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꿰인 썰 7(下)
8.
두 사람은 금방 차로 돌아왔어. 내내 안나가 엘사를 에스코트 했지. 그럼 이번 운행도 잘 부탁해, 스벤-. 이라 말하던 안나는 아차 하며 제 손에 무언가 쥐어줬어. 캔디바야. 주머니에서 쥐여진 만큼 내민 거였어. 대강 거절하려다가 안나의 손에서 빛나는 킷캣에 엘사는 받아들고 말아. 킷캣만 아니었으면 거절했을거야. 자꾸 이 사람한테 신세지는 거 같아서 불편해.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가. 거절하려고 했던 마음과는 달리 몸은 이미 봉지를 뜯고 입에 집어넣고 있어. 제가 이걸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안나에 대한 호감이 아주 조금 올라. 달달한 게 너무 좋아.
엘사가 오물거리며 조금씩 먹는 모습이 안나의 눈에는 귀여워보여. 귀여운 표정에 안나가 엘사를 끌어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운전에 집중해.
“어떻게 허락 받았어요?”
“고모님께 말씀 드린 것처럼 했어요.”
가족얘기에 맥이 풀린 듯 그저 고개만을 끄덕이는 엘사야.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지.
어느 순간 엘사는 눈을 감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엘사가 쉬길 바라면서 아무말 없이 천천히 운전하는 안나지. 생각보다 엘사와 멜리사가 사는 집까지 가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 차가 멈춰서고 도착했다고 말하려다 엘사가 잠든 걸 알아챈 안나는 시동을 끄고 벨트를 풀어준 채로 기다려. 저도 피곤했지만 엘사 얼굴 구경하는 걸로 피로를 푼다 치고 계속 엘사를 살폈지. 흐트러진 앞머리를 살살 정리해주고 다른 잔머리는 귀에 꽂아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 안아서 집 안 침대에 내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집 번호도 모르고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 상상이었지만, 힘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안나야.
아직은 제가 불편한가봐. 벨트를 풀었음에도 제 쪽이 아닌 문 쪽으로 기대는 엘사야. 날이 아직은 추워서 제 쪽이 더 따뜻할텐데. 자켓을 벗어 덮어줘. 날이 아직 싸늘한 게 좀 춥지만 제가 추운 게 낫지. 그리고 언젠가는 저를 좀 더 편하게 생각해주는 날이 오지않을까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해주길 바라지 않아, 그건 욕심이란 걸 알거든. 감히 열성 가슴에 우성을 품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하고 스스로 손사래를 쳐. 그저, 일 년 뒤에는 친구라도 좋으니까 좋은 관계로 남길 바라. 우성이고 집안도 좋은 엘사는 곧 재혼하겠지만. 당신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으면 내가 그렇게 해줄거야. 안나는 저도 모르게 쓰게 웃어.
아이가 저처럼 열성이면 안 되는데, 열성이라면 많은 상처를 받을거야. 우성인줄 알고 십오년을 살았지만 제가 열성인줄 알게 된 날부터 시작된 차별을 기억하기에, 이 세상이 열성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 지 잘 아는 안나야. 그래서 열성이라면 두 말 없이 제가 아이를 키울 생각이지. 아이가 우성인데 엘사가 데려가고 싶어하는 기색이면 보낼까 해. 조금이라도 아이를 불편해하면 제가 기를 생각이고.
‘애아빠’가 된 이후로 무척 가족 생각이 많이 나.
사람들은 귀찮은 걸 싫어해. 고전의 성, 남자와 여자에서 알파와 오메가로 세분화되었음에도 굳이 새로운 호칭을 만들지 않았어. 그래서 알파-오메가 커플도 공식적으로는 보통 남편과 아내의 표현을 빌어쓰긴 했지. 알파가 임신시키고 오메가가 아이를 품는 게 고전적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니까. 두 사람이 편한대로 정하는 것도 요새는 일반적이고. 저와 엘사는 천천히 정해가면 되겠다 싶어.
아이를 가졌다고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각났던 가족, 이제는 법적으로만 아렌델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하는 관계이지만 자꾸 생각이 나. 만나봤자 좋은 일 없을거면서.
아. 엘사가 부모님을 만나자고 자꾸 얘기하면 어떻게 하지, 안나는 저도 모르게 지갑에서 루헤인 가와 찍은 사진 뒤로 숨겨진 낡은 사진 하나를 꺼내. 저도 아렌델이던 시절 찍었던 사진이야.
그 손바닥만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안나야. 여섯 가족이 행복한 모습. 물론 제 모습은 붉은색 싸인펜으로 찍찍 그어져있지만, 아마 루이스가 그랬겠지, 제게 이걸 준 사람도 루이스니까. 안나는 사진 한 쪽에 적힌 루이스 아렌델이란 서명을 손으로 쓸어봐. 떠나기 전 날 경멸어린 표정으로 준 것이지만 안나는 감사하며 늘 갖고 다녀.
사진에는, 황금빛 색깔의 머리와 황금색 눈을 가진 아버... 아니, 다니엘 아렌델과 칠흑같던 머리와 눈을 가진 크리스틴 아렌델. 외양은 아버지와 똑닮았지만 눈은 갈색인 큰 오빠 샤이너 아렌델, 머리색은 어머니를 눈색깔은 아버지를 닮은 작은 오빠 루이스 아렌델과 펜으로 지워진 저. 그리고 저와 닮은 일란성 쌍둥이 동생, 이나 아렌델이 행복하게 웃고 있지.
