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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2)

ㅇㅇ(222.110) 2021.01.09 14:26:18
조회 354 추천 40 댓글 7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 않았다.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일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엘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것, 누리던 것, 그리고 원래 받았어야 할 것들까지도 전부 버릴 수 있었다. 아니, 차라리 포기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지키는 것은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자신의 신념까지 지키는 것은 어려웠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을 끝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엘사가 가장 힘들었던 건 가족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루나드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엘사에겐 가족이었고 유일한 혈육이었다. 부모를 잃고 자신을 여기까지 키워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와 만나게 된 것도 전부 루나드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더 간절했다. 가족이기에, 손녀이기에 자신이 바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이 이것 뿐인 것 같았다. 

안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루나드에게도 속죄할 수 있는 방법. 더 이상 엘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대체..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


“엘사!”


파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무실엔 정적만 흘렀다.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엘사가 준 서류들을 살펴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 

파비는 절대 할 수 없다며 엘사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엘사는 그저 무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그 정도는 각오했어요.”


“안나도 알고 있니?”


“..그건..중요하지 않아요. 이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요.”


“...이건 그냥 미친 짓이야! 꼭 너까지..”


파비는 차마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다시 삼켰다. 엘사는 자신을 희생해서 모든 일을 끝내려는 듯 보였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에 내려놨다. 그리곤 이미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리 네가 내 고객이라 해도 이건 할 수 없다.”


“아저씨.”


“아무리 회장님을 막고 싶다고 해도 꼭 이렇게 해야겠어? 지금 이건 같이 불로 뛰어들겠다는 소리야. 설령 잘 풀린다 해도 너 역시 책임을 피하지 못해!”


“...이미 늦었어요. 저도 프로젝트 책임자였으니까.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되든 저도 벗어나긴 힘들거에요.”


“엘사!”


“그 동안 생각해봤어요. 왜 회장님이 나를 프로젝트 책임자에 앉혔었을까? 가족이라서? 아니면 능력이 뛰어나서?”


“…….”


“전부 아니었어요. 할아버진...보험이 필요하셨던 거죠. 혹시라도 제가 배신할 것에 대비한 보험. 같이 절벽으로 떨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엘사, 지금 네가 하려는 건..”


“제가 해야 해요. 할아버지가 시작한 일이니까...가족인 저라도 책임을 져야죠.”


“…….”


“그러니 아저씨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전해주세요.”


엘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활은 시위를 떠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머진 그저 운에 맡겨야 했다. 

이 활이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모두에게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요행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아무리 파비가 싫다고 거절해도 엘사의 결심은 너무 확고했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에 파비 스스로도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엘사가 가져온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렌델 프로젝트에 관련된 서류와 루나드와 위즐튼은 뒷거래 계약서. 거기에 자필 서명까지. 엘사는 이 모든 증거들을 믿을 수 있는 검사에게 전달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비난받고 있는 해밀턴의 결백뿐만 아니라 루나드도 막을 수 있었다. 거기에 블랙우드에 대한 수사까지 시작될거고.

분명 루나드와 위즐튼은 빠지나가지 못한다. 서명이 있는 이상 그들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너무나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엘사와 위즐튼의 거래. 루나드와 위즐튼의 계약서를 받는 조건으로 응한 거래는 엘사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고 책임 소재를 따지다 보면 엘사 역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엘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인 루나드와 블랙우드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정말 이 방법뿐이니?”


“…….”


“엘사, 마지막으로 물으마. 이게 네 답이냐?”


“...네.”


“..알겠다. 일이 마무리 되면 연락하마.”


“최대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파비는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엘사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터였다. 죽진 않겠지만 죽는 것 이상으로 엘사는 고통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엘사는 그걸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사해요, 아저씨...몸 건강하세요.”


“…….”


엘사는 그에게 고객이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봐온 손녀 같은 아이였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그런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묶어 절벽에 던져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파비는 절망스러웠지만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길고 긴 침묵 끝에 엘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힘든 일을 맡겨 미안하기도 했지만 파비가 아니면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때문에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몰랐다. 엘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있으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엘사는 파비의 사무실을 나와 곧장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정장을 입던 엘사였지만 오늘은 후드와 청바지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쓴 채 다시 집을 나왔다. 거리가 사람들로 붐비고 노을이 지는 것을 보니 어느 덧 퇴근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엘사는 서둘러 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엘사?”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안나의 목소리에 엘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안나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면서.


“퇴근..했어요?”


“아직이요, 아무래도 오늘도 야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냥..당신 보고 싶어서.”


