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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꼭두각시의 칼 35~36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5.23 21: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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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99.


"역병에 대한 조사를 맡아달라... 이건가요?"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공주님."


카이는 엘사에게서 지난번과 다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평소라면 그녀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둘째, 항상 표정은 얼음을 뒤집어 쓴 듯 경직되어 있었다. 셋째, 그녀는 늘 혼자였다. 이따금 대면하는 사람이라곤 마부 허버트와 시종장 게르다 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점들은 아그나르의 말을 전하러 온 그 공백의 기간동안 확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집무실에서 카이에게 차를 내올 정도로 정중히 대하였고, 경직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약간의 여유, 어쩌면 행복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웃음이 입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게르다와 허버트와 같이 있지 않았다. 카이는 공주의 옆에 뻣뻣하게 서 있는 수호경의 존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나 윈터, 얼마 전 커보울에 있었던 검술 대회의 우승자이자, 우승을 박탈당한 소녀. 그녀의 존재는 카이로 하여금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무슨 현상이라고 그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단어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 단어였고, 말해봤자 좋을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제 오빠... 아니, 한스 왕자께서 순방을 나서면 더 좋지 않을까요? 대외적인 이미지는 한스 왕자가 책임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아그나르 황제께선 공주님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으신가 봅니다. 특히나 민심이 뒤숭숭한 지금, 왕실에선 유능한 사람 하나라도 절실한 상황입니다. 새로 온 재무총감은 군중의 지지를 받긴 하오나, 재정 해결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걸 반대하는 게 귀족들이겠지.'



엘사는 속으로 반박했다. 당연했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길 거부할 것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2%의 1신분과 2신분을 98%의 3신분이 떠받치고 있는데, 세금이란 것은 일종의 불명예라고 귀족들의 대부분은 생각할 것이었다. 이미 잉여 재정을 남모르게 환급하고 있는 엘사의 심정에선, 아그나르가 내색하지 않지만 촉박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고심하는 듯한 엘사를 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치료제, 혹은 치료법은 세상 어딘가엔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누구보다도 모멸시받는 제국의 공주가 성과를 보인다면 지금의 이미지는 확 뒤집을 수도 있고, 의회, 더 나아가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좋아요. 어차피 저에게 선택지가 있을리가 없겠지만...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어요. 일정은 어떻게 되죠?"


"일정은 여기... 파일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생각보다 복잡한 여정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카이는 조심스럽게 낡은 가방에서 사진첩같은 파일 하나를 두 손으로 엘사에게 내밀었다. 엘사는 파일을 슬쩍 훑어 보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환호와 고통의 비명이었다. 아버님이 드디어 자신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기쁨과, 서코노스, 티비아, 몰리, 그리고 차토를 순방하며 역병의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공주님은 공식적으론 여기에 없는 사람이란 점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저흰 공주님에게 외교관 신분인 '엘리사 드 자네르'인 가명을 부여하기로... 폐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자네르라면..."


자네르는 자신의 갓난아기 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 이두나의 고향이었다. 아그나르가 굳이 자네르를 이름에 끼워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엘사는 그것이 견제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기회를 주셨지만,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 말은 즉, 사라진 이두나와 엘사를 아그나르는 동일시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를 기릴 수 있다는데, 무언들 못 하겠는가?


"엘리사...드 자네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다른 가명으로.."


"괜찮아요. 마음에 들어요."


엘사는 가짜 미소를 지으며 카이에게 화답했다. 카이로서는 그녀가 만족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언제나 아그나르의 명을 전하는 자신인 만큼, 이번에는 다른 점과 함께 엘사 공주의 심리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조작된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기분으로 살길 바랄 것이라고 카이는 옆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안나 윈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새로운 수호경을 두셨더군요. 이름이..."


"아, 안나, 안나 윈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 카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아그나르 황제폐하의 전언을 엘사 공주님께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죠. 우리 모두 같은 처지인 만큼, 좋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카이가 너그럽게 웃었고, 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처지? 저 사람도 수호경인가?'


