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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카페인 - 47

불멸에관하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12 22: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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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지!”


  다음 날, 나는 다시 그 밀실 안으로 돌아왔다. 뼈를 시리는 찬 공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데이지의 환상을 불렀다. 


  “데이지ㅡㅡㅡ!”


  내 목소리가 텅 빈 밀실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가만히 서서 데이지를 기다렸다. 어제, 그녀가 하려다 못한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가슴을 졸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 데이지?”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적잖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부끄러워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 어두운 공간 속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 안돼.”


  분명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환상이었다. 이 방에 모습을 드러내던 데이지는 환상이었다. 진짜 데이지는 바깥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환상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제발, 돌아와…”


  그럼에도 나는 그 환상을 기다리게 되었다. 왜 이렇게 간절하게 되어버린 걸까? 어차피 내게만 보이는 환상인데. 나는 내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나는 한참 동안 그녀를 기다리며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기다렸을까, 어디서부턴가 익숙한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데이지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환상에서 나오는 소리였을까? 아니, 어쩌면 엘사였을지도 몰랐다. 기대에 가득 차 고개를 들고 방 안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역시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분명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없었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 작던 한숨조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사실이 주는 공허함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두려웠다. 엘사를 찾아다니는 이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또다시 나를 내쳐 버리지는 않을까? 아니, 사실 내가 오기를 원치 않고 있어 하는 건 아닐까? 데이지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사실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렌델에서 내게 안녕을 전하던 엘사의 모습이, 그리고 심판부에서 내게 안녕을 전하던 데이지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떠올리기 싫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서 엘사에게, 그리고 데이지에게 가야만 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깊숙하게 박혀 있는 두려움이 나를 움츠리게 만들고 있었다. 엘사가 나를 떠나 버리고, 다시 엘사에게 다가갔지만 또다시 나를 내쳐 버리던 그 장면이 아직까지도 나를 주저앉히고 있었다. 


  “... 아파.”


  머리가 다시 한번 지끈거렸다.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이상한 위화감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기억이 불완전한 탓일까?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머릿속에 뿌옇게 차 있던 기억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한 존재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 데이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항상, 언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얼굴에 핀 작은 미소를 지우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환상이잖아.


  그녀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바깥에 나가면 다시 데이지를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너는 엘사가 아닌데.


  신기하게도, 주저앉은 다리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대체 네 정체가 뭐길래.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힘껏 주었다. 쓰러졌던 몸이 다시 서서히 일으켜졌다. 


  나를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거냐고. 


  눈 앞에 보이던 데이지의 형상 위로 엘사의 모습이 겹쳤다. 엘사와 데이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엘사의 길게 뻗은 새하얀 백발, 그리고 데이지의 묶어 올린 샛노란 금발. 둘의 머리카락만 제외하고 보면 그랬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운명일까? 겹쳐 보이는 머리카락이 마치 아렌델에서 보던 엘사의 고풍스러운 백금발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허상이 보이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허상은 언제 나타나기라도 했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 이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간질거림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지끈거림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는 잠시 멈추어서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복잡하던 내 머릿속은 어느새 엘사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발,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앞으로 한 발짝 걸었다. 어디선가 처음 듣는, 그러나 익숙한 흥얼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계속 묵묵히 걸었다. 주변의 풍경이 점차 화사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단풍으로 물든 나무가 자라나고, 성벽이 높게 솟아오르고, 폭포와 눈 덮인 산,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모두 다 같이 모여서 왁자지껄 흥얼거리고 있는 아렌델 시민들 사이를 지나쳤다. 저 앞, 아렌델 기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기대에 가득 차있는 엘사와 나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깃발은 언제나 펄럭일 거야!”


  “언제나 펄럭여!”


  “언제나 펄럭여!”


  엘사가 먼저 외치자 곧바로 나도, 그리고 시민들도 덩달아 소리쳤다. 엘사는 손을 모아 얼음 알갱이들을 한데 모으더니, 곧바로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그러자 마치 폭죽이라도 쏜 것처럼 얼음 알갱이들은 깃발을 화려하게 빛내주었다. 


  우리는 아렌델 시민들과 함께 작은 파티를 열었다. 파티의 매 시간마다 엘사와 나는 함께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함께 행복을 나누었다. 엘사는 항상 나와 붙어 다니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뒷정리까지 마치고 성으로 돌아왔다. 


  성 안에 돌아온 나는 잠시 내 방에 돌아왔다. 나는 머리를 풀어내리고, 옷을 갈아입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자 잠시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내 머릿속엔 엘사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다. 가만히 별 생각 않고 있다가도 엘사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만큼 나는 엘사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작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하나하나에도 고귀함이 묻어나는 이 느낌은 엘사가 분명했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오, 어, 엘사! 무슨 일이야?”


  “시간이 됐어, 안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사는 작게 웃으며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문득, 나는 엘사의 반응이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겉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저기, 엘사.”


  “으, 응?”


  저거 봐, 뭔가를 숨기고 있잖아. 


  “...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괜찮아.”


  엘사는 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 안나?”


  “응, 가자.”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였을까, 엘사도 다시 자신감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복도를 나아갔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된 엘사인데, 어떻게 다시 얻어낸 평온함인데. 엘사를, 그리고 이 평온을 다시 잃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사의 기분이 그저 좋지 못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77/81


부정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때의 충격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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