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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괴롭히는 선도부 02

ㅇㅇ(125.134) 2021.12.12 20:28:59
조회 390 추천 17 댓글 4

다행히 방학 동안 연락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안나이다. 사실 서운한 마음도 들긴 들었다. 하지만 2학기 때 제발 부려먹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2학기. 3학년은 이제 본격적인 수능 준비에 들어간다. 엘사는 그냥 이냥저냥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한다. 선도부 생활이 이제는 좋아지기까지 한다. 안나를 2학기엔 안 괴롭히기로 굳게 마음먹지만 지켜지지 않을 것 같다. 귀여운 걸 어떻게 포기해.


엘사는 휴대폰 폴더를 열어 문자를 보낸다. 방학 잘 보냈삼?


답장이 온다. 안 죽고 잘 보냈죠. 선배는요?


자신도 잘 보냈고 이제 각오하라는 문자를 남긴다.


----


고3과 달리 고2는 아직 시장판이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개떼같이 몰려들어서 시끄럽게 한다. 오랜만에 인간답게 공부 좀 해보려는 안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 딱 좋은 순간이다.


"우리 언니가 와서 다 조져야 되는데.."


"언니?"


얘가 왜 안 끼어드나 했다. 왜 사서 난리를 피우는 걸까. 솔직히 2학년들 다 정신 빠진건 맞잖아. 나처럼 정신 빠지기 직전인 위인도 있고. 엘사 선배는 편애적으로 잡을 게 아니라 싸그리 잡아야지 뭐 하고 있어.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진짜 뒤질래?"


"난 수학 진도 물어본 건데 정색은."


솔직히 이건 내가 잘못했다.



대망의 야자 시간, 엘사는 주로 야자 시간을 공략해 부려먹기 때문에 9월인 지금 더 조심해야 한다. 언제 문자가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만 개판인 분위기에서 긴장 타고 있다. 이상하다.


오후 7시 45분. 드디어 폰이 울리고 안나가 폰 폴더를 열어본다. 


나 쵸코렛 하나만. 박카스도.


이놈의 박카스는 만날 쳐먹고 있다. 안나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교실을 빠져나가 매점으로 달려가 초콜릿 하나와 박카스 하나를 산다. 마침 3학년 복도에 선생이 없기 때문에 좋았다. 이젠 이 길이 집에 가는 길 같이 설레기도 한다.... 설레긴 뭐가 설레 미친. 갖다 자치고 나니 엘사가 또 돈을 준다. 가다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란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뽀뽀 하나 값이란다. 주책은.



9월 말에 들어서니 이젠 타 학년이 3학년 복도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벌점이라고 한다. 엘사가 그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반발해 봤지만 3학년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는 선도부장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젠 정말 수능이구나 싶다, 물러설 곳이 없다. 


"후배야."


"왜요."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저한텐 좋은 소식이겠죠."


"내일부터 너네 우리 복도에 못 와."


"흐음."


엘사는 안나가 방방 뛰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심각한 얼굴을 한다. 마치 심각한 상황에 놓인 사람처럼. 간만에 둘 다 심각해진다. 


"일단 알았어요."


---


안나는 2학기 때 엘사가 자신을 훨씬 부려먹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제 다신 복도에 못 갈 생각을 하니 우울하기도 하다. 엘사가 자신만 벌점을 먹이던 학기 초만 해도 엘사가 교장보다 훨씬 더 싫었었다. 하지만 자주 보니 예쁜 얼굴이 정감이 가고 귀엽기도 했다. 점점 스며드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수능을 치고 대학에 가면 엘사의 모습을 다신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 전에 어떻게든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다 가지고 가고 싶다.


그때 컴퓨터에 알람이 울렸다.


선도여신 님의 말:나 니네집 앞


엘사의 채팅 문자였다.



엘사가 안나의 집 앞까지 와 있었다. 진심으로 아쉽나 보다.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건가.


"언니가 여긴 웬일이에요?"


"나 니네집 근처 살거든.'"


그러더니 물어본다.


"혹시... 내가 널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술 먹고 왔어요?"


"아니 진지하게."


수능 얼마 안 남은 고딩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진심인가 보다.


"넌 내가 수능을 잘 쳤으면 좋겠어?"


"잘 치면 제 기분도 좋겠죠."


