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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54-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18 05: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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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내리쬐는 오후. 고요한 집 안, 엘사는 언제나처럼 창밖을 멍하니 관망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차가운 얼음이 담긴 글라스를 들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흩날리는 낙엽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단풍이 들어 태양빛에 황금빛 물결을 찰랑이는 나뭇잎들. 조금 쌀쌀해 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때마다 유리잔을 들고 한 모금씩 잭다니엘의 진한 향취를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면 또 다시 가슴속에 온기가 따듯하게 피어올랐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팔자 좋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동차의 배기음, 따르릉 따르릉 아이들이 울려대는 자전거의 종소리. 희미하지만 포근하게 코 끝을 간지럽히는 가을 향취, 심장 깊은 곳 어딘가를 자극하는 그 향기에 엘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여름, 아토할란의 첫날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번의 하룻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안나와의 기억들. 라푼젤에게 자신과 안나의 관계를 들킬뻔했던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하..”


그 날 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무척이나 길었고, 한 장 한 장 가슴속에 새겨진 찰나들이. 잊을 수 없이 화끈거렸던 체온이 아직도 어젯밤의 일처럼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안나..아그나르”


그 날의 기억.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자신의 팔을 베고 눈을 감았던 안나는 곁에 없었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써놓은 포스트잇 한 장만이 자신을 반겨줄 뿐이었다.


‘미안해요. 아침부터 다음 싱글 레코딩 준비가 있어서 먼저 나가볼께요! 밥 꼭 챙겨먹고 다음엔 세 번째 운전교육 하는 날 봐요! 그 동안 보고싶어도 꼭 참고 있어야 해요, 알겠죠?’


식탁위에 차려진 닭가슴살 샐러드. 엘사는 문득,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이 몸을 뒤덮는 듯 했다. 이런게 사랑일까?. 마치 가족처럼. 먼저 출근하는 연인이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떠나는 모습이라니. 자신도 모르게 실풋 지어진 미소에 한번 더 포스트잇 안의 글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읽어보았다. 맨 마지막, 공간이 부족해 날리듯이 써내려간 끝맺음 마저 귀여워 보였다.


‘-내 사랑 엘사에게’


“이러면 벌써부터 보고 싶어지잖아.”


그리고 지금.


가을 빛을 한껏 받아들이며 술을 홀짝이는 엘사의 청자켓 안. 그 포스트잇은 아직도 주머니에 고이 접어놓은 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흐르지 않을것만 같던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계절은 무더웠던 여름날이 아닌 그리움을 불러오는 가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보고싶었던 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안나가 출연하는 방송국의 스튜디오에 찾아가고 싶었다. 레코딩을 하는 작업실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가고 싶었다.


왜냐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으니까.


세 번째 운전교육은 다가오지 않을 기약만을 남기며 무기한 연기되었다. 소속사 측에서도, 안나에게도 모르겠다는 답변만을 받은 채 하릴없이 시간은 지나만 갔다. 안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날이 있은 뒤 며칠간 숙소 근처에서, 혹은 교외의 한적했던 정류장에서의 잠깐 뿐. 소속사는 조금씩, 하지만 자연스럽게 안나의 스케쥴을 빼곡하게 채워갔고, 또 한번의 성수기가 다가오자 이제 안나는 시간을 뺄 수 없을정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쓰읍...”


안나 아그나르.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연예계의 아이돌이었다. 왜 그토록 안나가 자신과 만나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었던 것인지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안나와 입맞춤을 하고, 안나와 몸을 섞고, 육체적인 쾌락에 눈을 뜬 지금. 자신은 너무도 안나가 보고싶었다. 마음속으로도, 상상만으로도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본능으로도. 자신는 안나를 갈구하고,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사랑이 식지는 않았냐고?


설마, 엘사와 안나는 매일 밤 새벽을 지나며 몇시간이나 전화를 했다. 그리운 연인을 만날 수 없기에. 엘사의 인생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핸드폰을 잡고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매일같이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타오르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물론 통화를 하던 도중에 안나에게 말하지 않은 채, 촉촉하게 젖은 팬티 속에 손가락을 넣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기는 했지만, 안나 역시도 수화기 너머로 미약한 신음과 함께 질척거리는 꽃잎의 은밀한 소음을 은근히 들려주었던 적이 있었고, 엘사는 그런 안나의 흥분된 숨소리에도 애써 모른척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새 목소리를 들으며 달아오른 자신들의 몸을 잠재워가는 것이 두 사람의 암묵적인 비밀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마음속에 걸리곤 했다. 무언가 속에 얹힌 듯이 무겁게 짓누르는 답답함. 영상통화로 보여지는 작은 화면속의 모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건지 참..”


