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팬픽/유혈/고어]꼭두각시의 칼 51~52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9.22 22:31:02
조회 186 추천 10 댓글 2

1~48



49~50



137.



'꼭두각시의 칼'이라는 선술집은 아직 축제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막 문을 연 것처럼 보였음에도 가면을 쓴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속에서도 두 사람의 발걸음, 그리고 선술집 한 켠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대, 담배 한 모금의 연기를 떠오르게 하는 목소리를 가진 흑인 남성이 노래를 부른다. 두 사람은 작은 연주회의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웨이터를 불렀다. 엘사의 사과 주스 한 잔, 안나의 사과주 한 잔. 안나는 곧 추궁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음에도, 엘사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과 선상 위의 '언니 타령'을 상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의 실소가 가면 속 안나의 입가에 지어졌다. 웨이터가 떠나자, 연주와 노래가 그들의 귀를 간질였다.


"사실대로 말해봐."


이상하리만큼, 두 사람의 주변에는 연주단을 제외하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지 못했다. 안나는 가면 속의 눈으로 엘사 언니를 바라보았다. 엘사 언니의 눈은 안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소문이 사실대로라면, 안나는 진작 얼음 꼬챙이에 꿰어져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안나, 말하기 싫니?"


"말하기 싫은 건 아닌데..."


"그럼, 왜 주저하고 있는 거야?"


일단 말을 마친 엘사는, 안나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 린든. 최악의 도시이자, 그녀의 실질적인 영지의 한 구획이던 러드쇼어 상업지구보다 더 많은 갱단과 불안한 치안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다. 엘사는 노점에서 안나에게 '린든에서'라는 말을 확실히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거짓말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공....아니, 언니도 알다시피, 그곳 출신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겠어요? 혹시 매티어스 아저씨의 고아원을 알고 계세요?"


"매티어스...들어본 적이 있어. 부패한 군부의 유일하게 청렴한 군인이었다고 했는데...그 사람이 린든으로 가 고아원을 세웠고... 잠깐, 내 대부님이 매티어스 대위였어?"


"...네."


엘사는 가면의 이마 부분을 손으로 짚었고, 안나는 두 손을 모아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전 린든에서 나쁜 짓은 안 했어요."


약간의 불순물이 섞인 순도 높은 진실을 안나는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말했다. 린든에서 안나가 저지른 일탈은 투견장에 몰래 가서 도박을 한 것이 가장 큰 그것이었다.


"언니도 잘 알잖아요. 인간의 본성이 뭔지. 잘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그런 거잖아요... 언니도 그래서 절 데려오신 거 아니예요?"


엘사의 마음에 의표가 찔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 마차에서 안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병적으로 그녀를 찾아 헤매 경기를 조작시켰을 뿐더러, 종국에는 안나를 경호원으로 곁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병이라면 병이고, 행복이라면 행복이었다. 안나의 행복과, 엘사의 행복은 다른 것이었다. 안나는 의식주가 보장되는 생활이, 엘사는 안나와 같은 햇살같은 사람이 바로 그것이었다. 엘사가 말이 없자, 안나는 이어서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언니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어쩌다 보니 우승을 박탈 당하고, 메가라 언니의 도제로 들어가면... 뭔가 제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문득, 왼손의 핏줄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방관자의 표식이 새겨진 손이었다. 말없이 안나를 응시하는 엘사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누가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고, 공허로 도망쳐 방관자와 얘기를 나눠 상황의 타개책을 찾아보자고. 하지만 안나는 방관자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내뱉지만, 그것은 결국 수수께기로만 남을 것이었다. 안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네 인생의 목적이 뭔데?"


때마침 두 잔의 사과 음료를 들고 나타난 웨이터가 그녀들의 앞에 각각 주스잔, 술잔을 놓아주었다. 안나가 지갑을 꺼내려 값을 지불하려 했으나, 엘사의 손이 더 빨랐다. 음료 값의 몫과 팁을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준 그녀는 만족하며 자리를 뜬 웨이터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일시적으로 밝아졌던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말해 주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할 수 있다면, 도와줄게."


"약속의 증거가 없잖아요. 이건 계약서를 써서라도 함구해야 할, 제 인생의 목적이라구요."


