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팬픽]꼭두각시의 칼 33~34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5.02 22:12:28
조회 78 추천 11 댓글 0




1~30


31~32







97.


"이것으로 설명하자면..."

아그나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기요틴 박사의 발명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목을 구속하는 기구 위로 매달려 있는 서슬 퍼런 두꺼운 칼날은 그 어떤 두꺼운 뼈와 단단한 살들도 잘라낼 것처럼 보였다. 아그나르는 거듭 기침을 하면서, 기요틴 박사가 왜 이것을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밧줄을 놓기만 하면 칼날이 내려와 목을 자르게 해주는 구조입니다."

박사가 의기양양하게 구조를 말함과 동시에, 약간의 소름이 아그나르의 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자신이 저 '단두대'라는 물건에 구속된 채로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칼날을 상상했다. 어른인 그였지만, 겁에 질려 똥오줌을 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이 단두대라고?"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아렌델에는 정치 사범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모두 사형해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단번에 목을 자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숙련된 사형 집행인들조차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죄를 지은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그나르가 물었다. 죄를 지었으면,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도 목이 쉽게 칼로 베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을 내리쳐도 베어지지 않고, 의식이 남아있어 비명을 지르는 사형수들도 그가 지켜본 적이 있었다. 문득, 그는 20여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그의 연인이었던 여성도 그의 석궁에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끈질기게 아이를 살리려고 발버둥을 쳐 시민들에게 구해진 적이 있었다.

"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아그나르가 말했고, 기요틴 박사도 이에 동의했다.

"저도 잘 압니다. 폐하, 하지만 기존의 사형 방식은 너무 폐쇄적입니다. 군중들이 보지 못하게끔 하는 사형 방식은 일정 이상의 공포심을 유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단두대는... 광장 같은 곳에 설치해 공포심을 조장시키는 겁니다. 자신이 그 칼날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잠재적인 공포심 말입니다."


기요틴 박사의 말에, 아그나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는 역병과도 같았다. 한 무리의 쥐떼를 광장에 풀면 사람들은 대놓고 기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단두대를 광장에 놓는다면, 사람들은 내면의 두려움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그럼 당장 설치하는 작업을 하도록 말해 두겠네. 그리고 추가로 단두대를 주문할 것일세. 또한 칼날에 붉은 페인트를 좀 묻혀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 의견을 내려주셔서 영광일 뿐입니다. 당장 시행에 옮기도록 하지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박사에게, 아그나르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 더 꺼내기로 했다.


"아, 그리고... 단두대에 이름을 하나 짓고 싶은데, 당신의 이름을 따는 게 어떨까 싶소만."


"제, 제 이름 말입니까..."


순간, 박사의 태도가 움츠러들었다. 기쁠리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단순무식한 기계에 지식인인 자신의 이름을 곁들인다니! 박사는 황제가 그 뜻을 제 스스로 거두기를 마음 속으로 바랬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의 뜻은 굳건했고, 박사가 저항했다간 단두대의 첫번째 주자가 될 지도 모를 터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이 기구의 이름은 '기요틴'으로 하겠습니다. 영...영광입니다."


"이제 물러가도 좋네, 아. 보상은 충분히 내릴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자네와 자네 가족들은 굶주리지 않을 것일세."


아그나르가 손짓하자, 기요틴 박사가 하인들에게 손짓했고, 이내 하인들이 기요틴 모형을 들고 그와 함께 알현실을 나섰다. 동시에,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의 충직한, 이름없는 시종이었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땀에 조금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들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폐하, 읽어보셔야 할 '저널'이 있습니다."


'저널? 아렌델에 언제부터 그런 게 있던가? 이리 줘 보게."


본래 아렌델에는 국영 언론이 전부였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국가에 대한 좋은 기사를 다루는 언론 말고도 새로운 언론이 생겼다는 것은 역병만큼이나 불길한 징조에 가까웠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돼지들은 들으시오.
지금 성 밖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소.
천 명이 먹을 거리를 당신들이 하룻동안 먹어치우고, 나날이 오른 세금을 제하면 제3신분에겐 남는 게 없소이다.
빵을 만드는 데 드는 한 줌의 밀가루는 겨우 당신들의 머리를 염색하는데 쓰이고
한 컵의 우유는 당신들의  섹스를 위한 생크림을 만드는 데 쓰이고 있소이다.
하루 빨리 정신들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 위대한 아렌델 제국에 언제나 번영만이 있을 수는 없소이다.
국민들은 당신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 아그나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가 저널의 밑에 쓰여진 저자를 확인하자, '막시밀리에르 드 라비스피에르'라로 적혀 있었다.


