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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s Desire 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2.14 01:28:46
조회 240 추천 15 댓글 5

Queen's Desire 1/3




"제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나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라도요? 이런 자리라는게 무슨 뜻이죠?"


"고급스러운 자리요."


엘사는 안나를 위하여 정원에 가제보를 설치했다. 커다란 가제보는 유리 세공이 되었고 사이사이 담쟁이 덩굴을 감아 정원의 감성에 운치있게 어울렸다. 안에는 8인용 테이블이 있었지만 의자는 두 개뿐이다. 안나의 것은 조금 더 화려한 크로커스 금치장이 된 의자. 엘사의 자리는 평범한 목제 의자. 테이블 가운데를 차지하는 커다란 꽃병에는 엘사가 하나 하나 골라 꽃꼿이 해놓았다. 안나는 그 대접에 맞게 엘사에게 제일 풍미 깊은 커피를 대접했다. 살롱의 귀부인들에게도 쉽게 내주지 않는 중동 지역과의 무역으로 들인 커피였다. 또 어느날은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안나는 최근에 이 정원 사이에 놓인 가제보에서 엘사와 함께 담소 나누는걸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여겼다. 답답한 왕궁이나 살롱의 귀빈실에서는 사방이 막혀 숨이 막히는데. 이곳은 탁 트여서 왕궁 안이어도 왕궁 같지 않은 게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물론 엘사의 배려심이 적중한 거지만.


"걱정마요 엘사. 이건 내 호의니까."


"여왕 폐하의 은사시죠. 그래서 정말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안나는 엘사의 우아함과 나긋한 말씨에 마음이 스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어쩜 이렇게 고귀할까. 엘사는 안나와 슬쩍 눈 맞추더니 부끄러운듯 시선을 내리깔고 귀 뒤로 머리를 넘겨 커피를 마셨다. 누구처럼 츄릅거리는 소리도 없고, 뜨겁다고 인상 쓰는 일은 없다. 찻잔을 잡은 새끼손가락은 자연스럽게 펴져 있었다. 간혹 힘을 꽉 줘서 일자로 쭉 피고 어색하게 있는 사람도 있어서 말해줄까 불편해지기도 한다. 안나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이 없다는 것조차도 마음이 풀어졌다.


"엘사, 혹시 예도를 배운적이 있나요?"


"전혀요. 전 그저 그런 평민 출신의 시종인걸요. 그런 고급스러운 배움의 기회는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우아할까요."


"그저 폐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에요.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걸 시늉하는 것에 불과하죠. 그래도 나름 왕궁의 시녀라면 모름지기의 최소한의 교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나는 편안하게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가제보에 들어오는 햇살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빛이 나고 있다. 안나는 어릴 때 꿈꾸는 동화속 공주님 모습이 떠올랐다. 혹은 공주님을 도와주는 신비한 요정님. 엘사는 딱 그런 사람 같았다. 왕족으로 태어난 자기보다 천상 공주님 같거나, 아니면 인간이 아닌 요정님 같거나. 살짝 발그레한 엘사의 얼굴은 금방 표시 난다. 흰 피부에 대조되는 발그레한 홍조는 너무 도드라지게 보였다.


꿀꺽.


'저 여자, 아름답지?'


안나가 침을 삼킴과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말을 걸어오는 갈망, 혹은 욕구. 안나 안에 있는 이중적인 자아라고 해야할까. 별로 도움되지는 않는 녀석이지만 안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나는 순간 저 하얀 백설 같은 모습에 음란함을 겹쳐 욕망했다. 발그레한 홍조를 띄며 숨이 차올라 발가벗은 모습을.


"아...제가, 무슨 얼빠진 모습이라도 보였나요? 너무 부담스러워요 폐하."


엘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살짝 씰룩였다. 거기에 안나도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미안해요. 엘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보고 있었어요."


'부끄러운 말씀 마세요. 폐하 앞에서 아름다움을 논하다니. 혹시나라도 흉내내는 제가 어색한게 있었다면 양해해주세요. 폐하에게 잘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전혀 그런 일 없었어요! 흠! 크흠!"


안나는 괴고 있던 팔을 빼고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도 들켰을까 괜시리 동작이 컸다.


"국서께서는 잘 보이시지가 않네요. 정원을 관리하면서도 정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왕궁도 드나드는데 한 번 뵙기도 어려웠던거 같아요."


엘사는 안나가 어색해지지 않게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반대로 행복하게 얼굴 가득 미소짓던 안나의 표정은 국서라는 말에 심히 잿빗으로 변했다. 엘사는 자기가 뭔가 실수했음을 직감하며 서둘러야 했다.


