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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꼭두각시의 칼 23~24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3.14 21: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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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9~22









69.

마차 안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마부석의 허버트와 게르다의 숨소리가 더 클 정도로, 안나는 엘사의 눈치를, 엘사는 안나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정말로 공주일까?'


안나는 할 수만 있다면 배낭 속의 심장에게 물어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하지만 배낭은 게르다에게 맡겨진 채였고, 안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금 베일을 쓰고 열린 덧창으로 지나가는 벽돌과 철로를 흘려보는 엘사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도리어 엘사 또한 안나에게 어떤 대화로 관계를 터야 할 지 생각해야 했다. 일방적으로 그녀를 고용한 사람은 엘사였고, 여기서 이모와도 같은 위치인 게르다, 덜 떨어졌지만 사격 하나는 출중한 마부 허버트의 도움을 받는 건 곤란했다. 엘사 혼자 해야 하는, 작지만 큰 걸음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의 어둠 속에 내딛어야 했다.


"저기..."


다행스럽게도, 대화의 물꼬를 튼 사람은 안나였다. 안나가 손을 들자, 엘사는 손을 내리라고 손짓했다.



"정말로...공주가 맞나요?"



"왕족을 사칭하면 1신분(성직자)일지라도 즉시 처형이야. 법전 1조 3항에 쓰여져 있는 기본 상식이지."


"그으래도... 어제 대회장에선 못 뵈었던 거 같았는데요... 또..."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관람석에서 눈에 띄었어야 했는데, 이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안나는 겨우 말을 삼켰다. 자신은 공주의 유무를 확인할 뿐이었지, 추파를 던지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조금 있었어."


안나는 공주가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했다. 국무를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지의 일에 대한 문서에 도장을 찍고, 다른 군도의 공작들에게 전하는 사신에 봉랍을 찍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못 믿겠는데...'


안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어쩌면 인신매매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다리 사이에 세워 놓은 목검과 화상 크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방관자의 낙인에 신경을 썼다.


"믿지 못하겠니?"


"네."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반사적으로 안나는 엘사에게 대답했다.


"어떻게 왕족이란 사람의 마차가 이렇게 허름해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데, 의문이 필요하니?"


엘사는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면 안나가 자신을 공주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피고용인은 왕족과 귀족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무례했다.


'분명 책에선 사군토 사람들은 인심이 좋고 친절하다고 써있었는데...'


지난 밤, 공주는 허름한 모텔 방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벌레와 쥐들을 두려워하면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왜 더 좋은 방을 잡지 않았냐는 게르다의 질책에 허버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이 잡은 여관방이 안나의 일행인 메가라 그레이스가 사는 에버튼 가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엘사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방 안 서랍에 들어있던 '사군토의 허름하지만 구수한 문화'란 책과 렌즈가 금이 간 망원경을 찾아냈다.



붉은 지붕, 엘사는 곧 메가라의 집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안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은 밝혀져 있지만, 열린 창문 하나 없이 바다에서 육지로 한 번 걸러 덜 짭쪼롬한 바람만이 그녀의 콧등에 맴돌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안나를 보는 걸 포기한 엘사는 밤새도록 벌레와 쥐, 그리고 언제 손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얼음에 마음을 졸여가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둥지 속에서만 살아온 새는 바깥을 알지 못했다.



"뭐, 제가 살던 집보단 조금 더 좋네요."


"집?"


"네, 가난했거든요. 온 식구를 먹여살려야 해서 온갖 일을 다 했고, 온갖 잠자리에 다 자봤죠."



이 말은 엘사에게 한 가지의 진실과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첫번째, 안나는 사군토에서 여러 잡일을 하며 살아왔다. 둘째, 안나는 물장사에 종사하는 여자였다. 그 도중에 동료, 혹은 손님에게서 검술을 배웠지 않았을까 하는, 베일에 싸인 추측 뿐이었다. 그런 엘사의 측은한 눈빛을 자주색 베일 너머의 안나가 알 턱이 없었다.


"검술은 어떻게 배웠니? 체술은 또 어떻고."


엘사가 묻자 안나는 힐끔 목검의 칼자루에 시선을 흘렸다. 목검에 매어둔 붕대는 손땀에 미끄러지지 않게 석회 가루를 뿌려 얼룩이 가려져 있었다.



"음, 제 아버지와 같으신 분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그분이 언제나 말씀하셨죠. '앞날은 모르고,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켜야 한다'라고요. 좀 힘들게 하셨지만... 괜찮은 분이셨어요."