"대담한 작자로군. 기억에 남았던 사내였지."


아그나르는 라비스피에르란 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루나드 선왕이 물러나고 왕위에 오르고 난 뒤의 첫 수도 행차에서, 한 고고해 보이던 시민이 그에게 찬양문을 올렸던 기억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막시밀리에르 드 라비스피에르라고 부르며 루나드 선왕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바라며, 이 제국의 배를 찌우게 해달라는 찬양문을 낭독했다. 당시의 그와 어린 한스 왕자는 그 뜻을 알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엘사 공주는 더듬거리며 뜻을 낭독했다. 그때만 해도, 애로 가득했던 사랑스러운 딸아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그나르가 문득, 불길한 저널을 들고 온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을 쩔쩔매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너도 네 생각이란 게 있겠지. 내 생각에 반대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그 마음 이해하네. 자네도 먹여살릴 가족이 있지 않은가."


아그나르는 한껏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시종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었다.


"저, 저는..."


시종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삼부회1)...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부회?"


그가 시종으로 뽑힌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급격한 상공업의 발달로 몰락한 귀족들이 적잖이 있었고, 그의 아비는 아그나르가 암살단의 지부를 파괴하고, 인연을 끊기 위해 물적으로 지원해준 가문의 사람이었다. 명색이 전 귀족이었으니, 어느 정도 소양이 있을 터였고, 아그나르는 지금은 죽은 그의 아비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를 직속 시종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는, 아그나르를 의아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인민들의 원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역병, 그리고 빈곤을 둘다 처리하지 못한 탓이지요. 역병은 소콜로프 박사님께서 영약을 연구 중이니 차치하고서라도, 국민들의 고충인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에릭 증조부께서 열으셨던 걸 이제서야 여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


마지막 삼부회는 아그나르의 증조부였던 에릭 선왕께서 열었다. 그 때의 안건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제 1,2신분과 제3신분간의 합의가 결렬되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 할 뿐이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반은 우리일세, 우리가 있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침략 대상이 될 것이야."


아그나르는 심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안건이 무엇이든 간에 합의가 결렬될 가능성이 매우 크네, 자칫하면 소요가 일어날 수도 있어."


삼부회는 제 1신분 300명, 그리고 제 2신분 300명, 제 3신분 600명으로 구성되는 회의였다. 신분별로 투표한다면 합의가 왕권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나, 그걸 제 3신분이 가만히 볼 리 없었다. 특히 제3신분은 신흥계층인 부르주아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에 있어 중요한 자들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시종이 아그나르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잠시 뒤, 아그나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네가 내 시종이어서 정말로 다행일세."


"칭찬해주셔서 영광일 뿐입니다."


"밖에 나가서 전하게. 두달 뒤에, 삼부회를 개최하겠다고 말일세."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 두 달이라면 역병의 치료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시종이 맞장구를 쳤다.


"자네에게 부탁을 또 해야겠군. 소콜로프 박사의 저택에 가서 영약 제조에 박차를 가하도록 전하게. 그리고... 카이를 부르게. 엘사 공주에게 맡겨야 할 일이 있다고 전하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네."




1):1, 2, 3신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개최하는 회의







98.



같은 시간, 사군토의 한 지하 사원에서는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할 두 단체가 복도를 한복판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 케니르."


왼쪽 기둥들에 서 있는,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자가 건너편, 흰색 로브를 입고 삼각형 모양의 배지를 찬 사내의 명칭을 말했다.


"그랜드 마스터 프랑수아 드 라 세르."


그러자 마스터 케니르가 프랑수아 드 라 세르를 불렀다.


"이게 얼마 만이지? 암살단과 템플러가 이렇게 칼과 암살검을 휘두르지 않고 마주하고 있을 때가."


