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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카페인 - 25

불멸에관하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10 21: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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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걸었다. 부디 데이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면서 걸었다. 


  도로를 좌우로 보이는 천막 앞에서, 사람들은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 앞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대화를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따가운 경계를 받아가면서 나는 길을 나아갔다. 아무런 대꾸,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으며 계속 걸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도로의 끝에, 그리고 차를 주차해 뒀던 곳까지 와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손 끝이 떨리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도 얼마 가지는 못할 것만 같아 보였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버텨야 돼.


  여기서 주저앉았다가는 데이지가 올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던 내 결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라도 나는 버텨야만 했다. 


  아.


  순간 바닥에 쌓인 눈에 미끄러져서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나는 차를 손으로 붙잡고 간신히 버텨내었다. 한숨과 함께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었다. 


  뭘 해야 하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눈동자에는 공허함이 당겨 있었다. 나는 힘 없이 차에 털썩 기댔다. 


  삐빅- 바로 그때, 차 문이 저절로 열렸다. 차에 기대서 그런 것일까? 나는 다시 차에서 몸을 뗐다. 


  깨끗하게 쓰고 엘사에게 돌려줘야 되는데. 


  엘사의 자동차에도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절망 섞인 한숨과 함께 차에서 조금 떨어졌다. 


  돌려줄 수는 있겠지?


  그래야만 했다. 다시 만나서 브루니를, 차를, 그리고 칩을 돌려줘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을 해야만 했다. 


  … 이상한 기억들. 


  이상한 꿈들은 여전히 매일 밤마다 내게 찾아오고 있었다. 이제는 깨어 있을 때마저 이상한 기억의 파편들이 내게 떠오르기도 했다. 그 꿈이, 그 회상이 계속될수록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허구일 수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칭할만했다. 동화 속에서는 그런 일이 있겠구나, 이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면 될 이야기였다. 


  “엘사…”


  하지만 그 이야기가, 엘사가, 브루니가, 이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위적인,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꿈과 현실에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도 엘사는 결국 나를 떠났다. 한 번도 아닌, 무려 세 번 씩이나. 어찌어찌 잘 해결되는 듯 싶다가도, 결국 마지막에는 그녀는 나를 떠났다. 속으로는 가지 마라고 울부짖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완전히 떠나 버리는 엘사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엘사는 나를 떠났다. 나를 포용하는 듯 싶다가도 결국 나를 밀어내 버렸다. 


  엘사는 왜 내 곁을 결국 떠났을까, 그것이 내 유일한 의문이었다. 그 질문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전해줘야만 했다. 나는 엘사를 필요로 했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엘사에게 그 말을 전해야만 했다. 


  어느새 내 머리와 어깨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눈을 볼 때마다 나를 차갑게 밀어내던 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작게 불을 피워서 눈을 녹였다. 눈이 내 눈물이 되어 옷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 길 위에도, 그 수많은 천막 위에도 어느새 눈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내가 길을 걸어도 무시하던 사람들은 자기 천막 위에 쌓인 눈을 치워내느라 분주해 있었다. 


  또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나는 내가 지내던 천막 앞에 올 수 있었다. 천막 위에 눈이 쌓여 있는 것은 다른 천막과 마찬가지였다. 


  많이도 쌓였네.


  천막 안에 들어가자 한껏 주저앉아 버린 천장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손으로 천장을 탁탁 쳤다. 그러자 눈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천막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꼭대기에 쌓인 눈은 수북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천장 한가운데에 쌓인 눈은 무슨 짓을 해도 쓸어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렸다. 내 쪽을 주시하는 시선은 없어 보였다. 


  안 들키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톡톡 건드렸다. 그 안에서 자고 있던 브루니가 깜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브루니.”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브루니가 작게 움찔거렸다. 


  “작은 불구슬 하나만 만들어 줘.”


  곧 내 손 위에는 아주 작은 불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기는 아주 작았지만 저 눈을 녹이기에는 충분했다. 


  흣, 차…!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 구슬을 힘껏 던졌다. 천막 위에 올라간 구슬은 눈을 천천히 녹여내기 시작했다. 


  한결 낫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오늘은 더 이상 쌓이지 않을 듯 싶었다. 


  “와… 저게 뭐예요?”


  “!!!”


  불청객이 또다시 나타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뒤돌아보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는 아침에 마주쳤던 어린아이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껏 긴장하면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를 하면서 가슴팍의 주머니를 꼭 쥐었다. 


  “불? 불 초능력이에요? 아니, 뭐라고 하더라, 그… 센티넬?”


  “... 센티넬?”


  낯선 단어였다. 나는 여전히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물었다. 


  “네. 엿듣다가 알게 된 건데 다들 센티넬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아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와 그 아이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눈을 흘기는 나를 보며 그 아이는 뻘쭘하다는 듯이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말했다. 


  “신고 안 하니까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되는데, 헤헤.”


  나는 그 말에도 섣불리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등을 돌렸다. 


  “아, 참.”


  아이는 다시 돌아가다 무언가 생각난 듯 등을 돌렸다. 


  “조심해요. 거기에 소중한 것이 있다고 대놓고 보여주면 어떡해요.”


  아이는 내 가슴팍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머니를 더욱더 감췄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브루니가 깜짝 놀란 듯이 주머니 속에서 파닥거렸다. 


  “보나 마나 아직 초짜인 것 같은데, 명심해요. 여기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구도 믿지 말아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혼자 알아서 잘 헤쳐 나가요.”


  나는 그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러다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천막 안에 돌아갔다. 


  “누구도 믿지 말아요.” 


  …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 꼬맹아. 


  그 아이가 한 말을 생각하니 한동안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엘사가 내게 다가오면서 묻고 있던 기억이 다시 슬그머니 떠올랐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혼자 알아서 잘 헤쳐 나가요.”


  그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고개를 흔들어서 생각을 떨쳐냈다. 나는 다시 천막 한구석에 누워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데이지가 어서 돌아오면 좋겠는데. 


  머리 뒤에 손을 깍지 끼고 누웠다. 깜깜한 천막 천장이 마치 내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 참. 브루니. 


  나는 주머니에서 브루니를 꺼내 내 가슴팍 위에 얹었다. 브루니는 잔뜩 화가 난 듯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와서 내 이마를 자기 발로 툭툭 쳤다. 나는 브루니를 타이르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 미안해.”


  브루니도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고, 내 이마 위에 자리를 잡고 발라당 누웠다. 


  “팔자 좋네.”


  브루니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내 이마에 자기 몸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대체 어디를 가야 엘사를 볼 수 있는 거니?”


  한탄을 한껏 담아 브루니에게 물었다. 하지만 브루니는 아무 행동도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기다리라는 거야?”


  브루니는 그 조그마한 자기 발로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 데이지도, 엘사도, 다 무사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피곤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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