안나가 말을 끊었다. 이제 안나는 자신의 몸 뿐만이 아닌 공주라고 사칭하는, 명목상 귀족이라 추측되는 여성의 호위를 맡게 생겼다. 안나는 그녀의 복장을 찬찬히 훑어보며 과연 급여는 얼마나 줄 지 생각했다. 어제 선술집에서 먹은 말린 도마뱀 구이를 고르면서 가격표를 본 결과, 동전 두세푼에 불과했던 음식들, 심지어 한 푼으로 살 수 있었던 그리스톨산 사과는 10푼짜리 몰리 산 사과와 값을 같이했다.


'물가 상승률은 고려해 주겠지...'



자세한 뜻은 모르나, 상황에 맞는 지식을 써가며 안나는 덧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돌바닥이었던 도로는 어느새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라고 생각했던 연무는 이내 지붕을 두드리는 이슬비가 되어 있었다.







70.



"거기, 멈추슈. 여긴 어쩐 일인데?"


매티어스는 소통의 개머리판을 잡고 지팡이 삼아 홀로 이슬비가 내리는 린든의 거리를 걸어나갔다. 10년도 넘는 이전의 세월의 한 켠이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아렌델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치안이 좋지 않고, 관광 특구로 만들려다 실패해 버려진 린든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퇴직금을 모두 들고 찾아온 퇴역 장교였던 그는, 여전히 린든을 바꾸는 데에 실패했다. 겨우 한 귀퉁이, 고아원을 만들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자신의 보호와 린든의 이해자들 속에서 키워내 린든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10여년의 고아원 원장으로써 직접 일을 하던 매티어스는 여전히 밤이 되면 군에서 배웠던, 그리고 몰리에서의 반정을 선봉에서 막아 냈을 때의 총검술을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총검과 목검은 린든의 습습한 곰팡내를 죽이지 못했다. 나날이 좋지 않은 린든의 상황에 역병마저 창궐해 사람들의 신경은 녹이 슬었지만 날은 벼려진 칼과 같았다.


"여기서부턴 벌린턱 갱단 구역이요, 어르신. 어서 돌아가쇼."


후줄근하게 차려 입고, 한쪽 허리춤에는 가연성 도수가 높은 술병을 찬 두 사내가 매티어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치안이 최악인 곳에서도 선인은 존재하고,그 선인 중 하나가 매티어스라는 것을.


"그대들의 두목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매티어스 또한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사내들의 손은 자신들의 허리춤에 찬 작두칼로 움직였다.


"어르신을 보고 하는 마지막 경고요, 오늘 우리 대빵께서 기분이 안좋으시걸랑."


"나도 마찬가지일세.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


매티어스는 벌린턱이 안나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사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건들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린든의 불문율을 벌린턱 갱단은 깡그리 무시했다는 사실을 안나의 전 직장 친구인 유진에게서 들었다. 도축장을 습격했으며, 의원 앞에서 안나를 제압하려고 했다. 이제껏 갱단들의 행패를 눈감아왔던 그였지만, 그들은 확실히 선을 넘었다. 두 사내는 순식간에 그의 총몸과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때마침 이슬비는 점점 굵어져 장대비가 되어갔다. 그들이 기절하며 내뱉은 단말마는 빗소리에 묻혀 근처의 갱단에게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매티어스는 총부리에 총검을 장착하며 천천히, 비를 맞으며 어둠 속을 진전해 그들의 뒤를 노렸다. 어떤 이는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려쳤으며, 어떤이는 심장에 총검을 쑤셔넣었다.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티비안식 목조르기로 목 밑 동맥을 막아 졸라 순식간에 기절시켰다. 이제 그의 앞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건물뿐이었다. 위스키 증류소, 벌린턱의 본거지였다. 매티어스는 열쇠구멍을 통해 안을 확인했다. 갱단원의 모습을 보이지 않자, 그는 문을 조금 열어두고, 이내 북을 두드리듯 개머리판으로 철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리고 박공에 손을 짚고 문 위 처마로 재빠르게 올라갔다. 지나온 세월에 몸은 무거웠지만, 감각은 여전히 몰리 전쟁의 영웅처럼 선명하게 배어 있었다.






71,



"자, 천천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겁 먹지 마요. 제발."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는 작은 식칼을 들고 손쉽게 시트라, 즉 한나가 밀수해온 물품 중 하나인 고구마 껍질을 깎아내고 있었다.


"아오... 씨."


하지만 옆에서 그와 똑같이 식칼을 쥐고 있는 한나는 감자를 깎지 못했다. 감자를 깎는 게 아닌, 조각에 가까울 정도로 감자의 전과 후의 부피는 명확히 달라져 있었다.



