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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꼭두각시의 칼 29~30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18 21:22:18
조회 4034 추천 10 댓글 2


1~28






91.


"정말 괜찮을까?"


"아유, 괜찮다니까요. 저만 믿어봐요. 아무도 공주님을 모른다면서요."


엘사는 벗었던 로브를 다시 꼭 쥐어쓰며, 안나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어느덧 숲을 지난 두 사람은 마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오고가는 시민들은 저마다 주어진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살이 붙어있는 생선 대가리를 던져주는 생선 장수, 영지 내 신문을 돌리는 호외 소년, 영지의 뒷쪽 설산에서 얼음을 캐와 파는 청년과 그를 따르는 순록까지. 안나가 원하던 이상향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게 아름다워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글쎄..."


엘사는 부정하면서도, 내심 안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을 나온 그녀로썬 안나만큼 두려웠지만, 설레이고 있었다. 엘사가 로브를 꼭 뒤집어 쓴 채로 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안나는 무의식적으로 엄지로 엘사의 손을 문질거렸다.


"우리, 저기부터 가서 좀 쉬는 게 어떨까요? 많이 걸었으니까 쉬었다 가요."


안나가 광장의 분수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수대의 가장자리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쳥 벤치가 덧입혀져 있었다. 안나가 엘사의 손을 잡고 분수대로 뛰어가는 그 모습은, 마치 철없는 동생을 뒤따르는 언니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안나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파-하. 안나는 옆에서 조신하게 앉아있는 엘사를 흘끔 쳐다보았다. 엘사는 다시금 로브를 쓰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은 언제나 남에게 숨겨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아그나르와 한스가 지니게 했다.


"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느냐."


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로브 속의 엘사를 들여다 보았다.


"어서 정무를 보아야..."


"오늘 정무는 없어요. 오늘은 당신의 여독을 푸는 날이예요. 금방 돌아가면 그게 일이지. 뭐겠어요?"


안나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녀의 눈앞에 노점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소한 소시지 굽는 냄새가 수십 미터 떨어진 안나의 코까지 다다랐고, 그것은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꼬르륵, 두 사람의 배에서 동시에 허기가 비명을 질렀다. 엘사가 베를 부여잡고 부끄러워하는 사이에, 안나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노점상에게서 소시지 꼬챙이 네 개를 사들고 왔다. 그리고 그 중 두 개를 엘사에게 내밀었다.


"자요. 배고프시죠?"


엘사는 말없이 소시지 꼬치를 받아들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무 외의 시간에 몸을 움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성 밖을 짖궃은 수호경의 묘수 하나로 빠져나왔고, 지금은 밖에서 식사까지 하는 상황에 놓였다.


"급료 정산 때 청구하렴."


엘사는 짧게 말하고 소시지를 베어 먹었다. 온갖 양념을 적셔 만든 궁정식 요리만큼은 아니어도, 배가 고픈 엘사에겐 최고의 음식이었다.


"에이,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세요. 다른 것도 먹을까요?"


벌써? 엘사는 옆에 앉아있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엘사가 한 입을 먹을 동안, 안나는 한 개 하고도 절반을 먹어치운 뒤였다. 어찌나 빨리 먹었던지, 분수대에 앉거나 그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이 안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배는 네가 더 고픈 것 같은데... 이번엔 내가 사도록 하마."


하지만 엘사는 크나큰 딜레마에 빠졌다. 그녀는 왕족이었고,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사본다는 경험이 전무했다. 꼭두각시여도 왕족은 왕족이었기에, 크나큰 불편함은 없이 필요하다면 모든 게 전해주는, 제국의 잊혀진 왕녀였다.


"그럼... 과일 어떠세요? 사과?"




"사과라, 좋아하는가 보구나."



"네, 어렸을 때부터 계속 먹고 자랐거든요. 언제나 달콤하고..."


안나는 엘사의 얼굴에 희미하게 띈 홍조를 보며, 다음에 할 말을 까먹었다.


"아무튼 새콤달콤해서 좋아요!"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너 하나, 나 하나. 이러면 되겠니?"


