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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Arens of Sheffield 17~18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3.14 20: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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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5~16화



자유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며 자라난다.
  • 미국 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44.



캠프 '호크 블랙' 내에 위치한 cia의 블랙 사이트(미국 국외에 있는 심문 시설이자 테러범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의 새벽은 평소와 다르게 비명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심리분석관이자 고문관인 요원 카산드라는 신경이 이제 막 숫돌로 갈아낸 칼처럼 예리해져 있었다. 매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레드불을 물처럼 마셔가며 국가의 안보를 위협햐는 테러범들과 물리접 접촉으로 피가 터지고 멍이 든 정보를 얻어내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고문 분석만 해도 5년차인 그녀는 어떤 흉악범 앞에서도 시니컬해졌고, 설령 그들의 부하가 가족의 신변을 위협해도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AI가 아니었고, 휴식이 필요했다. 휴식이 필요해진 겸 지부를 국내로 옮겨 적어도 몇달 만큼은 지긋지긋한 고문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일 심문을 해야 할 트리플 A급 범죄자들의 파일을 훑기 전, 그녀는 메가라가 명령한 한 남자와의 미팅을, 한 때 그를 생포하는 작전을 지휘했던 잭 '프로스트' 라이언을 통해 이송 중이란 사실을 기억했다.



'내일 하루는 그 놈 심문으로 때우겠어. 씨발....'


카산드라는 책상 위에 둔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근 45시간 동안 자지 못한 그녀의 눈은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사람처럼 초점이 불명확했고, 그 밑으로 눈물로 지워진 화장처럼 다크서클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속은 커피와 레드불 이외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메스꺼움이 그득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고문을 통해 심문을 하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고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인과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새벽은 그녀가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또한 잭이 코드명 H를 데리고 온다는 명확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오늘, 그녀는 세 번째 레드불 캔의 따개를 비틀어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곤두세워진 신경이 심문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적을 것이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크든 작든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45.



간만에 눈이 오지 않는 오후였다. 올리비에는 마당에 무릎만큼 쌓여진 눈들을 삽으로 치운 다음, 창가에 의자를 두어 뜨개질을 하던 중이었다. 다섯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나뿐인 딸이 회사에서 돌아올 것이었고, 두 시간 뒤쯤엔 마트로 가 딸이 좋아하는 크림치즈를 구워 바른 랍스터를 하기 위한 쇼핑을 할 예정이었다. 며칠 간 자리를 비운 딸은 전화를 받을 때 두 가지의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거나, 피로에 지쳐 풀이 죽어 있거나. 올리비에는 딸의 친구에 관련된 일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지만, 딸은 재차 부정했다. 회사 상사가 딸을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생각은 올리비에 스스로가 부정했다. 딸의 성격 상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는 사람은 무조건 때려눕혀 놓았기 때문이었다.


똑, 똑


그 때, 초인종이 아닌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의자의 삐걱댐을 제외한 집안의 침묵에 금을 내었다.


"누구슈? 필립수우?"


올리비에는 딸이 자주 언급하던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문 밖에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올리비에는 저려오는 허리를 세운 다음 문 앞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가려다, 메가라의 충고에 조용히 의자에 앉았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창가를 드러낸 커튼을 쳤다.


'낮선 사람이 오면 절대로 열어주지 마요. 만약 인기척을 냈으면, 제가 알려준 곳에서 고무탄 총을 가지고 계세요. 그리고... 저에게 전화를 거시면 돼요.'


올리비에는 창가 밑으로 난 작은 서랍장을 천천히 열었다. 리볼버의 형상을 가진 고무탄 총이 딸려 나왔고, 올리비에는 약실을 돌려 고무탄의 장전을 확인했다.


"저기! 여기 초인종이 망가져서요. 새로 이사 왔습니다!"


문 밖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에는 새로 이사 온 이웃이 과연 '낯선' 이인지 구분하려고 했지만, 구분을 하려면 딸의 의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전화를 걸어 묻기에는 바쁜 그녀에겐 너무 사소한 문제였다. 올리비에는 뒤춤에 고무탄 총을 끼운 채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다시 문 앞으로 가 도어캠(현관문을 살피기 위해 설치하는 CCTV의 일종)을 확인했다. 순박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내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사 기념으로 인사 차 드리려고 왔는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그 초인종... 다시 한번 눌러 주겠나?"


