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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꼭두각시의 칼 47~48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8.08 23:13:02
조회 125 추천 9 댓글 3

1~46





126.


헉, 숨을 토하며 일어난 안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누군가와의 박치기로 인해 눈앞에 맴도는 수십 개의 별들이었다. 한 손으론 얼얼해진 이마를 어루만지고, 다른 손으론 잠에서 갓 깨어나 흐릿한 눈을 비빈 안나는, 자신과 머리를 맞춘 사람이 바로 엘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괘, 괜찮으세요?"


"나, 나는 괜찮아. 그리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엘사도 안나와 비슷하게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안나는  몸의 촉감으로 인해 자신이 꽤 얇은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혀졌다는 사실과, 부서진 외교선의 선실과는 다른, 조금 낡은 선실에 엘사와 함께 있음을 깨달았다.


"혹, 혹시 저희 잡힌 거예요?"


이럴 리가 없는데, 안나는 얼굴을 찡그리는 엘사를 보며 생각했다. 분명히 자신이 해적선을 단신으로 침투해 선장의 목까지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닷속에 한 번 뛰어들어 옷의 피를 씻겨낸 이후엔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방관자조차 꿈속에서 안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기억의 공백이 남아있었다.


"아니, 우린 지금 해적선을...외교선의 호위함으로 이끌고 있어. 선장이 공백인 틈을 타서 잠시 닻을 내린 상태고, 새로운 선실은 마음에 드니? 해적선 중에선 가장 깨끗하다는데...흠..."


엘사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선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좋은 선실이라 한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적들이 득실거리며 썼던 곳이었다. 깨끗했던 외교선의 선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러웠다.


"해적놈들은 어떻게 됐어요?"


"쿡 선장이 지시를 내려서 지금은 네 지시를 따르기로 했어. 항해를 마치고 아렌델로 귀환할 때는 네가 말했던 영지의 초소를 경비하는 걸로 면죄부를 주기로 했지."


"네... 초소... 잠깐만요. 제 지시를 따른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조금 더 놀려줄까 생각했지만, 그것이 또 해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네가 아무리 해적선을 진압한들, 선원의 수는 여전히 해적들이 더 많아. 그래서 쿡 선장과 나와 합의 하에 해적선을 외교선의 호위함으로 대체하고, 그 호위함의 선장으로 널 지목한 거야. 다들 말하던걸. 네가 마법을... 부리듯이 싸웠다고 말이야."


안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 이불 속에 묻혀있는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장갑을 끼지 않은 듯 구속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들킨 거야?'


안나는 맥 빠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손으로 감싸는 척 하면서 왼쪽 손등을 확인했다. 다행이도, 화상 크림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화났니? 네 의견을 묻지 않아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엘사가 조심스럽게 안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안나는 엘사가 듣지 못할 정도로 참았던 숨을 조금씩 토해내며 몸을 돌렸다.


"화난 거 아니예요. 공주님이 조치를 내리신 거라면 그에 대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안나는 크림 밑에 남아있는 표식을 의식하며 말했다. 단신으로 해적선을 뚫고 수 명의 해적을 혼자서 쓰러뜨렸을 뿐더러, 선장마저 베어 죽인 그녀였다. 남아있는 해적들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거짓에 가까우리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확실히 빙의를 풀 때는 무서웠을 거야.'


안나는 빙의를 풀었을 때를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해적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확실히 그건 흑마법이었으니까. 그들이 마법이라고 지껄이는 것도 당연했다.


"근데 갑작스럽게 선장 역할을 맡는 것도 좀 무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전 뱃사람도 아니고..."


"그건 해적 쪽 갑판수 폴 씨가 널 보조해 줄 거야. 나도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렴."


"하긴, 우글우글대는 남정네들 속에서 공주님을 혼자 두기엔..."


"혼자 두기엔?"


엘사는 안나에게서 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된 후 표정을 잔뜩 풀고 있었다. 주근깨가 피어있는 안나의 모습은 퍽 짖궃어 보여서, 말장난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안나의 곁에 있으면 공주의 체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공주 엘사'가 아닌, 친구 엘사, 어쩌면...


"아까운 외모이시잖아요."