마치 산책을 나온 강아지처럼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그녀에게서 퍽 귀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엘사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사과 장수를 찾으려 했고, 이내 골목의 그늘진 곳에서 가판대를 차린 과일 장수를 발견했다.


"잠시만 여기에 있어보거..."


"에이, 같이 가야죠. 명색이 경호원인데."


안나는 자연스럽게 엘사와 팔짱을 끼려다,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에헤헤 웃으며 팔을 풀었다. 안나는 엘사의 연인이 아닐 뿐더러, 자신과 엘사는 동성애를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화책에서 읽은 왕자님과 공주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동이 오히려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아...자꾸 결례를.."


안나가 꾸벅 사과의 인사를 보냈고, 엘사는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엘사는 골목길의 사과장수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갑자기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서민에게서의 물건을 구매한다는 행동이 그녀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어서 옵쇼. 때마침 과일들이 모두 제철이라 싸게 팝니다요! 몰리 산 사과는 개당 세 푼, 티비아 산 포도와 배는 송이당 두 푼에, 개당 다섯 푼입니다.  숙녀분, 뭘 사러 오셨나?"


"저, 아니, 나, 나는.."


안나는 엘사가 미세하게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안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잡기 직전, 찰나의 떨림이 엘사의 손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 이쁜이 숙녀분도 무얼 사시려고 온 건가? 아, 일행인가? 일행이라면 더 싸게, 더 많이 줄 수도 있지!"


"일행 맞아요. 그리고 이 사람이 고를 거구요. 자, 어서 말해요."


이쁜이라고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안나는.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엘사에게 말을 걸었다.


"사, 사과. 두 개. 주려무...아니, 주세,,,요."


"사과 두 개? 아니, 그걸로 되겠어? 자, 사과 네 개 줌세. 값은 사과 두개 값인 여섯 푼만 내게나!"


미인계라도 통한 것일까, 넉살 좋은 수염을 기른 과일장수는 껄껄 웃으며 때깔이 가장 좋아보이는 사과를 안나와 엘사에게 각각 두 개씩 내밀었다.  엘사가 지갑을 꺼내 값을 치루는 동안, 안나는 사과를 천으로 싹싹 문질렀다.


"그럼, 다음에도 또 오시게나! 싸게 팔아 줄 테니!"


웃으며 작별한 사과장수를 등 뒤로 하며 두 사람은 다시 분수대에 앉았다. 여전히 즐길 거리는 많았지만, 엘사는 눈앞의  사과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과는 깎아 먹어야 하지 않느..."


아삭, 엘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크게 한 입 베어 문 안나가 옆에 있었다.


'더럽게 뭐하는 짓이냐.'


엘사는 순간, 목구멍으로 차오르려는 말 한 마디를 겨우 억눌렀다.


"네? 괜찮아요. 사과는 껍질에도 영양가가 있다고 제 대부님이 말해 주셨어요."


"대부?"


뜻하지 않은 정보에, 엘사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네, 전 고아라서 대부님 밑에서 자랐거든요. 명색이 사군토 출신이지만, 제빵은 못했고, 대신 검술을 주로 배웠죠. 제빵사가 하도 많다 보니까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면서요. 아무튼, 사과 껍질에도 영양소가 풍부하댔어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안나가 사과를 다시 한 번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아작아작, 맛깔나게 씹어대는 안나를 보며 엘사도 순간 안나처럼 먹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고, 그 충동의 물결에 저항하지 못했다. 깨끗한 천으로 사과를 사그락, 사그락 닦은 엘사는 안나만큼은 아니어도, 입을 조금 벌려 사과를 깨물었다. 농익은 사과의 즙이 엘사의 입안에 터져나왔고, 적당히 무르익은 과즙과 경도가 있는 껍질은 부담없는 상성을 이루었다.


"어때요, 맛있죠?"


"마, 맛은 비슷하구나. 하지만... 네 말대로 영양소가 더 풍부한 것 같구나."


마치 산책을 마친 강아지처럼 밝게 웃는 안나를 보며, 주인인 엘사는 마지못해 인정하며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92.




"어서 말해 보게."