"줘 봐요. 그냥 야채 좀 썰어 줘요. 그건 할 수 있죠?"


그는 한나의 손끝을 보며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감자를 조각하면서, 그녀의 손끝엔 식칼로 인한 상처들이 여럿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고 바르고, 장갑 하나 끼고 시작해요."


크리스토프가 서랍에서 연고와 세척된 수술용 장갑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다. 한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두 물건을 가져갔다.


"혹시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는 건 아니죠?"


크리스토프가 한 마디 했다. 그가 린든에서 하는 무료 배급에서 요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강가에 있는 이빨장어들을 잡아 끓여 스튜로 만들어도 린든은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가난한 미각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음식과 요리는 달랐다. 마치 요리와는 맞닿지 않은 분야에서 살아온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감각은 처음 시트라를 만나서 생긴,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생각한 그였지만, 말을 터 보니 그건 아니었다.


'벌써 들켰나?'


덩치 큰 금발 사내를 등지고 연고를 바르던 한나는 그가 툭 내던진 질문에 정통으로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요리를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몰락귀족의 영애였던 몸이었지만, 그런 그녀를 거두어 준 사람이 당시의 중위 주시자 카산드라였고, 카산드라에 의해 수도원의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부대끼며 교리를 읽고 밤새 토론을 한 적도 많았고, 선배 주시자들의 뒤치다꺼리와 식사 준비를 대신해 요리를 하던 적이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견습에서 한 단계 위인 하급 주시자였으며, 적어도 요리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났던 상태였다. 즉, 절제와 규율을 중시하는 만인의 수도원에서도 지켜지지 못한 규율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견습 주시자들의 요리솜씨였다.


"아, 아뇨. 만들 수 있어요. 아직 부상 중이라 그런 거예요."


"부상은 다리 쪽인데..."


크리스토프가 지적하자, 식칼을 들고 한나가 그를 찌릿 쳐다봤다.


"아직 진통 효과 때문에 몽롱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다시금 변명하는 크리스토프를 뒤로하며, 한나는 주시자들이 가져온 싱싱한 상추와 파슬리, 그리고 허브들을 확인했다. 상추를 잘게 자른 다음 거대한 솥에 끓여 흐물거리게 한 뒤,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들, 또 그들이 전해준 고래고기들을 넣어 스튜를 끓일 예정이었다. 착착착, 사각사각 이내 요리재료를 다듬는 칼의 휘파람만이 의원 안을 채웠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문득, 한나가 크리스토프에게 질문했다. 그는 한나가 미처 조각내지 못한 감자의 껍질을 겨우 까 손실을 예방하고 있었다. 역병으로 인해 싹튼 감자 한 조각도 귀중한 시기였다.



"어쩌다가 의원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정식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러드쇼어 상업 지구가 홍수로 인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고, 일부 청부 암살자 집단인 '고래잡이'들의 본거지가 된 것을 제외하면, 관광 특수지구로 만들려던 린든은 제국에서 버려진 유이한 지역이었다. 그의 행실거지는 린든 밖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속히 말해 건달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가 봉사심을 가지고 여기에 있더라도, 의사 면허는 따기 힘들 것이며, 더 좋은 지역에 가서 봉사를 할 수도 있었다. 언제나 습하고 쥐와 벌레를 걱정해야 하는 린든이 아닌 양지바른 따뜻한 곳들.



"딱히 이유가 있었다기 보다는 의무였죠."


"의무?"



"네, 죄책감을 동반한 의무라고나 할까요."



크리스토프가 껍질과 싹을 벗거낸 감자들을 도마 위에 올려 뭉텅뭉텅 자르기 시작했다. 미리 육수를 넣어 간을 맞춘 국의 뚜껑을 타고 고소한 내음이 흘러나왔다. 고기와 뼈를 넣는다면 새벽까지 끓여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밤은 린든의 누구보다도 길 터였다.


"안나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네,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어요."


"사실은 말이죠. 아..후... 말하긴 좀 그랬는데.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안나는 어머니를 잃지 않으셨을 거예요."


뜻밖의 말에 야채를 썰던 한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릴 적부터 살인을 저질렀다? 그것도 안나의 어머니를?



"그런 눈으로 보진 마시고요. 어...비오는 날 밤이었죠. 전 매티어스 아저씨의 고아원에서 가끔 과자를 가져오는 편이라 고아원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린든의 밤은 조용하죠. 잘못 나왔다간 갱단들에게 쥐어 터져서 동전 주머니를 뺏길지도 모르고... 아무튼 전 꼬맹이니까 그럴 일이 없었죠.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밤외출을 하는 걸 싫어하셔서, 몰래 빠져 나왔어요."