엘사의 생각은 뜻밖에 들려온 안나의 발언에 끊어지고 말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과 귓불에 홍조가 달아올랐다.


"그,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못 써. 내가 얼마나 추한데..."


"그럼 전 어디 뒷골목의 꼽추겠네요. 아무튼, 공주님은 충분히 아름다우셔요. 아부하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진심이에요."


안나가 끙 하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엘사는 화끈거리는 두 볼을 의식하며 안나를 부축했다.


"더 누워 있어도 돼. 네 몸이 우선이지 않니?"


"제 몸보다 역병 치료가 우선이죠. 어서 갑판수에게 가봐요, 우리."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는 듯 하면서 그녀를 채근하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안나를 선실 밖으로 이끌었다. 갑판에 오르자, 수리를 하던, 물자를 실은 상자를 옮기던, 접은 돛대를 피던 모든 해적 선원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아...안녕하세요?"


안나는 멋쩍이 웃으며 이제는 호위선의 선원이 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두려움과 공포 뿐이었다. 안나는 씁쓸해 하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안나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 뿐이었다.


"아그들아! 새 선장이 인사를 했으면 받아야지!"


그 때, 바로 옆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 선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사내가 있었다. 어찌나 큰 소리였던지, 엘사와 안나는 옆으로 벌렁 넘어질 뻔할 정도였다.


"엇차차, 선장이 넘어지면 쓰나."


그런 두 사람의 어깨를 움켜쥐고 일으켜 세운 사내는 여전히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다른 선원들보다는 호탕한 성격을 가진 듯 했다.


"폴이라고 부르쇼. 이 배의 갑판수이올시다."


"아, 당신이..."


안나는 불과 몇 시간 전 칼을 사이로 대치하던 때를 기억했다. 유난히 덩치가 컸던 사내였고, 안나로썬 조금  위축되게 만들 근육질을 가지고 있었다.


"잘 부탁 드려요. 안나 윈터라고 해요."


안나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우악스런 손이 힘차게 악수를 했다. 이끌리듯 악수를 마친 폴은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선장님께서 잘 지내보시잔다! 모두들 이의는 없겠지!"


그러자 크거나 작은 선원들의 긍정이 들려왔다.


"이해해 주쇼. 다들 선장이 죽어서 혼란스러운데다 여자가 선장을 맡는다는게 흔치 않아서 그렇수다."


"그에 비해 당신은 별로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안나가 비척대며 조타륜 쪽을 향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하,  마법이라. 그거 참 신기하지. 하지만 난 그런 거에 별로 신경쓰지 않네. 새 선장이 항해 동안 우리에게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한다면 말이지. 전 선장은 우릴 노예처럼 부렸거든."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이어 자신들의 일을 하는 선원들을 손가락으로 쭉 가리켰다.


"사실, 하루 이틀만 지났으면 아마 반란을 도모했을 거요. 때마침 당신들이 나타난 김에, 마지막으로 한탕 칠까 생각했지만, 우리가 되려 당해버렸군. 그래, 안나 선장? 당신의 상관인 엘리사 드 자네르 양께선 우리를 항해 이후 영지의 초소 임무를 맡길 거라고 하더군. 그럼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장할 수 있지?"


폴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와의 마주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경영이라는 개념을 헤아리지 못해서 어디까지 만족시킬지 몰라요. 하지만 이건 보증하죠. 당신들의 목숨은 내가 지켜요."


안나가 주먹을 꼭 쥐며 폴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자 폴은 답변의 의미로 안나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하기야. 마법을 쓰는 요술 선장인데 크라켄이라고 멀쩡할까 싶군."


"크라켄? 책에서만 나오는 그 거대한 오징어 말이예요? 진짜 있어요?"


"안나, 지금은 그런거에 호기심 가질 때가..."


뜻밖의 호기심을 피워내는 안나를 엘사가 조심스럽게 타일렀지만, 말괄량이 여동생처럼 안나는 폴의 이야기에 빠진 뒤였다.


"정말 존재하지. 이따금 한밤 중에 빛을 내면서 우리 배를 뜯어먹으려고도 했지. 하지만 일단 여기 외교관님 말씀대로 진정부터 하는 게 낫겠군. 일단 조타륜을 잡는 방법부터 배운 다음에 얘기하는 게 어때. 안 그런가, 외교관님?"


