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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역사기록에서 식민사관의 잔재를 청산하여야 합니다.

징갤러(14.32) 2024.03.12 11:47:21
조회 133 추천 3 댓글 0

지금까지의 임진왜란 역사기록에서는 1593년 4월부터 1596년 까지를 명나라와 일본의 화해협상기간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1593년 7월부터 1596년 까지를 휴전기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제시대 일본의 압력으로 임진왜란의 기록을 왜곡한 대표적인 식민사관의 잔재입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4월 13일 부터 고니시가 평양성을 함락한 1592년 6월 14일 까지 조선이 반격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무너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592년 7월 8일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의 정예수군이 이순신함대에게 참패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일본 육군은 탄약과 탄알을 추가로 보급 받을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일본군에는 전투병력 외에 탄약과 탄알을 베낭에 메고 쫓아 다니는 보급대가 따라 붙어야 하는 것은 필수사항 입니다.

군대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므로 우마차로는 탄약과 탄알을 실어 나를 수가 없습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 때도 보급대(=지게부대 또는 노무부대 라고도 함)가 따로 있었음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때에는 오죽하였겠습니까?

임진왜란 당시의 보급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투에 소요되는 탄약과 탄알을 미리 계산하여 베낭에 메고 출발합니다. 중간에 탄약과 탄알을 보충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보니 선조가 워낙 빠르게 도망치니 정신없이 평양과 함경도까지 쫓아 갔으므로 이미 탄약과 탄알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평양성에 도착한 고니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탄약과 탄알이 바닥이 나고 있었음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입니다.

어쩔 수 없이 평양성에 주저 앉아 일본 수군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한산도 대첩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 입니다.

***

탄약과 탄알이 오지 못하는데 조총을 자랑하는 일본 육군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몰살 당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탄약고가 있는 부산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산도대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 야욕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라는 평가가 나온 것 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작정 퇴각하다가는 탄약과 탄알이 소진되고 있다는 정황이 탄로 나게 되어 일본 육군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일본 육군은 심유경과 50일간의 휴전협정으로 시간을 벌고, 그 휴전기간 동안 일본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퇴각방안을 협의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도 어쩔 수 없이 퇴각이 불가피함을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1592년 11월~12월 경에는 마침내 일본 육군 모두에게 부산으로 퇴각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졸저, 임진왜란 222쪽 이하 참조)

일본의 퇴각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말이 선조실록에 나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도대첩 이후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먼저 조선수군을 격파한 다음에야 조선육군을 노획 할 수 있다.
(平秀吉每言: 先破舟師, 然後可取陸軍=선조실록 1597.07.22 :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참조)

이 발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한 말 이라서 한산도대첩의 위대성과 그후 임진왜란의 흐름을 가장 잘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일본의 전략 실패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스로 인정하는 말 이기도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퇴각명령 이후 퇴각 명분을 찾기 위해 고민하던 일본 육군은 명나라가 참전하자 명나라 군대와 주거니 받거니 몇차례 전투를 벌입니다.
그리고는 한산도대첩에서 당한 굴욕을 되갚아 주려고 행주산성에 있던 권율장군에게 덤볐다가 오히려 참패를 하고 아까운 탄약만 더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명나라도 원하는 화해협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탄약고가 있는 부산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퇴각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이순신장군 덕분입니다.
한산도대첩의 대승이 없었다면 서해 바다를 통하여 탄약과 탄알을 보충 받고 군대 마저 보충받은 고니시부대가 쉽사리 평양성을 명나라에게 양보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나라의 참전이 임진왜란의 극복에 큰 도움을 준 것 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한산도대첩이 끝나고 5개월 정도가 지나서 대군을 보냈다는 것은, 명나라도 한산도대첩 이후 일본의 퇴각이 불가피함을 충분히 파악하고 나서, 대규모 지원병을 파견한 것 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명나라도 나름대로 전쟁의 진행 상황을 분석하여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기를 택한 것 입니다.
결국 일본 육군의 총 퇴각이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한산도 대첩 덕분이며, 명나라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하는) 일본 육군을 몰아 내는데 힘을 보태준 것 입니다.