크리스토프가 이제 다 깎아낸 감자와 고구마를 끓고 있는 통 속에 하나씩 넣으며 말했다.


"근데 어디선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발 소리를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이 이방인인지, 아니면 린든 토박이인지 알 수 있어요. 여기 사람들 대부분은 밑창이 없거나, 혹은 거의 없는 신발을 신어요. 그래서 발소리가 질척거리죠. 하지만 그 날 제가 들었던 소리는 따박따박, 그리고 위에서 들렸었어요. 골목을 돌아 힐끔 보니까. 안나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도망치고 계시더군요."



이번엔 한나가 야채를 모두 잘게 썰어냈다. 조심스럽게 도마를 들어 통 안에 넣은 한나는 허브 몇 조각을 넣고 마지막으로 뚜껑을 닫았다.


"처음엔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분 주변으로 화살, 정확히는 석궁에 쓰이는 굵은 화살들이 쏟아지는 거 있죠. 그래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아주머니는 비명을 질렀지만, 린든은...도와주지 못했어요. 무시했죠. 인지를 한 저조차 나설 생각을 못했어요."


크리스토프가 그날의 순간을 기억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가끔 꿈에 나와요. 그 분이 화살을 맞기 전에 부축해서 그림자 속에 숨어버렸다면... 안나가 복수에 미쳐있진 않았겠죠."


"복수...글쎄요. 지금 안나 씨가 미치광이는 아닌 것 같던데."


한나는 이제 접대용 스툴 위에 앉아 그의 말에 반문했다. 주시자의 입장, 그리고 일반인의 입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안나는 검술을 잘 다루는 린든 사람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의료 과정을 밟진 않아도,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들은 잔병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중증이냐, 경증이냐가 문제죠. 안나는 지금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속엔 중증이 있을 거예요."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아무튼, 그 날의 죄책감 때문에 원래 이곳 주인이셨던 할아버지께 의술을 배웠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허드렛일까지 하며 약초를 외우고, 약을 제조하고, 간단한 수술까지 할 수 있게 되었죠. 지금 안나가 아프진... 얼마 전까지 아팠지만, 전 앞으로도 여기에 계속 있을 거예요. 그날의 일이 반복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거든요."


크리스토프가 덧붙였다.


"지킬 건 지키고, 버릴 건 버려요. 하지만..."


크리스토프의 도마는 텅 비어 있었다. 한나가 제대로 깎지 못한 감자 조각들도 스튜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가끔은 버릴 게 없는 경우도 있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의 소음과 내음을 맡은 듯 창밖의 빗방울들이 문을 열어달라며 두드렸다. 이래도 아침에 사람이 모일까요? 한나가 넋두리를 했다. 당연하죠, 식욕이란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데. 크리스토프가 줄기가 긴 나무국자를 냄비에 넣고 휘저으며 말했다.



그 때, 천둥이 한 번 린든을 관통했다.







72.



"미친 씨발 영감탱이...."


턱은 한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 부서져 있었고, 그를 모르면 -예를 들어 한나 같은 외부인들- 흉측한 토막살인을 저질러 사형 선고를 받다 탈영해 동전 1만개가 걸린 죄수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니, 그전에 내 부하들은 어쨌어. 어쨌냐?"


매티어스가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울부짖었다. 부하들로 경비가 삼엄한 위스키 증류소의 지하실이자, 자칭 '사무실'이라는 곳까지 허락되지 않은 낯선 이방인이 찾아왔다는 건...


"몇몇은 죽었지. 그리고 몇몇은 죽을 거라네. 이 장대비가 아침까지 계속된다면 말이지."


매티어스는 지금도 어렴풋이 귓가를 자극하는 빗방울의 북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비는 오전까지 올 것 같았다.


"안나 라는 썅년 때문에 온 거지? 린든의 선인이 움직이는 데 그 정도는 되야 하는 거 아닌가?"


벌린턱은 마지막 자존심에 휩싸여 작두칼을 집어들고 매티어스에게 돌진했다. 어쩌면 매티어스를 죽이고서라도 밖으로 뛰쳐나와 기절 상태이자 익사 예정인 부하들이라도 살려 조직의 기반을 유지시켜야 하는 절박함에 따른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매티어스가 칼을 쥔 그의 손을 비틀고 다리를 차듯이 걸어 넘겨 넘어뜨렸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그의 몸에 매티어스는 그제서야 총알을 꺼내 소총에 한 발 장전했다.