"알타이르 님께서 소피아 님과 연약을 맺으시고... 600년이 흘렀지."


두 단체의 수장은 앞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기둥마다 매달린 등불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려 그들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암시하는 듯 했다.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있어. 현 왕비의 친정인 몰리에서 또다시 반란이 이어질 모양이야."


"그 뿐인가. 다른 군도에서조차 하나 둘 역병에 대한 봉쇄 조치를 하려 하고 있네. 소콜로프의 영약이 언제쯤 만들어질지 미지수이고, 그것이 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야. 한 잔 하겠나?"


"좋지, 이런 무거운 대화엔 가벼운 와인이 제격이겠지. 서코노스산 포도주겠지?"


"자네의 술 취향은 우리 암살단원들조차 꿰고 있네. 언제나 조심하라고."



드 라 세르는 한 방 먹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챙겨온 은 잔을 케니르에게 내밀었다. 케니르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드 라 세르의 은잔에 따랐다. 아무런 색의 변화가 없자, 드 라 세르는 안심하고 잔을 들이켰다. 독이 있다면 색깔이 변하는 은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만큼, 암살단과 템플러 기사단은 수천년의 시간 동안 선악과라 불리우는 고대 유물을 파괴하고, 취하는 데에 피를 흘려대었다. 인간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암살단, 정당한 체재 속 평화를 추구하는 템플러의 대립은 시민들이 모를 만큼 조용한 전쟁을 이루고 있었다.


"주시자들의 상태는 어떤가, 드 라 세르?"


"말도 말게. 현재 주시자들도 분열하고 있어. 카산드라가 왕당파를 이끌고, 뮬란이 혁명파를 조직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네."


"그럼 이단을 잡는 데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싶네. 알잖나, 선악과엔 관심이 없는... 한 미친 신 말일세."


케니르가 방관자를 은연중에 언급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자신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른 뒤, 한 번 기울인 다음 천천히 마셨다.


"그들의 사도가 우리 둘 중 한 사람에만 있어도 주시자들이 통째로 공격해 올 걸세. 왕당파던, 혁명파던 말이야."


"우린 수시로 자체적으로 손등의 표식을 확인하고 있지, 자네는?"


프랑수아가 다시 한 번 은잔을 내밀었다. 케니르는 기꺼이 병을 기울이는 것으로 응했다.


"우리 암살단은 언제나 팔을 중시하지, 손목 뿐만 아니라 팔, 혹은 몸 전체를 수색하는 것도 마지않아. 자네도 잘 새겨두게."


케니르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아마 앞서 말한 방식으로 방관자의 표식을 가진 이를 색출했던 모양이리라.


"이럴 때일수록 황제가 더욱 시민들을 살펴야 하는데, 살피지를 않고 있어. 언론은 국영인 데다가, 섣부르게 나서는 민영언론이 등장하지 않아."


"자네의 정보력이 딸리는 모양이군, 어제 라비스피에르란 자가 황제를 겨냥하는 저널을 썼다네. 돌아가면 확인해 보게. 아무튼, 황제는 이제 끝인 것 같다고 생각하네만, 자네는 어떤가?"


어느새 두 수장의 뒤에 있던 부하들도 가까이 저마다의 일면식이 있는 상대편의 동료와 잡담을 섞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추구하는 사상만 다를 뿐, 그들은 템플러와 암살단 이전에 막역한 친우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지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네. 마땅한 자가 있는가?"


"황제의 친인척은 모두 썩어빠졌어. 아마 부를 유지한다면 황제도 팔아먹을 작자들일세. 그나마 한스 왕자의 평판이 좋아 보이는데, 엘사 공주의 평판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아마 엘사 공주는... 그리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네."


"참 불쌍하기도 하지, 옛 왕비마마는 공주님이 세 살쯤 되셨을 때 갓난 둘째 공주님을 데리고 왕궁을 탈출하셨다지. 그 이후로 아그나르 왕이 엘사 공주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네."


"아마 아렌델 전체를 합쳐도 얼마 되지 않을 걸세. 아, 그 얘기를 꺼내니 그런 소문이 돌았더군. 아그나르 왕이 20여년 전쯤 아무도 모르게 린든을 향한 적이 있으셨다고, 그 때가 왕비께서 탈출하셨던 때랑 묘하게 시기가 겹친다는 얘기도 들었건만...자세한 내막은 황제만이 아시겠지."