단차원적으로 접근한 안나와 달리, 엘사는 다차원적으로 그의 말을 해석했다. 그는 엘사의 심정을 헤아리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가 카이 자신처럼 엘사의 이해자가 되어 줄 것 같다는 말을 은연중에 꺼낸 것이다.


"순방 항해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죠?"


"3일 뒤, 3일 안에 모든 걸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엘사는 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3일이라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최소한 5일 정도는 배에 물자를 실어날라야 하고, 그 일꾼들을 조용히 모집해야 했다. 하지만 엘사는 감추어진 존재로써, 그 일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벌써부터 엘사는 아그나르가 자신에게 기회를 가장한 시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한숨이 깊어지자,  카이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3일이면...너무 촉박하지 않나요?"


둘 사이의 침묵을 깨뜨린 건 안나의 발언이었다. 린든의 고래 도축장에서 일해 본 안나는, 고래를 잡기위한 포경선의 물자를 나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소비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포경선과 순방용 배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다르지마는, 시간이 촉박한 건 변함이 없었다. 안나는 화상 크림으로 가려진 방관자의 표식을 힐끔 내려다봤다. 아마 카이의 눈에는 안나가 엘사의 눈치를 살피려 눈을 내리깐 것으로 보일 터였다. 무슨 눈치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점멸을 써서 짐을 나른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 터였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엘사는 영주가 아니었고, 안나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정체를 들켜서도, 방관자의 표식을 받은 자라는 것을 들켜서도 안 되었다.


'밤중에 나가서 짐을 날라야 하나.'


안나는 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게 수호경의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몰래 짐을 나르러 간 사이에 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첫날, 엘사가 악몽을 꾸어 소란이 일어난 것과 비슷한 상황에 그녀의 부재가 드러난다면? 최소한 직위를 박탈당하고 다시 메가라의 빌라로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짚었다.


"우리 수호경 께서도 걱정이 되시나 봅니다. 허허. 좋은 현상이예요."


그것을 긍정의 표시라도 여기는 듯, 원래 부드러웠던 카이의 말투가 더 유해진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엘사가 몸을 움츠러들며 안나를 잠시 올려다 보다가, 카이를 응시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힌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꼬투리를 아그나르에게 말하는 게 아닐까? 몇 가지 안 좋은 망상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안나의 존재'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감히 말씀을 올리자면, 사실, 검술대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주님께선 껍데기에 단단히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껍데기의 일부가 부서지고, 그 틈새로 쏟아지는 빛을 맞이한 듯 보이는 듯 하군요. 누구의 도움이든, 공주님의 자발적인 행동이든 말입니다."



카이의 말은 정답에 가까웠다. 안나가 벌이고 게르다가 도와주는 엘사의 작은 일탈, 그리고 거의 24시간 붙어있는 안나 특유의 존재감 덕분에 엘사에겐 지루할 틈이 없어 보였다. 무채색에 가까웠던 그녀의 회색 캠퍼스에, 안나라는 색깔이 조금씩 덧입혀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엘사는 며칠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해 보았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불안했던 마음은 가라앉아 있었고, 침실에 틀어박혀 정무를 보던 때와 다르게, 그녀는 지금 한결 나아진 심정으로 카이를 대하고 있었다.







99.5


엘사의 항해 준비는 게르다의 지휘 아래에서 이루어지기로 했다. 시민들은 모두들 한스 왕자, 혹은 엘리사라는 신임 외교관이 가겠거니 하고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안나는 짐을 나를 적은 일꾼들과 작은 배 때문에 망설여졌다. 안나가 엘사에게 배의 종류를 묻자, 발런더라는 말을 남기고 엘사는 혼자만의 검술 시간을 가지러 뒷뜰로 사라졌다. 안나는 그녀가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남겼기에, 시종들의 눈을 피해 방관자의 표식을 써가며 엘사의 집무실 뒤 서재에서 범선에 대한 책을 꺼내 대충 훑어 읽어 보았다.  그림으로 나와있는 발런더라는 범선은 좋은 의미론 작고 아담했으며, 나쁜 의미로는 작고 초라해 보였다.


