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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18

ㅇㅇ(14.32) 2020.12.05 20:57:26
조회 346 추천 27 댓글 7



생각보다 자투리가 길어져서 이번화도 1일차 진입 실패...... ㅜㅜ


대신 셀프공약으로 다음주 주말까지 19화 쪄오겟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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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엘사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지 못한 채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다. 허나 알아낸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저 인간은 왜 매일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지?’라고 분개하던 중, 문득 찾아든 생각이었다. ......매일?


매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엊그제도, 또 그그제도, 그 저번 주도...... 농락당한 날들을 헤아리고 있자니 과연 빈도가 심상찮았다.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닌가?’


설마 이 짓도 개수작의 일종인걸까? 안나는 소품샵에 있는 산타클로스 수염을 종류별로 들고 와 일일이 남의 얼굴(※안나)에 대보고 있던 엘사를 째려보았다. 이거 안 치워?


당장 이 날의 사례를 들자면, 본 목적은 ‘마켓 부스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정하기 위함이었으나, 깨닫고 보니 안나는 엘사의 차에 실려 있었으며, 도착한 서점에서 인테리어 서적을 몇 권 들춰보다가, 점심때가 되자 근처 식당으로 발을 옮겼고, 식사와 함께 조금 전 구매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이후 소품샵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헤어질 즈음 엘사가 덧붙였다.


“그럼 내일 오전에 가게로 갈게요.”


뭐라고, ‘내일’? 안나의 내면에서 경고등이 반짝였다. 이거 봐, 수상하다니까!


“내일 또? 만난다고요?”
“오늘 산 장식으로 예행연습 해본다면서요.”


방금까지 계속 같이 얘기했는데, 생각 안 나요? 엘사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잡생각으로 가득해, 오는 내내 자동응답모드였던 안나가 기억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일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예행연습은, 어떻게 장식할 지 한 번 꾸며보겠단 소리겠지? 바로 내 가게에서? 그러자 이 운명적 만남, 아니, 만남적 운명에 발버둥 쳐볼 구실이 떠올랐다.


“다, 다시 생각해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괜한 일을 두 번하게 되는 셈이잖아요.”
“그러면 이 잡동... 장식들은 마켓이 열릴 때까지 어디다 보관하죠?”


안나는 ‘저희 집으로 가져갈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트렁크와 뒷좌석을 꽉꽉 메운 물건들을 보니 도로 들어갔다.


맞아, 나는 차도 없지, 참? 안나는 자조 섞인 코웃음을 흘렸다. 아니야, 그럼 집 앞까지 실어달라고 하면 되지! 안나의 입이 달싹였으나 이번에도 곧 잠잠해졌다. 그랬다간 옮겨주겠다고 나서는 엘사를 집 안까지 고스란히 들이는 상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건 더 안 돼! 감히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은 안나는 흐름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냥 내일 만나요.”


그날 밤 안나는 침대에 몸을 묻은 채 과거를 회상했다. 되짚어보니 명목만 달랐지, 실상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시장 조사를 한다고는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지 않나, 현장 시찰이라며 사나흘간 함께 강가를 걷지 않나...... 하지만 마냥 꿍꿍이가 있다고 치부하기에도 어려웠다. 둘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일과 관련된 취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람? 혼자 끙끙 앓던 안나는 결국 도움의 손길을 빌리기로 했다.


“이러다 정신 차리면 우리 집 문턱을 넘어오고 있는 게 아닐까?”


안나가 전화기 너머 라푼젤에게 물었다. 목소리엔 근심이 가득했다. 장장 한 시간가량, 앞서 있던 모든 일(그 중 오해를 풀기 위해서만 50분을 소비했다)을 전해들은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그 시간이 왔나......


“그게 뭔데?”
- 성교육 시간.


안나는 팝콘처럼 자리에서 뿅하고 튀어올랐다.