폴이 엘사를 보며 말했다. 엘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폴은 안나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조타륜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126.5

저기... 제가 안 무서우세요?


아니, 무섭기야 하지. 하지만 선장 당신보다 무서운 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지.


...어떤 건데요?


뭐, 역병이나 굶주림, 썩은 왕실의 살인적인 세금 제도 정도. 당신의 마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내가 앞서 말한 것들은 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지 않나. 그래서 당신이 덜 무섭구만.


누군가는 세금 제도를 타개하려 노력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 내가 볼 때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엘사 공주의 사치와 문란함은 제국 어디서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수도 없이 들리던데, 내 말이 틀렸나?


...외교관님이 뱃멀미를 하시나 봐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잠시 조타륜 좀 잡아주세요.






127.


"겨우 한 숨 돌렸군."


동이 틀 무렵, 마르세유의 소요는 진정되고 있었다. 미라보는 연설을 마쳤던 제방 위에 쥐베르와 함께 걸터 앉아 서서히 꺼져가는 마르세유의 열기를 보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미라보는 그것이 무언가를 마시고 싶다는 갈증인지, 아니면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열기인지 마음 속 호수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지만 호수는 아무런 잔물결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마르세유가 백작님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되었군요."


쥐베르는 자조적인 어투로 미라보에게 말했다. 미라보는 절반의 긍정을 표하기로 했다. 살인적인 물가 폭등과 사치스런 기득권에 대한 반감은 어떤 형식으로든 표출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비폭력적이든, 폭력적이든 결국 폭력으로 결과를 맺는다는게 미라보의 중론이었기에, 그는 과정을 살코기의 비계를 도려내듯 깔끔히 결과 만을 도출시켰을 뿐이었다.


"부정하지 않겠네, 어, 저기 내 동료가 돌아오는군."


마르세유는 폭동 직후, 얕은 이슬비를 맞이했다. 시민들이 석도에 박혀진 돌덩이들을 뽑아 건물 곳곳을 때려부수고 약탈한 나머지 마르세유의 골목은 곳곳에 물이 고인 진흙탕 투성이가 가득 이루어졌다.


"마치 내 피부 같군."


진흙탕을 찰박찰박 밟으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는 멜리사를 보며 미라보가 혼잣말을 했다. 쥐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히 그 또한 미라보의 말에 무언의 긍정을 하고 있으리라.


"백작님,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습니다."


"그래, 자네는 어떤 길을 택했나?"


'연극'이 시작되기 전, 미라보는 멜리사에게 두 가지 길을 택하게 했다. 불타오르는 마르세유의 화마를 더욱 지필 것인가, 아니면 화마를 잠재울 이슬비가 될 것인가?


"이슬비를 택했습니다. 곳곳에 백작님이 왔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들에게 백작님을 향한 투표를 호소했습니다. 브레몽... 이란 자가 인쇄소에서 찍어낸 호외를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훌륭해, 어둠 속에서 빛을 섬기는 자 다워."


"그건 백작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멜리사가 쥐베르를 잠시 힐끔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백작님, 여기서 확실히 정해주셔야 겠습니다."


문득, 쥐베르가 미라보에게 말했다. 미라보는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사자같은 풍채에 멜리사와는 달리 쥐베르는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였다.


"혹시, 또 다른 '연극'이 있습니까? 저도 이렇게 된 이상, 알아야겠습니다."


"왜, 소외당한 기분이 드나?"


"그게 문제라면 제가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요. 백작님이 예상치 못한 기행의 선두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팸플릿 작전이 그런 것처럼요. 하지만 그런 백작님과 같은 친우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어느 정도의 계획 정도는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지."


미라보는 선뜻 긍정의 대답을 내밀었다. 멜리사는 그랜드마스터를 보면서 행여 암살단, 즉 형제단의 정체를 누설할까 싶어 팔에 차 있는 암살검을 의식했다. 미라보의 경우 암살단에서 단기간에 그랜드마스터까지 오른, 신출귀몰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영웅이자 신처럼 추앙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의 반대의 세력도 있기 마련이었다. 엑스의 기득권층처럼, 암살단 내에서도 미라보에 대한 기행에 부정적인 자들이 존재했다.