안나가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가면의 입가를 살짝 들고, 잔을 기울이자 노란색의 살얼음을 머금은 액체가 입안에 진하게 배었다. 엘사도 잔을 들고, 안나와의 행동을 같이 했다. 둘 다 첫 번째 시음을 마치고, 다시 서로를 바라본다.


"제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아."


엘사는 순간, 어릴 적에 헤어져 소식조차 없는,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엘사는 이별했다면, 안나는 사별을 맞이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들을 찾으려면... 일단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린든 내의 흥신소에서 일을 시작...할 뻔 했죠. 언니도 아시다시피, 역병이 터졌죠. 그래서 고래 도축장에서 일을 하다가... 지역 갱단이 소콜로프 박사의 영약이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도축장을 개판으로 만드는 바람에... 금전 수단을 잃었죠."



안나는 그 이후, 한나라는 주시자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방관자와 손에 새겨진 표식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를 엘사에게 전해주었다. 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한편, 이마를 짚어 안나의 말을 곰곰히 곱씹는 행동을 취하곤 했다. 안나로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기껏 찾은 직업이었고,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안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이기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공주를 속여 넘긴 것이 크나큰 중죄란 것을 망각한 채로.


"됐어, 이제 그만. 그 정도면 충분해."


"예? 아직 더 남았는..."


"네 사정은 충분히 알겠어, 저번에 네가 망토의 원단으로 찾는다는 것도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지?"


"결과만 말하자면.... 네. 이제 언니 차례예요. 음, 그러니까... 저를 짜를지, 안 짜를지..."


안나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엘사는 그 모습을 보고 프흣, 웃고 말았다. 안나는 엘사가 자신의 행동이 심기를 거슬렸나 싶어 후회했지만, 후회할 만한 결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안나, 사람들은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어. 나도 가지고 있고. 다만 난 아직 비밀을 감싼 껍질을 벗기지 않았을 뿐이야. 안나, 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의 껍질 조각을 내게 보여줬고, 천천히 드러낸 것 뿐이야. 난 그런 거 가지고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란다."


엘사가 테이블 위로 스치듯이 손을 뻗었다. 안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난 네가 여기까지 오려고 노력한 게 오히려 자랑스러워. 그, 알잖니. 귀족의 인맥을 통해 장교직을 얻는다거나 하는 부패한... 그러니까..."


"부패한 작자들이요?"


"맞아, 그런 무뢰한들에 비하면 넌 정말로... 매티어스 대위님과 다를 바 없는 존재야."


'그리고 내겐 넌 태양같은 존재고.'


엘사는 마지막 말을 내뱉지 않았다. 만약 내뱉다가는 안나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지도 모르고, 그녀 또한 그걸 원치 않았다.


"넌 앞으로도 내 경호원이야."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네요. 아, 제 목적을 함구하실 계약서 말인데요, 그건..."


안나가 웨이터를 불러 종이와 펜을 빌리려 하는것을, 엘사가 두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계약서 같은 건 너무 따분해. 너도 알잖니, 내가 하루 종일 서류만 보고 있는 현실을 말이야. 난 거기에 종이를 한장도 더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아니아니, 절대로 너의 비밀을 귀찮아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뭐랄까..."


엘사는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나는 잠시 턱을 짚고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좋은 수를 생각해냈다.


"징표나 선물로 정하는 게 어떨까요? 왜 있잖아요,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선물을 주고 받는 것처럼요."


엘사는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내 그것이 인상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공연은 좀 이따가 시작하려나 봐요. 그 사이에 우린 기념품 가게에서 서로에게 선물할 물건을 사서 교환하는 거죠. 제 아이디어 어때요?"


"좋아, 선물이라면, 그에 담긴 함구적인 의미도 무거울 테지."


말을 마친 엘사가 사과주스를 모두 마셨다. 안나는 엘사의 가면에서 입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불투명한 창밖으로 고조되는 소음을 들으며 천천히 잔을 기울여 마셨다. 짧은 음주의 시간이 끝나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보자, '사군토'의 경호원."


"넵."


안나는 사군토를 강조해서 말하는 엘사의 말을 조곤조곤 따르며, 먼저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 문 밖으로 나섰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 있는 무대는 반쯤 완성된 상태였다.


"무슨 공연을 할까?"


"제가 볼 땐 연극 같은데요."