“내 집에 들어오면 어떡하느냐고 물어본 거잖아, 내 침대가 아니라!”
- 안나, 꼭 침대에서만 그 일이 일어나란 법은 없어.
“그러니까...... 아니, 됐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심리적 문제야! 알겠어? 지금까지는 일 때문이라고 쳐도, 집은 확실하게 사적 영역이잖아!”
- 그럼 문고리에 ‘Do Not Disturb’라도 걸어두지 그래?


안나는 ‘저는 룸메이드가 아니라 바텐더인데요?’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사를 머릿속에 그렸다.


“농담하지 말고 제대로 들어줘, 당장 내일 벌어질 수도 있다니까!”
-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서, 라푼젤은 (얼마 없는) 진지함을 모두 끌어 모은 목소리로 쟁점을 짚었다.


- 요컨대 대문을 넘기 전에 마음의 문부터 넘어와야 한단 거지?
“뭐? 아니, 왜 그렇게 되는 건데?”
-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네 말은, 그 사람이랑 가까워지기 부담스럽단 소리야?


안나의 내부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성측)‘당연하지, 그 인간 수상한 게 한두 가지야?’, (감성측)‘하지만 우린... ‘뭔가’ 생기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면 왜 별별 구실을 들어가면서까지 자주 만나려 하겠어?’, (이성측)‘왜 별별 구실을 대는지 모르겠어? 어디까지나 일의 연장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으려는 거잖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으면 그런 이유 없이도 진작 만났겠지!’, (감성측)‘속고만 살았니?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어?’, (이성)‘이건 초가 아니라 촉이야!’, (감성)‘니 잘 났다, 나쁜 새X야!’, (이)‘너는 꼭 불리하면 욕부터 하더라? 그거 진짜 멍청해 보이는 거 알아?’, (감)‘누가 누구보고 멍청이래, ‘멍청’은 욕 아니야? 진짜 XX XX XXXX... (이하 생략)’.


아수라장이 된 머릿속에서 안나가 힘겹게 결론을 끄집어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 ‘모르겠다’는 ‘싫다’랑 다르지.
“그렇다고 ‘좋다’는 뜻도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정체도 불분명한데다 무슨 의도인지조차 읽어 낼 수가 없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 은혼식 말이야, 그 땐 다신 안 볼 사람처럼 굴더니!
- 그러던 사람이 이제는 챙겨주려 애를 쓴다고?
“그래, 챙겨... 시비 건다는 말이랑 착각한 거지, 그렇지?
- 그냥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거야.


제삼자 의견을 들어보려고 전화한 거 아니었어? 라푼젤이 덧붙였지만, 이미 번민에 사로잡힌 안나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설마, 그럴 리가! 챙기기는 무슨, 일을 더 키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아니야!’라는 말 또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럼...... 너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결론적으로 네 가게는 아직 열려있고, 어째저째 손님도 늘었고, 홍보에 관심도 없던 네가 지역 행사까지 나가게 됐잖아. 그리고 온 동네를 들쑤시면서 같이 놀러 다니고 있네, 내 말이 하나라도 틀렸니?
“결과만 놓고 보니까 그렇지! 그것만 봐선 직접 푼 건지, 냅다 찍은 건지 알 수가 없잖아!”
- 이렇게 많은 문제를 전부 찍어서 맞힌다는 일이 가능하다고 봐?
“......”


그렇지 않아도 안나가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아냐, 이 일은 그만 생각하자. 라푼젤이 말했다.


- 어차피 본인에게 듣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이지 뭐.
“하, 설마 직접 물어볼 일이 있으려구.”
- 그러게나 말이야.


하하호호. 안나는 반쯤 흘려들었으나, 다음 날, 트리를 꾸미는 와중 엘사와의 거리가 심히 좁혀지자마자 곧장 입 밖으로 사념이 튀어나왔다. 너무 가깝잖아! 갑작스런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엘사는 쥐고 있던 오너먼트를 놓쳤고, 이는 옆에 있던 안나의 발등에 떨어졌다. 악! 하필이면 뾰족한 별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듬성듬성 꾸미는 것보다 보기 좋을 것 같아서......”
“장식 얘기가 아니라, 그래, 나도 모르겠다!”