그녀의 체온, 가까이 다가가면 느낄 수 있던 호흡의 촉감. 따듯하고 보드라웠던 손.


‘까드득’


엘사는 유리잔 속에 남아있던 술을 입 안에 털어내고는 얼음을 뽀득뽀득 씹어대었다.


“에휴, 말하면 뭐해. 나만 아쉽지”


‘드르륵’


‘탁’


창문이 닫히고, 지금 자신의 처지처럼, 창 밖 풍경 속 가을 향취는 얇은 유리창에 가로막혀 석양 빛만이 애처롭게 방안을 비출 뿐이었다.


다를 것 없이 한결같은 집 안. 바뀐 것이 있다면 적적한 방 안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포근하게 감싸주던 재즈음악이 이젠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엘사의 집 안에는 따듯하고 은근하게 퍼지던 조용한 트럼펫의 소리가 아닌. 안나의 전곡을 담아놓은 핸드폰과 티비가 연결되어 퍼지는 청조하고 아련한 그녀의 목소리가 악기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배고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요 근래 어떤 달콤한 술을 마셔도. 풍미가 깊은 음식을 먹어도 전혀 입맛이 도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엘사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거실의 테이블 위. 그곳에는 안나의 트레이닝복 사진이 프린팅된 손바닥만한 종이곽안에 담겨있던 프로틴 초코바가 무수히 많이 쌓여있었다.


“...그나마 이건 괜찮네”


며칠전. 담배를 사기위해 들렀던 편의점 카운터 밑에 전시되어 있던 프로틴 바. 그날도 별 입맛이 당기지 않아 대충 인스턴트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러 겸사겸사 도시락을 들고 계산을 위해 점원앞에 섰던 엘사는 자석에라도 끌린 듯. 고개를 내려 안나의 모습이 프린팅 된 광고표지와 짤막한 마케팅슬로건, 그리고 손 안에 담겨있는 프로틴 바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머니 속 담배갑 하나와 손 안에 들려있는 비닐봉지 속 가득찬 프로틴 바들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와그작’


“...씁, 그래도 맛이 없진 않네”


한입을 베어물고 담겨있던 종이곽을 들어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읽었던 영양성분표, 이제는 모두 외워버린것만 같이 익숙한 문구들, 그리고 안나.


‘달달하게 즐기며 아이돌의 몸매를 가져보세요!’


말풍선 속 담긴 상품의 슬로건. 그리고 말풍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면 보이는 안나의 모습, 고급스러운 트레이닝복을 입은채로 자신이 씹고있는 프로틴 바를 들고 있는 그녀. 엘사는 말 없이 우물거릴뿐, 한참 동안 눈동자를 정지되어있는 안나의 사진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재미없다.. 재미없어..인생이..”


금세 바 하나를 모두 먹어치운 엘사는 그나마 사라진 공복감을 느끼며 소파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침실의 침대보다는 불편하지만 자신의 몸에 딱 맞는 푹신한 소파에 길게 누워버린 엘사는 두 눈을 감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칙’


불을 붙힌 뒤 두어 모금을 빤 엘사는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재떨이를 끌어왔다. 소파에 드러누운채 담배를 뻐끔뻐금 피는 자신의 모습이 백수골방의 형편없는 한량과도 같다고 느꼈는지, 실풋 어이없는 미소가 피어나왔다.


끌어온 재떨이 너머 보이는 종이곽들. 매일 프로틴바로 식사를 때우느라 쓰레기들은 넘처났지만 엘사는 안나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곽들을 버리지 못했다. 그저 곱게 접어 차곡차곡 테이블의 한켠에 쌓아갈 뿐.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했던지. 엘사의 입꼬리에 걸려있던 비릿한 미소는 사라지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곤 혀를 찼고, 또 한 모금의 담배를 빨아들였다.


“..싶어..”


자신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 한 마디. 몸 속에서 꺼내지 못한 작은 단어는 그렇게 다시 한번 엘사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보고싶어..”

.

.

.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악프로그램를 녹화하는 방송국.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백스테이지의 복도에 줄지어 있다. 그 중에 한 명. 안나 아그나르 역시도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사이에 껴서는 누군가를 향해 밝은 미소와 함께 힘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양쪽 벽에 붙어 군인들처럼 정렬한 그들은 카메라와 조명장비, 혹은 종이뭉치들을 들고 걸어가는 스태프들을 향해 스스럼 없이 인사를 건네었고, 그들은 말 없이 손을 들어 흔들어주고는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힘 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나갔다.