"어쩌면 재담일 지도 모르겠구나."


둘은 적당한 대화를 바닥에 깔린 안개에 섞어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기념품 가게를 찾았다. '서코노스 물산', 기념품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서코노스 사람들은 선물을 살 때 이곳에서 물건을 사간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녀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들어온 서코노스 물산 안에는 손님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다. 위즐톤의 공작궁을 나오기 전, 공작에게서 허락을 받은 직후, 안나는 엘사에게 말미의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심장 '누디아'를 챙겨 나왔다. 누디아는 어느 순간부터 안나의 대답에 침묵했고, 방관자의 부적과 룬이 근처에 있음을 알리는 박동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물산에 들어온 순간, 바지 뒤쪽에 매달아 놓은 심장에서 미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여기엔 수 많은 살인자가 있어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살인자들이.]


"저, 저기, 언니. 여기 말고 다른데 가서..."


희미하게 들려온 심장의 속삭임은 안나를 본능적으로 밖으로 나가게 하는 충동을 일깨웠다.


"왜? 여기에 좋은 물건이 많아 보이는걸. 어쩌면 희귀한 골동품을 발견할지도 몰라."


"거, 고양이 가면 쓴 아가씨가 안목이 좋구먼! 여기 있는 물건은 티비아, 몰리에서도 온 것들도 있다네. 봉쇄령이 떨어지기 직전이라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아 섭섭했는데, 혹시 어디에서 왔나?"


턱수염이 인상적인,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엘사가 대신했으니까.


"사군토에서 왔어요."


"사군토! 그곳은 본토일 터인데, 본토는 지금 역병으로 수 많은 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지역마다 다르지만, 그런 곳도 있다고 들었어요."


엘사는 사내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자세하게 말했다가는 가면의 존재가 무의미해질 만큼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본토에서 온, 현재까지 있는 마지막 관광객일 수도 있다는 거로군."


"관광객?"


"그렇네, 관광객은 돈이 많지. 그리고 이 상황에서 여기로 올 관광객들은... 그 만큼 여기에서 버틸 자금이 있다는 뜻이 되겠고... 안 그런가?"


주인의 말이 끝난 직후, 가게의 셔터가 내려갔다. 안나가 창문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지만, 창문 또한 셔터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바깥에서 여기의 소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걸세.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매출 부진으로 일찍 문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이고."


"하지만 우린 둘이고, 난 총과 칼을 가지고 있어. 당신 혼자서 해결이 되겠어? 조용히 우릴 보내주면 좋겠는데."


안나가 자켓 안쪽에서 두 개의 단검을 꺼내 양 손에 하나씩 들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으쓱일 뿐이었다. 그 으쓱임이 신호였는지,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여섯, 혹은 그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천천히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하지만 우린 둘 이상이지, 자네들을 보아하니. 꽤 곱게 자란 듯 한데, 적당히 맛을 본 뒤 사창가에 팔아도 손색이 없겠어."


"씨발, 기념품 가게라고 하더니만, 당신은 사창가 포주라도 되는가 봐요?"


"물론... 여자가 하나의 기념품이 되기도 하지. 사람들이 말 안해주던가? 이곳에서 기념품이란 뜻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 이거야 원, 이렇게 순해 빠진 관광객들이라니. 하지만 동정해 줄 마음은 없다네. 우리도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겠는가?"


"파올로가 알아채면 역정을 내겠지만, 혁명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내 중 한 명이 입을 열자, 다른 사내들이 하나 둘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안나의 목에 식은 땀이 찼다. 사내의 말을 조합하자면, 그들은 파올로의 갱단에 속한 자들이란 사실이었다. 순간 안나는 위즐톤이 왜 만류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 해적이자 현 선원들에게선 광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에겐 광기가 있었다. 혁명이란 믿음은 변질되어 맹신이 되고, 맹신이 과다해 빚어진 광신이 그들의 눈에 어려 있었다. 안나는 한 손을 들어 엘사를 자신의 뒤, 셔터 앞으로 물러서게 했다.


"내 뒤에 있어요."


"어이쿠, 꼴에 지키고 싶은 사람 하나는 있나 보네? 어차피 사이좋게 따먹힐 텐데."


