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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공약]꼭두각시의 칼 39~40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6.21 22:08:29
조회 315 추천 10 댓글 3




1~38






106.

미지의 영역에 들어서기 전, 떨리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한나는 떨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이기를, 그리고 거짓이기를. 한나는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1층 책장의 숨겨진 비밀의 방 안에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치, 침실 같은 거겠지."


한나는 만인의 수도원에도 존재하는 일종의 비밀 기도실들을 생각했다. 벨이 폭동의 주모지에 사는 주모자라 하여도, 일단은 주시자의 가르침을 따를 가능성도 없잖아 있을 거라 생각한 한나였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녀가 무심코 누른 전등의 스위치에 좌절되고 말았다. 비밀의 방 한가운데엔 지도가 깔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장기말과 줄이 묶여진 압정들이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한나는 그 지도가 어느 지역인지 알고 있었다. 린든을 포함한 아렌델이었다. 곳곳에 색깔별로 압정들이 꽂혀 있었지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나가 이해하기에 2분이 걸렸다. 거대한 섬으로 이루어진 린든에서도 같은 노란색의 압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연락 거점이라고도 추정이 되었다.


'카산드라 님의 말이 사실이었어.'



한나는 이번에는 벽에 시선을 옮겼다. 벽에는 빛바랜 종이가 된 옛 신문 기사와 빼곡한 글들이 압정에 고정되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노리는 듯한, 다른 주시자들이 몰래 들여온 복수극 소설에 나올 법한 몽타주들의 모습이 나와 있었다. 황제 아그나르를 시작으로, 한스 왕자, 보일 여사, 첩보대장 등의 수많은 몽타주들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엘사 공주는 이름만 적힌 종이로만 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도 엘사 공주의 존재를 모르는 것일까? 한나는 이들의 머릿속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엘사 공주의 실존 여부를 모르기에, 카산드라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가장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신문 기사를 고정한 압정을 뽑았다.



[하급 주시자가 방관자의 이교도를 잡다!]
하급 주시자 카산드라가 방관자의 이교도 단체를 이끈 수장을를 잡아 화제다. 하급 주시자에 불과했던 어린 그녀는 발더스라고 알려진 사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등에서 방관자의 표식이 발견됨에 따라, 그녀는 주시자의 굳결한 믿음의 수호자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한편, 살해당한 발더스의 연인인 벨은 그에겐 방관자의 표식이 없었으며, 만인의 수도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순간, 한나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첩자의 역할을 맡긴 고위 주시자 카산드라, 그리고 자신을 궤뚫어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보내지만, 한편으론 친절한 벨의 모습이었다. 한나는 이것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벨은 카산드라를 끌어내리기 위해 시국을 이용해 폭동, 혹은 혁명을 준비하려는 중이었고, 카산드라는 시국을 이용해 한나를 침투시켜, 벨에게도 발더스의 죽음에 영원한 입막음을 선사할 예정이었다. 한나는 생각했다.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발더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느냐, 진실을 파헤치느냐는 그녀에게 달렸다. 임무를 수행하면, 한나는 카산드라의 입김으로 중위 주시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을 파헤친다면, 그녀가 서 있을 곳은 아무곳도 없게 된다. 카산드라와 벨이 동시에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휩싸이자, 한나는 순간 헛구역질을 했다. 한시라도 이 방을 나서야 했다. 방을 나서고, 한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찌 되었든 알게 된 비밀에 대한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나는 카산드라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린든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본 것들을 최대한 기록한 다음, 비탈리의 다리에 묶어 보낸 다음, 안나가 알려준 하수구로 해안까지 가 다른 주시자들과 접촉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107.


"이 카페에서 만나는 건 1년 만인가 보군. 안 그러나?"


"1년 하고 2일이 지났죠, 어르신."


매티어스와 벨은 이제는 폐허가 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는 아무런 음식조차 놓여있지 않았다. 지난날 여기서 벌어진 싸움의 여파로 엎질러진 커피의 희미한 얼룩만이 테이블 위에 핏자국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다른 곳도 아닌, 폐허에서 얘기를 나누는 건 간단했다. 바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기초적인 발상에서부터였다. 물론 예외는 존재할 터지만, 두 사람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은 이미 린든에 자체적인 정보망을 갖춰 놓았고, 그들의 연락 거점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놓은 상태였다.