"백작님, 하지만..."


멜리사가 암살검을 사출하길 그만두고 미라보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려 했으나, 미라보는 손을 흔들며 멜리사를 제지했다.


"나도 선을 지킬 줄 아네. 쥐베르, 조만간 엑스에서도 오늘같은 '연극'이 일어날 것이야."


"엑스...라면."


야음의 바람을 벗 삼아 마르세유로 달려오기 전, 팸플릿 작전을 벌였던 엑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엑스의 시민들은 백작님의 편이 분명한데요. 이미 팸플릿을 읽은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아졌을 겁니다. 글로든, 소문으로든 말이죠."


"하지만 기득권들의 지지가 없으면 선출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네. 오늘의 폭동으로 인해 마르세유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나의 연설을 직간접적으로 들었을 테고, 나에게 투표권을 행사할 걸세. 엑스는 그에 대한 보험...아니, 잠시만."


미라보는 잠시 말을 중지시켰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멜리사와 비슷한 복장을 한 자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멜리사도 미라보와 거의 동시에 그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도 같은 형제단 소속 암살자였다. 미라보가 엑스의 의회에서 연설을 할 때, 연설을 지켜보던 그녀에게 소식을 전한 암살자이기도 했다. 그는 마르세유의 폭동을 유도함과 동시에, 엑스로 돌아가 '연극' 준비를 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저 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빌헬름, 자넨가?"


"백, 백작님.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큰일?"


떨어져 구르듯 안장에서 내려온 빌헬름이란 암살자가 미라보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지금, 엑스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학살? 연극이 아니라? 지금은 때가 아닐텐데?"


멜리사 또한 미라보와 같이 당황하고 있었다. 적어도 사흘 뒤에 벌어질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 연극이 변질되고, 시간이 앞당겨져 버렸다.


"그럼 대체 누가 학살을 주도하고 있단 말인가?"


빌헬름은 쥐베르에게서 물통을 건네받고 몇 모금 마신 뒤,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주시자들입니다. 그들이 엑스에서 이단 색출을 명목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 죽이고 있습니다!"









128.



"이른 아침에~!"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선상 위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화물창에서 이전 선장이 철저히 숨겨둔 럼주 창고를 발견한 안나는, 갑판수인 폴에게서 이전 선장이 선원들을 금욕적으로 다뤘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껄끄러운 항해가 되지 않게 럼주 파티를 열기로 했다. 이 소식은 외교선 선장인 훅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걱정을 금치 않았지만 "뭐, 당신이 있으니 반란 같은 건 일어나지 않겠죠."라며 수락했다. 안나는 그 후 저녁 동안 럼주를 들고 다니며 선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네며 얼굴을 익혔고, 몇몇 선원들과는 두려움의 관계를 해소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곧 파티가 되었고, 누군가의 노래를 시작으로 파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자! 여기, 우리의 새로운 선장님이 자기 소개를 하신댄다! 모두들 박수로 맞이하자고!"


폴이 어디선가 찾아낸 뿔피리로 노래의 장단을 맞추며 안나를 선원들에게 소개시켰다. 그들은 낮에 있었던 그녀의 기행을 깔끔히 잊어버리기로 한 듯, 대부분 박수로 안나를 맞이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선원 한 명이 가져온 단단한 나무상자 위에 올라가 선원들과 눈을 마주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드렸듯이... 여러분의 임시 선장을 맡게 된 안나예요, 그... 전 선장을 죽여서 죄송하고요...또..."


막상 당차게 준비했던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안나는 바닷바람으로 차가웠던 귓불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필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이라.


"에이, 그 놈은 죽어도 싸지!"


"새 선장은 우리에게 럼주를 허용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오히려 그들은 전 선장을 부정하며 안나의 자기소개를 긍정했다. 그 옆, 묘하게 그늘진 곳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엘사는 안나와 같이 럼주를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였다. 엘사는 여전히 그들을 믿지 않고 있었다. 믿을 사람은 누구일까? 믿을 사람은 안나 뿐이야. 엘사는 자문자답했다.