'하다못해 브릭급은 되어야 할 텐데.'


그리고 안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근 아렌델의 바다 주변으로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호위함을 거느리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지만, 엘사의 검소한 재정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작은 대포 몇 문과 다른 무기들을 실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나머지는 안나의 기량에 달려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나친 능력 남용으로 인해 조금 피곤해진 안나는 읽던 책을 다시 책꽂이에 끼워두고 침실로 들어왔다. 창문 밑으론 바로 뒷뜰이 내다보이는 구조였다. 그곳에서 승마복을 입은 엘사가 홀로이 목검을 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제 딴에 검술 연습을 하고 있으시구나. 안나는 생각했다. 첫 항해, 첫 기회이니만큼 인정을 받고 싶어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어보이는 것 같았지만, 안나의 눈에는 검무 그 이상의 것에 벗어나지 않아 보였다.


'도와주러 가야겠다...'



안나는 이번엔 침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창문 밑에 깔려진 짚더미를 응시했다. 이번에야말로 착지를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안나는, 린든의 높디높은 넝마 할멈의 집에서 뛰어내렸을 때와 비슷하게, 창 밖으로 도약을 했다. 잠시 뒤, 풀썩 소리와 함께 안나의 엉덩이부터 짚더미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울리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엘사가 엉덩방아를 찧은 건 둘 만의 비밀이 될 예정이었다.





100.



"네가 밤에 짐을 나르겠다니?"


저녁의 등불이 성에 깔렸다. 그리고 등불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고 있는 안나, 그리고 칼을 쥔 엘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3일 안에 무리인 거 아시잖아요. 조금이라도 일정을 맞추려면..."


"하지만 안나 넌 날 보호해야 해. 그 사실을 지금까지 잊은 건 아니겠지?"


엘사가 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안나는 그 칼이 아그나르가 수여했지만, 이내 회수당한 칼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안나의 목검은 조금 긴 단검에 가까웠고, 엘사가 가지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은 안나가 가지고 있었던 목검과 거의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등불 속에서 비쳐진 칼자루 끝에 붉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아그나르가 저걸 주면서 성전 기사단이니 어쩌니 했던 것 같은데...'


안나는 자신의 제안을 고심하는 엘사의 장갑에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장갑 위의 약지에 붉은 십자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은 불편해 보였음에도, 엘사는 그것이 일상이라도 되었다는 듯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건 아니예요. 다만...전 공주님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셨으면 해서 그런 거예요."


안나는 엘사의 삶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문과 진상, 그리고 그녀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노라면 부의 정도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에게 동정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공주님은 많이 불안해 하고 계세요."


안나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그리고 심장 '누디아'가 그녀를 향해 말하는 것을 토대로, 그녀가 극도로 불안에 떨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기회를 놓칠까봐, 평가를 바꿀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불안함, 그건 인생이 실패자들로 얼룩진 린든에서 살아온 안나에겐 도통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출신조차 불분명한 서민이었고, 엘사는 반푼어치 평가를 받는 공주란 것은 사실이었다. 신분의 벽을 깨고 안나는 엘사를 이해하려 했다.


"저는 그 불안함을 덜어드리려고 할 뿐입니다."


"그럼 너의 부재를 누구로 채워야 할까?"


엘사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어렴풋이 안나의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허버트 씨로는 안 될까요?"



어느덧 대화는 안나가 밤에 나가 짐을 나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엘사는 허버트를 일일 경호원으로 고용하고 싶었지만, 이제 막 회복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또한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었기에, 잠시 동안은 그를 놔줘야 했다.


"공주님도 아시잖아요. 저희가 순방해야 할 나라들의 순서가 봉쇄 조치를 내리기 시작하는 나라들 순이라는 거."