"씨발, 어차피 너희들 모두 다 뒤질 테니까 계속 나불대 봐!"


안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단검 하나를 휘두르듯 사내 중 한 명에게 던졌다. 안나와 비슷한 칼로 무장한 사내들 중 한 명의 목에 안나의 단검이 박혔고, 소리없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지는 그를 시점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일제히 안나에게 몰려드는 사내들을 향해 안나는 빈 손으로 재빨리 자켓의 주머니에서 산탄 권총을 꺼내 다른 사내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수십 개의 산탄이 사내의 얼굴을 토막내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안나는 몸을 숙여 첫 번째 칼날을 피하고, 단검을 들어 두번째 칼날을 쳐낸 다음, 세 번째 칼날을 산탄 권총의 총신으로 흘려보냈다. 네 번째 , 다섯 번째 칼날은 안나의 연미복의 소매만 찢어냈을 뿐,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철컥, 산탄 권총의 장전음을 들은 안나는 고개를 들면서 한 사내의 불알에 총구를 들이밀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씨, 씨발, 내 불알, 내 불알!"


"뭐 저런 미친년이 다 있어!"


안나는 고꾸라지려는 사내의 다리를 발로 걸어 넘어뜨린 다음 곧바로 옆에 있는 사내의 복부에 단도를 연달아 후벼 찔렀다. 복부에서 피와 내장의 음식물이 튀어나왔고, 이내 창자가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하게 우웩 하고 여린 여자의 구토 소리가 들려왔다. 엘사의 것이 분명했다. 안나는 엘사에게 눈이라도 감으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잠깐 후회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총알이 오른쪽 이마를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 안나는 총을 꺼내든 사내에게 텅 빈 산탄 권총을 내던졌고, 그것이 권총의 사선을 크게 비틀었다. 천장을 향해 발사된 총알은 이내 전구를 깨뜨렸고, 후두둑 우박처럼 흘러내리는 유릿조각들의 짧은 울음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어둠이 잠시 그들에게 찾아올 때, 안나는 엘사가 보지 않게 왼손을 등 뒤로 돌리며 암흑 시야를 발현시키는 주문을 외웠고, 이내 어둠 속에서 남은 적들의 수와 그들의 시선이 노란색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남은 적은 노인을 포함해서 총 넷이었다. 안나는 총을 든 사내를 요주의 위협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유릿조각의 바닥을 뛰어넘은 뒤, 사내의 멱살을 잡고 끌어메쳤다. 그 순간, 수십, 수백 개의 유릿조각이 사내의 등을 파고들었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부들거릴 정도로 고통에 짓이겨진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그가 총을 다시 발사하기 전에 그의 얼굴을 두번 구둣발로 걷어찼고, 목이 부러진 사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어둠 속에서 사내들이 휙, 휙, 칼을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한다. 안나는 그들이 등불을 꺼내 시야를 밝히기 전에, 첫 번째로 죽은 사내의 목에서 단도를 뽑았다. 그러자 그 질척한 소리를 들었는지 안나 쪽의 허공으로 칼이 휘둘러진다.


"저, 저리가. 저리가라고, 저리가 씨발련들아!"


남은 세 명 중 하나는 울부짖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엘사는 가면을 벗고 구토를 하려는 입을 두 손으로 억지로 막고 있었다. 그것은 안나에게 있어 쉬지 말고 죽이라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안나는 어둠 속에서 점멸을 시도해 두 사내의 뒤로 다가갔고, 그들의 두 목에 단도를 내리쳤다. 그들의 비명은 우렁차지 않았다. 그저 피와 가래에 젖어 나오는 부글거림이 전부였다. 안나는 두 사람의 목에서 두 단검을 뽑았고, 안나의 연미복에 따뜻한 피가 묻었다. 안나는 고개를 돌려 남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봐요. 아까 뭐라고 했죠?"


"나, 나는..."


"이제와서 뭐라고 하진 않겠죠?"


어둠 속에서 노인이 거의 안나를 향해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잘못했네, 목숨만은 살려주게. 몇 분 전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가고, 이제는 비루한 노인의 웃음을 지으며 노인은 그녀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내, 내가 가진 돈이라도 줌세. 그걸로 안 되겠는가? 제발, 내가 잘못했네...."