“피디님 오신다!”


“피디님 고생하셨습니다!!”


“어...그래..안나 너도 고생 많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이돌이었다. 모두가 스타였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하게도 안나 아그나르, 그녀 본인이었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펑퍼짐한 이름모를 점퍼를 입은채. 헬쑥해 보이는 중년남성은 그런 연예계 스타들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무심하게 걸어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안나의 인사는 지나칠수 없었던 것인지. 그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지나치면서도 안나의 맑고 청조한 음색에 슬쩍 손을 들어 몇마디 말을 주고 받고는 평소처럼 터덜터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안나와의 짤막한 인사를 마치고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안나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우와 언니 부럽다..저 피디님 무섭다던데..”


그리고 은근하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선, 후배들이 모를리 없었다. 특별한 대접이라는 것이 정말 특별한 부분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스태프들이 남들을 바라볼때와 다른 자신을 향한 눈빛, 말투, 어조, 그리고 지금과 같이. 피디나 작가등, 다른 아이돌들은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들 마저도 그녀에게는 친근하게 대해 준다는 것 말이다.


“..하하..부러워 하지 않아도 돼”


그렇기에 안나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올려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보다 한참은 키가 작은 소녀, 바넬로피의 귀여운 미소를 마주하던 안나는 자신의 겸손한 말에 무언가 토라진 듯 볼을 빵빵하게 부푸는 소녀의 질투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바넬로피의 볼을 콕, 누른 뒤 푸우우, 소리를 내며 줄어드는 소녀만의 풍선을 기분좋게 바라볼 뿐이었다.


“스타는 다르네에에”


“무, 무슨 스타야아..”


피디가 지나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이 복도에서 인사를 건넬 스태프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순식간에 자신들의 대기실로 몸을 움직이는 수 많은 연예인들의 발자국소리와 소음들에 바넬로피의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안나는 누가 들은 것은 아닐지 난처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바넬로피 본 슈위츠. 안나보다 두배 이상은 작은 키를 가진 소녀는 안나가 쭈그려 앉아야만이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어린 아이였다. 연예인도 아닌 그녀가 방송국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방송국의 높으신 분의 자제였기 때문이었다. 어느샌가 방송국을 제 집 드나들 듯 걸어다니며 이젠 대기실에 슬쩍 들어가 오퍼레이터 심부름도 겸하는 바넬로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나역시도 어색했던 처음의 기억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친해져서는 이젠 스스럼없이 어린아이 특유의 솔직한 말들을 뱉어내는 바넬로피를 떨떠름한 미소를 가진 그대로 바라볼 뿐이었다.


“뭐 아무튼, 잘가요 언니!”


“그래 다음에 봐~”


앙증맞은 미소를 띄운채 손을 파닥파닥 흔들던 바넬로피는 또 다시 어디론가 깡충깡충 뛰어갔다. 거의 매주를 방송국에 녹화를 하러 올때면 한번즘은 마주칠 소녀였기에, 안나는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멀어지는 키 작은 소녀의 뒷 모습에 손을 흔들어주고는 아쉬움 없이 자신의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생 많았어, 이번에도 예쁘게 찍혀서 다행이다”


“아 고마워요..하..피곤해..”


검은색 밴 안, 옷을 모두 갈아입고 무대 화장을 모두 지운 안나는 의자를 뒤로 눕힌 채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요 근래 바빠진 스케쥴을 소화하는 그녀를 운전석에서 백 미러로 슬쩍 흘겨본 매니저는 그녀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씁슬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시동이 걸려 미약하게 떨리는 디젤엔진의 소리를 들으며 지하주차장에서 급하게 빠져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던 그는 언제쯤 자신의 차례가 올지 기다리는 듯 했다. 언제나 음악방송의 녹화가 끝난 뒤의 관계자용 주차장은 붐비기 마련이니까. 창문 너머 보이는 자동차들은 모두 키가 크고 뚱뚱한 밴들 뿐이었다.


“이제 집에 가는거죠?”


“응, 그렇지.”