"난 니 얼굴만 보면 의욕이 막 넘치고 그 뭐냐.. 좋은 대학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나는 자신도 저렇게 될 까봐 두렵다.


"이제 너한테 어떻게 부려먹어야 되나......"


엘사의 중얼거림을 들은 안나가 결심한다. 어찌됐든 두 추억 다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신도 돈을 받았으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형식의 기브 앤 테이크로,



"언니, 저 부려먹는 게 그렇게 좋아요?"


좋으면 제가 스스로 노예가 될게요.





며칠 뒤, 엘사가 야자를 끝마치고 나가는 시간이다. 안나는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며칠째 얼굴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뻥이었나 보다 생각하는데..


"언니!"


안나가 학교 앞 편의점 앞에서 박카스를 든 채 기다린다. 내가 그동안 얘를 키운 보람이 있네. 엘사는 내심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힘든데 뭐하러. 엘사가 말한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가지고 가야죠. 남은 생활 힘내세요."


안나가 손을 흔든 뒤 멀어진다.



그 이후로도 이따금씩 안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음료수와 초콜릿을 사 왔다. 집에 돌아간 뒤에는 싸이에 방명록까지 남겨준다. 엘사는 고3 생활을 그걸로 버텨내기에 충분했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청춘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3월 말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생각조차 못했다. 안나를 봐서라도 수능을 꼭 잘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수능날. 엘사는 도시락과 수험표를 챙기고는 집을 나서 수험장으로 간다. 웬일로 안나에게는 전날 문자가 없었다. 수능이라서 배려해주는 거겠지라고 생각해보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쨘! 기다렸죠?"


안나가 엘사의 등짝을 치고는 앞에 나타난다. 엘사가 물렁한 표정을 하고는 안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사람이 뭘 먹고 자라면 이렇게나 귀여울까. 살짝 눈물이 나오려고도 한다. 


"이제 언니 못 볼지도 모르잖아요."


나 사실 언니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일단 존나게 이쁘고, 카리스마 있고, 또 어쩌고... 엘사의 귀에는 첫 문장만 들려온다. 엘사는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사실 자신도 너를 많이 좋아해서 그렇게 괴롭혔다고, 졸업이 아쉽고 너랑 더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럴 여력도 없이 학교 앞으로 왔다.


"언니 수능 꼭 잘 보세요!"


그렇게 엘사 인생 최대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12월. 고3은 이제 하나 둘씩 학교에 나오지 않고, 2학년 분위기는 잠깐 좋아졌다가 어수선해지고, 학교는 곧 있을 크리스마스와 연말 준비로 바빴다. 엘사는 이제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이 늘어가자 안나는 어딘가 허전했다. 1학기까진 땀 뻘뻘 흘려가면서 엘사 반에 갔었는데, 엘사가 없으니 곧 고3이라는 사실이 짜증나기만 한다. 그리도 싫더니 좋아지니 있을 떄 잘 할걸. 아쉬움만이 남는다.


"이제 그 언니 안 나오네."


많이 서운하겠다. 라푼젤이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려 하니 엘사가 앉아 있다.


"언니!"


안나가 달려가 엘사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많이 춥죠? 수능 잘 봤어요? 이것저것 물어본다.


"..."


엘사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오랜만에 봐서 그냥 웃는 것인지, 수능을 잘 봤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졸업하면 넌 나 보고 싶을까?"


"당연히 많이 보고 싶죠. 언니도 나 보고 싶을 것 아니에요."


같은 대학 가면 선배로써 또 만날지도 모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오늘 추억을 쌓아야 한다. 겨울밤이 춥고, 눈까지 올 것 같다.


"미안해. 한 번만 나 용서해 주라."


왜요? 안나가 묻는데 갑자기 엘사가 자신을 안아주고는.... 입술에 뽀뽀한다.


안나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정말 좋아하는 거 맞았구나. 그럼 학기 초에 잡던 것도 좋아해서 그랬던 거였구나. 나는 호강에 겨운 줄 모르고 살았구나.


안나도 눈을 감고는 느낀다. 이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특별한 감정으로 바뀔 것 같다, 아니, 바뀌고 있다. 이제 자신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도도한 선배가 자신을 원하니 말이다.


----


엘산나 뽀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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