"돈은 필요없어요, 이미 충분히 만져봤으니까요. 아, 물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념품 가게...아니, 정말로 물건을 파는 가게가 어딘지 말해주신다면 살려는 드릴게요."


"아, 알겠네. 광장 건너편에 있는, 하프 팻말이 걸린 거리를 지나다 보면 그곳에 "피오르드"라는 작은 골동품 가게가 있을 걸세. 거기서 물건을 많이 팔 테니 거기로 가보시게나. 자, 이제 나는 살려주는 거 맞지? 그런 거지?"


안나는 뒤를 돌아 엘사를 바라보았다. 엘사는 안나가 노인에게 말을 건 시점부터 심한 구토를 하고 있었다. 안나의 속에서 겨우 식어가던 분노가 다시금 타올랐다. 겨우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하고, 같이 선물을 사러 가기로 한 사람이 두려움에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안나는 단검을 집어넣으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꿔 한숨을 돌린 노인에게 말했다.




"눈 하나, 팔 하나, 다리 하나로 퉁치자고요. 저 셔터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막아준다고 했었죠?"





138.


쾅,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가게의 셔터가 잠시 올라갔다, 다시 내려갔다. 아무도 그녀들의 상태를 묻지 않았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 모두 가게 안을 미처 볼 새도 없이, 안나는 엘사와 함께 가게를 나온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셔터의 밑부분을 발로 크게 차 우그러뜨린 안나는 다시금 틈새에 손을 비집어 넣었고, 지렛대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쉽게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아뇨, 꼭 그래야만 했어요."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려는 안나와, 그녀에게 손이 잡힌 엘사는 희미하게 들릴 만큼의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예열되는 보일러 통처럼 축제의 분위기가 그들의 평소 대화소리를 묻어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따 공작궁에 가서 모든 걸 얘기해야겠어요. 우리를 공격했다는 빌미로 파올로 갱단을 거리에서 몰아내고, 치안을 유지하자는 거죠."


"지금 가려고?"


되묻는 엘사에게, 잠시 걸음을 멈춘 안나는 고개를 들어 이젠 반신불구가 된 노인의 말대로 하프 팻말을 찾아보려 암흑 시야를 발현했다. 집집마다 내건 초롱불과 장식들로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안나는 이내 청회색의 시계 속에서, 하프 모양의 팻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엘사를 이끌었다.


"당장은 말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기껏 허락을 받고 나왔는데, 공작궁에 내일까지 갇힐 일은 없잖아요."


태연스럽게 말하는 안나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엘사는 이유 모를 소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셔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세 사람, 안나, 엘사, 그리고 반신불구의 노인뿐이었다. 그리고 안나는 사지가 멀쩡한 노인의 눈을 파내고, 낑낑대며 사지의 절반을 잘라냈다. 그녀의 붉은 연미복은 이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입은 것일까. 그녀의 옷엔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연미복의 붉음과 눅눅한 어둠이 그녀의 모습을 가려주었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짜디 짠 비린내는 이제 막 식기 시작한 피의 비린내를 말려 주었다.


"안나, 잠시만."


"잠시만요."


"멈춰주겠니?"


"조금만 더."


이내, 한적한 골목길에서 엘사는 안나의 손을 놓았다. 손에 허공이 잡히자, 안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엘사는 안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나는 뛰지 않았음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불빛 속에서도 안나의 목에 젖어내리는 땀들이 선득하게 보일 정도였다.


"안나?"


안나는 말이 없었다. 그제서야 안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리를 쪼그려 앉았고, 두 팔을 얼굴에 묻었다.


"괜찮니?"


"...괜찮다고 말하는 게 수호경의 의무겠죠."


"아니, 내가 볼 때, 너 안 괜찮아. 잠시 쉬는 게 좋겠어."


"아니예요, 제가 쉬면 축제를 못 즐기..."


"안나, 날 똑바로 봐. 자, 어서."


엘사는 안나의 팔을 풀고 억지로 가면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안나의 고개가 엘사의 눈을 향했다. 안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내장에서 나온 비린내를 맡고 구토를 참았던 자신처럼, 안나는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토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그녀가 토하고 싶은 건 죄악이었다.