"자, 이로써 새 선장님의 소개가 끝났고, 다음은... 선장님은 외교관의 경호원 신분으로 항해 중이셨지, 외교관님, 혹시 자기소개 하실 생각 없습니까?"


"나, 나는 괜찮..."


"에이, 그래도 한 번 하시죠! 저희에게 새 직업을 선사해 주신다는 은인이신데!"


폴이 말하자 몇 명의 선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더 이상 바다 생활은 지긋지긋해. 육지에서 크라켄 걱정 없이 살고 싶어.


"공...아니, 외교관님. 한 번 소개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안나가 나무상자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엘사에게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난 여러 사람 앞에 나서는 건 무리란 말이야..."


엘사가 힘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안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안나는 엘사의 생각을 부정했다.


"아마 서코노스에 가시면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실 텐데,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게 어때요? 저도 당신의 자기소개를 듣고 싶어요."


"안나,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엘사는 주변을 흘끗 흘끗 둘러보더니 나무 상자 위로 올라가려 했다. 제복을 입었다지만 그녀는 안나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안나가 엄지손가락으로 엘사의 검지손가락을 살살 문지르자, 엘사가 가지고 있던 떨림이 살짝 잦아들었다.


"나, 나는 역병의 치료제를 찾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 서코노스로 파견한 외교관, 엘리사 드 자네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경호원이자 여러분의 선장인 안나 윈터고요. 저는 제 명예를 걸고 여러분들의 남은 항해, 그리고 육지에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고 시도해 볼 것입니다. 혹시... 다른 질문이 있나요?"


엘사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자, 몇몇 선원들이 손을 들었다. 엘사는 가장 멀리 있는 선원에게 손을 가리키며 질문을 허락했다.


"저...아까부터 궁금했던 겁니다. 도대체 육지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엘사가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엘사는 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들이마셨다. 짭짜름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차가운 폐 속을 휘저었다.


"현재 육지에선 쥐와 우는 자들을 매개로 하는 역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우는 자들'이라면 저희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마치... 판디시아 대륙의 부두술사들이 하는 의식에서 태어나는 '좀비'들과 비슷하게 움직인다지요?"


"하지만 그들은 좀비가 아니라 환자예요. 저희 아렌델은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안톤 소콜로프 박사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럼 육지 생활이 더 힘든 거 아닙니까?"


이번엔 다른 쪽에서 손을 든 선원이 질문했다. 이것 또한 엘사가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자칫하다 우리가 감염되면 어떡하죠?"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안나가 엘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속삭인 다음, 그녀를 나무상자에서 내려오게 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시 오른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간략히 설명해 드렸는데, 여러분은 한스 왕자님의 영지에서 초소병으로 근무하시게 될 거예요. 주 업무는 역병의 방역을 도맡아 할 거지만..."


"할 거지만?"


폴이 안나의 말끝을 물었다. 안나는 생각했다.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더 긍정적인 말이 필요하다고.


"물론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스 왕자님의 영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역병이 창궐하지 않은 청정구역이고, 여러분은 초소를 잘 만들고, 관리하기만 해도 역병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우는 자'들은 격리해야 합니까, 아니면 처리해야 합니까?"


결국 나왔구나, 안나는 질문을 한 선원을 탓하지 않았다. 엘사는 우는 자들을 환자라고 규정했지만, 린든에서 우는 자들을 자주 보아온 안나는 그들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우는 자들의 주변을 떠도는 날파리들은 그들의 살점을 조금씩 파먹음과 동시에 의식의 끈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날파리 한 마리 한 마리마저 잠재적인 위험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이면 격리를 해두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처리를 해야겠죠. 그 자들을 대처하는 데 필요한 검술과 지식은 제가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공ㅈ.... 아니, 왕자님께선 최고의 지원을 여러분들에게 내리실 거니까요."


"그럼 마법도 알려주나?"


"맞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마법을 쓴 게 맞아. 혹시 마녀인가? 아니면 방관자의 표식을 지니기라도 한 거야?"


안나는 선원들의 말에 뜨끔하면서도, 한편으론 당당해지기로 했다. 장갑 속 손등에 두텁게 발려진 화상 크림은 그녀의 손을 자주 잡는 엘사에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표식을 가리고 있었다.