"안나에게서 소식은 없었나?"


"오늘부로 편지가 하나 도착했는데... 아직 뜯어보지 못했어요, 저를 부르신 건 어르신이잖아요."


"시트라...아니, 한나라고 해야겠지. 그 아이가 뜯어볼지 궁금하군."


"아마 안 뜯을 거예요, 이미 기선제압을 단단히 해뒀거든요."


벨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웃었다. 매티어스는 등에 매단 라이플을 고쳐 매며 벨의 웃음이 입가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앞으로 갱단들이 예전처럼 설치는 일은 없을 걸세."


"네?"


뜬금없는 노인의 말에, 벨은 잠시 멍해진 머리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린든의 경찰과 자경단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린든이 최악의 치안을 자랑하는 도시라고 불리우는 이유 중 하나인 갱단이 더이상 설치지 않는다는 것은, 안나가 자신의 어머니인 누디아를 죽인 범인을 단번에 찾았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즉,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마 어르신이..."


하지만 매티어스라면 말이 달라진다. 전직 군인인 데다가 여전히 다부진 몸을 자랑하는 그로써는 헛바람이 잔뜩 들은, 숫자에 불과하는 갱단들을 하룻밤 사이에 처리하는 것들은 일도 아니었다.


"그 설마가 맞네."


"와우."


벨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감탄사 중 최고의 감탄사를 매티어스에게 선사했다.


"예상 밖이네요. 어딜 터신 거예요?"


"벌린턱. 안나를 괴롭히던 그 곳, 기억하나?"


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병이 창궐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사무소를 집 삼아 보내면서, 부업으로 고래 도축장에서 일하던 안나의 직장을 고작 헛소문 하나 믿고 박살내버린 갱단이 바로 벌린턱 아니겠는가.


"노장은 죽지 않는다더니, 어르신을 두고 하는 말이셨군요."


"그런 말 마시게. 흘려지는 말은 벌레라도 듣는 법이지."


매티어스가 거리를 내다보며 말했다. 쥐 무리의 출현 빈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걸 반증하듯 때마침 거대한 보아뱀 한마리, 어쩌면 도마뱀의 면적에 필적하는 수많은 작은 쥐 떼들이 가로등 밑 거리를 짹짹거리며 지나갔다. 그들은 사뭇 태연하게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고약한 쥐약을 공수해 곳곳에 임시방편으로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쥐들과 달리 역병에 걸린 쥐들은 학습을 하는 모양인지, 처음 몇 마리가 연락 거점에 뿌린 쥐약에 걸린 뒤로부턴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가급적이면 많은 쥐약을 공수해오고 싶었지만, 린든 바깥의 사정도 이곳만큼이나마 좋지 않았다. 활기차던 시장이 물가의 폭등으로 멈춰서고 있었다. 주식인 밀가루로 만든 빵의 공급이 줄어들자, 사람들의 생활이 멈춰들고, 다른 상품의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쥐약도 그것 중 하나였다.



"하다못해 쥐 꼬치라도 해먹지..."



구운 쥐 꼬치는 자칭 린든의 명물 음식이었다. 빵은 먹을 수 있지만 흰 빵은 아니었고, 검은 빵이 주를 이뤘으나 이마저도 부족했다. 하다못해 오래전 누군가가 병을 무릅쓰고 쥐를 잡아 내장을 버린다음 잘 씻어 불에 구워 먹은 것을 시작으로, 쥐 꼬치는 린든의 구제음식이 된지 오래였다. 역병이 창궐해도 쥐 꼬치를 먹는 시민들은 줄지 않았다. 쥐에 깃든 역병이 불에 약한 것이 맞다는 반증이라고 한 노인과 마주 앉은 여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바깥의 사람들은 쥐 꼬치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고,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그 누가 오물을 먹고 병을 옮기는 쥐를 구워 먹을 생각을 하겠는가? 그들에겐 체면이란 벽이 있었고, 그 벽은 오랜 세월 마음의 손으로 단단히 빚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들에게 구겨진 체면을 바래선 안 되네. 그래야 우리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법이지."


"그래서... 벌린턱 갱단을 모조리 처치하신 거예요?"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어도 우리의 대업을 이룰 미끼가 될 정도는 남겨 두었다네. 그들의 대부분이 선봉에 설 것이네."