도어캠의 사각엔 초인종이 들어와 있었다. 사내의 말이 사실인지 테스트 해보고 싶어서였다. 사내는 군말하지 않고 초인종을, 의심을 거두라는 듯 힘을 쥐어 눌렀다. 명랑한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올리비에는 한 층 경계심을 풀고 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미, 그리고 유럽 쪽의 혼혈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제 이름은 파울 세르난데즈인데...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내, 내 이름?"


"어차피 자주 만나시게 될 텐데, 이름 정도는 괜찮잖아요?"


'보기보다 당돌할 놈일세!'


올리비에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파울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써의 호기심이 생겼다.


"내 이름은 올리비에 그레이스라우."


"올리비에... 입에 착착 감기네요!"


파울이 케이크 상자를 올리비에게 내밀며 말했다.


"거... 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갈텨?"


"차요? 커피 있나요? 아직 이삿짐을 다 안 풀어서 커피를 좀 마셔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하루가 길어야 짐을 다 치울 수 있거든요."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했다. 올리비에는 가져온 케이크는 시기를 놓쳐 축하하지 못한 딸의 승진을 기념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두기로 하고, 간식용으로 구워 두었던 마들렌과 커피를 대접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파울도 거리낌 없이 안으로 몸을 들였다.




46.



"질문 하나 있습니다."


호크 블랙으로 가는 동안, 잭은 자신과 함께 심문을 진행할 요원들에게 침묵 조약을 지키라고 사전에 말한 바 있었다. 심문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만이 존재했다. '조국, 혹은 세계의 안보'가 그것이었고, 채 마감되지 않은 목재 가구의 나뭇가시처럼 일말의 사념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실제로 잭과 이전까지 그와 함께했던 심문 요원들은 잭과의 불문율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그 규칙은 복면을 쓴 한 요원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말해 봐."


"민간인 납치는 금기 사항 아니었습니까?"


요원이 옆에 앉은, 마대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수갑으로 채워진 사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평범하게 살던 사람을 갑자기 납치해 블랙 사이트로 끌고 간다는 것은, '조국'이라는 천장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활동한 요원에게도 속에서 켕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민간인의 정의를 얘기해 봐."


민간인? 요원은 서릿발 같이 차가운 잭의 눈빛을 피해 손으로 시선을 옮기며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간단한 단어 속에 채워진 매듭들은 풀어지지 못했다. 추상적인 의미를 답했다간 질책을 당할 것이었다.


"군인, 경찰관이 아닌 사람을 민간인이라고 해. 그리고 업계에서는 국가 안보에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지 않은...'일반인'으로 규정하고 있고."


"하지만 지금 이 자는 평범한 민간인 아닙니까? 정원사라는 직업이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16번의 폭탄 테러로 3명을 살해, 23명을 부상시켰다.)라거나 제프리 다머('밀워키의 식인종'이란 별명을 가진 미국의 연쇄살인범)가 가졌던 직업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우리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


"에이번, 에이번. 맞지? 농장에서 언제 수료를 받고 여기로 발령 받았지?"


낄낄대는 동료 요원들을 제지하며 잭이 물었다.


"6개월 됐습니다."


"6개월, 음. 좋아. 좋다고, 아직 배울 게 많은 신입이니까 이런 부당한 상황은 정의롭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



에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버리한 그일지라도 스스로 뿌리박은 정의가 있었고, 어느 영화에서 본 문구 하나는 그의 정의에 줄기를 틔웠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정의의 줄기를 베어내려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영화 있어? 아니면 최근에 봤던 영화라던가."


잭의 말에 에이번은 기억을 더듬어 좋아하는 영화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달](MOON, 2009년에 개봉된 SF 스릴러 영화)이었습니다."


"그 영화... 나도 인상 깊게 봤어. 다들 혹시 봤나? 니콜라이? 바리안?"


잭이 동료 요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본 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젓거나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난 떠오른 점이 하나 있었어. 한 개인의 희생은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냐. 왜냐, 더 나은 세상과 다수를 존재시키잖아. 트롤리의 테마도 이와 선을 같이한다고 봐. 겨우 한 사람, 그리고 이 지구를 통틀어 소수자들일 뿐이야."


잭의 의견은 에이번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에이번은 그 영화를 보고 '개인의 존재를 인정함에 따른 인류애'라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 마대자루를 쓰고 있는 자도 희생해야 마땅한 소수자이고, 아마 나중에 보고서 프로필을 보게 되겠지만, 네 생각이 124도 정도는 바뀔 거야."