아그나르는 심통한 표정을 지으며 재무총감 라푼젤에게 말했다. 라푼젤은 어떻게 해야 최대한 아렌델의 적자, 그리고 황실의 적자를 메꿔 황제에게 전해야 할지 사흘 밤낮을 내리 새워 편두통이 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이번 분기에만 2천만 크로네가 적자입니다."


"2천만 크로네?"


"지난 분기에는 4천만 크로네였습니다. 은행이 차입을 허락해준 덕분에 이번 분기는 다행이도...."


라푼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변변찮은 금융계 사람인 그녀는 순전히 제3신분들의 말을 대변하는 말을 몇 마디 한 것 때문에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재무총감의 자리에 올랐지만, 제1과 제2신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실력과 존재 의의를 탐탁치 않아 했다. 라푼젤은 도리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타 나라에 독립전쟁을 위해 지원을 해준 것은 의도는 좋았지만, 규모가 매우 컸으며, 귀족들의 사치는 날이 갈수록 치솟는 치세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그나르 황제와 한스 황세자는 검소하게 살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그래도 재무총감의 자리에선 모든 사치를 엿볼 수 있었다.




금으로 된 술잔을 그럴듯한 구리잔으로 바꾸어도 수십 명이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있고, 보석들을 팔기만 해도 지금의 적자를 상당 부분 메꿀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세금이 문제였다. 현 세금 제도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3신분에게만 집중되는 편이었고, 귀족들은 사실상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에 가까운 형태의 제도였다. 세금의 종류 또한 너무 다양하고 세율이 만만치 않아, 인육 스튜를 먹는 게 더 낫겠다는 풍문까지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말을 잘못 했다가는 근위대에 끌려가 목이 잘릴 지, 산 채로 불태워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자네는 왜이리 무능력한가?"



오히려 라푼젤이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700만명의 음식과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선왕인 루나드 왕이 이루지 못한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 것일까? 그저 허영심에 불과하며, 불필요한 명예에 불과할 텐데?



"왕족이 국민의 세금을 올바르게 쓰는 건 당연하다. 사치 또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당연하지. 하지만 어째서, 서민들은 이토록 돈을 내놓지 못한단 말인가. 통탄스럽구나."


'그럼 보석부터 팔아보시던지...'



"송구합니다."



라푼젤은 속으로 그를 욕하면서 명목상의 사과를 했다.



"그만 나가보게. 다음에는 좋은 소식을 들고 와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네 직위를 파면할 테니까."


아그나르가 으름장을 놓았고, 라푼젤은 쩔쩔 매는 척을 하며 알현실을 나왔다. 알연실을 나오자, 낯익은 남색 제복을 입은 주시자들이 서 있었다. 모두들 상아색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흑색의 단발머리를 한 고위 주시자 카산드라가 다른 주시자들의 경호를 받으며 문앞에 서 있었다.



"라푼젤 총감."


"주시자 카산드라, 오랜만이예요."



공적인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왕당파인 카산드라이자, 제3신분의 지지를 받고있는 라푼젤이었지만, 라푼젤은 원래 주시자 출신이었고, 그 둘은 같은 기숙사를 쓰던 동기 사이였다. 제 아무리 사상과 신념이 갈라졌을지라도, 사석에서는 빵과 와인을 돌려마실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폐하께서 한 소리 하셨나봐요."



"뭐, 언제나 그렇죠. 잔소리 듣지 않게 조심해요."



자리를 뜨는 라푼젤의 조언을 들으며 카산드라는 아그나르의 엄포를 들을 준비를 하기 위해 심호흡흘 두어 번 한 뒤, 문을 열었다. 알현실의 끝에 놓여진 황금 왕좌에는 아그나르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카산드라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 아그나르에게 인사를 올린 그녀는, 이내 다른 주시자가 가져온 양피지 두루마기를 펼쳐 보았다.



"고위 주시자 카산드라가 황제 폐하께 알려드립니다. 현재 린든에 파견된 저희 측 주시자 말로는, 주도자는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배식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폭동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 '시궁창과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게 다인가?"


아그나르가 퉁며으럽게 물었다. 카산드라는 싱긋 웃으며 두루마기의 나머지를 읽어 내려갔다.