"어떻게 회유시킨 거죠? 단순히 목숨 정도론 안 끝났을 것 같아요. 비결이라도 있는 거예요?"


"비결이야 있지. 여자, 마약, 그런 걸로 회유하는 시대는 지났네. 그것들을 누리고도 무마할 수 있는 권력, 그런 권력을 선물하겠다더니, 기어코 받아들이더군."


어차피 총알받이가 될 텐데. 매티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벨을 응시했다. 이제 그녀가 말할 차례였다.


"조그만 폭동을 지시했어요. 앞으로 3일 뒤, 그리고 8일 뒤에 엑스와 마르세유 관구에서."


"그곳에 연고라도 있는 건가? 다른 관구도 있을 텐데, 어째서? 내가 모르는 암살단의 비밀이라도 있는 겐가?"


그런 매티어스의 약지에는 암살단이 대척해야 할, 부채꼴 모양의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반지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템플러, 혹은 성전 기사단이라고도 불리우는 자들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독수리의 두개골을 내리찍은 듯한 문양을 심벌로 하는 암살단과 수천년간 권력과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 그들의 조합은 분명,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화되기 힘든 단체의 소속 일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매티어스는 군 시절 권력의 부조리함을 몸소 느꼈고, 부조화를 개선하고자 노력했지만, 썩어빠진 정부와 귀족들은 오히려 조국의 병사들 대신 티비아의 용병들로 체제를 개편하기에 바빴다.



그런 템플러들 속에서 융화되길 포기한 매티어스는, 남은 재산을 모아 미련없이 템플러를 탈퇴한 것이었다. 벨은 그 사실이 진실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칼을 겨눌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린든에선 사상의 권위란 존재하지 않았고, 매티어스는 고아원을 꾸려 아이들과 린든의 사람에게 작게나마 각자의 이상을 심어주는, 불가침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벨의 입장에서 매티어스는 오히려 친숙한 동네 어르신이자, 템플러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오래된 정보원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매티어스의 연줄을 이용해 제국의 수뇌부에 암살단 일원들을 심어놓을 수 있었고, 주시자들 속에서도 암살단의 씨앗을 흩뿌려 두었고, 성공적으로 자라고 있는 상태였다.



"저희 그랜드 마스터가 프로방스 출신이잖아요. 전국삼부회를 연다는데, 참가할 의향이 있으시나 본데요."


"그 방탕한 사자 '미라보'가?"


미라보, 그는 추남이 분명했다. 방탕함이라고는 황제 아그나르와 한스 왕자 저리가라 할 정도이고, 혹자는 사드 후작 저리가라 할 정도의 취향을 가졌다는 추문도 나돌 정도의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미라보 후작은 그런 그를 금사령에 내렸고, 수 개의 감옥을 오가는 색다른 경험을 가졌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마르세유의 이프 섬에서 만난 암살단 죄수에게 감명을 받고 암살단에 입단했다. 무능해 보였던 그는 숨겨진 언변 능력이 있었고, 벨이 매티어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암살단에게 대업에 참여할 귀족들을 소개하는 등, 암살단 내의 지위를 높였고, 단시간에 그랜드 마스터까지 오르는 경지를 내보였다. 더 이룰 이상이 그에게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한달 뒤에 전국삼부회가 열린다는 포고가 떴어요."


"전국삼부회? 하지만 지방삼부회가 남아있잖은가. 그리고 미라보는 더 이상 귀족이 아니야. 제2신분.."


"그분은 제3신분 의원으로 출마할 예정이예요. 하지만 물론, 당신 말대로 지방삼부회가 그랜드 마스터...미라보의 발을 묶고 있죠."


"지방삼부회의 의장들과 의원들은 대체로 귀족들이고 말이야. 이거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을 텐데."


"그 미운 털을 뽑아버려야 하는 방법이, 바로 폭동이예요."


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티어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밀 한줌, 빵 한 조각 구하기 힘든 게 바깥 상황이예요. 2년간의 이상 기후로 밀의 출하량이 급감했고, 사람들은 본능에 굶주려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저들에게도 쥐 꼬치가 유행할 정도인건 알고 계시죠?"



"그건 알고 있네."


매티어스가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포의 불붙은 심지나 다름이 없죠. 우린 그 심지를 조금 더 짧게 만들고, 더 빨리 불을 지피는 것 뿐이예요."