지금 잔뜩 정의에 취해 둬. 잭이 말을 마치고 팔짱을 끼며 쪽잠을 자려다가, 다시 에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 사람, 민간인은 절대 아니야."









47.



"네 엄마."


막 포토맥 강을 건너 랭글리로 서버번을 운전하던 메가라는 불현듯 찾아온 전화에 복잡해졌던 생각을 잠시 풀기로 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애인도, 친구도 아닌 어머니였다. 메가라는 그녀가 마당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오후 햇살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은 어머니의 절반에 그쳤지만, 2년 전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관계는 돈독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직장인 랭글리와의 거리도 좁힐 겸 본부로 발령받기 직전 부동산을 통해 팰리세이즈의 매닝 플레이스 노스웨스트 도로변에 위치한 붉은 2층 벽돌집을 싼 값에 사 리모델링한 적이 있었다.



원래의 그녀라면 안보 요원의 특성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할 가구들만 배치해 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CIA의 분석국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그녀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휴스턴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았다. 휴스턴의 집을 처분했을 때, 그녀의 올리비아는 옛날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에 내심 아쉬워 했다. 하지만 메가라는 직장과 가까운 펠리세이즈로 이사함과 동시에 어머니를 데려옴으로써 자주 집에 들러 어머니와 함께 가족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꼴로, 올리비아는 메가라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했다.




늘상 있는 일인데다 식사 메뉴 혹은 쇼핑 내지 이웃간의 얘기가 올리비아의 주된 대화 주제였고, 수석 그룹에서 국장이 되었을 때도 이미 굳어진 가족과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메그, 아까 전에 손님이 왔다 갔단다.]


"손님?"


메가라의 머릿속에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안나 가족과 벨은 여행 중이었다. 필립스? 자주 전화를 거는 그였지만 그 또한 작업으로 바빠 찾아온다는 일은 없었다. 설령 찾아온다 하여도, 메가라에게 미리 연락을 남겨두고 대기했을 것이 분명했다.



"케이크와 편지를 주고 갔는데, 절대로 열지 말고, 네가 열길 바란다더구나. 아무래도 널 좋아하는 남자가 아닐까 싶구나."


직업병 특유의 의심이 피어났지만, 메가라는 올리비에를 믿을 수 있었다. 집안 곳곳에 숨겨 놓은 고무탄 총과 이밖의 방범 장치들을 외우게 했으며, 딸의 성격에서 옮겨진 특유의 예민함은 메가라에게 있어 소소한 행복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그렇고, 결혼은 언제 할 참이니? 밀랍수인지 필랍수인지 하는 총각은 언제 소개시켜..."


"아, 그 사람은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라니까요. 엄마, 좀..."


"아니면 오늘 찾아온 총각 좀 소개시켜 줄까? 너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전화기 너머로 주책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메가라는 어머니가 웃으시라고 잠시 시간을 내어 주었다.


"필립스는 여기 안 와요. 뭐... 제 장례식 때나 올 법한 사람인데."


"그래도 한 번은 시간 내서 만나 보렴."


"예, 예. 알겠어요. 아, 초록불이다. 이만 들어갈게요. 오늘 좀 바빠서요, 저녁은 혼자 드셔야 할 것 같아요!"









48.



밤 사이 안나는 벨이 한 응급 처치 덕분에 손바닥의 이물질도 상당히 제거해 곯아떨어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안나는 검은 숲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오두막의 들판처럼 푸른 생기가 아닌, 백년 전의 파스샹달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헤매던 그녀는 그만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거니 생각하고 일어난 안나였지만, 그것이 곧 아이의 팔뚝이란 것을 확인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안나는 본능에 이끌리는 것처럼 흙을 파내었다. 그리고 그 팔뚝의 주인은...


"눈사람은 트렁크에 못 싣는 거죠...?"


시야의 끝이자 창밖 너머에서 손을 턱에 괴고 엘사를 올려다보는 엘리사가 있었다. 안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숲, 그리고 엘리사를 보면 지난 밤의 꿈이 그다지 긍정적이란 느낌은 들지 않아서였다.


"안나?"


안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벨이 물었다. 벨은 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오전 내내 안나의 상태를 살피며 무언가를 꾸준히 읽고 있었다.


"아, 괜찮은 거 같아요. 지금은요."


안나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이! 그러지 말고 우리랑 놀 면 안 돼?"