설마 직접 물어볼 일이 있으려구~ 안나의 머릿속에서 태평했던 지난날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래, 있다!


“요, 요즘 우리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그러게요? 이게 무슨 남 일이야? 이 웬수를 번쩍 들어 문 밖으로 내던지고픈 안나였지만, 조금 전의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 기다려 봐! ‘그러게요’는 본인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단 소리잖아?


그래, 정말 몰랐으면 이 인간을 ‘그런가요?’라고 했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안나는 손에 들어온 실마리를 조심성 없이 훅 잡아당겼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엘사는 길게 ‘음’하고 내뱉으며 손바닥을 조물거렸다. 그 모습에 안나는 더욱 확신했다. 뭐가 있긴 있나 보구나! 어째선지 조급해진 심정에, 안나는 엘사를 몰아세워가며 대답을 부추겼다.


“알고 그랬어, 모르고 그랬어!”
“그, 그게......”
“빨리 말 안 해?”


엘사는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럴수록 안나는 종종거리며 따라붙었다. 더 이상 뒷걸음질을 칠 곳이 없자, 엘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싫으셨나요?”



*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 ......싫다고 하면 울 것 같았단 말야!”
“무슨 상관이래? 그냥 울라고 냅둬!”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라푼젤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 설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 응?”
- ......그렇게 어색한 상태로 트리만 꾸몄어. 두 시간 내내 말도 없이.
“다 꾸민 후에는?”
- 각자 헤어졌지.


뭐야? 라푼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 가득 떠올랐다. 아니, 그 인간은 그렇다 쳐도, 믿었던 불도저 너마저! 라푼젤이 앓는 소리를 내자, 안나가 쭈뼛쭈뼛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 더 이상 캐묻지 않을 이유가 있었단 말야! 엘사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있긴 뭐가 있다는 거야!”


딱 봐도 용기가 없구만! 라푼젤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래, 처음부터 수상했어! 그만큼 휘둘리는 것도 애당초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니 그랬겠지! 라푼젤은 지금의 칼로리바란스 사태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럼, 남은 문제는 바텐더 언니인데...... 하지만 이번 일로 밝혀졌듯, 안나에게 맡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깨달은 라푼젤이었다. 그렇다면 이 언니가 직접 나서주마!


그리하여 이튿날, 엘사의 바에 두 여자가 출몰했다. 라푼젤은 보란 듯이 엘사가 있는 카운터석에 엉덩이를 들이밀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사는 안나를 향해서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것들 보게? 라푼젤이 벌떡 일어나 태양 같은 자기 존재를 과시했다.


“저에게도 관심 좀 주실래요?”


이 다짜고짜 텐션 높은 목소리는, 설마? 엘사는 그제야 미친여자2의 존재를 알아챘다. 헉, 잔뜩 공포에 질린 엘사에게 라푼젤이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저 보고 싶었죠?”


얼핏 ‘저 여자가 바로 내가 말했던 크레이지 금발이야.’, ‘어째 똘기가 예사롭지 않더라.’라는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라푼젤은 굴하지 않고 엘사와 눈을 맞췄다. 음, 당신이, 그......, 몇 초간의 버퍼링 끝에 엘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라벤더 양?”


이게 아닌가? 팍 시들어가는 라푼젤의 표정을 보자, 엘사가 급히 발언을 수정했다.


“그럼 라즈베리?”


저도 몇 달 동안이나 루돌프라고 불렸답니다. 위안을 주려는지 올라프가 끼어들었다. 라푼젤은 안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복화술이라도 하듯 이를 다문 채 조곤조곤 말했다.


“너 아무리 얼굴을 밝혀도 그렇지 이런 금붕어 인간 어디가 좋다고...... 읍!”
“잠깐 화장실 좀 빌릴게요!”