볼트가 뒤로 꺾였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고, 총검의 끝이 벌린턱의 볼에 맞닿았다. 흐르는 빗물에도 씻겨지지 못한 부하들의 연한 핏자국이 겨우 손 크기의 칼날에 남아 있었다. 벌린턱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다 사무실의 책상에 몸을 부딛혔다. 꼴성사납게도, 탁자 위에는 빈 영약 병과 외상 장부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말 조심하게. 내가 키운 아이들 중 하나이니. 다름이 아니라... 불문율을 깼다고 들었네만..."


"그야 당연하지. 지금 바깥에서는 역병에 대비한 빛의 벽, 아크 방사탑이 즐비한데 우린 뭐가 돼. 소콜로프가 만든 체력 영약이 있다면 우리 모두 안전하게 나을 수 있다고! 우린 우리 갱단의 존속을, 당신은 고아원의 유지를 말이야!"


"그렇다고 고래 도축장을 공격하다니... 어귀가 안 맞지 않나 싶은데."


매티어스는 탁자 위에 놓인 홍차라고 생각되는 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조금 마셨지만, 흘러들어온건 홍차가 아니라 커피에 가까운 '카피탕'열매로 만든 차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찻잔 접시에 잔을 올려놓은 매티어스가 벌린턱을 내려다보았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노병의 눈빛이 그의 눈을 찌르고 목을 옥죄었다.



"역병엔 차별이 깃들어 있지. 하지만 고래 도축장에서 일하는 놈년들 중에서 역병에 걸린 자는 한 명도 없었어. 방관자의 가호라도 받은 건가? 아니, 어쩌면 바다에 맞닿은 만큼 밀수를 통해 소콜로프의 영약을 받아 자기들끼리 나눠 마신 게 아닌가?"


"소콜로프의 영약은 거짓말일세. 아직 있지도, 나오지도 않았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도축장은 어떻게 생각하냔 말이야!"


사납게 반문하는 벌린턱의 정강이를 발로 세게 찬 매티어스는 그의 신음이 잦아들 때까지 여유있게 기다렸다.


"고래를 도축하는 이들은 역겨운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해서 두꺼운 방독면과 가죽 밤스를 입어야 하지. 쥐가 씹지도 못하는 고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말일세. 그런 환경에서 역병이 도대체 어떻게 영약으로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고래잡이'들을 떠올려 보게."


매티어스는 한 청부암살 집단을 벌린턱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서로 접촉할 일은 없는, 제국의 칼이라고도 불리는 '고래잡이'들의 복장은 도축장의 그것과 비슷했다. 만약 역병이 그들에게까지 걸렸다고 전해진다면, 그들의 두목인 다우드가 조용히 암살자가 될 사람들을 모집했을 것이고, 미약하게나마 그에게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씨발... 미안하게 됬수다. 내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야."


아무리 폐쇄된 지구라 하여도, 린든은 제국의 수도에 맞붙어 있었다. 영약이 상용화되었더라면 비드랑 대로를 따라 설치된 방사탑과 빛의 장벽들, 그리고 그것들의 보호 아래 경비를 서는 도시 경비대들이 없었어야 했다.


"날 경찰에 떠넘길 건가? 여기 경찰들은 어차피 자율 방범이고, 되려 날 보고 오줌을 지릴 텐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잔혹함으로 유명한 갱단 리더가 겨우 칼만 휘두르는 수준인 자율 방범대에게 맡겨진다는 사실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더 든든할 정도였다.


"난 오히려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싶네."



"왜, 고아원의 경비라도 서주랴? 그건 내 성미에 안 맞아.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정강이는 괜찮나?"



매티어스가 조심스럽게 그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매티어스의 경직된 분노는 이제 경직된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좀 덜 하군. 그래서?"


매티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을 꺼낸 이상, 비밀 유지는 벌린턱을 죽여서라도 지켜내야 했다.


"여명을 끌어오려는데, 자네와 자네 부하들의 호전성이 필요하더군. 가능하나?"


"여명? 새벽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드디어 치매라도 온 건가 영감탱이?"


두 손을 모으고 다리를 꼬고 앉은 벌린턱의 모습은 벌을 받는 사람이 아닌, 위장 직업인 위스키 판매상의 껄렁한 태도를 비추고 있었다.



"우린 큰 일을 준비하고 있어. 다른 지역들의 단체들까지 연계할 정도로 큰 일을."


"체육 대회라도 여는 건가?"