창 밖으로 멜리사의 기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멜리사의 말대로 안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집채만한 이글루와 눈싸움을 위한 참호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밤에 실행했던 수술은 안나의 활동에 제약을 걸어 두었다. 스카가 보낸, 소련 시절 진행되었다가 폐기된 오메가 프로젝트에서 안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미안, 언니가 아직도 좀 피곤해. 대신 맛있는 걸 준비해 놓을 테니까 조심히 갔다와야 해! 언니도, 한나도!"


"그, 그럼 저... 크라세카크.."


"크란세카케? 언니! 엘리사가 많이 먹으려나 봐! 배에서 꼬로록 소리 들리지? 고생 좀 해!"


한나가 부끄러워하는 엘리사를 업으며 안나에게 소리쳤고, 안나는 애써 웃음으로 답했다. 네 사람이 버스에서 멀어져 숲속으로 사라지자, 이내 버스엔 남은 네 사람이 가진 심각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러니까... 내용을 정리하자면."


제인이 머리에 손을 짚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안나 씨의 손에서 나뭇가지가 자랐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제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개체 프로젝트를 한스 옆에서 지켜본 그녀로썬 잊어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에게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끔찍이 싫었다.


"안나, 요즘 일이 바빠서 몸살이라도 난 것 같구나. 최근엔 캠프 준비도 하고 그랬잖니."


이두나가 안나의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안나의 이마는 추운 로몬드를 고려하더라도 열이 불청객처럼 머무르고 있었다.


"사장님, 그리고 제인 씨. 이거 거짓말이 아니예요. 깜짝 쇼는 더더욱 아니고요."


벨이 식탁에 놓여진 둘둘 말린 천을 펼치며 말했다. 불에 타고 남은 것 같은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하얀 천을 검은 잿가루, 안나의 피를 배여놓았다.


"저희가 뜬금없이 나무에 불을 지를 리가 없잖아요."


안나가 두 손에 남은 검은 흉터를 내보이며 말했다.


"제인 씨는 알고 있었나요?"


이두나가 물었다. 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한스의 비서직을 맡았던 사람이었지, 연구원이 아니었다.


"모르는 게 당연해요. 아톤에서 가져온 정보는 1년이 지나도 아직...빙산의 일각만 파악됐을 뿐이예요. 일부는 러시아 정부가 압수했고, 중국 쪽 해커들은 보관했던 서버에 트로이 목마를 풀어놓기까지 했어요."


벨이 다시 나뭇가지를 천에 쌌다. 나뭇가지의 촉감은 약간 탄성이 있었지만 대체로 딱딱했다. 그것이 형언할 수 없는 사람의 장기 같아 벨은 감각을 잊고자 두 눈을 지그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스카가 남은 자료들의 일부를 보내 주었고, 그 중에서 우연히 안나 씨와 관련된 자료를 찾았어요."


말을 마친 벨이 태블릿 화면에 낫과 망치가 우측 상단을 차지하고 얼기 설기 번역된 글을 띄웠다.







아파치 그룹, 개체 프로젝트 실행 결과 보고

작전 책임자, 브론코 웨스터가드


-1672일차, 개체들의 능력에서 방출된 '낙진'의 부작용 확인되었음.

능력이 일반인에게도 전이되는 것을 확인함. 하지만 실험 도중 '낙진'을 투여받은 100명의 실험자 중 95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함.

※사망 통계
체내의 식물화:53명
체내의 석화:17명
전신 화상으로 인한 사망:10명
동사:15명


5%의 확률은 현재로썬 실험을 이어나가기엔 부족한 가능성임.
이에 따라 정확한 연구가 도출될 때까지 오메가 프로젝트는 잠정 보류하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임..







"체내의 식물화..."


"제인, 아는 게 있어요?"


이두나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제인은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기로 했다. 딸이 식물화되서 죽을지도 모를 판국에 놓여 있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비난의 총격을 받아내야 했다.


"아뇨, 전혀요."


제인은 부정했다.


"신약으로 치료할 순 없어요?"


안나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손목에 있던 이물감은 사라졌지만, 이물감을 겨우 잘라냈을 뿐 팔꿈치에서 어깨까지의 이물감은 남아있었다. 갈갈이 부서진 뼛조각을 이어붙이기 위해 핀을 박은 것 같았다.


