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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 대해 예전글 재탕 하겠소. 모두 보시오.

2004.10.03 11: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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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근<역사학자> 오늘날 한국사 관련 교과서나 통사류 등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국가는 고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 그후 역대 왕조는 모두 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통설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는 고조선 멸망 직후가 아니라 무려 1,500여년이 지난 고려 후기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그 기록이 실려 있는 현전 최고(最古)의 문헌은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다. 과연 고조선은 한국사의 출발점인가? 朝鮮의 등장 “삼국유사”는 “고기”(古記) “단군기”(壇君記) 등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고조선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이에 대해 “제왕운기”도 “본기”(本紀) “단군본기”(檀君本紀)를 토대로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제(上帝) 환인의 아들 웅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가 바로 단웅천왕(檀雄天王)이다. 그는 손녀를 인간으로 변신시켜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했고 그 자식이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중국의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에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그는 1,038년 뒤인 은나라 무정(武丁)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았다. 시라(尸羅-신라)·고례(高禮-고구려)·남옥저·북옥저·동부여·북부여·예(濊)·맥(貊)·비류국(沸流國)은 모두 단군의 후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비교해 볼 때 단군의 계보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箕子 대 檀君 먼저 한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고조선의 시조는 단군이라는 점. 그리고 단군은 신성한 존재로서 중국사에서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고 있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개국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조선 이후 등장한 역대 왕조는 모두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점은 “삼국유사”보다 “제왕운기”가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라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13세기 이전에는 한국사의 출발점을 어느 나라로 인식하였는가. 고려 중기까지는 한국사의 시작이 기자조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문종 9년(1055) 7월조에 실려 있는 거란(契丹)에 보낸 국서중에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기자지국(箕子之國)을 계승했다.’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적고 있다. 인종 23년(1146)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 연표상(年表上)의 기사다. ‘해동(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 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삼국사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도 고려가 기자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고려사” 태조 16년 3월조에 실려 있는 당의 태조 책봉 조서 중에는 ‘권지 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은… 주몽의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곳의 임금이 되었고 기자가 번신(藩臣)으로 있던 옛 사실을 본받아 나의 교화를 넓히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인종 6년(1122)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도 그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선조를 기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1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 아니라 기자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기자조선이고, 우리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인식하였다. 실제로 고조선 이후 등장하는 고대 왕조들은 고조선에서 비롯했다는 계승 의식을 지니지 않았다. 고구려와 신라 왕실은 그 기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손(天孫)임을 자처하는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졌고, 백제 왕실도 부여·고구려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이처럼 이들 왕조는 각각 독자적인 기원 신화를 가졌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지배층에게는 자신의 나라가 고조선에서 비롯한다는 계승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역시 고구려의 후예를 표방했기에 지배층에서 고조선 계승 의식이 없었다. 오히려 “삼국사기”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은 기자조선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 13세기 이전 우리 선조들에게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은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을까. 檀君은 평양 일대 주민들의 조상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247)조에는 단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봄 2월 왕이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 이 기사의 선인왕검은 단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단군은 평양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된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충숙왕 12년(1325)에 쓰여진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다. 여기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지금까지 남은 사람도 당당한 사공(司空)일세. 평양군자(平壤君子)는 삼한(三韓) 이전에 있었는데, 1,000년 이상 살았다니 어찌 이처럼 오래 살고 또 신선이 되었는가. 