끝가지 업신여기는 벌린턱을 향해 매티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린 혁명을 준비하려 하고 있다네."







73.

"진창이 생겨 못 지나가겠는데요, 공주님?"


안나는 마부석에 앉은 허버트와 게르다의 외침에 닫혔던 덧창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린든의 어둠에 익숙해진 안나의 눈 앞에는 꽤 길게 늘어진 웅덩이가 보였고, 마차를 끌던 두 필의 말이 허버트가 채찍으로 때렸음에도 선뜻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비는 또 왜이리 억수로 내리는 건지... 처마가 없었으면 우린 쫄딱 젖었을 거야. 그렇지 게르다?"


"어떻게 앞으로 갈 생각 좀 해 봐요, 정말이지..."


부부같은 두 사람의 수다에 비해 마차 안은 조용했다. 안나는 공주 놀이를 하고 있는 귀족과 무슨 대화를 해야 이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 문득 게르다에게 맡긴 배낭을 떠올렸다.


"저기, 게르다 씨? 제 배낭에서 봉투 하나만 꺼내 주시겠어요?"


안나의 뜻밖의 행동에, 잠시 베일을 벗고 숨을 고르던 엘사가 눈을 흘겼다.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의 작은 호수에 어우러져 있었다.


"옛다! 안에 든 게 뭔데 그러니?"


"아뇨, 그냥 먹을 거예요!"


게르다의 외침에 답한 안나는 봉투에서 꺼낸, 서코노스 산 포도가 배낭의 협소한 공간에 터지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엘사에게 포도를 내밀었다.


"자, 드시지요."



아무리 가난해도, 안나보다 신분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했기에, 두 손으로 내민 포도를 엘사는 조금 놀란 눈치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아"


안나는 먼저 송이에서 포도 하나를 빼 먹었다. 독이 바른 포도가 아닐까 싶어 눈치를 주었겠지만, 만약 안나가 암살자라 하여도 별다른 표시 없는 수십 개의 포도알 중에서 독의 유무를 판단하기란 불가능했다. 표식의 능력 중 하나인 암흑 시야도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나타내진 못했다.


안나가 포도를 꿀꺽 삼키자,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엘사 또한 송이에서 포도 하나를 뽑아 입에 넣었다. 마치 사탕처럼 들어간 포도를 조금씩 씹는 엘사를 보며, 안나는 생선을 처음 봐 어떻게 먹는지 몰라 핥아 먹는 흰 고양이를 떠올렸다.


"안 익었구나."


"그래요? 난 그냥 시큼해서 좋던데. 씹는 맛도 있잖아요."


엘사는 안나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포도로 인해 더욱 관계가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마차 밖에선 허버트와 게르다의 잡다한 수다가 이어졌다.


"아, 글쎄, 내 친구의 사촌의 조카가 이번에 주시자에게 심문을 받다가 도망쳤다는데, 사람들이 시위를 한다나 뭐라나...?"


"아줌마, 주시자한테서 도망을 친다고? 방관자의 낙인을 받지 않는 이상 제국 끝까지 쫓아오는 미친 광신도들에게? 거짓말도 적당히 치쇼. 재밌긴 한데..."


허버트가 딴지를 놓았다. 안나는 그 시위에 대해 엘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귀족과 평민의 신분이었기에, 예법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열띤 토론도 가능할 것 같았다. 또한 어제 아그나르를 암살하려 했던 자가 말했던 세금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 분명했다.


"공주님? 음... 갑자기 이렇게 전언을 올리면 이상하지만요..."


안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위?"


"네, 왕실과 귀족들이 세금을 자신들의 사치에 쓴다고 해서 말이 많고, 시위로 번진다고...게르다 씨가..."


안나가 손가락으로 뒤편과 위쪽의 중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제가 갑갑해서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눈이 불편해서였을까, 별안간 엘사가 모자챙에 가려진 베일을 휙 걷어냈다.


"공주로써 할 말은 아니지만, 정당하다고 생각해."


"오..."


"물론 우리 영지라면 다르겠지만."


긍정의 대답이 부정의 결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안나는 공주가 자신을 시위꾼으로 오해하지 않기 바라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심어두었다.


"공주님의 영지는 어떻게 되세요?"


진창을 빠져나가려면 인부를 불러야 했고, 때마침 덧창 너머로 허버트가 허겁지겁 빗속을 뚫고 인부를 부르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 한 두 시간, 어쩌면 반나절을 마차에서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평화롭고, 다채롭지. 하지만 난 아니야. 단채롭고, 불화스럽고, 차가워."