"아직 임상 단계고, 쥐의 실험에서도 부정적인 곃과가 나온데다, 아직 아이들에게만 실험했고, 만들어진 약의 수도 극히 적어요."
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약인데, 유출이라도 됐다가는...아마 모든 법과 윤리가 무너질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하는 지옥이 펼쳐질 수도 있어요."


"그럼 언니, 엘사 언니랑 엄마한테도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안나는 이두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숲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을 엘사를 떠올렸다. 한나, 엘리사, 멜리사는 태어나먼서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났지만, 다른 세 사람은 달랐다. 그 중 엘사는 엘리사와 멜리사를 만나기 전까지 시력을 잃었던 상태였다.


"엘사 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인이 안나의 부정을 일부 무너뜨렸다.


"아무래도...아톤에 있다 보니 중요하든 중요치 않든 연구원들의 보고서를 조금 훔쳐본 적이 있었어요. 시력을 잃었던 적이 있었지만, 엘사 씨의 유전자가 프로젝트에서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보았거든요."


적어도 엘사 씨는 죽진 않을 거란 소리죠, 제인이 덧붙여 설명했다.


"엄마는 어때요, 혹시 아픈 데라도..."


안나가 이두나에게 물었다.


"딱히 아픈 곳은 없지만... 하지만 걱정스럽구나."


이두나가 안나의 손에 묶인 붕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가 된 상황이었고, 자신 또한 능력을 투여받은 사람으로써 시한부의 가능성에 포함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그때는 1984년이었고, 아톤이 해체 직전까지 프로젝트를 재개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무언가 방도가 있다는 거겠죠."


제인이 말했다. 아직 캐내지 못한 아톤의 정보 광산에서 CIA가 캐내지 못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엘사처럼 부득이한 장애를 잠시 가졌더라도, 희망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 엘사 씨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의 신약은 쥐 실험, 더 나아가 안나 씨로 인해 위험성이 입증되었으니, 엘사 씨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해서...."


제인이 머뭇거렸다. 그 다음의 말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몰라서였다. 분명 긍정적인 거였는데, 제인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일반인에게 더 적응성이 뛰어난 신약을 만들고... 아이들의 신약으로 장애를 치유한다면... 게임 오버네요."


벨이 제인의 말을 이어 끝냈다.


"벨,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이두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벨의 딸인 벨라 또한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시간은 어느 순간 그들을 운명의 이분법적인 도박에 밀어넣었다.


"아이들의 혈청으로 만든 신약이 11개월이 걸렸지만, 기존의 유전자 지도에 엘사 씨의 유전자 지도를 개량시킨다면 적어도 절반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보고서를 보건대 증상이 발병하고 난 뒤 2개월 안에 사망할 확률이 80%예요."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안나는 살랑거리며 내리는 진눈깨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은 안나에게 묘한 평정심을 안겨주었다. 이미 한 번 죽어본 데다, 죽으면 가게 되는 오두막의 존재를 앎으로써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제 생각에 캠핑은 여기서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이두나 씨와 안나 씨는 저희 기관에서 맡고 있는 의료 시설에서 추이를 지켜봐야 할...."


"아뇨, 아뇨..."


벨의 말 속에는 진지함과 슬픔이 섞여 있었지만, 안나는 그 끝부분을 잘라냈다.


"어차피 6개월 정도 걸리고, 캠핑은 겨우 며칠이잖아요. 그냥... 즐기게 해줘요.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요. 엄마도 아직...아픈 곳이 없으시니까."


"안나, 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란다."


이두나가 두 손으로 안나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캠프는 나중에라도..."


이두나는 말을 멈췄다. 확실하지 않은 치료책이 없는 이상, '나중'이란 단어는 헛된 희망에 수렴했다.


"나중에라도 갈 수 있을 테니... 일단 여기서 그만하자꾸나."


안나는 생각했다. 2개월, 60번의 밤, 180번의 식사가 겨우 남아 있었다. 안나는 다시금 신을 부정했다. 신이 있다면 자신부터 구원했을 텐데, 겨우내 찾은 평화에 커다란 금이 생겼다.


"아니요. 계속 해요."


뜻밖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안나를 향했다.


"어차피 며칠이잖아요. 입원은 캠핑이 끝난 다음에 해도 되고요.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야죠. 어차피 오두막에 가게 될 텐데, 새로운 신약으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벨? 안나가 살짝 웃으며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딸의 어미를 바라보았다. 벨은 슬픔을 머금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일단은 엘사 언니의 흔적부터 찾아야겠어요. DNA가 담겨있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까."