땅을 나누어 다스려 그 후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네’라고 기록하여, 단군을 평양의 조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은 평양 지역을 개척한 시조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왕운기” 내용 중 구월산(九月山)에 단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서의 사당은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보이는 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월산 삼성사는 “제왕운기”가 편찬된 13세기에 이미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새나 사슴들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비를 빌면 영험이 있었다는 점이나 그 지명이 성당리(聖堂里)로 불렸던 것으로 보아 신성한 장소로 여져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단군은 평양의 시조임과 동시에 구월산 일대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3세기 이전에는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닌 평양 일대의 시조에 불과했다. 결국 단군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도 한국사의 출발점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라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 비로소 부각됐다. 그러나 이런 인식도 이 시기에 일반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보다 늦은 14세기에 제작된 ‘조연수묘지’에서 단군을 한민족의 국조가 아닌 단지 평양의 조상이라고 규정할 정도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고, 그 시조가 단군이라고 적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인용된 “고기” “본기” “단군기” “단군본기” 등은 한민족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주하던 고조선계 일부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자료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연수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14세기까지도 평양에는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연이나 이승휴 등이 평양 일대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본기” 등을 토대로 한국사의 시작이 고조선이고, 그 시조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운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箕子東來說은 조작 그것은 바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하니,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기자가 백성을 교화해 조선을 문명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 이른바 기자동래설은 위의 책들보다 더 이른 시대인 선진(先秦)시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기자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후 주 무왕 16년에 기자가 주 왕실에 조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서”(尙書)에도 기자가 주나라 무왕때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후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그로부터 홍범을 배웠다고 돼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기록 어디에도 기자가 동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대(漢代) 이전의 문헌들에서 기자는 단지 덕과 학문을 지닌 어진 인물로 묘사되었을 뿐 조선과의 관계, 즉 기자동래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요컨대 선진(先秦) 문헌들에는 기자와 조선의 관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한대 이후 기록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자동래설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기자동래설이 후세에 조작됐을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자는 조선에 온 적이 없다. 결국 기자동래설은 한대에 와서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중국인들은 왜 기자동래설을 조작했을까 한 무제(武帝)는 기원전 108년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진번·임둔 두 군은 설치 20년만에 폐지되었고, 그 일부 지역은 기원전 82년에 낙랑·현도에 통합되었다. 더구나 현도군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75년부터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동북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 멸망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것이 기자동래설이었다. 이들은 당시 동북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조선을 항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중국인인 기자를 조선의 통치자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이런 조작의 기저에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대 중화주의자들은 기자동래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설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즉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한대 이후에 편찬된 역사서에서는 갑자기 기자동래설 관련 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후한서” “동이열전”의 “옛날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에 피난하였다.… (기자로 인해) 동이(東夷)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3방(三方 : 西戎·南蠻·北狄)의 풍속과는 다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분연히 9이(九夷)에 가서 살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이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라는 기사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풍속이 어지러워지자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문명국가로 그릴 정도였다. 고려의 箕子 신봉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후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고려 숙종 7년(1102)에는 예부(禮部)에서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자에 대한 제사가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고려 왕조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삼국사기”는 기자가 주 왕실의 봉함을 받은 뒤부터 우리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게 이르렀다. 즉, 국가차원에서 기자조선은 한국사의 출발점이며 그 시조인 기자가 민족의 시조임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때 와서 한대 중화주의자들의 견해를 토대로 기자를 국조(國祖)인 동시에 문명을 개화한 군주로 인식하는 소중화주의자들의 기자상이 성립되었다. 고려 후기의 소중화주의자들도 기자동래설을 그대로 믿었다. 