"그렇군.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미라보의 사자같은 언변은 시궁창에서도,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통할 정도로 좌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다. 하물며 굶주리는 제3신분의 편에 서겠다는 전 귀족이라면, 귀족들의 재산을 위협하려는 제 3신분의 분노를 자제시키는 사람이 미라보라면, 지방삼부회도 별 다른 수를 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오히려 미라보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 심지를 어떻게 자를 텐가?"


"그건 브랜든이 설명해줄 거예요, 브랜든 씨?"


"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녁이 드리워진 카페의 그림자 속에서 인기척도 없이 후드를 쓴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희 멘토에 따르면, 그나마 출하된 밀이 아렌델에 공급되는 걸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추적한 암살단원들이 있었지만... 모두 소식이 끊기거나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로써 저희는 조정하는 자들, 그리고 저희 암살단을 처리하는 자들이 따로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있나?"


"후드의 유무입니다."


브랜든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잠시 뒤 그는 역병 때문이 아니라는듯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암살단원들의 장비들은 꽤나 비싼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약탈해 판다면 적어도 빵 몇개는 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세지를 남기듯이 모든 장비, 후드가 그대로 남겨진채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내린 '처리하는 자'들은..."


브랜든이 검지손가락으로 매티어스의 약지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성전 기사단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급하는 자들은 템플러와 연계를 맺고 있지만, 어쩌면 왕실과도 연관을 맺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들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비 템플러인 것 같다고....저희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자네들의 정보력이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테지.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해 두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일세. 이 반지를 끼는 건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해주는 왕실에 대한 일종의 예우일 뿐일세."


"최근 그 후원도 끊기지 않았습니까. 이제 저희 암살단이 지원해 주겠습니다. 저희 암살단은 아직 재원이 풍부합니다."


브랜든이 말했다.


"혹시 그 재원들의 출처는..."


"부르주아지, 그리고 프티 부르주아지(18세기와 19세기 초기의 한 사회 계급을 가리키던 프랑스어 낱말로, 현재는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의 중간 계급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들은 부르주아지는 아니지만 부르주아지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구성되어 있습니다. 메가라 씨를 아시는지요?"


"알지, 내가 키운 아이인데. 혹시 그 아이도..."


"우리 암살단, 그리고 린든의 후원자예요."


"이거 한 턱 먹혔구만 그래."


매티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키운 아이들만큼은 앞으로 있을, 평생에 걸칠 싸움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죽은 안나의 어머니가 암살단 출신임을 알리는 목걸이도 안나에게 '그저 평범한 목걸이'라고 알린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안나의 어머니를 죽인 자의 모습은 매티어스가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안나가 막연히 '복수'의 길에서 헤매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린든에서 자란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면, 귀족들에 대한 혐오심이 불타오르기 마련이죠. 아마... 어르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워진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우릴 후원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만약 그게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말리지 않겠네."


매티어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행이도 자신이 키운 아이들은 올곧은 선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럼 다음엔 어디서 만날지, 지금 여기서 정하도록 하지. 8일 뒤면 만족하나?"


"아뇨, 거사를 치루기 위해 전 린든을 떠나 있을 거예요. 여기 브랜든도 같이 떠날 거고요. 엑스와 마르세유의 폭동의 불씨를 키우러 나가야죠."


"아참, 그러고 보니. 그걸 듣지 못했군. 그래서 어떻게 폭동을 일으킬 거지?"


떠나려는 벨과 브랜든의 뒤를 향해, 매티어스는 소리쳤다. 벨은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이 부족하면 물을 끌어내려야 하고, 물을 끌어내려면 마중물이 필요한 법이죠."








108.5


한나가 돌아오려면 아직 이른 저녁이기에, 벨은 열쇠를 꺼내 사무소의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열쇠구멍의 각도가 달라져 있음에 잠깐의 의문을 품었다.


"일찍 왔나?"


벨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에 있는 브랜든을 바라봤다.


"제가 안열었습니다."


"그냥 한번 본 거예요."


벨은 시큰둥하게 답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라진 로비의 풍경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만히 뭐하고 있는...씨발."