"원래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죠. 훨씬 더 바쁘신 일들이 있으실거고. 아마도 훌륭히 외교 문제나 내정을 다지시고 계실거니까요. 물론, 여왕 폐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지만."


"이 몸을 신경쓸 필요 없어요 엘사.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졌나요?"


"죄송해요 폐하, 제가 감히 폐하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서 말실수를.....정말로 죄송해요....하, 송구해서 어쩌죠.....저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신다 해도 억울해하지 않을게요. 감히 주제넘게....!"


"그럴리가요. 엘사, 당신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겠지만...휴우, 부끄럽게도 크리스토프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편이에요. 적적한 혼인 생활이죠. 귀부인들이 가득찬 살롱이나 수 많은 접견인들 앞에서는 절대 티낼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그게 더 괴롭답니다. 나도 평범히 부부싸움이나 하면서 성질대로 할 수 있으면 어떨까해서요."


엘사는 쓴 표정의 안나를 보며 똑같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그저 안나의 손이라도 잡아주는 것이었다. 여왕의 옥체에 손을 대는 부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이 위로가 될 것 같으니까. 엘사는 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만 손을 뻗어 보았다. 아주 미세하게. 미동 없는 안나는 무언으로 답하는 것 같았다. 이 손을 잡아 위로해달라고. 엘사는 마음속으로만 들숨을 마시고 과감히 안나의 손을 맞잡았다.


"엘사?"


"심려마세요 폐하. 제가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


왼손에 닿은 엘사의 촉감. 그 외모만큼이나 또 꽃을 다룰 줄 아는 손답게 너무 부드럽고 향긋한 위로였다. 안나는 자기 손위에 얹어진 엘사의 손등에 또 다시 제 손을 겹으로 포갰다. 살짝 손가락 사이를 벌리자 엘사는 자연스럽게 그 틈새로 새며들어온다.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엘사. 손이....참 부드럽네요."


"허브와 은방울꽃 라일락등은 물론이고 시트러스한 과일들을 혼합한 오일을 바르고 있어요. 향수장이들이 향수로 만들기 위한 오일로 추출하는 과정을 다르게 가공한 것이죠. 폐하에게 언젠가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지금이 딱 적기인가봐요. 국서께서 관계가 좋지 않다면 이걸 써보시는게 어떤가요? 은은한 향이 마치 체향처럼 남아서 향수보다 훨씬 더 고혹적일거에요."


안나는 가볍게 턱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주 작은 신음도.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손이 부드러운지, 좋은 꽃향기가 나는지. 그냥 순록 침이나 당근 냄새를 더 좋아할걸요."


"그럴리가요?"


엘사는 장난스러운 찌푸림으로 맞장구쳤다.


"정말인걸요."


"불경한 말이지만 만약에라도 제가 국서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럼 폐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거에요. 낮에는 매일 꽃을 들고 노래를 불러주고, 달콤한 식사를 함께하며 거리를 거닐거에요. 국정에 바쁘고 치이면 위로를 잊지 않고 직접 탄 커피나 차를 가져다주며 입 맞출거고요. 다정하게 포옹하며 잠깐 품에 안아 쉬게 해줄수도 있겠죠. 이왕이면...가벼운 굿나잇 키스처럼요. 아, 국정중이시니 점심 키스라고 해야할까요? 이렇게 말하니까 점심 식사처럼 들리네요."


안나는 엘사가 하는 얘기들을 상상속에 그려봤다. 안나도 언젠가 늘 꿈꿨던 반려자와 함께하는 생활들. 엘사는 천진난만하게 말하면서 엉성한 말장난에 멋쩍게 웃었다. 이야기는 별거 없는 가벼운 것들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상들. 사랑하는 사이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달콤한 장난들. 그 장난어린 상상력에 안나는 조금 성인들이 좋아할 법한 소스를 살짝만 얹어보고 싶었다.


"그럼 낮이 지나고 밤에는요?"


"밤에는 서로 함께 잠들겠죠. 같은 침대 위에서 그 날 아쉬웠던 일들을 토로하면서...아렌델을 돌보느라 피곤하셨을 폐하의 머리를 넘기면서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무르익으면?"


엘사는 한참 대답하다가 머뭇거렸다. 홍조 띈 얼굴이 완전히 절반쯤 익어버린다.


"저에게 짖궂은 대답을 바라시는거군요?"


안나는 얼굴을 가릴 정도로 크게 만개하며 웃었다.


"저는 처녀에요....그 이상의 대답은 저에게 바라실 수 없을거에요. 경험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 더 바라게 만드는거 모르시나요?"


"제가 먼저 폐하를 아는척 송구한 죄를 지었으니 이걸로 용서해주셨으면 해요. 충분히 벌이 된거 같네요."