"그 왕비 얘긴 더 이상 하지 말게. 괜히 슬퍼지니까. 그 현명한 분을 왜 내치셨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살아 계신다면 아렌델을 더욱 훌륭한 국가로 성장시키는데 이바지하셨을 거야. 지금의 아렌델은 썩고, 굶주리고 있어. 하다못해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겠지."


"역병도 마찬가지야. 도대체 이 역병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턱이 없네. 소콜로프가 영약을 만들고, 갈바니 박사가 계속 근원을 조사하고 있네."
은잔을 코트의 품에 넣으며 프랑수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판디시아 대륙에서 왔다고 하는 소문이 있네."


"어디까지나 소문이잖은가."


"그리고 판디시아에 파견된 우리 암살단원에 의하면, 선악과를 찾을 수 있는 관측소를 찾았다고 들었네. 하지만 입구는 열쇠가 있어야만 들어간더군. 그 열쇠모양을 스케치해 확인해 본 결과, 고대의 암살단원이 관측소를 세운 모양일세. 그리고 그에 맞는 열쇠는..."


케니르가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런가, 어서 더 말해보게. 혹시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라면 더 재촉하지 않겠네."


"...열쇠를 우리 측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행방이 묘연하네."


"행방이 묘연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의문을 표하는 프랑수아에게, 케니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0년 전에 파면당한 암살단원이 모종의 수로 그 열쇠와 비슷한 문양의 목걸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 그 암살단원의 행방이 묘연하단 말일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그래도 이름은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물며 우리 템플러들도 소속과 명단을 리스트로 가지고 있는데, 자네들도 그 정도는 있지 않은가?"


"그래, 만약 자네가 이 이름을 가진 여자를 알게 된다면, 우린 동맹으로써 관측소를 같이 찾아야 하네, 동의하는가?"


"다른 그랜드마스터들과 상의를 해보겠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난 자네와 마음을 같이할 걸세. 그래, 그 암살단원의 이름이 뭐였던가?"


프랑수아의 질문에, 케니르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별들이 알알히 박힌 남색 천 사이로 하얀 진주같은 달이 둥둥 떠 있었다.





"누디아. 누디아일세."








99.


메가라는 잠시 잠을 잔 것 같은 멍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코 끝이 찡해진 것을 보아, 그녀는 보일 여사가 재운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등 뒤로 양 손목이 교차로 묶여 있었으며, 코와 입 둘 중 하나에선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시큰한 안면에 두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웨이벌리 보일 여사의 응접실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는 수상하게 생긴 보라색 로브를 쓴, 복면으로 입가를 가린 여성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메가라 그레이스, 맞지? 맞을거야."


기가 드세보이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후비었다. 그녀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재갈이 그녀의 입을 반쯤 열어둔 상태였다.


"읍읍, 읍읍읍!"


"아, 재갈 빼놓는 걸 깜빡했네. 자, 이제 말하기..."


퉷, 순간 메가라의 입에서 나온 침이 괴한의 볼에 튀었다. 괴한이 볼에 묻은 피 섞인 침을 대충 닦아낸 뒤, 불현듯 그녀의 입에 권총을 물렸다. 총구에 배인 고래기름 냄새는 메가라의 입에서 쇠와 형언 할 수 없는 맛을 자아냈다.


"말하기 쉽겠지. 아니면 네 뒤통수로 총알이 뛰쳐나가는 걸 보게 될 테니까.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해."


메가라는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총구를 입에서 뺀 그녀는 다시금 팔짱을 꼈다.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지갑에 돈을 별로 안 들고 다니는 사람이야."


"아니, 돈을 원하는 게 아냐. 우리가 원하는 건, 네가 가지고 있는 장부 속 귀족들에 대한 리스트다."


"리스트?"


메가라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괴한을 올려다 보았다.


"그게 왜 필요한데?"


"이유를 물을 처진가?"