안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와의 일탈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엘사를 위해 음식을 사는 과정에서 시민들과 정보 소통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소문이 바로 아렌델 제국을 둘러싼 다른 군도 제국들이 속속이 봉쇄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봉쇄 조치, 그리고 순방 루트. 안나의 에상대로라면 가장 먼저 봉쇄를 할 곳은 제국의 북부에 위치한, 차가운 눈과 바람이 주를 이루는 혹독한 군도인 티비아였다.


"네 말이 맞아, 안나. 하지만 난 나갈 수가..."


"좋아요. 남들 앞에서 있다는 게 두렵다면, 한밤중인데도 두려워서 나가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일탈은 없는 걸로 해요."


안나는 조금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반역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의지력을 시험해보과 하는 가벼운 질문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한 심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공주님은 없던 존재였으니..."


"자, 잠깐, 알았어. 대신 나도 데려가는 걸로 하자꾸나. 어떠니?"


엘사가 주춤거리며 안나의 주장에 한 가지 조건을 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영지가 아무리 풍요롭고 화목해도 범죄는 존재하기 마련 이었다. 한 눈에 봐도 연약하디 연약한 제국의 공주를 항구에 세워두고, 안나는 방관자의 표식을 쓰면서 짐을 나른다. 안나는 무심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단단히 꼬이고 만 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도울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짐을 날라보도록 노력할게."


'그냥 가만히 주무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여요...'


안나는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공주님은 그냥 저하고 같이 있어주시면 될거 같아요. 저 짐들이 얼마나 무거울지 생각은 해보셨죠?"


엘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안나의 확신이 맞음을 알려주는 반증이었다.


"전 사군토 출신이라 무슨 잡일이든 해서 들을 수는 있는데... 공주님은 아니시잖아요."


"그럼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엘사는 안나보다 조금 키가 작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내 무릎을 딛고 일어난 안나를 올려다 보아 시선을 맞추었다. 엘사는 자신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공주님, 그럼 공주님께 일을 하나 맡겨드릴게요. 제가 선적할 물건들의 리스트를 체크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의 없으세요?"



안나는 최대한 자신의 능력 중 점멸을 요긴하게 써먹을 심산으로, 엘사에게 동적인 일을 맡기지 않았다. 엘사는 배의 갑판에서 머무르고 있으면 되는 것이고, 안나는 어둠 속에서 짐을 든 채로 점멸과 암흑 시야를 사용하여 엘사의 눈치를 살피며 짐을 옮기면 그만이었다. 룬의 영향으로 늘어난 체력 덕분에, 지칠 일도 거의 없어보였다.


"언제부터 시작할 거니?"


엘사가 궁금한 듯 안나에게 물었다.


"임명식이 끝나고 나서, 바로 할까 생각중인데... 정 힘드시면 내일 밤에 해도 될 것 같아요. 내일 할까요?"


안나가 넌지시 엘사에게 의중을 물었다. 엘사는 고민도 하지 않고 오늘 하자고 안나에게 말했다.


"커피를 챙겨가야겠구나. 밤을 지새울 테니까."


이것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다음으로는 예정되어 있던 안나의 수호경 임명식을 할 것이었다. 안나가 주춤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엘사가 두 단검을 안나에게 하사했고, 안나는 두 손으로 단검들을 받아들였다. 커틀라스처럼 생긴 칼은 목검보다 조금 더 무거운 수준이었다.



"나 엘사 아렌은, 현 시간부로 안나 윈터를 나의 수호경으로 임명함을 선포하노라."


말은 선포였지만, 듣는 이는 안나를 빼고는 전무했다.


"또한, 안나 윈터는 나 엘사 아렌의 안위를 수호하는 수호경으로써 임할 것을 선언하노라."


이번엔 엘사가, 안나의 약지손가락에 손수 반지를 끼워주었다. 아그나르가 다시 가져간 것과 똑같은 반지였다.


"안나 윈터, 당신은 성전 기사단의 일원으로써 엘사 아렌 공주를 지켜줄 것입니까?"


"네, 선언합니다.'