엘사는 연신 손등을 좌우 뺨에 번갈아가며 열기를 식혔다. 안나는 부끄러워 하는 요정님의 모습에 마음이 더 꿈틀거렸다. 가슴 요동침이 빨라지고 호흡이 조금 짧아져 있다. 자연히 눈은 엘사의 얼굴을 따라 내려가며 살짝 헐렁이는 시녀복의 가슴에 꼿힌다. 바람지면 허리에 묶은 매듭끈 덕에 날리지는 않아도 나풀대며 흔들렸고 그 틈새에 속살이 어른댔다. 펑퍼짐하지 않게 실용적으로 짧은 치마폭 사이의 다리도 그럴까? 안나는 잠깐 사이에 엘사를 시간해가며 욕망을 태우고 있었다.


"폐하."


"아, 게르다."


"담소중에 죄송하지만 잠깐 가보셔야 할거 같습니다. 국서께서 볼 일이 있으시다고 하군요."


분위기가 확 깨는 말이었다. 엘사는 게르다가 오자 공손히 고개를 모으고 어느새 안나에게서 손을 떼고 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알겠어요."


"찻잔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요. 오늘도 즐거웠어요 엘사."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겸손한 자세로 엘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나가 자리에 뜨기 전에 먼저 일어나 테이블 옆에 물러나 있던 엘사는 황망스럽게 무릎 꿇어 더욱이 시종된 자세로 고개 숙여 답했다.


"저야말로 너무 큰 은사를 받고 있어요 폐하. 또 다음에도 미소지시도록 노력할게요."


"크흠."


게르다는 짐짓 엘사가 조금 불편하다는 눈치였다. 사실 엘사는 지금 성안의 모든 귀족들에게는 알게모르게 미움을 사는 중이었으니까. 단지 여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질투였지만. 그럼에도 엘사는 당차게 그 불편함에 주눅들지 않았다. 안나가 그런것처럼 엘사도 역시 안나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네, 폐하, 폐하께서도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랄게요. 분명 그럴거에요."


엘사는 오늘의 작별 인사로 그렇게 전했다. 그 말에 안나는 발이 우뚝 멈춰버렸다. 좋은 시간이라니. 좋은 시간은 따로 있는걸. 분명 그럴거라는 마지막 덧붙인 말이 안나를 복잡하게 했다. 엘사는 진심으로 크리스토프와의 회복을 기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괜한 의도일지. 요즘은 만성적으로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내면의 갈망과 싸우는 통에 모든게 의심스럽게 들리고는 한다.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았고 말에 담겨 넘실대는 어감, 채도, 색상, 음색, 모든 면에서 다가오는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했다.


"폐하?"


너무 시간이 끌렸다. "고마워 엘사." 안나는 서둘러 엘사에게 답하고 걸음을 뗐다. 분명 그럴거야, 그래 분명....잘될 수 있어.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맞는 대의와 처신이니까. 그래야만 한다. 여왕도 뭣도 아니라고 해도 단지 언젠가는 짧게라도 사랑했던 사이로서. 정원을 벗어날수록 안나는 무언가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변해가는 주변 풍경과 눈에 차는 궁전 안뜰. 멀리에 크리스토프가 서있는게 어른대며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몸이 이토록 무거웠던가. 갑자기 피곤해지기도 하는 기분이다. 그리고....마음의 틈새가 벌어져 균열이 나면 반드시 또 갈망이 차오른다.


'이미 틀렸다는거 알잖아 안나.'


갈망은 영리해서 형체를 바꾸고 있었다. 안나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라 엘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영악한 놈! 안나는 눈에 환상처럼 보이는 갈망을 째려보며 기를 펼쳤다.


'크리스토프가 준비한 것과 위로의 말이 엘사가 네게 해준 만큼 따스하게 마음을 녹여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이 곧 너의 생각이지.'


'입 닥쳐.'


'아쉽게도 입을 막을 수가 없어. 왜냐면 이건 너의 생각이니까.'


손이 떨려온다. 안나는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몰려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 그가 보이네. 멍청하게 차려입은 꼴 보라지. 과연 저 정복을 입고 이번에는 얼마나 버틸까? 그와 파혼해. 잠깐 명예롭지는 못 하겠지. 하지만 그깟 명예와 명분이 너의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과 비교한다면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어.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지.'


'엘사의 모습을 하고서 개소리하지마!'


'엘사의 모습을 하게 떠올리지마. 그녀를 원하고 있지? 아까 네가 하던 음흉한 생각들도 전부 알고 있어. 엘사 같은 여인이라면.....하아, 생각만으로도 벅찬걸.'