“으아 빨리 쉬고싶어요오오오”


“하하 조금만 자고 있어. 어차피 지금시간에는 꽤 막힐 것 같으니까”


‘부르릉’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온것일까. 지금 매니저 본인이 운전하고 있는 차량이 안나가 탑승한 밴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지. 헤드라이트를 키고 계속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던 매니저는 먼저 줄에 합류해 거북이 걸음으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차량이 천천히 멈추고는 상향등을 두 번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매니저는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이름모를 동업자에게 보이기를 기대하며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저 자고있을께요오오..”


“그래 어서 자~”


천천히 움직이며 느껴지는 자동차의 진동. 기분좋은 퇴근시간임을 알려주는 그 진동에 안나는 시트에 몸을 더 밀착시키고는 자동차의 포켓에서 담요를 꺼내 몸에 살포시 덮었다. 이어폰을 끼고 잔잔한 음악을 튼 안나는 이제 잠깐동안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단잠에 빠질 참이었다.


“어어..저게 뭐야..”


지하주차장의 불빛들을 지나, 길 위로 올라온 뒤 보이는 석양빛.


그리고 매니저의 경직된 중얼거림과 함께 보이는 팬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나야 자..?”


“..아니요.”


음악방송의 녹화가 있는 날이면 언제나 방송국 앞, 지하주차장의 출구는 팬들로 붐비곤 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연예인들을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주로 여성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이 미는 남성 아이돌을 찾으며 기다리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기에 안나는 지금껏 퇴근길에서 팬들에게 손을 흔들일이 없었다. 자신의 팬들은 선선한 가을날 피켓을 들고 목이 터져라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어린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안나 아그나르!! 해명해! 당장!!”


“너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이어폰을 낀 채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려던 그녀, 안나 아그나르의 눈 앞에는 수많은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광경을 보며 할말을 잃은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해야 했다.


“안, 안나야 어, 어서 자”


“...아뇨..이게 대체...”


수십, 아니 수백명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담긴 피켓을 들며 자신이 타고있는 밴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사람. 분명 짙은 선팅에 보이지 않겠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손가락들은 안나의 심장을 쿡쿡 찔러오는듯한 알 수 없는 고통이 되어왔다.


“..아..아니...매니저 오빠..이게 뭐에요...?”


“...숙소로 가면 설명해줄게..”


“..네? 그게 무슨말이에요...?”


“우선 잠부터 자둬.”


-더럽게 안가네. 지하주차장에서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워에 섞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교통흐름과 정체된 자동차들을 보며 작게 욕짓거리를 내뱉은 매니저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자신의 밴을 따라 걸어오며 소리를 지르는 팬들을 흘겨보았다. 마음같아서는 창문을 열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도 물론이거니와 안나의 연예계 생활도 끝이나는 것은 불 보듯 뻔한일이었기에. 매니저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지 않고 중간에 껴들어서 지하주차장을 나와버린 스스로의 판단에 후회를 할 뿐이었다.


“안나 아그나르 빨리 해명해!! 어서!!”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하더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도,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거야아..”


“창문 열지마!! 내, 내가 다 설명할테니까! 절대 창문 열지마!”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했다. 이어폰을 귀에서 뺀 안나는 이름모를 팬들이 소리치는 외침을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내려 그들에게 의문을 던질 뻔했다. 백미러로 안나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바라보던 매니저는 안나의 손이 윈도우 스위치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홱, 몸을 돌리는 왁. 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왜..왜요..”


그 덕분에, 안나의 얼굴은 호기심에서 천천히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니가 우리 오빠한테 꼬리쳤다면서?!!”


“나쁜년아!!”


“...저, 전 그런적 없는데..오, 오빠 이게 무슨말이에요...”


‘부르릉’


교통의 흐름이 점점 풀려간다. 자동차가 움직일만한 공간이 나오고, 조금씩 차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 매니저는 황급히 악셀을 밟아 방송국에서 멀찍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팬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피켓들. 안나는 초록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피켓안의 글자들과 팬들이 외치는 고함들을 들으려 했다. 무언가 오해라도 있는것이겠지. 갑자기 꼬리를 쳤다느니, 나쁜년이라느니. 그건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매니저는 그런 그녀의 바램과는 다르게 거칠게 차를 움직이며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움직이려는것 같았다.


“오빠!!!”


“...가서 다 설명해줄게..미안해”


어느새 안나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촉촉해져 있었다.


그리고 눈물은 이내 방울이 되어 그녀의 볼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

.

.