"마녀인지 방관자의 신도인지는 손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선장, 우리에게 손등을 보여 줘!"


안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손에 착용된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두 손등을 선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맑은 밤하늘의 달빛 속에서 그녀의 손등엔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다는 거짓은 그들에게 사실로 다가왔다.


"으, 으음... 사실은요. 제가 마녀인지 방관자인지를 차치해도 제가 선천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안나는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고 이걸로 남을 등쳐먹거나 하는 일은 안했어요. 보시다시피 외교관의 경호원으로 임명되기까지 했고... 제가 최면을 거는 마법을 가진 것도 아니고요."


"흠... 그래도 확실히 무섭긴 해. 그 마법이란 것 말이지. 하지만 아그들아! 선장님이 마법으로 우릴 지켜주신다면 크라켄이건 뭐건 뭔들 무서우랴! 어?"


이야기의 소재가 금세 떨어진 안나의 눈치를 살핀 폴이 안나에게서 말을 받아 선원들에게 긍정적인 외침을 남겼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선원들은 안나와 폴의 말을 거의 곧이곧대로 믿고 환호했다.


"그건 맞지!"


"선장! 크라켄도 잡아서 삶아 먹어버리자고! 크라켄이 정력에 그렇게 좋대!"


얼빠진 환호에 안나는 괜스레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128.5


"그럼, 저도 이만 제 시간을 가지러 가 보겠수다. 선장, 외교관, 편한 밤 보내쇼."


폴이 럼주 두 병을 가지고 자신의 선실로 사라지자, 선상에는 취해 뻗은 선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조타륜 잡은 안나와 그 옆에는 엘사가 럼주 한 병을 글라스에 부어 나눠 마시고 있었다.


"이제서야 하루가 끝났네요."


"실감이 안 나지이?"


엘사가 싱긋 웃으며 글라스를 약하게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글라스 속 호박색 액체가 그녀의 손길에 따라 춤을 춘다.


"그렇죠. 어제까지만 해도 옆쪽 배에 탔는데, 이젠 이 커다란 배를 조종하는 위치까지 오니까..."


"항해에서 돌아오면 이 배도 처분할 생각인데에, 안, 안나아. 네 생각은 어떠니?"


"처분해서 사회에 환원하시려고요? 그건 시기상조라고 보는데요..."


안나가 럼주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면 이런 거 어떨까요? 배를 처분하지 말고, 혹시 모르니까 임시 진료소로 쓰는 거예요."


"임시 진료소오?"


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과 동시에, 안나는 엘사의 얼굴에 홍조가 물들었음을 볼 수 있었다. 한 나라의 공주라도 럼주의 알코올에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리라. 정작 이보다도 쓴 밀주와 술지게미를 먹어 본 안나로써 럼주는 조금 쓴 맥주를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영지가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곤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저 사람들을 초소병으로 세우고 초소를 관리해도, 역병은 쥐 한마리로도 초토화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뭐랄까... 아픈 자들을 수용하는..."


"감옥을 말하는 거지?"


순간, 안나는 엘사의 발음이 또렷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환자가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소콜로프 박사의 영약이 언제 만들어질 지도 모르고... 아니면 피에르 조플린이란 자에게 영약을 만들어 달라고 해도 그 사람의 소재가 불분명하고...또..."


"그래, 그래애. 안나. 난 널 이해해애. 내 시각이이, 시각이이. 모두를...대변하는 건 아니잖아아."


엘사는 취했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안나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엘사는 안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좋다아..."


'으, 어깨 무거워어...'


엘사는 안나를 한참 동안 허리를 안고 있었다. 안나는 슬슬 엘사를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조타륜에서 잠시 손을 놓고, 닻을 내리기로 외교선에게 얘기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물로 얼룩진 엘사의 얼굴이 보였다.


"잘할... 수 있을까."


"네?"