"린든에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어요. 그저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갱단과 싸울 뿐이었죠. 그리고...숲속의 도적떼를 죽였을 때가 제 처음의 살인이었고요. 그 때와 기분이 비슷해요. 흥분되는데, 죄악감이 흘러 넘지는 기분. 그 기분이 이 손끝에 남아 있어요."


안나는 두 손을 들어 엘사에게 보여주었다. 양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안나의 손에서 지울 수 없는 비린내가 났다.


"그거 아세요? 아마 제가 지금껏 죽였던 사람들은 죄다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남을 해치려는 거였을 거예요. 사연 없는 사연이 없듯이 말이예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가슴 속에선 계속 죄책감이 흘러내려요."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안나."


나도 도적에게 총을 쏴버렸는데, 엘사는 뒷말을 끊어 말을 마쳤다. 쓸데없는 말은 안나의 정신에 독이 될 뿐이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 가족이 있다면 어떡하지? 그들은 망자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망자의 목숨은 제가 빼앗아 갔고. 그들은 하염없이 기다리겠죠..."
이윽고, 안나는 눈물을 흘렸다. 엘사는 그것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리라 짐작했다.


"가장 나쁜 사람은 저일지도 몰라요..."


안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엘사는 머뭇거리다, 안나의 어깨와 등을 안다시피 하며 손으로 토닥여 위로했다.


"아냐, 안나. 넌 네 할 일을 충분히 했을 뿐이야. 절대로, 네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 공주인 내가.... 아니, 네 언니로써 보증할게. 넌 절대로 나쁜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네요."


안나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안나는 엘사에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같이 쪼그려 앉았던 엘사도 같이 일어났다. 다시금 가면을 쓴 안나는 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사 또한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안나가 내미는 손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럽혀진 손은 더 이상 더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피오르드로 가 볼까?"


"그러죠. 제가 앞장설게요."


늘 그랬다시피,


이윽고 한적해진 거리 속에서 하얀 눈사람과 흰 고양이 한 마리가, 광장으로 흐르는 인파를 거슬러 하프 거리의 골동품 가게로 모습을 감췄다.







138.5


"안나, 그렇게 고민하다간 오늘 밤 축제를 즐기지 못할 거야."


"잠시만요, 음..."


코를 훌쩍이며 안나는 진열대를 살펴보며 엘사에게 어떤 물건을 선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선물, 안나는 지금껏 선물을 받아본 적 밖에 없었다. 그는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기에, 안나는 매티어스 아저씨에게도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고, 친구 사이였던 크리스토프와도 선물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기에, 어떤 것이 엘사에게 어울릴지 생각나지 않았다. 안경? 그녀는 이미 업무용 안경을 가지고 있었다. 스카프? 소박하지만 엘사는 일탈을 할 때 스카프로 목을 가리고 다니곤 했다. 그렇다면...


"아, 이거다."


안나는 고민 끝에, 엘사의 눈 속의 바다와 비슷한 비취색으로 도금된 브로치를 선택했다.


"이거 어떠세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뜻밖의 질문에, 안나는 당황했다. 함구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골랐지만, 엘사는 브로치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싶어하는 듯 했다. 안나는 브로치를 한참 동안 내려다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 맑은 색깔처럼, 언니가 언제나 청렴하길 바란다는....뜻이 담겨있...죠?"


"지금 막 지어낸 거지?"


"아으, 하지만 전 언니에 비하면 문학적 감각이 떨어지는 걸 어떡해요."


머리를 괜스레 긁적이는 안나를 보며, 엘사는 가면 속에서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모습이 네게 더 잘 어울려.'


엘사는 그런 생각을 품고서, 안나에게 작은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남색으로 이루어진, 고상해 보이는 회중시계였다.


"그 시계가... 함구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음... 이번엔 제가 물어볼 차례네요. 그 시계엔 어떤 의미가 또 숨겨져 있죠?"


"좋은 질문이야. 시계는 항상 초침이 흐르지, 태엽과 전지가 멈출 때까지. 난 언제까지나 너와의 시간이 이 시계처럼 영원하길 바란다는 의미..."


갑자기 안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엘사는 안나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자신이 실없는 소리를 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땀이 삐질삐질 흘렸지만, 공주와 외교관, 그리고 안나의 언니 되는 자로써의 체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사랑스러워 엘사 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하, 하하... 웃어서 죄송해요. 그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해서, 감동했어요."