안나는 라푼젤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억지로 화장실에 데려갔다. 나 집에 갈 거야! 손을 떼자마자 라푼젤이 소리쳤다.


“넌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잖아!”
“미안해, 아니, 내가 사과할 일이야?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여기 오자고 했어?”
“하긴, 올 필요도 없어 보이더라! 둘이서 같이 집에 걸어가든 기어가든 마음대로 해!”
“뭐? 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며, 그놈의 브라이덜 샤워인지 뭔지!”
“야, 나 없으면 당장 집에 들여보내기라도 할 것처럼 들린다? 알았어, 그럼 호텔로 꺼져줄게!”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아니면 너네가 갈래? 당장 방 잡아줘?”


왁왁, 화장실 문을 뚫고 들려오는 소란함에 올라프가 걱정스럽다는 듯 엘사를 바라봤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혹시 산재처리 되니?”


산재처리는 기각되었지만, 현재 여자화장실에 접근할 수 있는 직원은 그녀가 유일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엘사가 출동했다.


“조, 존경하는 레이디 여러분?”


엘사가 나타나자,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다행히 사람 분간은 하는 모양이네. 엘사는 내심 안도했다. 누추한 저희 가게에서 이러지 마시옵고, 다들 나가서 한탕하심이 어떨까요? 가급적 자극하지 않으려는 투로 엘사가 본론을 꺼냈지만, 채 반도 못가 안나의 외침에 가로막혔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요!”
“네? 여자화장실이잖아요?”
“그거 말고, 그 쪽이 들으면 안 될..., 여튼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빨리 나가요!”
“아냐, 나가지 마요, 바텐더 언니! 저 물어볼 거 있어요! 읍!”
“이게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나가! 나가지 마! 엘사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 갇힌 심정이었다. 어쩌지, 양자역학 조크라도 해볼까? 다행히 엘사가 입을 열기 전, 간신히 안나의 손에서 벗어난 라푼젤이 외쳤다.


“안나에 대해 어떻게...... 악!”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어떡해, 미친개야! 안나는 순식간에 라푼젤의 목에 팔을 휘감고서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사라졌다. 저, 한 칸에 둘은 좀 좁지 않을까요? 엘사가 농담 던지듯 말해보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영 까칠했다. 신경 꺼!


안나는 라푼젤을 칸막이벽에 밀어붙였다. (우당탕 소리를 들은 올라프가 엘사에게 긴급문자를 보내왔다: 경찰 부를까?) 그리고 머플러 페달을 밟은 피아노처럼 그녀에게 속닥거렸다.


“너 미쳤어? 나한테 죽고 싶어서 이래?”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이런다, 왜! 해결될 때까지 나한테 매일 밤 전화할 거였잖아! 나 애인이랑도 그렇게 오래 통화 안 해!”
“안 그래도 이제 안 하려고 했어, 당분간 이대로 모른 척 덮어두고 지낼 거니까!”
“뭐? 그럼 지금부터는 어장관리야?”
“어장... 이게 무슨 어장이야! 그냥 일시정지라고, PAUSE 몰라, PAUSE?”


안나가 열심히 허공에 대고 두 개의 작대기 표시를 그어보였다. 라푼젤은 그런 사촌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PAUSE는 무슨, PLAY 버튼이 있을지는 어떻게 알고?


“불씨가 있을 때 열심히 부채질을 해줘야 올라오지, 그냥 놔두면 꺼질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내 입장도 잘 생각해 봐, 괜히 허튼 소리 꺼냈다가 어색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어제 두 시간도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마켓은 자그마치 5일 동안이란 말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그래, 그건 그렇다 쳐. 하지만 그건 엘사가 마음이 없을 때 얘기이고, 만약 있으면? 해피엔딩쨘쨘 아니야?”
“그럼 나는 엄마한테 죽어.”


누가 등 뒤에 칼이라도 가져다 댄 것 같은 표정으로 안나가 말했다. 얘는 무슨... 하여튼 엄마 엄청 좋아해요. 라푼젤이 혀를 찼다.