"이번 일... 꼭 잘 해내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그 일은 역병의 치료제를 뜻한다는 사실은 안나도 알고 있었다. 안나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조타륜을 놓고 엘사의 머리를 껴안듯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외교관님은 어엿한 공주님이예요. 게르다와 허버트 씨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지금은 본국에서 성 대청소를 진두지휘하고 있을 시종장 겸 하녀장 게르다와, 떠나기 전 안나가 부탁한 무기들을 연구하고 제작하고 있을 허버트를 떠올리며 그녀는 엘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서코노스에 가셔도 당당히 행동하셔야 해요. 저처럼요. 물론 저도 서코노스는 처음인데."


"처음인데에?"


"노력해야죠. 공주님처럼."


그러자 엘사가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바다를 담은 두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피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울지 않고, 눈물을 삼켰다.


"안나아."


"네?"


"사석에서는, 날 공주님, 외교관님이라고 부르지 마아."


"네?"


뜻밖의 말이 엘사에게서 튀어나오자, 안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취기를 타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마음에 담았던 말인가?


"그럼...뭐라고 불러드릴까요? 공주님...아니아니, 음음, 당신이 저보다 세 살 더 많으셔요."


어찌저찌 '당신'이라고 호칭을 올려 부른 안나였지만, 이것 또한 부르기 쉬운 호칭은 아니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언니라고 불러주면 안 돼애?"


"어, 언...네네, 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말을 얼버무린 안나였고, 취기 속에서도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낸 엘사가 안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 니라고 불러쥬어..."


"정말로, 그렇게 불러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엘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그래애... 한 번마안..."


안나는 목을 팔로 감아 안은 엘사를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눈, 바다를 담은 눈에서 보이는 애환이 안나로 하여금 침묵을 선물했다. 엘사에겐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는 여동생이 있었고, 그 여동생은 황실에서 쫓겨난 어머니가 데리고 가셨다. 안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엘사는 안나에게서 여동생의 모습을 본 것일 수도 있겠다고. 안나는 잠시 엘사의 시선을 회피한 다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만월이었다.


'그래, 그러자.'


"알겠어요, 엘사...으음."


"으으음."


엘사는 거의 쓰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안나는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언니'라는 단어 하나를 외치려고 애썼다.


"어, 어어, 언...니이!"


끝내, 안나는 엘사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데 성공했다. 마치 선을 넘어버린 배덕감 비스무리한 것이 안나의 목구멍을 타고 뿜어져 나온 느낌이었다. 직후, 안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 취기를 이기지 못해 잠에 들어버린 엘사를 천천히 안아 들어 계단을 내려가 선실로 들어갔다.


정작 언니라고 불린 당사자는, 언니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로.






129.75

"으으으..."


엘사의 머릿속에 지난 밤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주량에는 자신있다고 안나에게 큰소리 친 다음, 럼주를 나눠마셨고,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은 백지마냥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를 부여싸며 몸을 일으킨 엘사는 옆의 탁자에 따뜻한 수프 접시에서 나오는 고소한 내음을 맡았다. 의아해 하며 엘사가 접시를 들자, 접시 밑에서 쪽지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급히 휘갈겨 쓴 필체였지만, 엘사가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다시 수프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엘사는 쪽지를 들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지난...밤에는...기분... 좋았...어요? 잔뜩 취하신 모습이...보기 좋았구요."


엘사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분명 이 쪽지는 안나가 쓴 것이 분명했다. 엘사는 혹시 몰라 옷의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지만, 흐트러짐은 없었다.


'이상한 짓은 안했구나!'


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쪽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사석에선 엘사 언니라고 부를게요... 공주님. 위에서 조타륜을 잡고 있는 안나가."


엘사는 안나가 말한 그 기분의 의미를 끝까지 읽고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엘사가 취기를 기운삼아 안나에게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고 한 모양이었고, 안나는 그것이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은 엘사는 다시 수프 접시를 집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안나의 침대쪽 탁자에 유광이 발라진 하얀 가면이 붓과 팔레트와 함께 놓여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안나는 아직 엘사의 가면 만들기를 포기하기 않은 듯 했다.


"아, 일어나셨어요?"


직후,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까치걸음으로 들어오던 안나가 일어난 엘사를 보며 말했다.


"엘사...언니?"


"으, 으응. 안나, 혹시 어제 우리 아무짓도..."


"아무것도 안 했어요!"