"폐하? 괜찮으신가요?"


게르다는 정원을 벗어나자 급격히 안색이 구겨지는 안나를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 된 물음은 지금 당장 안나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관자놀이가 찢어질듯 악! 하고 울려서 잠깐 주춤했다.


"폐하!"


"괜찮아요. 신경쓰지마세요."


'크리스토프가 죽는다면 명예도 지키면서 너도 편해질탠데. 그가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왕궁을 떠나버렸으면. 산속에서 실종된다면 어때? 솔직하게 말해볼까? 한 겨울에 얼음장사를 하던 덜떨어진 놈이야. 원래 하던 일이나 하라지. 곧 겨울이 오면 얼음을 잘라다가 산너머 이웃나라에 보내버려. 돌아오는 길에는 아쉽게도 사고가 나고 말거야. 좋은 계획이야 만들면 되지.'


'그만해 제발....나는 바라지 않아!'


'그가 없다면 엘사를 마음껏 안아 침대에 눕혀놓을탠데.'


"망할, 그만!"


"여왕 폐하!"


안나는 더는 볼 수 없어 손을 휘둘러 갈망의 환상을 갈기 갈기 찢어버렸다. 옆에 있던 게르다에게 손찌검이 될 뻔해서 게르다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안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이 주륵 흐르고 있었다. 안나는 잠깐 사이 꿈을 꾼 사람처럼 동공이 커져 있었고 격앙되게 고조되어 각성해 있는 상태였다.


"안나?"


왕궁 안뜰에 들기 전에 크리스토프가 달려와 안나를 부축했다.


'그를 죽여버려, 마음부터 죽이는 것도 방법이야. 당신 때문에 모든게 힘들다고 저주를 퍼부어!'


"안나, 괜찮은거 맞아요? 게르다! 안나가 왜 이러는거죠?"


"저, 저도 모르겠어요. 여왕 폐하!"


미쳐버릴 것만 같아.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너무 혼란스럽게 웅웅대며 울렸다. 소란은 점점 커져가서 먼 발치에 있던 다른 왕궁의 일꾼들까지도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게르다는 그들중에 몇 명을 추려서 당장 의원을 데려오라고 명하고 일부에게는 따뜻한 약차와 담요, 물수건을 준비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꾼들은 허둥대면서도 명령을 받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국서께서도 거들어주세요. 폐하를 부축해서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 그럴게요. 안나? 팔을 내게 걸쳐요."


"됐어요. 나는 괜찮으니까..."


안나는 머리만 조금 지끈거릴 뿐이었다. 서서히 또 괜찮아지고 있는 와중에 벌어진 유난들만 거슬릴뿐.


"카이, 카이는 어디있죠!"


"집사장님은 지금 성 외곽에 계십니다."


"당장 카이도 데려와요! 폐하께서 편찮으셔 쓰러지셨다고! "


"됐어요 게르다, 크리스토프. 그럴 필요 없으니까 이제 그만...."


"안나, 심각해 보여요. 열이라도 있는건 아닌가요?"


안나는 억지로 부축하려던 두 사람을 밀어냈다. 게르다가 건넨 손수건으로 이마에 조금 맺힌 식은땀만 훔쳐내고 말았다. 몸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정말로 맹세컨데 안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어린 시절 공주때처럼 성 전체를 쌩쌩히 뛰어다닐 수 있었다. 다만 마음의 지병을 앓고 있다는건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뿐이고 그게 답답해 죽을 것만 같은 것이지.


"엘사를 데려와요."


"폐하?"


'엘사요? 그게 누구죠?"


"그 아이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여왕 폐하.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왕명이에요. 엘사를 관저로 데려와요. 그리고 크리스토프,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 마음은 이미 충분히 알았으니까."


안나는 끝까지 부축하겠다고 나서는 게르다도 만류하고 안뜰을 돌아 성의 입구로 걸었다.


"폐하! 여왕 폐하! 어디계시죠?"


"그만. 난 괜찮아요."


뒤늦게 도개교를 지나쳐 뚱뚱한 몸으로도 단번에 날아 달려오는 카이에게도 손을 내밀어 멈춰세웠다. 게르다가 명했던대로 약차와 담요와 물수건을 챙겨온 일꾼들도 성문 입구를 지나치다가 안나와 마주치며 옆으로 물러섰다. 수 많은 사람들을 물러내고 안나는 성의 가운데 카펫 위를 걸었다. 케이프가 쓸려 스윽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함이 가득했다. 대부분의 일꾼들은 어린 여왕께서 심히 편찮으심에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것에 감명 받아 경외를 보내고 있었다. 허나 그들중 누가 알것인가.


안나는 죽은 사람처럼 생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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