안나가 엘사의 손에 브로치를 쥐어 주고, 엘사는 안나에게 시계를 건넸다. 서로의 선물을 교환했음을 확인한 뒤에도, 안나와, 엘사의 웃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 무슨 비밀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선물을 교환하는 거 어때요?"


"좋은 생각인데, 하지만 그 돈을 환원하는 게 더 아름답지 않겠니?"


"여기서까지 시민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언니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정말로."


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보라색 보석이 박힌 이어커프를 하나 집어들었다.


"이어커프는 왜? 그것도 선물이니?"


"선물이긴 한데, 언니 선물은 아니예요."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긴 거니? 누군데 그러니?"


"아뇨, 그것도 아니예요."


안나는 카운터에서 값을 지불하고 피오르드의 문을 나설 때까지, 선물을 받을 객체를 엘사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위기를 알려준 심장, 누디아를 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39.



몇 시간 전만 해도 쥐베르, 미라보, 그리고 멜리사가 만담을 나누던 카페에는 누군가 도미노처럼 쓰러뜨린 목각인형처럼 일자로 굳어진 시체들이 붉은 진흙탕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게 어찌..."


쥐베르는 할 말을 잃었고, 그건 멜리사와 미라보, 그리고 세 사람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온 형제단(암살단)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세유의 폭동은 인위적인 폭동이었다. 불을 일으키되, 작은 불을 점점이 일으켜 쉽게 진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엑스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엑스는 불타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아직은 멀쩡한 의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아있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보였다. 말 그대로 대화재였다.


"주시자들이 어쩌자고 이 짓을 벌이는 걸까요?"


"낸들 알겠나."


암살단원중 한 명이 미라보에게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닐세, 동지들, 자네. 자네. 그리고 자네들은 어서 시민들을 모아 부르제 호수로 가서 물을 떠 불을 진압하게. 그리고 멜리사, 자네에게 사람을 붙여줄 테니, 주시자들을 제압하게."


"하, 하지만 주시자들은 국가에서 허락한 종교 단체입니다. 그들에게 해를 입혔다간 오히려..."


"쥐베르,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우선일세. 이건 마르세유와는 달라, 우리가 만든 연극이 애들 장난이었다면, 이건 실전일세."


쥐베르의 말을 맞받아치며 미라보는 멜리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후드를 쓴 단원 세 명을 지목하고, 불길이 휘몰아치는 엑스의 거리로 뛰어들었다.


"저, 저... 미친..."


쥐베르가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미라보가 '동지들'이라고 부르는 사내들은 뿔뿔히 흩어져 시민들을 모으고 있었다. 주시자들에게 죽느니, 잿더미에 타 죽기로 한 시민들 몇이 미라보를 알아보고 그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하고, 미라보는 그들을 격려하면서 강가로 가 물을 길어오라고 지시한다. 미라보, 미라보 백작, 미라보 님. 사람들은 불길 속에서도 그를 찬양했다. 쥐베르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 불타는 엑스에 버리기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시시한 망상을. 하지만 미라보의 행동에는 거짓이 없어보였다. 그는 애써 시민들을 격려하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종국에는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쥐베르는 어느덧 꼭 쥐고 있던 서류 가방을 미라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아뇨, 백작님이 말하신 대로,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 한사람이라도 물을 떠와 이 화재를 진압하는데 힘을 부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네는 가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이봐, 쥐베르!"


미라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짧은 기간동안 친구로 지내왔던 사내는 잿더미 속에서 양동이 하나를 찾아냈고, 몸이 성한 시민들을 이끌며 부르제 호수로 달리기 시작했다.


"쥐베르..."


거구의 몸으론 쉽게 뛸 수 없다는 건 미라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잿더미가 휘몰아치는 거리로 사라진 형제단의 동지, 그리고 친구를 보면서, 거구의 사자라 불리는 사내는 정작 자신은 이 대화재에 실질적으로 한 게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불타는 엑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139.5


"사방이 지옥이야."