괴한이 권총을 들이밀며 말했다. 마치 '네 목숨은 내 방아쇠에 있어'라고 은연중에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메가라는 그녀를 꿋꿋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설마 자신을 시기하는 다른 가면사들이 보낸 청부업자인가? 아니, 그렇게 대담한 자들일 리가 없었다. 메가라는 눈앞의 여성이 암살 청부집단인 '고래잡이'라고도 순간 생각했지만, 도축장 마스크와 으스스해 보이는 검은 작업복으로 무장한 그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의상이었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 속 문양이 그녀의 존재를 알게 해 주었다.


"당신...암살단이잖아!"


"씨발, 조용히 안해?"


"아니, 내가 에버튼 가의 후원자라고!"


메가라는 죽기살기로 눈앞의 암살자와 오해를 풀고자 했다. 고아원에서의 성인식을 치룬 후, 메가라는 벨의 인맥으로 밀수를 통해 린든을 빠져나간 과거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몸을 의탁했던 메가라는, 벨에게서 암살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비록 입단은 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후원자가 되어보겠다는 약속을 한 뒤로, 가면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돈을 저축해 일면식이 있는 암살단원을 통해 린든으로 돈과 물자를 보내왔다.


"정말이야?"


"아그나르의 불알을 걸고 맹세하지. 미친, 내가 그 빌어먹을 후원자라구. 벨 아주머니 알지? 아이고..."


메가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언젠가 한 번 쯤은 이럴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해로 빚어진 참사이자, 하필이면 경비가 삼엄하기로는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보일 여사의 저택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벨 까지 안다면...이거 참 미안하게 되었어. 그래도 리스트는 내놓는게 좋을거야. 벨이 얼마전에 암살단에 입단했고, 내 뜻이 바로 그녀의 뜻이 될 테니까."


그말은 즉, 그녀가 후원자여도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뜻이었다. 메가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잠시 얼어붙었고, 자신이 살 길을 찾으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리스트를 줄게, 대신 부탁이 있어."


"부탁할 처지..."


"아니, 부탁할 수 밖에 없을걸. 너에게 그 리스트가 중요하지? 무슨 이유가 되었든 간에. 나도 그게 중요해. 내 단골 손님들이거든. 여기까지 왔으면 우리 집 주소도 알 테고, 거기서 만나서 얘기해. 그러면 리스트를 줄게."


멜리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메가라의 말을 듣기로 했다. 이미 수 명의 경비를 죽이고 기절시켜온 그녀였기에, 앞으로 보일 여사의 집안은 조금 소란스러워질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이 닿는 의원들을 조종해 의회에서 암살단의 존재를 폭로할 수도 있거나,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대한 숙청 안건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메가라의 죽음은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파장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알았어. 그럼 언제쯤 만나면 돼지?"


"3일 뒤에, 아,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메가라가 말하는 동시에, 문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씨발, 문이 잠겼나?"


"안쪽에서 뭘로 덧댄 모양이야!"


문 너머 경비들이 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돌려가며 열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방안에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리스트를 모으는 이유를 알려 줘."


메가라가 짐짓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큰 일을 준비하고 있어. 그 일에 반대할 법한 사람들이 네가 가진 장부 리스트에 대다수가 있다는 첩보를 받았고, 그걸 입수해 암살을 하거나, 로비를 벌일 작정이야."


문 밖의 소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예 문을 부수려는 시도까지 하려는 모양인지, 경첩이 불안정하게 달그락거렸다. 메가라는 미리 보아둔 창문의 창틀로 발을 딛으며 뒤를 돌아 보았다.


"내가 왔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안나를 죽여버릴거야."


섬뜩한 뒷말을 남긴 멜리사는, 문이 열리자마자 창문을 박차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바닥을 한번 구른 그녀는 재빠르게 도시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저택 주변을 지키던 거신 기병조차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쫓아가지 못했다.





99.5

"그레이스 양, 괜찮아요?"


세 보일 여사가 결박에서 풀린 메가라에게 걱정스러운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저마다의 가면에 가려져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메가라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그러자 역병을 보듯이 경비와 보일 여사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요. 피가 허파로 들어가서..."


"습격이 있었어요. 경비들 몇이 죽거나 기절한 상태로 발견되었죠. 동선을 확인해 본 결과. 여기, 저 웨이벌리의 응접실에서 당신과 마지막으로 만난 듯 해요. 혹시 인상착의를 알려줄 수 있나요?"