따라서 1593년에 이루어 진 명나라와 일본의 화해협상은 허울만 화해협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탄약과 탄알의 추가 공급이 끊겨) 코너에 몰린 일본 육군이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서 부산으로 도망치려는 일본의 술책에 불과합니다.
그 후에 휴전이니 뭐니 하며 일본으로 철수한 것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이 한결같이 일본의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은 한산도대첩 이후 1596년 중반 까지 만 4년동안, 협상타결 조인식이 한번도 없었으며, 화해협상이 타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 또한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협상타결 조인식이나 협상타결 문서도 없이, 먼저 퇴각부터 하여, 이미 점령하였던 땅을 반납하고 나서, 뒤늦게 하는 화해협상은 없습니다.
일본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면서 말로만 화해협상 또는 휴전이 타결되었다는 식으로 허울을 쓴 것 뿐 입니다.

만약 협상타결 조인식이나 화해문서 하나 없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퇴각한 것이 정말로 화해 또는 휴전이라면, 이는 침략할 때에는 늑대나 하이에나에 불과했던 왜적들이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순한 양이 되었다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이는 유사 이래 전쟁사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일 입니다.


***
탄약고가 있는 부산으로 퇴각한 일본군은 탄약과 탄알을 재충전하고서는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제2차 진주성 전투), 일부 병력(약 2만명)은 이미 전라도로 진격하였습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제1차 진주성전투 패배에 대한 단순한 보복전이었다고 한 것 역시 전형적인 위장전술 입니다. 진주성을 거저 먹겠다는 대표적인 꼼수에 불과합니다.
고니시가 했다는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순국 선열들을 욕되게 하는 일 입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싸웠겠습니까? 고니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워 일주일 이상을 버텨 줌으로써 그나마 그 당시 전라도의 피해가 적었던 것 입니다.

고니시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잘 말해주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습니다. 잠시 보겠습니다.


***

선조실록 1593.07.20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이 해안 지역 상황을 아뢰며 구원군의 파견을 청하다.


"지난 6월 27일 이순신이 '부산포와 김해의 왜적선이웅천으로 옮겨 왔는데 그 수가 7∼8백 척은 족히 된다.' 고 했던 것은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웅천으로 몰려와 정박해 있던 왜적선들이 6월 23일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몰래 바다를 건너 거제도 경계로 부터 영등포·송진포·하청가이까지 가득 정박하고 있습니다.

이들 왜적들의 형세를 보건대, 왜적들은 수륙 양면 작전으로 호남을 침범할 뜻이 분명하므로 요충지인 거제도 한산도·견내량 등처에서 충청,전라.경상도의 조선수군이 합세하여 죽을 각오로 견내량을 막기로 작정하였으나 임금이 계신 행재소가 멀리 있어 미처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금년 7월 4일에 구례석주에 있는 복병장 고부 군수 왕경조의 보고에 ‘왜적 2만여 기(騎)가 진주로부터 곧바로 악양창으로 와서 분탕한 다음, 점차 우리 군사가 매복해 있는 곳으로 나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왕경조의 보고에 의하면 또 '흉악한 왜적이 우리 군사가 매복하고 있는 10여 리 밖에서 분탕질을 친 뒤에 진(陣)을 치자, 지키던 우리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지킬 방법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왜적이 가까와지자 매복한 우리 군사들이 풍문만 듣고 모두 도망쳐 버리니 전라도가 와해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급히 조치하여 정예 군사를 많이 보내주십시요."