벨이 잠시 침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뒤,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은 라텍스 장갑과 자외선 탐지기들이었다. 안나는 범죄 드라마의 경찰 감식반을 보는 것 같았다.



"다들 하나씩 착용하세요. 안나 씨는 가급적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그럼 크란세카케는 어떡하죠. 안 만들었으면 다들 의심할 텐데..."


안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손에 미라처럼 칭칭 묶인 붕대를 보았을 때, 지난 밤 산책을 나가다 돌부리에 넘어졌고, 땅을 짚다 돌부리에 찍혔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아이들이 눈과 얼음을 만들어 권했지만, 속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여기서 혹시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안나 씨 말고 있을까요? 저는 감식을 해야 하니까 열외로 친다지만..."


"저도 아톤에 있었을 때 내부고발자를 잡기 위해 감식반을 꾸린 적이 있었어요."


제인이 약간 섬뜩한 과거를 말하며 자신을 열외시켰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이두나 뿐이었다. 안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 또한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 제가 레시피를 알려드릴 테니까, 절대로 긴장하면 안 돼요."


"냉동 크란세카케를 사 둘걸..."



이두나가 장난스레 푸념했고, 안나는 냉장고에서 아몬드와 설탕, 그리고 계란을 조심스럽게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딸과, 언제 그녀를 따라갈 지 모를 어머니의 어설픈 요리가 시작되었다.








49.



"같이 안 놀아주니까 슬프니?"


보라색 벙어리 장갑을 낀 채로 햇살을 받아 눅눅해진 눈들을 뭉쳐 구르는 엘사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버스를 떠나기 전, 아이들은 안나의 부재에도 나름 활발했지만, 지속되는 안나의 회피에 풀이 죽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숲 속으로 먼저 가는 동안, 엘사와 한나는 안나와 벨이 감기에 걸렸을 거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되묻는 한나에게, 엘사는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미심쩍은 단서가 하나 존재해서였다. 부츠에 눈이 묻으면 들어올 때 물자국이 남아 있어야 했고, 엘사와 엘리사가 나갔을 땐 바닥은 말라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번질거리듯 한 물자국이 침식 복도에 남아 있었다. 그런 엘사의 추론에 한나는 제인은 나가기 귀찮아서, 벨은 안나를 간호하려고, 그리고 이두나는 크란세카케와 뱅쇼를 만들기 위해 버스에 남았을 거라고 추론했다.


"조금 우울해요."


엘리사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캠핑의 주최자가 되는 사람이 되려 캠핑을 기피하고 있었고, 엘리사는 자신만의 시련에 도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시련은 간단했다. 눈을 다루는 능력 없이 안나의 모습을 띈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눈은 엘리사의 생각대로 뭉쳐지지 않았고, 뭉쳐서 쌓아올린 눈도 장갑으로 살살 갈아내려 하면 무너지기 일쑤였다. 엘리사는 멜리사의 눈사람을 한 번 훑어보았다. 멜리사는 말 그대로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미끄럼틀을 만들 작정이었는지, 눈으로 쌓은 미끄럼틀의 겉면을 부드럽게 장갑 낀 손으로 훑어내리자, 케이크에 아이싱을 한 것처럼 얕은 얼음이 깔렸다.


"만약에 여길 오지 않았다면 감기에 걸릴 일도 없었을 거예요..."


장갑 위에 남아있는 눈가루를 만지작거리며 엘리사는 말했다. 한나는 그런 엘리사에게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려던 눈사람의 눈덩이를 엘리사 앞에 세워 주었다.



"엘리사,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능력과 멜리사의 능력이 만능이 아닐 수도 있지. 감기라고 생각해 보자. 감기약이 있어도 감기는 계속 걸리잖아? 너희들의 눈과 얼음은 일종의 감기약이라고 언니는 생각해."



가만히 듣고 있던 엘사는 오랜만에 듣게 된 한나의 논리적인 설명에 속으로 감탄을 자아내며, 자신의 걱정 또한 그녀의 말에 누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건 간단해. 가족이 아플 때마다 능력을 흘려주면 돼. 간단하지?"


한나가 박수를 두어 번 치자, 엘리사의 손에 있던 눈가루가 허공에 띄워졌다. 한나가 손가락을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자 허공을 떠돌던 눈가루는 이내 커다란 눈덩이로 뭉쳐졌다.


"언니, 나 좀 도와줘!"