시민들을 한쪽 벽으로 나란히 세워 권총으로 처형하려는 주시자 셋을 순식간에 양 손에 차여진 암살검으로 해치운 멜리사가 엑스로 돌아와서 내뱉은 첫 마디였다. 주시자가 이따금 사상 검증을 위해 시민들을 데려가 '교화'시키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것도 불특정다수라서, 만약 교리를 외우고 있지 않다면 이단으로 몰려 수도원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이것조차 고위 주시자가 맡고 있는 지역이냐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서코노스는 고위 주시자의 입김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의 부장관 주시자인 리암 번은 시민들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며 지역 갱단에 맞서 싸우는, 이상적인 주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엑스와 마르세유 관구 지역의 주시자들은 고위 주시자가 이끌고 있었고, 그 사람은 멜리사가 린든의 조력자인 벨의 밀실에서 본 사람과 동일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카산드라.'


분명히, 이 대화재의 이면에는 카산드라가 있을 것이었다. 세 명의 동지들과 함께 거리를 질주하다 동일한 숫자의 주시자들과 맞서게 된 그녀는, 어깨의 작은 포켓에서 단도를 뽑아 던져 가운데에 서 있던 주시자의 목에 직격시켰고, 허리춤에서 펄션(팔시온)을 뽑아들어 그녀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주시자의 사브르를 맞받아쳤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단원 하나가 암살검을 사출해 멜리사와 맞붙던 주시자의 가슴팍에 여러 번 찔러 쓰러뜨렸다. 남은 주시자는 두 명,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칼을 버리고 도망쳤다. 타닥타닥, 매연 속에서 네 명의 암살자와 한 명의 주시자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이런 씨발!"


주시자가 사브르를 고쳐 쥐더니 이내 멜리사에게 돌진했다. 죽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찌르겠다는 뜻이었다. 멜리사는 몸을 크게 옆으로 돌려 칼날을 피한다음, 칼등으로 주시자의 등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시자가 나뒹굴며 쓰러졌다. 그가 기침을 하며 일어서려 하기도 전에, 멜리사가 그의 목덜미를 쥐고 일으켜 세웠다.


"자,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자, 잠깐... 잠깐, 자, 잠깐잠깐. 시키는 대로만 할게. 죽이진 말아줘!"


울음 섞인 앳된 목소리가 경직된 가면 속에서  울려 퍼졌다. 멜리사는 단도를 뽑아들어 주시자의 가면 밑 목에 가까이 대었다.


"이 사태를 일으킨게 너희들이지? 그리고 그 윗선엔 카산드라가 있고."


"나... 난 몰라. 난 하급 주시자라고. 정말이야. 지, 진짜 몰라!"


"그럼 뒤지는 수밖에 없지."


멜리사가 거리낌 없이 단도로 그의 목을 살짝 긋자, 그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 알았어! 제발! 카산드라님이 지시했어. 여기에 암살단이 남긴 유산의 열쇠. 그 열쇠의 흔적이 있을 거라고 지시해 우릴 파견했다고!"


"암살단이 남긴 유산의 열쇠?"


멜리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공기가 매웠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눈을 뜬 멜리사는 아예 그에게서 가면을 벗겨 자신의 얼굴에 뒤집어 썼다. 다른 단원들도 이내 쓰러진 주시자들의 가면들을 노획해 각자의 얼굴에 씌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 앞에는 붉고 짧은 머릿결을 가진 사내가 울먹이며 멱살을 잡히고 있었다.


"그, 그게 다야. 우린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주시자들의 전초기지는 어딨지? 잘 말해주면 목숨은 살려줄게."


"부 부르제 호수 하류에 위치해 있어. 이, 이제 살려주는 거지? 살려..."


이름 모를 주시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멜리사의 단도가 그의 목을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컥컥, 두 손으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애써 막으려는 주시자의 멱살에서 손을 놓은 멜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표정으로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부르제, 부르제 호수라면..."





"지금 시민들이 물을 길으러 간 곳 아닙니까?"


추천 비추천

10

고정닉 5

2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7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44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0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1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18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27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19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3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0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1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2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29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6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3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3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5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4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17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9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0 4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0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18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8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19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4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5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29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5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5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3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0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0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5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1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2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1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1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3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6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4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6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1 0
1123665 이럴 때 정신놓으면 갓반인 된다 [2] ㅇㅇ(223.62) 06.06 30 0
1123664 말라간다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4 0
1123663 단편이나 떡밥 내놔!!! ㅇㅇ(211.234) 06.06 2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