***


그러나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바다를 통하여 전라도로 향하던 일본수군이 7~8백척을 동원하여 견내량 바로 직전인 거제도 북쪽까지 진출했다가 견내량을 지키는 조선수군에게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덤벼 봤자 한산도대첩의 참패와 똑 같은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면 일본 수군 장수들도 머리는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일본수군이 학익진에 두번 속을 줄 알았더냐? 하면서 그대로 도망친 것 입니다. 한산도대첩의 학습효과 때문 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난중일기 1593년 6월 28일, 7월 3일, 7월 5일에도 상세하게 적혀 있고, 이순신장군이 임금에게 보고한 축왜선장(1593.07.01) 진왜정장(1593.08.10)에도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축왜선장, 진왜정장은 이충무공전서에 나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 육군 장수들이 일본 수군 장수들을 심하게 질책(성토)하자 일본 수군 장수 하나가 벌떡 일어나 "내가 계급장을 떼어 너에게 줄테니 네가 직접 일본수군을 지휘하여 이순신함대를 격파해라"고 하자 그만 모든 일본 육군 장수들이 아무 말 못하고 일시에 조용해 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자 남해바다를 통하여 전라도로 탄약을 보급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또 좌절되었습니다.

<먼저 조선수군을 격파한 다음에야 조선 육군을 노획 할 수 있다> 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이 또다시 재현된 것 입니다.

즉 한산도대첩에 이어 두번째로 시도한 조선수군 격파 시도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것 입니다.


그러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이미 전라도로 진출한 육군 선발대 마저 불러 들이고 부산으로 퇴각합니다.

그리고는 일부병력(약 4만명) 만으로 다시 쳐들어오기 위한 교두보 즉 부산포(정확히는 울산~부산~안골포) 만을 남긴 채 일본으로 철수합니다.


이는 이순신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입니다. 명분만 홰해협상에 따른 퇴각이라고 했을 뿐 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명나라 장수들도 잘 아는 내용이지만 명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이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으로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에게 강하게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을 가지고 후대의 역사가들이 화해협상이었네, 휴전이었네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 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부산으로 도망치기 위한 꼼수를 화해협상이라고 추켜 세워준 것이고, 탄약과 탄알을 육군에게 공급할 방법이 없으니까 바다 건너 일본으로 도망친 것을 휴전이었다고 우리 스스로 우대해 준 것에 불과합니다.


일제시대에는 1,2차 세계대전으로 탄약과 탄알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부각된 시대입니다.

당연히 임진왜란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한산도대첩으로 인한 일본의 가장 큰 타격은 일본 육군에게 탄약과 탄알을 공급할 길이 막혔다는 사실이다.) 라고 써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군량미를 비롯한 보급품의 조달이 어려워 졌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탄약과 탄알의 공급이 끊기면 일본 육군은 무조건 퇴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보급품의 공급이 끊겼다 하면 당분간은 현지 조달이 가능하므로 즉시 퇴각할 것 까지는 없다는 식으로 상황을 호도하여 화해협상이 가능했던 것처럼 유도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는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식민사관의 잔재 입니다. 시급히 잘못된 역사기록을 바꾸어야 합니다.


***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일본의 화해정책이 거짓이며 재침을 위한 교묘한 계책이었음을 이미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발퀴즈 : 일본의 화해 정책이 거짓이었음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일까요? 선조수정실록보다 약 50년 정도가 빠릅니다. 정답은 맨 뒤에 나옵니다.)

<선조수정실록 1596.12.01 평행장(고니시)과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의 교묘한 술책을 사평하다.> 에 나오는 글 입니다. 잠시 보겠습니다.


...중략... 일본이 화의를 위하여 왕래한 것은 중국 사람의 뜻에 거짓으로 응하면서, 사실은 교묘한 계책을 실행하여 중국 군사들을 지치게 하고 우리 나라 군사를 피로하게 한 뒤에, 이미 휴식을 취한 일본의 군사들을 재차 출병하고는, 중국 황제를 성나게 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을 오게 함으로써 일본은 군대를 바닷가에 주둔시킨 채 주인이 객을 기다리는 전술로써 필승의 계책을 삼으려는 것이었다...이하 생략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약 50년정도가 지난 후에 작성된 것으로서 사관이 단독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정실록청을 신설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수정작업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중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만은 비교적 당파싸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분야로서, 당시 조선조정의 중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기록이 존재함에도 오늘날의 역사서 등에서 화해협상, 휴전기간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 입니다.