한나가 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엘사가 부리나케 한나와 함께 눈덩이를 잡아 처음에 놓아둔 눈덩이 옆에 올려 두었다.



"한 단 더 쌓을까?"


"하지만 제 키보다 훨씬 큰 걸요. 잘 안 보일 텐데..."


두 단밖에 되지 않았지만, 눈사람은 엘리사와 멜리사의 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까치발을 들어도 눈사람과 눈을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엘리사, 여기로 와. 여기!"


그런 엘리사의 작은 고민을 멜리사가 해결해 주었다. 자신이 지금 막 만들어낸 설빙 미끄럼틀은 엘사와 한나의 키와 맞먹었으며, 이제는 새로운 성을 하나 만들고 있었다. 엘리사가 두 어른의 눈치를 우물쭈물 살피다, 엘사의 눈웃음, 그리고 한나가 어깨를 토닥임으로써 멜리사를 향해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철이 많이 들었어."


엘리사의 뒷모습을 보며 한나가 엘사에게 속삭였다.


"네가 할 말은 아닌데, 1살 짜리 막둥아."


엘사가 뜻밖의 사실을 지적하자, 괜스레 붉어진 한나의 귓불이 있었다.







50.

"빨리 빨리 내려, 시간 없어."


호크 블랙의 오전은 가랑비로 얼룩져 있었다. 카산드라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다가 문득,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우산과 정장의 색이 동일한 검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앞에선 이제 막 검문을 통과해 진입한 검정색 에스컬레이드가 주차되어 있었다.


"잭."


"캐스, 오랜만이야."


"안녕, 캐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총 다섯이었다. 운전수, 조수, 잭, 바리안, 그리고 누더기와 마대 자루를 쓴 오늘의 심문 대상자가 그것이었다.


"국장님하고 연결 됐어?"


카산드라가 심문실의 문을 열자, 잭이 억지로 밀어넘기듯 대상자를 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 뒤를 따른,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IT 너드들의 두꺼운 안경을 쓴 바리안이 카산드라에게 악수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아직 안 됐어. 조금 시간이 걸리신다나 봐. 화상 연결을 하기 전에 미리 심문 준비를 해 두자고."


FN사의 파이브세븐 권총을 장비한 운전수, 그리고 HK사의 UMP 기관단총을 장비한 조수는 가까운 처마 밑으로 가 그들을 위한 경비를 섰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정장 속에 입어둔 플레이트 캐리어,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 구비한 글록23의 존재를 의식하며 심문실의 문을 닫았다. 심문실은 폐허가 된 마굿간의 일부를 연상케 했다. 한 쪽에는 구태여 상상하기 힘든 이물질이 떠 있는 물이 담긴 양동이들, 벽을 타 잠식한 곰팡이들, 그리고 한 쪽에는 카산드라가 미리 켜둔 노트북과 웹캠이 있었다. 카산드라가 웹캠에 손을 흔들어 송신 확인을 마쳤지만, 아직 메가라의 화면을 떠 있지 않았다.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대기하세요.'라는 문자를 보낸 그녀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카산드라는, 잠시 선잠을 잘까 하는 달콤한 생각을 했다.


"씨발, 일어나라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방 한 가운데에 늘어진 쇠사슬 끝에는 손발을 구속할 수 있는 고리가 달려 있었고, 이제 막 잭이 대상자의 발에 고리를 채우고 있었다. 대상자는 거칠게 저항했지만, 잭이 정강이를 차자 순순히 말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의 저항이 약해진 틈을 타 비라안이 천장에 달린 사슬을 가져와 대상자의 손을 묶었다. 이내 대상자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그림을 연상케 하듯 팔다리를 뻗어대고 있었다.


"잭,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뭐, 너도 알다시피, 위험 인물이야. 테러리스트, 극단적 공산주의자...뭐든 될 수 있지."


"뭐, IS의 추종자라도 되나?"


"IS는 아니고, NFF하고 연관이 좀 있는 사람이자, 남아프리카에서 내전과 분쟁을 일으킬 무기를 팔아대는 상인 '아파치'와 관련이 있지."


아파치? 카산드라의 머릿속에는 아주 잠깐 전투 헬기 아파치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NFF가 킬 리스트에서 떨어진지 10개월이나 지났잖아. 남아공 내전이 NFF 소행이기라도 해?"