"역병이 확산됨에 따라 동시에 시민들의 폭동의 조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는 자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지역에선 거리가 온통 조용할 따름이지요."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카산드라 주시자.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그나르가 왕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카산드라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희가 곧 허위 정보와 활동을 할 것입니다. 폭동의 조짐이 보이는 곳엔 우는 자들을 풀어 사그라들게 할 것이며, 엘사 공주의 영지에서 역병이 창궐했다는 소문을 퍼뜨릴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의 비난은 왕실이 아닌, 엘사 공주를 향하게 되겠지요.:"


"하긴, 엘사의 존재 의의가 그것밖에 더 되었기나 했던가.  카산드라, 이번 일이 끝나면 자네에게 아주 후한 보상이 내려질 것이네. 8명의 고위 주시자 중 한명이 아닌, 만인의 수도원을 이끌 수장이 되도록 내가 든든히 밀어줄 것이네. 그러니 앞으로도 충분한 공작을 서슴치길 바라네. 이만 나가보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다시금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마친 카산드라는 몸을 돌려 알현실을 나섰다. 성을 나가면서, 카산드라는 엘사 공주에게 새로운 경호원이 생겼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 경호원이 어떤 인상인지는 보고받지 못했지만, 카산드라는 그 경호원이 얼마 안가 그만둘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엘사 공주의 수호경들은 엘사의 히스테리한 성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것을 확신했다.



만약 자신의 계획이 성사시켜도, 엘사를 동정할 사람은 가까운 시종 외엔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큰 그림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93.



"여기! 여깁니다! 따뜻한 음료와 담요, 그리고 빵과 돈이 있습니다!"


복면을 쓴 한스는 연신 빵과 담요가 든 바구니를 들며 시민들께 소리쳤다. 그의 말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나라의 왕자와 수행원들이 자신들에게 먹을 것과 화폐를 준다는 데, 그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빵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기미를 보이는 지금, 그들에겐 한 덩어리의 빵, 한 푼짜리의 동전조차 중요했다. 대중들은 그의 정체가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달려들어 바구니 속 빵과, 주머니 속 돈을 챙겨가려 손을 내밀었다. 한스는 그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복면을 썼기에 망정이지, 그의 미세한 욕설은 수많은 인파와 복면에 가려져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자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요."


"암, 암. 이 나라를 이끄는 데엔 제격이신 분이야."


빵과 돈을 받아가는, 그나마 점잖은 사람들은 한스에게 칭찬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스는 그들이 완벽하게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웃음을 지어냈다. 보라, 저들의 피를 빼먹고 남은 피딱지를 돌려주는 것인데, 저들은 우리를 구세주로 알고 있지 않느냐.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반면 엘사 공주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죽어가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잖아!"


"모든 잘못은 그녀의 사치에 있어, 적자 부인이야! 적자 부인!1)



그들은 모두 들으라는 듯 한통속으로 엘사를 욕하고 저주했다. 한스는 속으로 뇌까리며 눈웃음을 잃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준비한 빵과 돈, 담요가 다 떨어지자 그들은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갑갑한 듯 마스크를 벗은 한스의 맞은편에는 단창을 매고 있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어땠나, 딜런."


"왕자님의 연기 말입니까?"


딜런이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흐르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풍경 중 하나에는 한스가 준 빵을 씹어대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엘사 공주의 음란한 행실을 씹으며 걷고 있는 민중들도 있었다.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주기엔 충분한 활동이었다고 보지만... 옥체를 좀 더 보전하심이 어떨까요. 빛의 벽과 아크 방사탑이 괜히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우리에겐 그저 일시적인 의례에 불과해, 그리고 사람들에겐 공포의 수단이지. 역병과 함께 말이야. 그리고 우리에겐 소콜로프가 있어. 그의 영약이 곧 완성된다면. 우린 그 영약으로 대중들을 조이면 된다."


딜런은 눈 앞의 왕자를 보며 소름이 끼쳤다. 역병은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가며,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잃고 다른 이에게 전염을 시키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우는 자로 만드는 판인데, 그는 영약이 나오는 가에 대한 도박을 걸고 있었다.