멀뚱히 서 있어보이는 벨을 못마땅하게 여겨 뒤따라 들어온 브랜든이 끝내 욕설을 내뱉었다. 탁자 위에 놓아둔 안나의 편지가 여전히 뜯어지지 않았다는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곳에 있었다. 비밀의 방이 보란듯이 열려 있었다. 서둘러 뛰어가는 브랜든과 벨은, 그곳에서 건드려진 것이라곤 벨의 뉴스 조각이 사라진 것뿐이란 걸 알아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비밀의 방이 들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당신들이 연 거 아니예요?"


"당신들이라뇨, 이젠 '우리들'인데. 우리가 사전에 협의없이 열었을리가 없습니다. 멜리사 씨도 다른 곳에서 임무 수행중이고요."


브랜든이 손사레를 치며 부정했다. 벨은 주시자들, 그 중에서 한나를 생각했다. 원래라면 한나가 오는 시간에 벨은 항상 사무실의 로비를 지켰다. 그녀가 책장에 손을 대나 안대나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연찮게, 한나는 벨의 예상보다 일찍 사무소에 들어왔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 했다.


'그 뉴스엔 카산드라도 언급되어 있는데.'


처음 한나가 주시자임을 알았을 때, 벨은 그녀가 하급 주시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제복에 달린 보석의 문양을 보고 깨달은 것이었다. 발더스가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 적어도 한나의 상관 중 한 명에는 카산드라가 존재함이 분명했다.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 바로 사라진 뉴스 조각이었다. 벨은 반사적으로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노려보았다.


"브랜든, 어서 옥상으로 올라가 봐요."


"하지만 여기서 단서를..."


"단서고 뭐고 범인이 위에 있을 테니까, 빨리!"


외침으로 대꾸하는 벨이 비밀의 방에 있는 암살단 의복으로 갈아입으려 하자, 브랜든은 욕을 씨근대며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109.



"영 소식이 늦는단 말이지."


카산드라는 진홍빛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시자들에게 술은 금지되어 있지만, 고위 주시자들은 어느정도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진 형태였다. 카산드라는 지금 한 소식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왕의 출두 이후로 일주일 하고 절반의 시간이 지났지만, 린든에서의 소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지속적으로 주시자를 태운 보급선을 보내 한나의 생존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것 뿐이었다. 한나는 린든에서 벌어질 지도 모르는 폭동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쓸모가 없는 주시자였나? 한나 웨이크?"


카산드라는 지금 이곳에 없는 한나를 힐난했다. 중위 주시자로 승급시켜주는 데 줄을 대주겠다는 제의라면, 하급 주시자라면 충분히 눈이 돌아갈 정도의 제안일 것이리라.


"어쩌면 린든에 물들여진 것일지도 모르겠어."


와인을 한모금 입에 머금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야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만인의 수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계획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확증은 커녕 답장조차 오지 않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수도원이 한가해서 지원해주는것도 아니라고."


이번엔 잔을 쭉 비워낸다. 다른 고위 주시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계획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어쩔 수 없다면..."


한나는 쓸모가 없다는 게 된다. 차라리 다른 숙련된 주시자를 투입시킬걸, 하고 그녀는 후회했다. 왜 자신은 하급 주시자에 연줄도 없는 한나에게 사주를 벌인 것일까? 옛날의 볼품없던, 발더스라는 사내를 죽이고 손등에 방관자의 표식을 그려넣은 하급 주시자였던 자신을 겹쳐서 보기라도 했던 걸까?


"아냐, 그때도 술에 취해서 그랬어. 술김에, 술 때문에 그런거야."


괜스레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까득, 와인잔에 금이 가는 순간, 정적을 깨고 그녀의 집무실에 똑똑거리며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주시자, 바리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그녀의 허락을 받고 문을 연 사내는 주시자의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발명가이기도 한 그의 생활에 맞게 작업용 멜빵바지와 합쳐진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허리 한 귀퉁이엔 청사진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새로 만든 폭탄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어서 말입니다."


"주무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왜 나에게?"


"항상 그래왔잖아요."


카산드라는 친근하게 웃는 바리안에게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쥐어싸맸다. 오갈 데 없는 어린 몰락귀족인 한나를 거칠게 키워냈다면, 바리안은 곱게 키워낸 주시자 중 하나였다.


"주무관님은 항상 제 의견에 문제를 제기하잖아요. 결국 다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는 거, 카산드라 님도 아시잖아요."


"그렇지. 한잔 하겠니?"