웨이벌리 보일이 메가라에게 물었다. 메가라는 암살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가 왔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안나를 죽여버릴거야.]


'어림도 없지'


메가라는 그 암살자에게 통수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암살단이 안나를 표적으로 삼는다는 건 위험했다. 제 아무리 검술에 뛰어난 안나라 하여도, 소리없이 사람을 죽이는 암살단 앞에서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메가라를 결박하고 심문한 암살자는 안나를 제대로 아는 듯 했다. 어떤 면으로 바라보아도, 결국 그것은 협박이란 사실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공격당한 상태여서 미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고, 걸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던 건 확실했어요."


거짓 반, 사실 반을 섞어가며 메가라는 보일 여사와 경비대들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다행이도, 그들은 메가라의 말에 속아 넘어갔고, 메가라는 보일 여사의 접대실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메가라는 그 눈빛을 기억했다. 수 많은 빈민들에서 귀족들을 보면서, 그렇게 차가운 눈빛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약속을 잡았고, 곧 만나게 되겠지만. 복면과 로브를 쓰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메가라는 저절로 돋는 소름과 오한을 참으며 담요를 꽁꽁 싸매며, 쪽잠으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00.



"정식 수호경 즉위식을 올리시겠다고요?"


안나는 엘사와 비슷한 승마복을 입고, 목검을 찬 상태로 엘사와 같이 뒷뜰에 서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뒷뜰은 마치 고아원의 뒷뜰을 연상케 하는, 안나에게 있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래, 비록 아버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왕실 사람인 나에겐 인정을 받았잖니?"


안나는 자신이 인정을 받을 일을 했나 지난 일주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를 성심성의껏 호위한 적은 없었고, 그저 매일 밤 그녀가 악몽을 꾸지 않게 옆에서 자질구레한 동화책을 읽어준 것이 다였다. 이따금 성 밖을 빠져나가 일탈을 즐기게 한 것은 경호라기 보다는 갑갑한 일상에서 도망치는 방목에 가까웠다.


"걱정하지 마렴. 아버님께 들킬 일은 없을 거야. 사실, 이미 너를 위한 반지와 검의 제련을 부탁해 놓았어. 오늘 저녁중에나 도착할 예정이라고 게르다가 말해주었구나."


엘사는 안나와 똑같은 목검을 들고, 그녀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엘사가 검술에 소양이 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존감 수업'의 일환이란 핑계로 엘사 공주의 자존심을 키워달라는 게르다의 부탁에, 안나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검술로 그녀의 자존감을 북돋아주려 자리를 마련했다.


"네...챙겨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런데 말이죠. 혹시 검을 쥐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예, 예전에 조금... 검무 형식으로 배워본 적은 있다만... 혹시 부담스럽니?"


"아뇨, 아뇨아뇨."


안나가 부리나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공주가 검무를 해 보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박했지만, 무언가를 즐겁게 했다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었다. 적어도 안나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럼 혹시 해 보시겠어요? 공주님의 검술 수업에 어느 정도 참고할 수 있을까 봐서요."


안나는 내심 그녀의 검무 실력을 보고 싶어했다. 물론, 혹독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완벽한 검무를 출 리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존감은 사소한 행동으로부터 자라는 새싹과도 같았다. 아무도 안 보는, 오롯이 그녀와 안나의 휴식공간인 성의 뒷뜰에선 그녀도 자신있게 출 수 있을 거라 안나는 확신했다.


"그, 그럼 조금만 해 볼테니..."


엘사가 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목검을 우아하게 잡았고, 이내 검무를 시작했다. 검은 허공에서 살아있듯이 움직였고, 그에 맞춰 엘사의 발도 빠르게, 그리고 유연하게 맞춰 흐름을 끊지 않았다.  마치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그녀는 검무를 이어나갔고, 안나는 넋을 읽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사 또한 안나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무 자체에 마음을 다잡은 듯 것 같았다. 한참 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엘사가 부끄러운듯이 안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우, 우와아. 엄청 잘하셨어요!"


"공주 앞에서 거짓말 하면 못 써."