"불편한가?"


그런 딜런의 내면이 눈에 읽히기라도 한 듯, 한스가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불편하다고 생각되는게 당연해서이지. 몰락귀족 출신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낮은 곳의 사회는 너무 어두워서 더러움이 감춰져 있고, 높은 곳의 사회는 너무 밝아서 더러움을 볼 수 없는 법이지. 난 지금 자네에게 그 더러운 왕족의 발언 하나를 보여준 것 뿐이야."


딜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음해에 몰려 몰락한 귀족이자, 어릴 적 실종된 여동생을 찾기 위해 창술을 배워 대회에 나왔건만, 자신의 여동생의 또래 뻘 되는 상대에게 다리를 다쳐 기권을 선언했다. 그래도 유려한 창술을 보여준 덕분에, 그를 기억하는 귀족들 또한 적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경호원 제의도 적잖게 들어왔다. 어느 부유한 귀족의 경호원으로 고용될 찰나, 한스가 그를 고용했다. 더 높은 급료에, 공식적인 수호경 직위를 뜻하는 새 창을 내리면서. 딜런의 인생 이정표에 변경점이 생겨났다.



"불편하면 언제든 떠나도 돼. 하지만 떠난다면, 자네의 여동생을 찾는 게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 만은 알아뒀으면 좋겠네."


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딜런은 무응답으로 그를 따랐다.



하지만 딜런은 그의 말을 마음 속에 새겨 두며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의 창날이, 한스를 향할 것이라고.






1):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비유한 별명.





94.


"씹어먹을 자식."


한스를 태우던 마차가 천천히 오간 덕분에, 빈민으로 위장한 부르주아지 출신 암살단원들은 그들의 대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피를 빼먹다. 피딱지.  안톤 소콜로프의 영약. 그들은 지금껏 영약이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왕자가 직접, 그것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스스로 누설했으니, 이 역병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 되었다.


"영약 얘기, 모두 들었지?"


"암, 들었지. 마스터 멜리사에게 소식을 전해 드려야겠어. 지금 마스터는 어디 계시지?"


"린든에 계시지. 주도자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 계셔."


어느덧 골목을 한 차례 접어 들자, 그들은 몸에 두르고 있던 냄새나는 거적데기를 벗어던졌다. 그들은 정장과 로브의 사이에 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점잖은 신사, 누군가에겐 학자, 누군가에겐 검사로 보일 수 있는, 애매모호한 복장이었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활동을 하는 것의 진술을 헷갈리게 해 수사를 방해할 수도 있었다.


"난 그 주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왜? 이쁘고 반반하잖아. 우리 마누라가 그렇게 예쁘고 템플러면 난 당장 귀의할 의사도..."


"자크,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암살단의 신조를 잊은 거야? 입단한 이유도 마땅하지 않았나?"


자크라고 불리우는 단원에게 다른단원이 지적했다.


"그냥 농담한 것 뿐이야. 테스, 그 여자의 남편이 주시자들에게 죽었다면서, 그것도 왕당파 주시자들에게."


"우리가 일으킬 혁명에 앞세우기 딱 좋은 체스말이지. 아마 그녀도 숭고히 임할 것 같아. 제기랄, 저 쥐 떼 좀 봐."


테스가 손으로 어둠 속에서 돌바닥을 갉고 다니는 쥐 떼를 보며 말했다. 쥐 떼들은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듯 도망치다, 이내 빛의 벽에 부딪혀 불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대체 언제쯤 역병이 끝나려는 거야? 누가 말하길, 판디시아 대륙에서 역병이 든 쥐를 데리고 왔다고 하던데."


"역병이 든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 이득은 있겠다. 도시 치안을 대비하는 지휘권자들은 권력을 휘두르기 딱 좋게 배경이 조성되었지."


이는 곧 첩보대장과 고위 주시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치안과 정화를 핑계로 도시의 치안을 더욱 강화하는 데 이어, 지원자들의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인 탓에 위계질서가 흔들리고, 정치 깡패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른 즉, 타락한 권력 기관이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또 궁금한 게 있어. 엘사 공주가 진짜 존재하긴 하는거야?"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엘사 공주건, 엘사 왕자건 우리 목표는 아닐 텐데."