“왜? 너 마마걸이야?”
“웬 헛소리야! 말 그대로 우리 둘이 만나기라도 하면 엄마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지금이 중세시대야? 집에 정해둔 약혼자라도 있니?”
“없는 거 뻔히 알면서 그딴 건 왜 물어!”


쾅! 안나가 주먹으로 칸막이를 후려쳤다. 부, 부수면 안 돼요...... 밖에서 들리는 구슬픈 목소리에 안나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후, 하. 호흡을 가다듬고서 안나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잘 들어, 당연히 이 얘기는 우리 엄마한텐 비밀이야. 사실 보이면 안 될 모습을 보여드려서 말이지, 그 뒤로 엄마가 우리 둘 사이를 호시탐탐 주시하고 계셔. 아니라고 잡아떼서 간신히 오해는 풀어드렸지만 만약 하나라도 꼬투리 잡히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서 정말, 날, 죽이실 거야!”
“뭔지 몰라도 다 니 잘못이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어찌됐건 마켓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생겨도 안 돼! 그 때는 차여도 마주칠 일 없고, 잘 돼도 크리스마스 이후니까 괜찮아! 그럼 엄마도 뭐라고 못하실 거야, 내가 애인이랑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부모님 댁에 안 갔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테니까!”


하지만 일장연설을 들려준다해서 딱히 감복할 상대방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돼? 시큰둥한 투로 라푼젤이 대꾸했다.


“그럼 그동안은 비밀로 사귀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건 그래.”


그러자 라푼젤이 쏜살같이 안나를 벽에 밀쳤다. 야, 너 뭐야! 라푼젤은 대답하지 않고 잠금쇠를 풀었다. 그리고 칸막이 문을 자신과 안나 사이에 두고 온 힘을 다해 밀어붙여, 그대로 안나를 벽과 문 사이에 가두었다. 이게 뭐냐니깐,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진짜! 졸지에 샌드위치의 햄 신세가 된 안나가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와장장창 난리법석을 구석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엘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가게 최초의 화장실 출입금지 처분은 당신들이 받게 될 것 같네요.”
“에, 에르싸!”


온몸으로 안나를 봉인하는 와중, 라푼젤이 힘을 쥐어짜 바텐더의 이름을 불렀다. 저 말이에요? 엘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 엘사가 너 말고 또 있냐! 라푼젤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잘 못 알아들었으니 그렇죠. 사람 이름은 똑바로 불러주시는 게 예의 아닐까요?”
“니가 나한테 할 말이야? 진짜 이런 한결같은 애 어디가 좋다고 그러지? (쾅쾅!) 미안, 미안하다니까!”
“그래서 한결같은 저를 왜 부르셨는데요?”
“그게...... (말하기만 해봐, 진짜 죽는다!) 아, 쫌, 가만히 있어봐!”


그렇게 손 놓고 있다 누가 채가도 나한테 불평불만하지 마! 그렇게 다그치자,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래, 이게 다 널 위해서야. 이렇게 사촌 일에 두 발 벗고 나서는 사람 어디 흔한 줄 아니? 라푼젤은 스스로(의 오지랖)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이어서 두 사람을 멍청하게 구경하던 엘사에게 물었다.


“안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소동을 피워 놓고 그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고 답할 것 같나요?”
“이, 이건 다 제 탓이에요! 아니, 또 은근슬쩍 말 돌리네. 우리 순진한 안나에겐 통할지 몰라도 저한테는 소용없어요!”


라푼젤은 ‘범인은 너야!’라는 듯이 엘사를 향해 검지를 겨누었다. 안나에게 딴 맘 있는 거 맞죠, 그쵸!


“따, 딴 맘이라뇨?”
“기회 줄 때 순순히 털어 놓으시지 그래요, 본인에게 직접!”
“......”


엘사는 대답 대신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향했다. 행여 놓칠세라, 라푼젤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이 리트리버가 진짜! 사냥감과 사냥개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확실히 찔리시나 봐요? 그나저나 궁지에 몰리면 도망치는 유형이에요? 딱 봐도 누구 고생길이 훤하구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사람 평가하는 것보다 낫다고 보는데요?”