역사의 기록이 퇴보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잔재 입니다. 시급히 수정하여 우리의 자랑스런 임진왜란 극복 역사가 정상적으로 복원되기를 기원합니다.


***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의 역사는 {1592년 7월 8일 이후부터는 탄약과 탄알을 보급 받을 수 없게 된 일본육군이 어떻게 부산까지 퇴각하여야 하는가를 일본 본토와 상의하다가, 명나라가 참전하자, 명나라도 원하는 화해협상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부산으로 퇴각하였다}고 써야 합니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탄약과 탄알을 재충전하고는 전라도로 쳐들어 가다가 일본수군이 조선수군에게 막혀 견내량을 돌파하지 못하자 할 수 없이 다시 부산으로 다시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또다시 명나라와의 화해협상에서 휴전이 성립한 것처럼 명분을 만들어 일본으로 퇴각(작전상 후퇴)을 한 다음, 군사를 재충전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수군 격파전술 개발에 올인하였다} 라고 써야 합니다.


부디 빠른 시일내에 식민사관의 잔재를 청산하여 자랑스런 임진왜란 극복 역사를 후손들에게 들려 주기를 기원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개월만에 불리하기만 하던 임진왜란의 전세(戰勢=판세)를 단숨에 뒤집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이후의 임진왜란은 한산도대첩에서의 참패로 탄약과 탄알을 보급 받을 수가 없어 코너에 몰린 일본육군이 명나라와의 화해협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퇴각하는 일련의 과정이었을 뿐 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본의 화해정책이 거짓임을 지적한 선조실록 기록 3개를 뒤늦게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
1. 선조실록 1593.07.13 승문원과 심유경에 대한 주문 내용을 의논하다 ...중략...선조임금이 이르기를, "...중략... 중국 조정으로 하여금 거짓 화친(원문:詐和) 으로 틈을 엿보고 기회를 노리는 왜적의 간상(奸狀)을 알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 
 2. 선조실록 1593.07.18 : 승문원이 경략에게 화친을 거절하고 대군을 보내 달라 청하자고 아뢰다. 승문원(承文院)이 아뢰기를, ...중략...그러니 간사한 왜적(奸賊)의 믿을 수 없는 거짓 화친하자는 말(원문:詐和)을 받아들이지 말고 급히 대군을 보내어 제때에 무찔러 물리치라는 내용으로 회답을 (명나라측에) 급히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3. 선조실록 1593.07.19 : 군량, 방어 강화를 요구하는 제독의 자문에 적을 공격해달라 회답하다 제독(提督)이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중략...(제독에게) 회답하기를...중략... 그러나 이제 왜적의 세력이 다시 신장(伸張)되어 진주가 함락되었으므로 백전 의장(百戰義將)들이 여기에서 다 죽고 사방의 조수(調輸)가 여기에서 다 소모되었습니다. 경상도의 완전한 성이 끝내 무너졌고 전라도의 요새가 텅 비었으며, 또 가는 곳마다 탕진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들이 한강(漢江)을 경계로 한다는 말을 퍼뜨려 왜적을 치러 내려가는 군사와 대항하고 국토를 분단할 뜻을 멋대로 부리려 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를 약하다고 깔보아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일본)의 믿을 수 없는 거짓 화친(詐和)임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증명되었습니다. ...이하 생략... 

**************** 
 이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 이때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화해정책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빠른 시일내에 역사기록에서 식민사관의 잔재(화해기간, 휴전기간 이라고 설명하는 역사 왜곡)를 말소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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