안나가 한 손을 들며 말했다. 길 거라고 생각했던 수호경의 임명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양 허리춤에 단검을 찬 안나는 검의 무게가 엘사의 목숨 무게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검이 엘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침실에서 물건을 좀 챙겨와야 하니, 따라오거라, ...수호경 안나."


엘사가 머뭇거리며 안나에게 입을 열었다. 어색한 것은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101.



그날 밤, 안나는 엘사의 눈을 피해 짐을 들고 점멸을 써가며 항구에 쌓여있던 짐들의 일부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아침에 찾아올 일꾼들은 밤새 사라진 짐들에 놀랄 것이고, 그 짐들이 배의 창고에 온전히 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랄 것이었다.


'이번엔 이정도면 되겠지


체력이 증가되어도 차갑게 식은 땀은 막을 수 없었다. 안나는 갑판 위로 올라갔고, 그곳엔 먼 바다의 수평선을 보고 있는, 선적 리스트를 들고 난간에 걸터 앉아있는 엘사가 있었다. 난간에는 두 개의 찻잔이 접시 위에 올려져 있었다.


"다 끝내고 왔니?"


엘사가 안나에게 물었고,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식재료 위주로 날랐어요. 이따가 같이 확인하자구요."


안나는 찻속의 내용물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내일은 대포의 탄환이라도 날라야지, 하고 생각한 안나는 찻잔 속의 커피를 후, 후 분 뒤 조금 기울여 홀짝였다. 린든에서는 아주 가끔, 질이 좋지 않은 커피콩이 들여오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부분은 커피콩을 통째로 끓여 마셔서, 맛이 밍밍하거나, 시큼하거나, 쓰기 일수였다.


"맛있네요."


안나가 두 손으로 찻잔을 모아 들며 말했다. 뜻밖의 칭찬에, 엘사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다. 안나는 철썩거리며 천천히 흔들려지는 선체를 한 번 훑어 보았다. 항해를 하다 난파를 당하지 않을까 싶은, 작은 배였다.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하긴, 이 배가 작고...호위함도 없고, 그나마 대포 몇 문을 놓는 게 전부라서. 충분히 위험할 것 같구나."


엘사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해적들이 많아졌다고도 하는데... 하다못해 해적선을 습격해 배를 빼앗는 게 낫겠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못해도 해적들이 몰고 다니는 해적선이 엘사 일행이 탈 함선보다 클 것이 거의 사실이었다.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구나."


어둠 속에서, 엘사의 차가운 미소를 안나는 볼 수 있었다. 안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비난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칭찬 한 조각에도 좋아하는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바로 웃음이었다.


"아. 공주님, 혹시 내일 잠시 마을에 갔다 올 수 있을까요?"


"일탈을 말하는 거니?"


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헸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버트 씨에게서 사격 연습을 받고 싶어서 그래요.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물론, 안나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린든에서는 공기총을 위주로 사격 연습을 했으니, 그것과는 다른 실탄 사격을 연습해 보는게 낫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게르다의 말로는, 허버트는 모종의 이유로 정식 수호경이 되는 걸 거부했지만, 사격 실력이 자신이 보았던 사수들보다 월등했다고 안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항해에 나가기 전에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안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엘사는 순순히 안나의 요청에 응했다. 엘사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판단했다. 수호경이랄지라도, 안나 또한 엄연한 사생활이 존재하는 시민이었다. 또한 항해 이전에 일종의 자유시간을 주는 것도 자신에게도, 안나에게도 있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그녀였다.


"저 없이...괜찮으시겠어요?"


안나가 조심스레 묻자, 엘사는 안나가 그랬듯 커피잔을 홀짝인 다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소속은 아니어도, 근위병들이 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안나, 고향에 편지 정도는 써 두는게 어떠니? 네 대부님이라든지... 널 이곳으로 오게 해준 사람들에게 말이야. 내 음성 기록 재생기를 빌려줄 테니, 원하는 만큼 쓰도록 하렴."