“사장님 시작된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빨라”


작은 사무실, 사무실이라고 말하기에도 초라할 정도로 허름한 공간. 그곳의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책상과 앞에 놓여진 접대용 소파. 그곳에 흑단발의 여성이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손 안에 담긴 테블릿 pc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테블릿 pc를 건네어준 비서로 보이는 여성은 커피 두 잔을 각자의 자리에 내려놓고는 작게 고개를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방 문을 나섰다.


“....흐음..”


잠깐의 정적, 고요함을 깬 것은 담배를 모두 피운 뒤 테이블 위 재떨이에 비벼 끈 흑단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 안에 담긴 pc의 액정화면 속, 답답하게 얽히고 설킨 단어와 단어들의 퍼즐들을 모두 바라보고는 한숨같은 호흡을 작게 내뱉으며 그것을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 대각선에 무심하고 무표정한, 한치의 감정도 없이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의 또 다른 여성에게 슬쩍 밀어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쥐새끼를 잡으려고 치즈를 놓은 것 뿐이야. 동요하지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붉은 머릿결의 여성은 눈동자만을 내리깔고는 자신 앞에 환한 빛을 내는 액정화면을 내려다 보았다. 인터넷 뉴스, 충분히 재밌는 장난감으로서 사용될수 있는 미디어 매체. 그녀는 자신 앞에 놓여진 글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아주 굵은 글씨로 잔혹하게 쓰여진 제목부터.


‘아이돌 스타 안나 아그나르, 파렴치한 성생활 드디어 드러나.’


‘상대는 유명 남성 아이돌 B군. 스캔들이아닌 성범죄?’


‘충격 폭로 –B 군의 숙소에 드나들던 주황머리는 과연 누구?’


한참을 말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글들을 읽어가던 붉은 머릿결의 여성은 , 이내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경멸스러운 비웃음을 지었다.


“..이새끼들은 항상 수법이 똑같아..어디 학원에서 이렇게 가르치는건지..”


“..그래서 방법은?”


“...내 알 바야?”


‘쾅!’


붉은 머릿결의 여성이 코웃음을 치며 흑단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경멸스러움, 그리고 하찮은 것을 본듯한 무감정한 눈빛. 언제나 적응되지 않는 그녀만의 눈빛을 마주한 흑단발의 여성은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무신경한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말았다.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마..”


그러자 오히려 붉은 머릿결의 여성은 더욱 눈을 차갑게 쏘아대며 흑단발의 여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있은 뒤. 흑단발의 여성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의 시선에 못 이겼는지, 머쓱하게 입을 비죽거리며 또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윽고 사무실 안은 금세 담배연기로 점점 새하얗게 변해갔고, 붉은 머리의 여성은 그런것에도 개의치 않은지 눈을 감고 담배를 피워대는 흑단발의 여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방법이 없어?”


“...당신..아니 너랑 한 계약은 이게 아닐텐데”


“...그래 그때는 아니였지.”


흑단발의 여성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손바닥을 들어 마른 세수를 했다. 지극하게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또 한번의 호흡같은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손바닥을 내리며 감았던 눈을 뜨고는 붉은 머릿결의 여성에게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천천히 자신 앞에 놓였던 종이컵을 들어올렸다. 그 속에 담긴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씨발..”


처음으로, 붉은 머릿결을 가진 여성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것조차도 전혀 알아차릴수 없을정도로 미약하게. 하지만 흑단발의 여성은 익숙하게 그녀의 얼굴 표정을 알아차리고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방법은 있지?”


“...내가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한게 있다면 단 두가지일 거야.”


“..뭔데?”


“하얀 머리카락을 가졌던 꼬맹이를 만났던 거하고.”


“..그리고?”


“멜리사 화이트. 니 년을 손님으로 받았다는거.”


“운수가 좋네.”


흑단발의 여성이 웃음을 지었다. 더 없이 잔혹하고 비릿하게.


“난 그래서 너가 좋아...에리얼”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아가리 닥쳐”


에리얼이 입을 비죽이며 욕지거리를 뱉어내었다. 하지만 멜리사는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 에리얼의 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내고는 또 한번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멜리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꼭 이 얘를 데리고 가야겠어?”


“..당연한 소리를.”


에리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액정 화면을 가리켰다.


“넌 지금 호랑이굴에 붙잡힌 사슴을 구해주는 꼴이나 다름없는거야”


“..괜찮아”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것인지는 안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모든 계획은 그녀에서부터, 그녀를 위해서 시작했던 것이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럴 계획이었어..그리고.”


“그리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호랑이들을 다 죽이면 되는거 아냐?”


“..미친년”


그녀들의 눈은 더 없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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