"아, 아뇨. 진짜로. 정말 잘하셨어요. 저도 검무를 배우긴 했다마는, 공주님만큼 하진 못할 거예요."


"안나, 너도 검무를 배웠니?"


때마침 뒷뜰에 흐르는 바람이 그녀들의 주위를 두어 번 휘저은 뒤 사라졌다. 안나는 목검의 칼자루 끝을 엄지로 매만졌다.


"검무라기 보다는.. 사실 검술에 가깝죠. 대부님이 워낙 싸움을 강조하시다 보니까, 검무도 검술처럼 추게 되어 버리곤 해요. 지금도 그럴걸요?"


"그렇다면 나도, 네가 추는 검무를 보고 싶구나. 한 번 춰 줄 수 있겠니? 나를 위해서 말이야."


엘사가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장갑을 낀 손을 입가로 가져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나는 그런 엘사의 웃음이 좋았다. 얼어버린 웃음이 아닌, 이제 갓 녹아 싱그러운 웃음이기 때문이었다. 검무를 권유한 자신을 자신있게 여기면서, 안나는 검을 고쳐 취었고, 이내 자신만의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안나의 검무를 본 엘사는 안나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상정하고 싸우는 듯한, 검투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찌르고 베고, 주먹과 팔꿈치, 발을 허공에 쳐올리고, 쳐내리는 모습이 공격적이었다. 한참 뒤, 안나의 검무가 끝났고, 안나는 엘사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승마복이 선득히 젖을 정도로, 안나는 엘사를 위해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검무를 추었다. 엘사가 여분의 손수건을 안나에게 건네자, 안나가 고개를 푹 숙여 손수건을 받았다.


"사석에선 그러지 않아도 돼."


"그래도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안쪽에서 시종 몇이 쳐다보고 있는걸요."


안나가 시선을 힐끔, 성 안으로 돌리며 말했다. 엘사가 안나의 검무에 정신을 판 사이에, 암흑 시야를 발현시켜 안쪽을 확인해 본 결과, 서너 명의 시종이 뒷뜰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그렇구나... 내 생각이 짧았어."


"아뇨, 절대 짧지 않아요. 이제부터 길어지면 그만이죠 뭐."


"음, 항상 나에게 좋은 말만 해주려는 모양이구나. 너는."


"그야 물론이죠, 공주님, 저번에 말하셨잖아요. 살면서 들었던 칭찬보다 악담이 더 많았다고요. 지금도 공주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저 밖에 수두룩할걸요?"


그들은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골랐다. 손수건으로 채 닦지 못한 옷 안쪽의 땀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공주님은 칭찬받을 자격이 있어요. 아까 검무도, 아주 잘 추셨어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저도 배워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니, 난 너처럼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엘사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했다. 날카로운 얼음. 하지만 엘사는 그런 이형의 물체가 아닌, 자신의 검과 총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장갑 속에서 서리가 자라나는 듯 했다. 엘사가 몸을 홱 돌리자, 안나는 엘사가 칭찬이 부끄러워 몸을 돌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검술을 배워보고 싶구나."


엘사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다행스럽게도, 변덕은 이번엔 그녀의 기분에 어울려 주었다.


"제가 알려 드릴게요! 그럼 되잖아요!"


남아있던 불안함을, 옆에 있던 햇살같은 그녀가 씻어주었다. 안나가 엉덩이를 팡팡 털고 일어난 뒤, 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햇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엘사는 안나가 웃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엘사도 나긋하게 웃으면서 안나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안나는 엘사에게 검을 쥐는 법부터 시작했다. 검무랑 조금 다를지언정, 뿌리는 같았기에 손쉽게 목검을 쥐는데 성공한 엘사는, 안나의 검술을 모방하듯 따라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엘사는 검을 휘두르고 검의 무게에 휘말려 넘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성장했다. 안나는 그런 그녀가 자랑스럽다고 여기면서 매티어스를 떠올렸다. 매티어스에게서 배운 지식들을, 자신은 한 나라의 공주에게 쏟아붓고 있는 셈이었으니, 기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때마침 정오를 알리는 마을의 종소리가 성내에도 울려 퍼졌다. 안나의 배에서 꼬르륵 허기가 졌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매번 소박한 식사가 이루어지지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기에, 안나는 홀로 서서 검을 휘두르는 엘사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이제 식사하셔야 할 시간이예요."