"그, 그거 엄청 비쌀텐데..."


'강조개를 몇개 팔아야 하지? 10개? 20개?'


안나는 마음 속으로 음성 기록 재생기의 가격을 유추했다. 하지만 정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재생지는 많단다. 나에게...재생지를 보내줄 사람이 없었거든."


엘사가 쓸쓸히 말했다. 가지고 있음에도 가지지 않는다는, 동시의 감정이 엘사의 표정에 슬픔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엘사가 다시금 혼자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어....그런데요. 저도 사실 재생 기록기를 써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대부님도 돌아가셨고, 나머지 분들도 돌아가시거나 제국 곳곳으로 흩어져서 행방이 묘연하거든요..."


안나는 거짓말을 했다. 엘사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생기를 사용할 수 없는 큰 이유는 하나였다. 린든에는 음성 기록 재생기를 소유한 사람이 안나가 알기로는 전무했다. 빈곤의 도시에서 하루를 벌고 하루를 사는 대부분의 빈민들에게 사치란 살인에 가까웠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부유하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약탈해 가는 곳이 린든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편지로 보내는 게 가장 나은 수순인 것 같아요."


어느새 안나의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커피를 모두 식혀버린 탓이었다. 엘사는 안나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파도의 영향이었으리라. 그러면서 그녀는 준비해온 고풍스러운 도자기 주전자의 주둥이를 안나의 빈 찻잔에 기울였다. 안나의 찻잔에 다시금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안나는 당장 기억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써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하며, 엘사의 커피를 다시금 홀짝였다.


그들의 소박한 티타임은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동이 틀 무렵, 몰래 성 안 침실로 숨어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침대에 누워 노곤해진 허리를 푼 두 사람은, 서로에게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엘사는 독서를, 안나는 이불을 뒤척이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102.



"오우, 여긴 어쩐 일이야. 수호경 양반."


"전 양반이 아니라 수호경 양이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깝쇼...?"


허버트의 집은 안나의 예상과 다르게 수수했다. 아니, 영지 내 눈에 들어온 건물들은 커보울처럼, 동화 속 아렌델처럼 온갖 조형물과 장식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아니었다. 소박함, 이 말이 가장 가까운 표현이었고, 허버트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영지 외곽에 살았으며,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나는 입을 찡그리며 퍼지는 연기를 손으로 휘 휘 저었고, 허버트는 너털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땅에 놓고 발로 비벼 껐다.


"정식으로 수호경이 되었다면서, 축하해. 그 두 단검은... 공주님이 하사하신 건가?"


"네, 어젯밤에 수여하셨어요. 그리고 이 반지도..."


"오, 반지까지? 완전 신혼부부 아니야 이거!"


농담아닌 농담에 안나는 살짝 당황했고, 농담의 당사자는 실실 웃었다.


"농담이야. 자, 그래서 여기엔 어쩐 일이지? 항해에 날 데려갈 생각이시라면, 난 아직 부상에서 호전되어야 한다고 전해줘, 공주님은 아마 내 말을 이해해 주실거야."


허버트의 말에 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버트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니, 그럼 뭣 때문에 여기에 온 거지? 그의 눈에는 당혹이 어려 있었다.


"별 건 아니고....아저씨가 총을 엄청 잘 다루신다면서요?"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그러던? 게르다가?"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네가 이곳에서 말을 튼 사람이 나하고 게르다, 엘사 공주님 밖에 더 있겠어? 추측해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데. 아, 기분이 나빴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그럼...사격 좀 알려주세요."


"사격? 간단하지, 그냥 표적에 대고, 가늠자와 자늠쇠에 맞춰서, 그대로 방아쇠를 찰칵."


허버트는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안나에게 쏘는 시늉을 했다. 안나는 입술을 샐쭉거리며 그의 장난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알려줄게. 음. 항해를 간다고 했지. 항해....항해라.... 잠깐만."


허버트는 잠시 집안에 들어갔다. 잠시 동안 무언가를 뒤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나온 그의 양 손에는 한 상자씩 들린 채였다.