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귀족식 농담인가 싶어 웃음으로 얼버무렸고, 엘사도 안나의 태도에 지적을 하지 않았다. 폭풍이 내리치듯 비는 거세게 마차를 두드렸다. 마치 귀족을 끌어내 금화 주머니를 끄집고, 최악의 경우에는 범하려고 드는 갱단 무리처럼, 비는 거셌다고 안나는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게르다의 비명을 듣고는, 그것이 절대로 망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람 살려!"


게르다의 비명에 안나는 잠시 엘사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 계세요. 금방 보고 올게요."


"조심하렴."


짧게 답하는 엘사를 뒤로 하고 안나는 부수듯 마차의 문을 열어제꼈다. 억센 비가 밖으로 나온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안나의 튜닉을 모두 적셨다. 안나는 재빠르게 암흑 시야를 발동해 게르다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했다. 가까운 진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한 사람의 눈빛은 뚜렷하지 않고 흐렸다.


"얘야, 안나! 어서 이리 와 보렴!"


"하지만..."


"어서!"


게르다의 외침에 안나는 어깨를 흘끔 돌렸다. 불안한 듯 마차 속 엘사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금만 참으셔. 안나는 헐레벌떡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허버트야, 강도한테 칼을 맞았나 봐."


안나는 허버트의 복부, 정확히는 간 쪽에서 울컥거리며 나오는 핏물에 주목했다. 이대로라면 허버트가 죽을 수도 있었다.


"게르다, 말 탈줄 알아요?"


"아니,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니? 그럼 너는?"


"지금 말 싸움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마차를 분리해서라도 타고 가야죠! 그리고 저도 조금 탈 줄 알거든요?"


비록 목마이긴 하지만, 안나는 마지막을 덧붙이지 못했다.


"엘사 공...공주님!"


안나는 결국 그녀를 완전한 공주로 부르기로 했다. 그녀가 정확한 신분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그냥 공주라고 부르는 게 그녀에겐 편한 일이었다.


"승마! 승마 할 줄 아시리라 믿습니다!"


엘사가 다시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쓴채로 찰박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일행에게 달려왔다.


"주변에 강도가 있으니까,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도망쳐야겠어요, 제가 허버트 씨를 태울 테니, 공주님은 게르다 아주머니를 태워주시면 되겠어요. 가능하죠?"



운이 좋게도, 마차의 밑바닥에는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한 두 개의 안장이 달려 있었고, 안나는 그것을 때어 각각 '아그나르', '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무도 안나의 작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속으로 그들을 포함한 왕족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원한 또한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이,이럈!"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상처부위를 압박해 묶은 안나는 허버트를 말등에 태운 뒤, 자신도 말등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말은 안나의 예상대로 난폭했으며, 하필이면 가까이에 내리친 천둥에 놀라 제어가 힘들었다.


"자, 침착해, 침착...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안나의 말등에서 허버트가 신음섞인 비명을 질렀다. 안나는 어쩔 수 없이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방관자의 표식은 쓰면 쓸 수록 피로가 누적되어가고 있고, 안나는 지금 졸음이 쏟아지는 상황에 처했다. 두 마리의 말이 빗속의 숲을 지나가는 동안, 안나는 암흑시야 속에서 보이는 강도들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바로 그들 중 한 명에게 부러졌던 목검을 던졌고, 회전하며 날아간 목검의 끝부분이 강도의 머리에 제대로 박혔다. 이어 안나는 새로운 목검을 하나 꺼내 들어 엘사의 말 주변으로 달음박질하는 강도들의 머리를 차례로 후려쳤고, 흥분한 말들의 편자가 그들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그들이 안나의 돌발행동에 주춤한 사이, 안나는 다시금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어서요! 빨리!"


"어, 어, 어어.."


안나가 거칠게 엘사의 어깨를 두드리고 앞서 나가자, 엘사는 뒤에 게르다가 앉아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단순한 왕족의 취미라고 생각했던 승마 솜씨로 경마를 하고 있었다. 뒤에선 강도들의 욕지꺼리가 들려오고, 돌멩이가 주변의 나무들을 따다닥 때렸다. 두려워야 할 상황에서, 엘사는 묘하게 흥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고정되어 왔던 일상 속에서의 변화가 가장 큰 이유였고, 무엇보다도 방금 전 곤경에 처한 자신과 시종을 구하려 과감하게 강도들의 두개골을 후려치는 안나가 있었음이 두 번째였다.



엘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74.



"다행이도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과격한 행동은 금지하셔야겠습니다."