자크와 테스가 입씨름을 하는 사이에, 나머지 한 사람. 소크는  빛의 벽이 자신들에게 가까워졌음을 알고 그들의 대화를 멈추었다.


"모두 신분증 꺼내."


그들은 부르주아지를 나타내는 제3신분증을 꺼내 경비대에게 보내면서, 약간의 뇌물을 쥐어주었다.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손에 넣은 도시의 경비대원들은 뜻밖의 수입에 후하게 웃으며 그들을 벽 너머로 보내주었다.


"만약 혁명이 일어나면 저들 중 누가 우리 적이고, 아군이 될까?"


"가장 험상궂게 생긴 자가 우리 편이 될 거라는 데에 동전 열 푼을 걸지."


"지랄하고 자빠졌네. 차라리 난 엘사 공주한테 열 푼을 걸지."


"그건 또 무슨소리야?"


자크의 말에 테스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앞에 차가운 바람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고, 그들은 로브를 뒤집어 쓰며 잔뜩 몸을 움츠렸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보내는 일종의 제물이자 노잣돈 같은 거지."


의문을 제기한 테스에게, 자크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마 사형 집행인들은 이 혁명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


무심코, 소크라가 모두가 궁금해 할 주제를 꺼냈지만, 답은 두 개로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혁명이 시작되면, 그들은 실업자가 될 걸."


"어쩌면, 부자가 될지도 모르지. 잘라야 할 목이 수천 갠데."





94.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식처럼, 맛있구나."


엘사는 안나가 급조한 새 간식을 마음에 들어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기하학 책을 읽으면서, 안나가 만든 마시멜로를 잔뜩 끼얹은 핫초코를 홀짝이고 있었다. 독서 시간이야말로 그녀가 하루 중에서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매일의 독서에, 안나의 간식은 말 그대로 안성맞춤이었다. 달달하고 상큼한 마시멜로가 만들어낸 거품이 뜨거운 우유에 녹인 초콜릿 가루에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엘사는 만약 벽에 개폐식 구멍이 있다면, 문을 열고 안나에게 만들어 주어서 새침한 어투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나는 지금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수호경의 일 중 하나는 밤샘 근무였고, 그것은 곧 침실 근처에서 깨어 있은 채로 대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기에 안나는 자투리 시간에 잠을 자야 했다. 또한 오늘 있었던 둘만의 작은 일탈은 피로를 축적시켜 수면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 탓에, 안나는 기존과 차원이 다른 피로를 느끼며 단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 10시가 되면 엘사는 자야 할 것이고, 안나는 일어나야 할 예정이었다. 엘사는 처음으로 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사실이 무언가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기존에는 이따금 지나치는 시종들 이외에는 죽은 듯이 있던 그녀였지만, 안나를 만나 일탈을 즐기면서, 조금씩이나마 움직이는 새싹이 된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실제로 오늘 그녀가 바라본 하늘은 여태껏 본 하늘 중에서 가장 넓고, 맑았으며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엘사 자신의 정책 덕분에 사는 걸 모르고 그녀에게 환대를 해 주었고, 그녀에게 스스럼없는 웃음을 내비쳤다. 엘사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권력이 있었다면, 저들에게 환대를 해 주었을까? 아니면 적대를 해 주었을까? 엘사는 한스의 행실을 생각하며, 차라리 지금 권력이 없는 자신이 자신답다고 답을 내렸다.






대중들은 사치와 향락을 부리며 겨우 표면적인 시민들과의 위선적인 만남을 가지는 그보다, 재정을 검소히 쓰되 남은 재정을 영지에 베풀어 시민들의 안위를 챙기는 자신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으로는, 그녀의 실제 영지들을 구원해주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은 이미 여러 차례 수해가 지나간 곳이고, 암살 집단인 '고래잡이'들이 점거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의 살인과 강도는 마치 시민들이 주식으로 빵을 먹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일상화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역병에 걸려 우는 자가 되어 치욕적인 죽음을 맞기 싫다면, 엘사 공주가 다스리는 수해로 폐허가 된 러드쇼어 상업지구로 가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자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한스 왕자가 다스리는 영지로 가라고.