잔을 슬쩍 내미는 카산드라를 보며 바리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일단 제 청사진을 먼저 봐주세요."


'이번엔 또 무슨 무기를 만들었으려나.'


주시자로 키워냈지만, 바리안은 발명가의 기질이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카산드라의 손에 거둬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연 철학 학술원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 천재로 알려질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발명품 중 하나인 '주시자의 오르골'은, 미지의 대륙인 '판디시아'의 어느 유적에서 발굴해 온 악보를 해석해 그에 맞는 오르골로 만들어 내었고, 이것이 방관자의 표식을 받은 자들이 능력을 쓰지 못하게 발동된다는 해괴한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물건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청사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르골처럼 복잡한 것이 아닌, 상당히 소박한 설계도가 새겨져 있었다.



"이름은...섬광탄이예요. 일반적인 폭탄처럼 발파 원리는 비슷하지만, 대신 이건 파편을 흩뿌리는 대신 엄청난 고음과 빛을 뿜어내죠. 하나 만들어왔는데, 확인해 보시겠..."


"미, 미쳤니?"


카산드라가 당황하며 천진난만하게 조그만 원기둥을 꺼내들고 핀을 뽑으려던 그를 허둥지둥 말렸다.


"농담이예요. 이건 그냥 껍데기예요. 그런 모습 정말 오랜만에 보내요."


"닥쳐. 그건 그렇고, 꽤 쓸만한 무기구나. 그건 인정할게. 그리고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부탁이요? 이거 영광인데요."


가슴을 한껏 내밀며 바리안이 과장된 커티시를 취했다. 그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러워서 카산드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곧 린든으로 암살대를 파견할 거야. 그들에게 이 섬광탄의 프로토타입을 장비하게 해줬으면 해."


"시, 실험조차 하지 않았는데도요?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네요."


"그래, 아주 급해. 내 신경을 박박 긁을 정도로."


카산드라는 이번에는 잔에 와인을 붓지 않았다. 금이 간 것을 다시금 확인한 그녀는 병째로 와인을 들이켜 마셨다.


"그리고 이 편지를 암살대에게 전해줘."


"그 편지에 뭐가 들었는데요?"


바리안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카산드라는 비밀을 감추지 않았다. 바리안이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특별하게 키운 주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린든의 폭동 예상지를 타격하고....하급 주시자 한나를 '처분'하란 내용이 들어있어."









110.

"아, 드디어 내일이구나."


안나는 오랜만에 밤의 침대와 이불이 가져온 부드러운 촉감에 몸을 한껏 부비었다. 엘사의 배려로, 항해의 전날인 지금은 특별히 근무가 면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칼은 차고 있어야 되니... 이렇게라도 만족해야지 뭐."


하지만 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뛰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선잠을 자야한다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아예 잠을 자지 않고 복도를 지켜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근무 시간에 쏟아지던 잠은 지금은 어디론가 달아난 듯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러니함의 상황 속에서, 안나는 어떻게 해야 잠을 청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암흑 시야를 발동시켜 엘사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투시해 보기로 했다. 눈앞의 시야가 이내 파래졌고, 벽 너머로 엘사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엘사는 안나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비슷하게 뒤척이고 있는 듯 했다. 희미하게 그녀의 입모양이 씰룩거리는 것을 본 안나는, 그녀 또한 자신처럼 설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나는 차라리 같이 잠을 못 잘 바에야, 같이 얘기라도 하다가 잠을 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잠은 배의 선실 안에서도 잘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한 안나는, 벽을 다섯 번, 똑 똑똑 똑똑, 하고 두드렸다.


"저랑 눈사람 만드실래요~?"


그것은 안나와 엘사가 합의한 일종의 암구호였다. 좁게 들으면 일탈을 하자는 뜻이었고, 넓게 들으면 대화를 나누자는 뜻이었다. 엘사가 안나의 암구호를 들었는지, 순간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안나가 있는 벽 쪽으로 다가왔다.


"안나, 어서 자야 내일 날 경호할 것 아니니?"


"하지만 워낙 설레서 잠이 안 와서요, 공주님도 그러시죠?"


"우리 만나서 얘기할까?"


"제, 제가 갈게요."