엘사가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라푼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쉬쉬거렸다.


“뭔데 남의 사이에 끼어들어요?”
“그냥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것도 죄인가요?”
“거기다 딴 맘이 있네 어쩌네 쫑알댔잖아요!”
“없음 가만있지, 이러면 점점 수상한 거 알죠? 어차피 더 미루기도 애매할 거 확 말해버려요!”
“이게 누구 때문인데, 아직 때가 아니니까 그렇죠!”


저번에 실패한 만큼 이 쪽도 노력중이란 말이에요! 엘사가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허나 라푼젤의 인내심은 진작 바닥을 보인지 오래였다. 저번이라면 어제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내가 있단 말이지! 라푼젤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냥 지금이 그 때려니 해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잖아!”
“남의 일이라고 정말......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고서 이러는 거예요?”
“그럼요, 알 수밖에!”


너야말로 내가 당신들 일로 며칠 째 통화중인지 알긴 해? 라푼젤이 빽, 하고 외쳤다. 그러자 엘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여태 알고 있었어요? 전부?”
“여기에 당신 생각 모르는 사람 한 명도 없어, 너도 나도 얘도 다 알아!”
“안나도요?”
“그래, 그러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걸요, (내가) 기다리다 못해 안달이 났으니까!”


라푼젤은 안나가 있는 쪽으로 엘사를 떠밀었다. 엘사가 울상이 되어 입모양만으로 ‘지금? 여기서?’를 외쳤다. 라푼젤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반복했다. 엘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슬며시 눈을 감았다. 똑똑, 안나가 감금된 문 위로 엘사가 조심스레 노크했다.


“안나, 잠깐 할 말이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저리 꺼져! 안 들을 거야!”
“괜찮다고 하네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하지만 사건의 지평선을 이미 넘은 몸, 엘사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조심스레 펼쳤다.


“그, 그럼...... 안나, 저랑......”


잘 하고 있어! 코치라도 된 것 마냥 라푼젤이 엘사의 등을 두드렸다. 변변찮은 응원이었지만, 그런대로 도움이 되었는지 엘사가 힘내어 고백을 이어나갔다.


“저랑 친구로 지내주실 수 있나요?”
“좋아!”


이는 안나가 아닌 라푼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1초 뒤, 촐싹쟁이도 이 상황을 인지했다.


“뭐라고, 이 새X야?”


이번에야말로 안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저랑 친구해달라고...... 그런데 왜 욕을 하세요?”


그리고 그 쪽에게 물어본 거 아닌데요. 엘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한다... 라푼젤은 퀴즈 프로그램 사회자처럼 엘사에게 재답을 종용했다. 정말, 정말 확신하십니까?


“혹시 조금 전 문장에서 어떤 단어를 빠트린 건 아닌지 다시 잘 생각해보실래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래! 차라리 그럴 사람이면 좋겠다, 왜!”
“그 쪽 보고 한 말이 아니래도 자꾸 이러네.”


자랑이니? 그게 자랑이야! 엘사는 꽥꽥거리는 소리 따위에 안중도 없이, 문 뒤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안나에게 전했다.


“안나, 이렇게 갑자기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지난번엔 꽃다발도 그렇고, 괜히 이상하게 보였을까봐 조금씩 다가가려 한 건데....... 듣고 계신가요?”
“.......”

“혹시 이것도 부담스러우세요?”


안나는 알을 부수고 나오는 공룡처럼, 자신을 가둔 문을 쾅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밀쳤다. (앞에 있던 엘사는 덤으로 봉변을 당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화장실을 빠져나가려던 라푼젤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안나의 손이 어깨에 닿자, 라푼젤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유언을 남겼다.


“그냥 나는 오늘 차에서 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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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엘산나 진도 많이 빼서 쥬미는 뿌듯뿌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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