엘사는 그런 풍문이 돌 때마다, 자신이 많이 위축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자신은 언제까지 꼭두각시로 살아야 하는 걸까? 황실의 사람들은 과연 자신에게 기회를 주긴 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살다 죽는 것이 그녀의 운명인 걸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엘사가 무심코 검술 대회 직전 안나와의 인연스러운 만남이 고용관계로 이루어진 것처럼. 인생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 그녀를 그나마 챙겨주던, 얼굴이 유난히 검었던 이름모를 중위는 퇴역을 하기 전, 작은 숙녀였던 그녀에게 린든으로 떠나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전진하십시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언제나 해야 할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린든으로 떠났을 중위의 생사가 궁금했다. 중요한 건, 아무도 그의 생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성 내의 시종과 영지의 사람들 중 린든 출신은 없었고, 이제 갓 온 신입 수호경은 사군토 출신이었다. 만약 그를 다시 만난다면, 엘사는 자신이 부끄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의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떠났지만, 엘사는 스스로의 목표를 성인식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여왕이 되는 것?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스보다 유능해지는 것? 애초에 그녀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없었다. 여차하면 타국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살얼음판임에도, 그녀의 긴장은 풀려져 있었고, 조금씩 눈꺼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엘사는 남아있던 마시멜로 핫초코를 모두 마시고, 책에 책갈피를 끼운 뒤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잠들기 전, 시계를 바라보았을 때, 분침과 시침은 거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잠들고, 안나가 일어나 활동할 시간이었다.








95.


"흐아암..."
안나는 하품을 하며 사브레를 허리춤에, 단도를 부츠에 끼운 다음 제복을 입고 침실을 나왔다. 공주의 침실은 바로 옆에 있었기에, 활동 반경은 넓지 않았다. 안나는 나오면서 담요 한 필을 챙겨 나왔다. 담요를 깔고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닌, 성내에 휘몰아치는 바람들을 견뎌낸 자신이 없었기에 한 겹이라도 두르고 있는 게 나았다. 안나는 지하실이 사실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의 인테리어에 몸서리를 쳤다. 린든에서조차 흔한 카펫 한 장도 이곳엔 깔려 있지 않았고, 성을 비추는 조명들의 수와 빛의 세기는 안나의 생각보다 훨씬 적고 약했다.




안나는 이러다가 정년이 되었을 때, 장님으로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만약 새벽에 다른 경호대와 교대를 할 때, 불의 밝기라도 좀 높여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이내 생각이 끊어지자, 지루한 밤이 찾아왔고, 안나는 담요에 싸 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린든에서 떠나기 전 무작위로 집어온 책들 중 하나였다. 책의 제목은 '음란한 방관자의 시녀'였다. 그 방관자? 안나는 꿈 속에서 자신에게 표식을 준 이단의 신을 떠올렸다. 그래도 안나는 겁을 먹지 않고 펼쳐 읽기로 했다. 이미 표식을 받은 마당에, 방관자가 해를 가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 안나는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약 30분 동안, 안나는 자질구레하지만 지루함을 벗어낼 수 있는 그 소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안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주위를 경계하며, 약 3시간이 지난 뒤가 되서야 소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소설을 모두 읽은 안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목표를 기억했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는 것. 그리고 안나는 자신의 배낭에 숨겨진 세모꼴 표시의 문양을 한 목걸이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마치 병따개와도 같아보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에게 괜히 물려주신 게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곳저곳에 물어보고 다닌다면,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이 안나를 쫓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엘사는...


'언제부터 엘사 공주님을 신경쓰게 되었지?'