안나가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보는 이가 없는데도 살금살금 문을 열고 엘사의 침실로 들어갔다. 엘사는 안나처럼 잠옷 차림이었지만, 안나가 입고 있는 것보다 더 고급진 레이스가 달려있는게 차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엘사가 침대에 걸터 앉더니, 한쪽 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안나는 침대에 걸리지 않게 단검을 홀더에서 풀어 책상 위에 둔 다음, 엘사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도 너랑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되기도 하구나."


"무슨 걱정인지 제가 알아도 될까요?"


"너도 알다시피, 역병의 치료법 때문이야."


엘사의 주제는 안나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무겁기 그지없었고, 안나에게 항해의 목적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이번 항해는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군도 제국에 걸쳐 역병의 치료법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항해가 엘사의 마음 한편에 불안으로 작용되었을 것이었다.


"치료법은 분명 존재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너는 다리를 떨고 있구나. 너부터 걱정하지 말아주겠니?"


다리를 떠는 행동은 안나가 걱정을 할 때 일어나는 버릇이었다. 떨림이 잦아들자, 약간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찾아왔다.


"그리고 내 생각인데...아마 왕실 재정과 영약과 긴밀한 관계가 오갈 지도 모르겠구나."


"어떻게요?"


엘사는 안나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것은 안나의 무지에 대한 것이 아닌, 한 나라의 황실 사람으로써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걱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마 영약이 완성된다면, 소콜로프는 막대한 금액을 황실에 요구할 거야. 일종의 판매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지. 하지만 지금 황실의 재정은 거의 위태로울 정도야."


내가 이렇게 검소하게 살아도 말이지, 엘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설령 영약이 시중에 판매되어도, 거액에 거래가 될 거야. 공급이 적은데 수요가 많으면, 자연스레 가격이 오를 테고. 제3신분 중에서도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가 아닌 대다수의 서민들은 영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나가겠지..."


안나는 자신의 얕은 생각을 후회했다. 어쩌면 암흑 시야로 본 벽 너머의 엘사가 움직였던 입술은 설렘이 아니라 걱정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왕실의 재정이 회복될 정도로 많이 팔리진 않을 것 같구나."


"음...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영약이라고 해도 판매 초반엔 사람들이 경계할 거고, 그래서 많이 팔리지 않다가 나중엔 귀족 정도 되서야 고가에 거래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귀족과 성직자들은 수가 적죠..."


안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안나가 솔직하게 말한 다음, 단순히 여행으로만 생각해 본분을 잊고 있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안나 네 생각도 맞을 수 있어. 사실 나도 너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기도 해. 아버님께서 내게 주신 두 번째 기회이기도 하고, 내가 바깥 세상에 나가본 적이 없기도 하잖니."


엘사가 시큼한 홍차를 마신듯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한번도 배를 타본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 아니, 어릴 적에 타본 적은 있었구나. 어머니께서 궁에 계셨을 땐 말이지. 그때의 난 겨우 세 살, 네 살에 불과했는데...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내 동생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배가 가르고 지나간 파도의 포말은 뚜렷이 기억이 나는구나."


본의 아니게 가정사를 들어버렸고, 그것은 안나의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그...동생분이 계셨다던데, 지금은 어디에 있으세요?"


"나도 몰라. 어머니께서 성에서 쫓겨나셨을 때, 동생도 같이 데리고 나가셨거든. 갓난아기였을거야."


"흠..."


안나는 문득 자신의 출생에 대해 떠올렸다. 에이, 설마. 왕비님이 린든에 무슨 연고가 있다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엘사가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자, 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동생분...그러니까 둘째 공주님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왕비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는지...제가 알 수 있을까요?"


"그것도 잘... 미안하구나. 너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해서, 무릇 궁금증이 생기면 잠을 못 이루는 법인데, 내가 너의 잠을 방해한 게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구나."


"아, 아뇨. 괜찮아요. 원래 잠이 없는 체질이기도 하고..."


'메가라 언니 때문에 체질이 바뀌긴 했지.'


유년기 시절부터 방을 같이 써온 메가라는 거의 매일 밤 가면을 만드는데 열중했고, 촛불의 밝기 때문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 것이 체질로 변질되었을 뿐이었다.


"만약에요, 둘째 공주님과 어머니를 만난다면 말하고 싶으신게 있으신가요?"


순수한 질문을 던진 안나였지만, 이내 자책했다. 엘사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졌기 때문이었다.