그 단적인 사례는 이승휴가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신의 저서 “제왕운기”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郡王開局年代)편 첫머리에서 ‘요동에 별천지가 있사오니 중국 왕조와 두연(斗然)히 구분되며… 경전착정(耕田鑿井) 어진 고장 예의 집, 중국인들이 이름지어 소중화라’고 자랑스럽게 노래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연의 경우도 이런 사고방식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흔히 일연을 김부식과 달리 자주적 인물로 알고 있는데, 그 역시 소중화주의자에 불과하다. 이는 그의 “삼국유사” 서술 방식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단군계의 국가활동보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한으로 연결되는 중국계의 국가활동을 더 큰 비중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마한은 기자조선의 후예가, 진한은 진나라의 유민이 세운 것으로 기술하는 등 삼한의 주도세력을 중국계로 파악한 것은 일연의 소중화주의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모든 사실을 기술할 때 그가 신봉한 중국측 기록을 주요 자료로 삼고, 국내 자료는 이를 보완 설명하는 주석으로 처리하는 정도로 이용한 것에서도 그의 소중화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일연이나 이승휴와 같은 소중화주의자들이 기자동래설을 신봉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화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오히려 자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 문화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우리의 문화수준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조선의 등장 이런 의식을 지닌 일연 등이 우리나라도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부터 존재했던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자랑스러운 나라였다고 전하는 ‘고기’ 등의 기사에 주목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더욱이 마침 중국의 이상적인 제왕인 요와 순(舜)의 관계처럼 단군이 기자에게 선양했다는 기사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왕운기”는 “본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단군은)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을 지나 하(夏)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028년. 그 조화 석제(釋帝)이신 환인의 유전한 일. 그뒤 164년에 어진 사람(기자) 나타나 군(君)과 신(臣)을 마련하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과 기자의 선양관계를 보다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 즉위 50년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한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이렇듯 일연과 이승휴는 평양 일대 고조선계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등을 토대로 공자가 이상적인 인문(人文)의 시대를 열었다는 첫 성군(聖君)으로 칭송했던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가 건국되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요순의 관계처럼 단군에게 선양받은 기자에 의해 우리나라가 중국과 같은 문명국가, 즉 소중화가 되었다는 자랑스런 역사상을 성립시켜 놓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고조선 이후 등장한 나라들은 단군과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고기” 등을 따르더라도 부루와 주몽은 단군과 1,000여년 이상의 시차가 있고, 그 사이에 기자·위만조선이 존재하였기에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관련지을 수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역시 ‘단군기’ 등 단군 관련 기사가 실려 있는 고기(古記)류가 고조선계 일부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결국 일연은 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된 고조선계 일부 유민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부루나 주몽을 단군의 후손으로 만들어 버린 전승 기록을 토대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소화중주의자들은 왜 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 아닌 평양 일대 일부 주민의 전승기록을 근거로 한국사의 시작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이었다는 고조선상을 창출했을까. 그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승휴는 “제왕운기” ‘충렬왕조’에서 ‘천자의 누이가 대궐 살림을 맡고, 황제의 외손자가 세자(충렬왕)로 되니 조상으로부터 물려온 왕업이 다시 빛나네’라고 노래했듯 그 자신이 살던 시대를 고려 왕조가 중흥할 수 있는 시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세기를 원나라의 후원을 토대로 무신정권기를 마감하고 왕권복고를 이룬 고려 왕조가 계속 번영할 절호의 기회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당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정상적 사대관계가 아니었다. 사실상 고려는 원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원나라는 일본 정벌때 고려에 전함을 비롯한 군수품만이 아니라 군사 동원까지 부담시켰고, 철령(鐵嶺)과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땅을 빼앗아갔다. 또한 원 조정은 내정간섭을 일삼고 각종 명목으로 엄청난 공물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수천명의 고려 처녀들을 공녀라는 이름 하에 징발해 갔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승휴나 일연 등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잘못된 사대관계를 시정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것은 고려 왕조가 원과의 정상적인 사대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30여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심점을 필요로 하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연과 이승휴는 새로운 역사상을 창출하였다. 즉, 우리 역사는 중국사에서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고 있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한 내력을 지닌 단군이 개국한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고려를 비롯한 고조선 이후에 등장한 역대 왕조들의 정통이 모두 고조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상인 것이다. 그것도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 문화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었으므로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우리의 문화수준도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는 소중화라는 것이다. 