"지금 내가 볼 땐 네가 가장 써야 할 것 같은 사람인 것 같아."


"오, 총이예요?"


"싸구려 총은 아니고, 예전에 한탕 뛰었을 때  개조해서 쓰던 놈들이지. 한 번 열어 봐."


안나는 허버트의 말대로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총신이 안나가 강도들에게서 약탈한 권총보다 조금 두꺼웠고, 조금 큰 리볼버식 탄창, 그리고...


"탄환 모양이 좀 신기하네요. 원기둥 모양인데."


"그걸 장전하면 한 번에 수십 개의 작은 총알들이 나가, 산탄이라고도 하지, 총신이 두꺼운 건 총알의 위력을 버티기 위해서, 그리고 소음을 약간 줄여주는 데 도움을 주지. 옛날에 잠깐 쓰고 손질만 계속 해 두었으니, 격발하는 데 이상은 없을 거야. 가져가."


"나중에 딴 맘 먹고 비용 청구할 거 아니죠?"


"이미 먹고 살 만큼 왕년에 충분히 벌어 뒀으니 돈은 관심 없어. 물론 지금 시기에 부를 과시하면 안되기도 하고. 10분 뒤에, 집 뒤뜰로 나와. 장비를 준비해 놓을 테니까 말이야."








103.




말이 뒷뜰이지, 실상은 들판이나 다름없었고, 들판에는 원형 모양의 세 양철 표적이 각자만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안나와 허버트는 앞에 놓여진 테이블 위에 놓여진 네 자루의 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안나가 선물받은 것과 똑같은 리볼버식 권총이었지만, 총신은 고래기름 권총의 것과 동일하게 얇았으며, 대신 끝에 한 뼘 크기의 검은 원기둥이 나사식 형태로 돌려 끼워져 있었다. 원기둥의 정체를 묻자, '소음기'라고 허버트는 짧게 대답했다.


"자, 이제 한 번 쏴 보자고, 처음엔 조준 시간을 길게 잡고 가까운 것부터."


허버트가  가볍게 권총을 들어 가까운 표적을 겨눴고, 이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표적에 총알이 명중했음을 알렸다. 다음은 안나 차례였다. 안나가 권총을 쥔 손을 들고, 린든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리고 허버트에게서 들었던 것처럼, 가늠자와 가늠쇠의 높이를 일치시킨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땡... 명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기본기는 있는 모양이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쐈어."


"아마 다음 표적부턴 힘들 걸요..."


안나는 허버트의 가벼운 칭찬을 흘려넘기고는 다음 표적에 총구를 겨누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다르게 거리가 있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고른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빠캉, 격철이 당기는 소리와 함께 총구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고, 표적에선 땡 하고 명중을 알렸다.


"뭐...내가 알려 줄 건 없어 보이는데, 원래 사격을 해봤던 거야?"


"어릴 적에 잠깐...공기총으로 해보긴 했죠. 하지만 실탄 사격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아서..."


"공기총도 효과적으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어. 무엇보다도 더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지. 한 정 있는데, 챙겨줄까?"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뜻밖의 선물들이 이어지자, 안나의 입가엔 웃음이 잔뜩 걸렸다.


"아마 세 번째 표적도 잘 맞출 것 같은데, 클레이 사격이라도 한 번 해보지 않겠어?"


"클레이 사격이라면...원형 접시를 맞추는..."


"맞아, 뭐, 모든 적들이 나 맞춰주십쇼 하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니까. 해 볼거야?"


"네, 해 볼게요."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허버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튀어나온 사람은 허버트가 아닌 한 쌍의 남매였다.


"누나가 수호경이야? "


"언니가 칼싸움 대회에서 일등했다면서?"


두 남매의 얼굴에는 아비의 모습이 제법 남아있었다. 아마 허버트는 아이들에게도 안나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안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맞긴 한데...일등은 아니랄까...하하, 하..."