"잭은 두 팔을 벌려 눈썹을 씰룩였다. 알아서 찾아보라는 듯 익살스럽게 웃는 얼굴에 카산드라는 글록을 뽑아 그에게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 어... 다들 진정하고, 이제 거의 다 준비된 것 같아요."



바리안이 양 손에 전기가 흐르는 봉을 들고 있었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이 아니었지만, 두 봉이 서로 맞닿을 때마다 붉은 전기가 튀어나와 바닥에 흘러내렸다.



"또 상자도 준비했고, 물 고문을 하기 위한 욕조에 물도 채웠고, 재우지 않기 위해 락 음악도 빵빵하게 디스크에 받아 뒀죠.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잭은 준비성이 심각하게 철저한 바리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번이 너의 절반만 따라해도 좋을 텐데, 멍청한 새끼."


"에이번은 또 누구야? 신입이야?"


카산드라의 질문에 잭은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산드라는 낯익지 않은 조수가 에이번임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납치한거야? 우린 국내에서 공작하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


카산드라는 궁금해했던 의문을 잭에게 얘기했다. 잭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라이터의 기름이 모두 닳았는지 몇번이고 셔터를 눌러도 불꽃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걸 써."


카산드라가 자신의 지포라이터를 휙 던졌다. 한 손으로 라이터를 잡아낸 잭은 마저 담뱃끝에 불을 붙였다.


"이미 작년에 한 번 했었어. VIP 납치 건이었는데 실패할 뻔 했지. 그 VIP는 우리에게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우린 그가 가진 정보가 필요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승인시켰지."


잭이 담배 연기를 한 번 입에 머금고는 다시 내뱉었다. 갓을 씌운 조명 하나만이 존재하는 심문실의 그림자 속에서 바리안의 찡그린 얼굴이 잭의 뒤에 비쳤다. 바리안은 무종교인이지만 금주와 금연에 충실한 건강염려증 환자에 가까웠다.


"동시에 나와 내 팀, 그리고 저 사람과 관련된 사람들은 1급 기밀을 목격했고, 죽을 때까지 함구하고 있어야 해. 아마 캐스 너도 오늘부로 그 기밀에 대해 알게 될 거야. 만일 하나 남들에게 누설했다가는..."


협박과 비슷하다고 카산드라는 생각했다. 1급 기밀, 카산드라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정년을 채울 때가 되서야 해제될 큰 비밀을, 그녀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맨헌트의 주인공이 되겠지. 자, 여기 서명해. 기밀 유지 협약서야."


잭이 정장 주머니에서 팩으로 포장되어 접힌 종이, 그리고 펜을 꺼내 카산드라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피자, CIA의 로고와 비밀 유지 기간이 50년 정도 남아 있으며, 기한은 연장될 수도 있으며, 불이행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상투적인 말들이 적혀 있었다. 카산드라는 고민하지 않고 종이의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서명을 확인한 잭이 종이를 회수했고, 또다시 심문실에는 침묵이 찾아오려 했다.


[프로스트, 프로스트?]



그때, 카산드라가 켜 둔 노트북에서 메가라가 나타났다. 국장실에 앉아 화면을 보고 있는 메가라는 이제 막 도착한 듯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예, 보스. 잘 들려요."


[H는 잘 데려왔지?]


잭이 책상에 걸터앉아 사지가 묶여있는 사내를 말없이 가리켰다. 메가라는 별 다른 지적 없이 그의 심문 방식을 이해하기로 했다. 유화책은 고육책 뒤에 오는 법이었다. 지금은 고육책이 필요한 순간이니, 눈물과 울음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죽여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네, 약간의 저항과 소란이 있었지만 취객으로 위장시켜 부차적 피해는 없었습니다. 재갈을 물렸고, 안대를 채우고, 방음 헤드셋을 끼워 지금 우리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럼 이제 자루를 벗기세요.]



그러자 바리안이 대상자의 머리에서 마대 자루를 벗겼고, 머리를 감싼 온갖 구속구를 풀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듯이 잔뜩 일그러진 그을음은 머리의 한쪽을 대각선으로 훑고 지나갔다. 사내는 아직 약효가 남아있는 클로로포름의 영향으로 비몽사몽해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노트북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초점이 없던 그의 두 눈에 일말의 눈빛 비스무리한 것이 띄워졌다.


"이번엔... 뭐가 궁금해서 데려오셨나?"


그가 비꼬며 말하자, 메가라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남긴 잔재의 여파에 대해서, 한스 웨스터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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