결국 고려 왕조는 이런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만큼 원과의 관계에서 독자적 지위를 유지할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려 왕조는 원과의 사대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휴는 원종 15년(1274) 원나라에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갔을 때 세자(충렬왕)로 하여금 원 세조를 설득하여 고려가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 朝鮮이 고조선을 공인 이렇게 고려 후기에 일단 성립된 고조선상은 조선에 와서 더욱 확고해졌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원년 8월 경신조에 따르면, 조선 왕조에서는 개국 직후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므로 사전(祀典)에 등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정식으로 제사를 모시자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단군의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공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동안 받아들여지지 않다 태종 12년(1412)에 이르러 실행되었다. 이때 단군 제사는 단군의 도읍지로 여긴 평양에서 거행됐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기자는 국가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단군은 평양이라는 한 지역의 시조로 간주돼 국가 제사에서 제외되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단군은 비로소 국가의 제사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단군을 모시는 제사는 기자의 제사보다 격이 낮았다. 우선 기자사(箕子祠)에 단군이 합사(合祀)된 까닭에 기자는 좌북남향(坐北南向)하고 단군은 배동서향(配東西向)하였다. 또 기자에 대해서는 제전(祭田)이 따로 있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두번 제사지냈으나 단군에게는 제전이 없었고 봄·가을에만 제사지냈다. 그러다 세종 11년(1429)에 와서 독립된 단군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사는 봄·가을에만 올려 여전히 기자보다 제사의 격이 낮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단군조선은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존재가 된다. 성종 6년(1476)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성종 15년(1484)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이 바로 그 사서다. 이 책들은 국가 차원에서 편찬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인들의 역사인식에 미친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가령 명종때 박세무(朴世茂)가 편찬한 어린이용 교재인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도 단군이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기록된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결국 “삼국사절요” 등 관찬 사서들을 통해 고조선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는 역사상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기자가 단군보다 더 추앙받았다. 예컨대 조선의 국명부터 기자의 고국(故國)이라 하여 조선으로 채택되었다. 태조를 도와 조선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호를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조선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기자가 주 왕실에 의해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진 것, 기자가 홍범과 8조범금을 보급하여 그 문화적 업적이 뛰어났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태종 때의 제사의 격도 그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마침내 성종대에 들어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한 사림파가 대두하면서 기자 숭배는 극단화되었다. 즉, 기자는 이들에게는 명분과 의리의 구현자, 조선 도학(道學)의 시조, 왕도정치의 실천자일 뿐만 아니라 공자·맹자·주자와 같은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져 그에 대한 극단적 숭배가 행해진 것이다. 箕子와 기자조선이 중시되다 성종 1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서는 단군조선은 극히 소략하게 다룬 데에 비해 기자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 체계를 서술하였다. 기자-마한 중심의 역사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 그것이다. 17~18세기의 주자학자들이 이른바 ‘삼한(마한) 정통론’을 들고나오면서 단군조선은 국사 체계에서 재차 서자(庶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까지도 기자는 단군보다 더 추앙받았다. 이런 역사상은 일제시대에 와서 완전히 바뀌었다. 이때부터 중국인인 기자는 아예 무시되고 단군이 국조임은 물론 민족의 상징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원인이 민족정신의 쇠퇴에 있고, 그것은 사대주의에 의해 민족의 독자성이 침식당한 것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외래 문물의 영향이 적었던 상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는 단군과 고조선 연구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고조선상은 현재의 일부 역사학자와 재야학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자들은 한국사가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그 시조가 단군이라는 대전제는 인정하지만 부수적 문제들에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가령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라든가, 그 중심지가 요하 유역이 아니라 현재의 평양이라는 것 등이다. 요컨대 고려 중기까지 고조선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은 평양 일대의 시조에 불과하였다. 단군이 민족의 시조이며, 그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이 한국사의 시작이라는 고조선상이 성립된 시기는 고려 후기에 가능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런 역사상은 마침내 국가 차원에서 공인받기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성립된 고조선상은 사실(史實)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소중화주의자들의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20세기초 이러한 단군상은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다시 복원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자신들이 배척해야 할 소중화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해 단군조선은 말 그대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주류 역사학자들은 그들 견해의 정당성을 실증사학에서 찾으면서도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고조선 관련 기사의 성격 등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한 채 고조선의 건국 시기나 그 중심지가 요동인가, 평양인가 하는 등의 현상적 주제에만 천착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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