"벌써? 아니, 조금만 더 하고..."


엘사는 완전한 열정을 보이고 있었다. 안나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엘사의 푸른 눈을, 만난치 일주일이 된 지금에서야 처음 엿볼 수 있었다. 그 눈은 안나로서도 말릴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럼 저하고 대련을 한 번 해 보실래요?"


안나는 그 열정을 조금 꺾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열정이 과한 건 좋지만, 명색이 공주였다. 해야 할 정무도 있을 뿐더러, 오후에는 왕실의 전령인 카이가 성에 방문할 거라는 일정도 잡힌 상태였다. 약간의 일탈은 안나와 게르다의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지만, 아그나르의 명을 전달하는 카이의 방문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열정을 꺾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바로, 안나와의 짧은 대련밖에 없었다.


"안나 너하고? 분명 내가 질 거야."


"그럼 핸디캡을 달고 할게요, 전 칼집만 쥘 거고, 한 손만 쓸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안나는 두 발을 땅에 짚으며 촛대처럼 꼿꼿이 섰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 정도면 가능할까요?"


엘사는 잠시 안나와 자신의 목검을 차례로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봐주기 없기야."


"저는 봐줘야 한다구요..."


'안 봐주면 사형감이니까요!' 속으로 사심을 밝힌 안나는 검을 조용히 들었다. 둘 사이에 또 다른 바람이 불었고, 침묵이 가득했다. 이내 엘사가  기합도 없이 안나를 향해 질주해 찌르려 했고, 안나는 몸을 숙여 칼을 피했다. 그리고 엄지로 칼자루로 엘사의 옆구리를 스치듯 쳐냈다. 간지러운 듯 엘사가 까르륵 웃었다.


"방금 뭘 한 거니?"


"글쎄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칼도 안 썼잖아요."


안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엘사는 이상함을 느끼며 다시 한번 안나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세로로 베는 동작이었으니, 피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지만, 안나는 몸을 옆으로 젖혀 검을 피한다음, 검의 끝으로 다시 한 번 엘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에는 간지러움이 아닌, 약간의 고통이 엘사의 몸에 파고들었다.


"아..."


순간, 안나는 자신이 심하게 찔렀나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린든에서 매일같이 대련을 한 고아원의 또래들도 아니었고,  벌린턱의 갱단도 아니었다. 지금의 공격은 엘사에게도 어느 정도 충격이 간 모양이었는지, 엘사가 순간 숨을 헐떡였다.


"괜찮..."


안나가 묻기도 전에, 다시 한번 검이 안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종이 몇 장 차이로 겨우 회피한 안나는 엘사의 눈빛이 여전히 열정에 차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에, 안나는 대련을 멈추고자 다시 한 번 달려드는 엘사의 발을 슬쩍 걸었다. 그리고 넘어지려는 엘사의 손을 끌어당겨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훌륭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검술을 배우시면 될 것 같아요."


안나의 얼굴과 엘사의 얼굴 사이엔 겨우 한뼘 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엘사는 순간 얼굴에 홍조를 띄웠고, 안나는 창백한 그녀의 피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안나는 끌어안았던 손을 풀고, 이젠 엘사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식사하러 가시지요. 공주님."


"그, 그래. 어서 가자. 배고프구나."


엘사가 머뭇거리며 뒷뜰을 한 번 둘러본 뒤, 안나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 설레임이, 무슨 감정인지 의문을 품으면서.


추천 비추천

11

고정닉 3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7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6] ㅇㅇ(110.47) 06.09 43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0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1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18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26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19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3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0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1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2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29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6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3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3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5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4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17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9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0 4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0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18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8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19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4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5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29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5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5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3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0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0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5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1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2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1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1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3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6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4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6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1 0
1123665 이럴 때 정신놓으면 갓반인 된다 [2] ㅇㅇ(223.62) 06.06 30 0
1123664 말라간다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3 0
1123663 단편이나 떡밥 내놔!!! ㅇㅇ(211.234) 06.06 2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