"애들아, 손님이 올 땐 곤란하게 만들지 말자고 아빠가 그랬지?"


"하지만 심심한걸요? 모처럼의 손님도 왔잖아요. 그것도 유명한!"


"애들아, 미안한데, 난 유명한 사람은 아냐..."


안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말했다. 유명해진다 해도 그리 좋을 건 없어보였다. 이미 검술대회에서 얼굴을 팔린 그녀였지만, 한 나라의 황제의 뜻을 거역한 자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편이 더 나았다. 처음 엘사와 만났을 때 그녀가 말했듯, 자신은 엘사처럼 조용히 잊혀지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는 간직하고 있었다.


"아니래도..."


"창 다루는 사람하고 싸웠을 때, 사람들이 누나가 죽을 뻔 했다고 막 그랬어!"


"난 언니가 이긴다에 걸어서 돈도 벌었지롱!"


그게 사실이라는 듯 누이가 흔드는 작은 가죽 주머니에선 짤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본 허버트가 두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고, 아이들은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집안으로 도망쳤다.


"그게...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말을 거절한 사람이 우승자였다보니까... 소문이 좀 퍼진 모양이야."


안나는 동시에, 일탈을 할 때 로브를 쓰고 다녔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말은 신이요, 태양의 말과 같았기에, 모습을 드러냈다간 찍 소리도 못내고 어딘가로 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만인의 수도원이라던가...'


안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허버트의 손에 들린 얇고 붉은 접시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걸 던져서 맞추는 거죠? 어떻게 하는 건진 알고 있어요."


"그럼 애기가 편해지겠군. 아, 아이들에게 네가 왔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부칠게, 알잖아. 네가 여기 있는걸 묵인하는 자들은 성 안의 사람들, 그리고 나란 사실을 말이야."



"약간 협박하는 어조로 들리는 건 착각이겠죠?"


"착각은 아니고, 그냥 항해하고 올 때 기념품 좀 사다줘. 네가 사준다면 아이들이 좋아하 것 같아 보이네. 자, 이제 클레이 사격으로 네 사격 실력 좀 더 향상시켜보자고."



허버트가 대화의 끝을 알리고, 접시를 던지기 위해 몸과 팔을 힘껏 구부렸다.








104.




안나의 코는 화약으로 인해 잔뜩 피곤해져 있었다. 화약의 내음은 바람이 치워주었지만, 바람의 내음이 더 이질스럽다고 생각한 안나였다. 그만큼 허버트는 사격용 접시를 날려보냈고, 안나의 총신은 홍조를 머금은 듯 살짝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안나는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잠시만 쉬었다 하지. 이제 열에 일곱 정도는 맞출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네."


때마침, 영지의 광장에 위치한 교회의 종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손닝에게 밥을 굶겨가면서 붙잡아둘 필요는 없지. 예들아! 이번 점심은 너희들에게 맡기마!"



허버트가 아이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맗했다.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곧바로 네! 하고 짧은 누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래 뵈도 요리 하나는 잘하는 애들이니까 걱정하지 마. 나중에 왕실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얼마나 연구를 하던지."


안나는 아이들의 사례를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는, 생각해 두었던 질문들을 꺼낼 준비를 마쳤다.


"저기... 질문 몇 개만 해도 될까요?"


"나한테 궁금한 게 있나?"


"아이들의 어머니는 어디 게세요?"


그러자 허버트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를 낳고서 고통을 버티지 못해 떠나버렸지."


대화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바뀌어 버렸다. 안나는 여기서 어떤 말을 꺼내야 허버트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할지 생각할 질문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수호경이 되시는 걸 거절하셨다는데,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뭐, 다양한 이유가 있지. 첫째, 사생활 보장이 힘들어. 둘째, 난 외부모 가정이라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어, 세 번째는..."



그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잘그락거리며 잔음을 내는 안나의 두 단검을 연달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듯, 안나에게 세 번째 이유를 말해주었다.







"넌 손에서 얼음이 나오는 사람 밑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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