130.


서코노스다! 서코노스에 다 왔다!


위에서 망을 보던 파수꾼의 말이 들린 지 1시간 뒤, 두 사람을 태운 호위선 한 척, 그리고 외교선 한 척은 서코노스의 부두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부둣가에 사람이 내릴 수 있게 판자가 내려지기도 전에, 부둣가는 아렌델에서 온 외교 사절단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붐볐다.


"저 사람이...위즐톤 공작인가 봐요. 뭔가... 좀 돈을 밝힐 것 같은 교활한 모습이..."


조타륜을 막 놓고 망원경으로 항구를 바라본 안나가 옆에서 같이 망원경으로 그녀와 행동을 같이하는 엘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의 망원경 속에 들어있는, 인파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흰색 제복을 입은 땅딸막한 노인, 그리고 덩치가 크고 독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내가 노인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물자를 나르던 폴과 다른 선원들이 안나의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엘사는 웃지 않았다.


"안나,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엘사가 짐짓 진지한 투로 말하자, 안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안나가 엘사의 얼굴을 바라보자, 엘사의 얼굴엔 그리움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저 사람이 외교관님에게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세요?"


안나가 넌지시 물었다.


"음... 안나, 너에겐 대부님이 계셨다고 그랬지?"


"네, 그랬죠."


"저 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대부님의 위치에 계셨던 분이야."


오호오, 안나는 선원들이 물자를 내릴 동안 엘사가 안나에게 위즐톤과의 이야기를 더 해주길 내심 바랬다. 마지막에 내려도 상관없는 게 사절단이었다.


"벌써 초령에 접어드셨구나.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저 분은 아주 젊으셨지. 아주 잠깐 동안 사절단으로 아렌델의 궁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지. 그 전에 어머니께서 황실에서 쫓겨나셨고... 난 혼자였어. 어린 내가 의지할 어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어.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그리 좋은 버팀목은 되지 못하셨지. 당시엔 공주라는 직위를 입에 달지도 못했어.  그냥 '버려진 딸'. 이게 전부였는데, 저 공작님은 나에게 가장 처음으로 '공주님'이라고 말을 붙여주신 유일한 어른이었어."


"음... 생각 외로 좋은 분이셨나보네요."


"생각 외가 아니야. 일주일 간의 체류기간 동안, 저분은 내게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황실 사람이 가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에 대해 알려주셨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일주일 간의 임시 가정교사를 자처하셨던 것 같기도 해."


엘사가 싱긋이 웃으며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다시금 망원경을 들어 위즐톤 공작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공작은 교활한 웃음을 짓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손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져 있는 듯 했다.


"공작께선 외교관님의 정체를 아시는 것 같아 보여요."


"흠...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어른은 얼굴이 거의 바뀌지 않지만, 어린애는 모습이 금방 바뀌잖니."


엘사가 망원경을 망토 안쪽에 안감으로 덧대어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내릴 차례야. 수호경, 아니, 경호원 안나."


"네, 엘리사 외교관님."


엘사의 말에, 안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참, 내리기 전에 잠깐만, 손을 내밀어 보렴."


"네?"


엘사를 뒤따르려는 안나의 걸음이 멈췄다.


"내가 준 물건을 잊어선 안 되지?"


엘사가 안나의 손에 올려놓은 물건은, 기사단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 박힌 반지와 날이 긴 단도였다. 어젯날에 해적선을 소탕하기 전, 불안에 떨어하는 엘사에게 맞긴 것들이었다.


"아차차... 깜빡 잊고 있었어요."


"괜찮아. 나도 이제 막 기억했는걸."


엘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나는 체스트 홀더의 남은 자리에 단검을, 그리고 장갑을 낀 손, 그중에서 왼쪽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러자 엘사의 눈에서 동요가 일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안나의 표정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얘기가 빨리 끝났네. 그럼 폴 아저씨. 뒷마무리 좀 부탁할게요."


"마무리 끝나면 자유시간도 주나? 전 선장은 자유시간 따위 주지도 않았거든."


폴이 나지막이 물었다. 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동만 부리지 마세요. 공작과의 접견 이후에 사람을 보내서 합의된 체류 기간을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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