안나는 린든의 의원과 란크실의 의원이 분위기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허버트의 치료를 받은지 겨우 두 시간이 지났지만, 안나는 설령 다치더라도 린든의 의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생각을 줄였다. 어딜 보아도 깨끗한 플라스크, 시약병, 증류 기계, 그리고 가지런히 유리병에 보관해 서늘한 그늘에 놓여진 온갖 약재들까지. 무엇보다도 안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의사만 있는 게 아니라 간호사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치료비는 얼마나 되죠?"


안나가 물었다. 처음엔 엘사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우물쭈물 말을 걸지 못했다. 게르다는 가지고 온 돈이 없었고, 안나는 강조개를 암시장에 팔아서 얻은 동전과 상금으로 받은 은화 주머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은화 20푼은 주어야 할 겁니다."


"무례하군요!"


그 때, 엘사가 화를 내었다. 안나는 엘사가 화를 내는 것을 고용당한 이후 처음 보았다. 저렇게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구나. 근데 왜 지금까지 안 했던 거야? 안나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엘사의 의견을 경청하기로 했다.


"너, 너 너무... 비싸잖아요..."


다시금 소심해진 엘사가 근거를 덧붙였다. 안나는 붕대에 감긴 허버트의 상처를 보면서, 엘사가 귀족은 맞나 싶다는 확신을 했다. 사실 안나의 계산 하에선 은화 50푼을 줘도 모자를 수술을 단시간에 끝냈기 때문이었다.


"저기, 잠깐 귀 좀."


안나가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엘사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안나의 행동에 움츠러들면서도, 엘사는 그녀에게 귀를 내 주었다.


[저 정도면 싼 거예요. 정말이니까 진정하세요.]


안나가 이번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상금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며 은화들이 안나의 손에 떨어졌고, 안나는 은화 스무 닢을 정확히 계산해 의사에게 전해 주었다.


"한 이틀 정도는 여기서 요양을 하셔야 할 겁니다. 한 사람 정도는 간병을 해야 할 텐데... 누가 하실 거죠?"


"제가 할게요."


게르다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안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게르다가 엘사와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는 걸 직감했다. 아마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라는 무언의 권유였으리라고 생각한 안나는, 어차피 자신이 경호원으로 고용되었으니 고용인의 주변에 머무르는 게 순리라고 판단했다.


"그럼..."


엘사가 드레스 안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나오지 않은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떡하니...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아."


쩔쩔 매는 엘사를 보고 안나는 지금쯤 귀족의 지갑을 얻어 당분간 배곯을 일을 없을 강도 떼들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싶었고, 지갑 하나 간수하지 못한 눈 앞 백은의 귀족도 힐난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럼 제가 낼게요. 게르다 씨, 숙식을 하려면 얼마나 필요하세요? 제가 이곳 시세를 잘 몰라서."


안나는 자신이 사군토, 외지 출신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게르다는 안나의 말을 사실로 받아드리는 눈치였다.


"은화 세 닢이면 될까 싶다마는..."


그러자 안나는 은화 열 닢, 그리고 동전 열 닢을 게르다에게 주었다.


"돌아올 때 말 필요하실 거 아니예요. 이분이 마부시니까 말도 잘 타시겠...죠?"


아니면 마차를 얻어타고 오셔도 되고요. 안나가 자신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길 바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도 아침에 출발하도록 해요. 지금 이 새벽에 밖에 나가면 이번엔 칼이 아니라 화살을 맞을지도 모르니까."


안나는 병원 한쪽에 배치된 벤치에 엘사를 앉혔고, 자신의 배낭을 옆에 놓아 주었다. 불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엘사는 건물을 두드리는 빗방울 속 천둥소리에 놀라면서도, 안나의 배낭에 몸을 서서히 기대었다. 애써 졸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면서, 안나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곰팡이가 전혀 없는 담요 한 필을 가져와 엘사에게 둘러주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실 텐데, 푹 자두세요."


제가 옆에서 지켜드릴게요. 안나는 지금쯤 숲에서 물러지고 있는 부러진 목검을 기억하며 말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목재 세검과 매티어스가 남기고 간 목검이 전부였다. 안나는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상점으로 가서 단도라도 구입하기로. 더 이상 목검만으로 몸을 지키고 지켜주기엔 세상은 너무나 날카로웠기에, 안나는 경갑을 차 입을까도 싶었다. 배낭에 몸을 기대 자고 있는 엘사에게도 경갑이 필요해 보였기에, 안나는 강조개를 팔아 얻은 동전을 원래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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