"어...죄송해요. 제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보고 싶었어요,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


안나의 말을 끊듯이 대답한 엘사의 눈가엔 그리움의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하, 하하...내가 왜이러지..."


슬쩍 장갑낀 손으로 눈물을 닦는 엘사를 보며, 안나는 어제 허버트와 만나면서 들었던 얘기를 상기시켰다. 확실히, 새벽까지 장갑을 끼고 있는 것도 이상했고, 엘사가 한번도 안나에게 맨손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아무렴 어때.'


안나는 장갑을 벗고 있었다. 허버트에게서 여분의 약초를 선물받아 화상크림을 제조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지워지지 않고, 허버트같이 눈이 극도로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 가리고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엘사가 감추고 싶어할 만큼 안나에게도 감춰야 할 비밀이었고, 오히려 위험성과 후폭풍은 안나 쪽이 더 클 것이었다. 공주의 마법은 소문으로 묻히면 그만이지만, 방관자의 표식을 가진 사람은 소문이 아니라 주시자들에게 심문과 고문을 당하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곳에 매장 당할 게 분명했다.


'그냥...아무 소리 내지 말자.'


안나는 가장 나은 처세를 취하기로 했다. 엘사의 장갑에 굳이 토를 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엘사가 마법을 쓴다고 해도, 그것이 나쁜 쪽은 아니라고 그녀와 함께한 안나는 생각했다.


"미안하구나, 괜히 이런 모습을 보여서."


"아, 아뇨. 사람이 울 수도 있죠. 저도 가끔 옛날이 그리워서 울고 싶을 때도 있는걸요. 옛날에는 이렇게 세상이 각박할 줄은 몰랐는데, 막상 나와보니 어디로 가야 맞는 건지 정해진 이정표가 없는 거예요."


안나는 잠시 숨을 골라 쉰 다음, 이야기를 재개했다.


"사실, 검술 대회도 돈과 지위 때문에 참가한 거였어요. 물론...다른 사람도 그랬겠지만. 어찌저찌 1등을 하긴 했어도, 갑자기 눈앞에 들어온 부와 지위, 그리고 제 옆에는 사연에 호소하는 시민이 있는데... 그냥 딱 포기했죠. 시민의 편을 들기로요."


"난 그때 멀리서 널 지켜보고 있었어. 솔직히 무서웠단다. 아버님이 널 벨까봐서..."


"다행히 그런 일은 없는 대신, 우승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상금만 겨우 얻을 수 있었죠. 그 이후엔 아는 언니 밑에서 가면을 만드는 도제로 일할까 생각했어요."


"가면이라면... 메가라 그레이스의?"


"오, 저희 언니를 아세요? 아, 친언니는 아니어도 같이 지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 언니 밑에서 일하려던 찰나에, 게르다 씨에게서 고용 제의를 받았고... 그냥 전 귀족에게 고용당하는구나! 싶어서 얼씨구나 따라갔죠. 그런데 저를 맞이한 분은 다름아닌..."


안나는 두 손으로 엘사를 모시듯 뻗었다.


"공주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쩌면 이게 저에게 맞는 이정표일지도 모르겠어요."


안나는 진심을 담아 엘사에게 말했다. 엘사의 창백한 얼굴에 드물게 홍조가 드리워졌다. 그것이 부끄러움이란 것을 엘사는 창피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 평안하고...다들 저에게 친절하고...전 제 특기에 맞춰 일할 수 있고... 공주님을 만난 건 저에게 행운이나 다름 없는 것 같아요."


'아, 방금 건 너무 나갔나...?'


안나는 스스로 한 말의 되짚으며 조금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엘사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안나를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안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엘사에게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왕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게 중죄라는 것을 알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엘사는 아무말도 없었다. 오히려 행복에 겨운 모습이었다.


"저, 저어...눈물 닦아드릴게요."


안나는 머뭇거리며 엘사의 눈에서 흐르는 두 줄기의 개울을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공주는 눈물마저도 얼음장처럼 차가울 거라는 사람들의 소문과는 달리, 엘사의 눈물은 따뜻했다.



이후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 두 사람은, 다음날 항해에 앞서 사이좋게 한 침대에서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은 안나가 엘사를 품에 안고 잔 듯한, 마치 몸을 둥글게 만 두 마리의 고양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고 게르다가 먼저 일어난 안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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