안나는 처음 게르다에게 제안을 받고, 메가라의 집에서 결단을 내렸을 때, 안나는 엘사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목적을 이루는 데의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근 이틀 동안 그녀를 접한 안나는 엘사가 매우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안나가 겪은 린든에서의 삶은 고달펐지만, 그럼에도 자유란 게 있었다. 반대로, 엘사가 겪고 있는 황족이라는 삶은 부유함에도, 자유가 없었다. 세상은 엘사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엘사를 욕한 것일까? 단순한 시민에서부터는 아닐 것이다. 분명 엘사를 시기하는 자들인, 적어도 서민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퍼뜨렸을 것이었다.



'적어도 괴롭힘은 멈추게 해야지....'



안나는 목적을 새로이 변경하기로 했다. 목적을 이루면서, 엘사를 음해했던 자들까지 모두 처리해 버리기로.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그녀의 계획에는 더 이상의 변화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때, 엘사의 침실에서 비명소리가 울렸고, 안나는 재빠르게 표식의 주문을 외워 암흑 시야를 발동시켰다. 문 너머로 엘사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일렁이며 안나의 눈에 비추어졌고 그녀는 마치 목에 칼이 들어온 듯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96.



엘사는 꿈을 꾸었다. 항상 꾸던 꿈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는 시체의 강가에 서 있었고, 그 중에선 입을 열며 중얼거리는 시체도 있었다.


'당신이 우리 지구를 망쳤어!'


'당신이 우리 가족을 죽게 내버려 두었어!'


'이 망할 씨발년아!'


'이 개썅..'


온갖 욕설이 엘사에게 쏟아졌고, 엘사는 이젠 일상이 된 그 꿈 속에서 몸을 웅크리며 두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향한 저주는 손의 틈새를 파고들며 그녀의 고막을 갉아먹었다. 이번의 꿈은 저주의 강도가 특히 그러했다.


"아니야....내가 한 게 아니예요..."


엘사는 울부짖었다.  그럼에도 시체들은 그녀보다 더 크게, 더 괴롭게 울부짖었다. 갑자기 호수가 일렁이더니, 시체들이 일어났다. 썩은 뼈들과 곪아 터진 살가죽을 가진, 엘사가 모르는 사람들이 천천히, 한 걸음씩 엘사를 향해 다가왔다. 엘사는 일어설 수 없이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깨야 할 꿈이지만, 지금은 깨지 못했다. 마치 안나와의 하루가 꿈이고, 지금이 현실인 것처럼. 좀처럼 그녀의 의식은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저리 가, 저리 가요!"


엘사가 다시금 울부짖었다. 시체 하나가 가장 먼저 그녀의 앞에 도달해 팔을 잡았다.


'죽이자!'


'빠뜨려 죽이자!'


이내 다른 시체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들어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다. 엘사는 힘껏 저항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발 깨, 제발 깨란 말이야. 누가 나 좀 깨워줘.'


엘사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현실에서 그녀를 구해주는 안나는, 이곳에선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녀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 멀리, 일전에 보았던  숲에서, 붉은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칼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아니, 목검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놔 줘!"


안나가 외치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시체들의 목을 검으로 휘둘러 부러뜨리고, 발로 차 뼈를 으스러뜨렸다. 주먹으로 목뼈를 돌리는가 하면, 박치기로 하여금 두개골을 부수기도 했다.


'안나.'


목이 메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엘사는, 그저 슬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조차도 그녀는 안나에게 구원을 받고 있었다. 하나 둘, 그녀를 잡던 시체들이 안나의 목검과 주먹, 그리고 발에 쓰러져 갔고, 이내 안나는 마지막 시체의 목에 발길질을 해 부러뜨려 쓰러뜨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안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엘사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안나, 안나 윈터. 부르고 싶은 이름을 가진 소녀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내 그 선택을 후회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고, 손에서 나온 얼음이 안나의 등과 어깨, 손을 궤뚫어 버렸다. 안나의 등과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시체들의 무더기에 흩뿌려졌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직후에 그녀의 꿈이 깨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사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목 아래에 서늘한 무언가를 느꼈다. 암살자라도 찾아온 것일까? 그녀는 눈을 굴려 좌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암살자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에 겨눠진 것은 얼음이었고, 그 얼음은 그녀의 손에서 사출된 것이었다.




"공, 공주님, 괜찮으세요!"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 윈터. 그녀의 수호경이 문 앞에서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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