 기자조선이 있었다.
사실 조선은 지명이고 단군의 단檀과 기箕가 국명이란다
후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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