“뭐에요...갑자기...집에 가면 또 볼거면서..”


“그래도 보고 싶어서. 당신 목소리도 듣고 싶었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설레게 해요?”


안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내심 기분은 좋은 듯 엘사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엘사는 작게 웃으며 마침내 도착했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라도 당신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밥은..먹었어요?”


“아직. 당신은요?”


“그럼 내려와요. 같이 밥 먹어요.”


“어딜?”


“당신 회사 앞이에요.”


그 말에 놀라는 안나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안나는 금방 내려가겠다는 말과 함께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엘사는 허둥지둥 내려오는 안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당신과 마지막으로 먹는 저녁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쓰라렸지만 여기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안나에겐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엘사!”


숨을 몰아쉬며 엘사에게 다가 온 안나는 몇번이나 자신의 눈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까지 나체는 봤어도 후드를 입은 엘사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야구모자까지. 

안나는 신기한 듯 연신 엘사의 모자와 후드를 만지며 물었다.


“엘사? 한 번도 이렇게 입은 적...”


“음, 결혼 전에는 자주 입었어요. 결혼 후에는 당신한테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안 입었었지만.”


“..뭐에요..자꾸 사람 설레게..”


“그리고 데이트 하는데 꼭 격식 차릴 필요는 없잖아요.”


“..데이트?”


“당신이 말했죠? 연애부터 제대로 하자고. 그러니까 우리 데이트해요, 오늘.”


“엘사!”


“걱정마요, 다시 데려다 줄 테니까. 오늘 저에게 함께 식사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안나 해밀턴씨.”


순간적으로 귀까지 빨개진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잡았다. 

따뜻한 안나의 체온이 손끝에서 심장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안나는 예상치 못한 엘사의 행동에 놀라기도 했지만 먼저 다가와 준 엘사를 뿌리칠 수 없었다. 매일 밤 같이 잠들면서도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는데 자신을 위해 이렇게 찾아와 준 엘사가 고마웠다. 거기에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이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것 같았다.


안나와 엘사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격식을 차릴 필요 없는 편안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은은한 조명과 심플한 실내 장식이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저녁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침내 음식을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자 엘사는 걱정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나, 요새 제대로 못 먹었죠?”


“걱정마요. 나보다는 당신이 더 안 챙겨 먹잖아요.”


“난 잘 먹어요. 근데 최근에 보니까 당신이 좀 야윈 것 같았어요. 침대 위에서도...”


“에..엘사!”


안나가 조용히 하라며 황급히 엘사의 입을 막으려 하자 엘사는 농담이었다며 안나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안나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엘사는 아무 일 없다며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분명 엘사와 데이트 하는 행복한 순간인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불안할 일이 하나도 없는데 이 순간이 마치 금방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엘사.”


“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왜요? 있을 것 같아요?”


“아니...그냥, 좀 이상해서요.”


“이상해요?”


“당신이랑 이렇게 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조금 불안한거 있죠?”


머쓱한 듯 목을 쓸며 대답하는 안나의 모습에 엘사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안나와 엘사는 그 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에 떠밀려서, 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두 사람의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 엘사는 그것이 너무 미안했다. 

왜 좀 더 당신에게 시간을 쏟지 못했을까. 왜 당신에게 더 신경 쓰지 못했을까. 


잠깐의 침묵 끝에 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의 옆으로 갔다. 안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달콤하고 말랑한 입술이 안나의 입에 닿았다 떨어지길 몇 번. 조금은 뜨거워진 얼굴과 거친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가득찼다.


“..엘사..”


“...불안해요? 아직도?”


평소보다 낮은 엘사의 목소리에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손을 뻗어 엘사의 볼에 입을 맞췄다. 

불안감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엘사와 함께 이는 이 순간이 소중했다.


“이제 안 불안해요.”


“…….”


“정말이에요. 옆에 있으니까 이제..안 불안해.”


“안나..”


“요새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그런가봐요. 당신이 옆에 있는데도 바보같이..”


푸른 눈동자에 안나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갈색 머리와 곳곳에 보이는 주근깨, 붉은 입술과 짙푸른 녹색 눈동자, 아름다운 미소와 웃을 때 보이는 보조개까지. 어느 것 하나 엘사가 사랑하지 않는 게 없었다. 안나는 엘사에게 햇살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안나가 행복하길 바랐다.


사랑해.


누가 먼저 속삭였는지 모를 말에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분명 달콤한 키스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짭짤한 맛에 순간 안나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망설임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들어오는 엘사의 입술에 모든 것이 삼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엘사는 안나를 보내 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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