참 행복했었어.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우성이라 생각하고 데려온 제가 열성이라는 게 밝혀지고 실망하던 부모님의 표정이, 원래부터 저를 마뜩찮아하던 작은오빠 루이스의 손찌검이 늘던 게, 마침 큰오빠는 대학을 가버려 그걸 몰랐던, 부모님이 알아채면 이나를 때리겠다던 루이스의 협박에 안나는 저항하지 않았어.
이나를 못 본지도 너무 오래되었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해보지만 루이스의 그 황금빛시선이 사라지지 않아. 사실 처음부터 저항할 생각은 없었어. 루이스에게 맞을 때 보았거든. 황금빛깔 눈동자가 자신을 외면하는 걸.
한 번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보다 사진을 집어넣어. 가족들 생각만 하면 감상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싫지만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돌아갈 수 없어 슬프지만 그때는 행복했으니까, 어쨌든 천애고아인 저를, 제 동생을 거둬준 부모님이니까.
아마 엘사가 끝끝내 부모님을 만나야겠다고 한다면 어쩔까. 제 부모님을 직접 만나게 하는 건 위험이 너무 커. 모두에게. 파비안과 겔다라면 모를까.
그래, 단순히 파비안 루헤인과 겔다 루헤인만 만난다면 참 좋을텐데. 뒷감당이 어려워서가 문제지. 파비안과 겔다를 파비안 아렌델과 겔다 아렌델로 속여서 만나게 한다고 해. 그렇게 상견례까지 넘긴다고 치자.
이 쪽도 문제는 많아. 아주 어렸을 때, 아렌델이었을 때, 루헤인 가를 방문했다 돌아오던 길, 제 부모님이 경멸조로 루헤인네 가족들은 새끼 치는 게 꼭 토끼 같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식구야. 결혼식날은 어떻게든 다 참석하려고 할텐데 그 많은 식구들이 ‘아렌델’인 척 연기하는 게 가능은 하련지.
늘어나는 고민에 안나느 편두통도 커져가. 지금처럼. 머리가 아파. 이나가 보내준 약을 물도 없이 씹어삼켜. 쓴맛이 입가에 가득퍼지지만 제 마음만 할까. 아파서 그런가 마음이 약해지나봐. 제 옆에 있는 사람이 사근사근 ‘안나-’ 하며 이름을 불러주면서 많이 아프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어.
아파? 네가 아파? 아프다고? 내 귀가 잘 못 됐나?
나를 잊었구나. 네가. 너로 인해 내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행복하려 해?
미안, 샤이너. 혼자 중얼거리다 안나는 약을 하나 더 씹어 삼켜.
다른 사람 잡아먹고 살아있는 제가 바래선 안 되는, 욕심.
크리스가 담배를 피울 때 내뱉는 연기처럼 크게 한숨을 몰아내쉬어. 제 생각에 너무 취해있어서 몰랐나, 엘사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저를 보고 있어.
겨우 스물 네 살-, 그래 난 정말로 어려. 가진 것도 없고 열성이지.
그런 나로 인해 상처받을 아이와 엘사를 위해서 나는 강해져야 해.
혀를 꾹꾹 씹으며 갑자기 피어난 감정들을 죽이곤 엘사를 보며 웃는 안나야.
“깼어요?”
“... 도착했으면 깨우지...”
“많이 피곤해 보여서요.”
어느 샌가 조수석 문을 열어 에스코트 하고 있는 안나야. 엘사가 살짝 눈썹을 들어 안나를 바라봐. 들어가기 전 보다 흐트러져있는 옷차림. 피곤해보이는 눈. 저렇게 보냈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주차 안 해요?”
“... 네?”
“언니가 들어와서 살라잖아요. 오늘 들어오나 내일 들어오나... 오늘 안 자고 가도 되니까, 좀 쉬었다가 가요.”
“그럴까요...?”
엘사가 올라가면 차에서 조금 자야겠다고 생각한 안나라 엘사의 제안이 반가워.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우리 가족들에게 뺨까지 맞을 필요는 없었는데... 눈 보니까 멜리사도 그냥 넘어간 거 같지는 않고... 뭐 바라는 거 있어요?”
먼저 올라가기 전, 차갑게 말하지만 조금은 누그러든 엘사가 안나에게 은근하게 물어봐. 바라는 거 없다고 부정하려던 안나가 침묵을 지켜.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엘사가 의아해하며 안나를 바라보지.그 동안의 일들은 다 밑밥이었나. 잠시 거두었던 의심을 불러들이려는데 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해.
“저기... 엘사.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역시나. 잠시 있었던 감동도 사라진 채 혀를 차려는데 이어지는 목소리.
“아기한테 인사해봐도 될까요?”
엘사는 그제야 제가 그때까지도 임신했다는 말은 해놓고선 안나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 임신했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전해서 일까. 더 캐묻지도 않고 안나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걸 인정했어. 그저 병원을 다녀왔다는 자신의 말과 테스터기 하나만으로. 그동안 제가 준비가 되길 기다렸던걸까. 마주한 눈을 보니 기다렸던 거 같아.
사실 안나는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말을 붙여보고 싶었어. 하지만 심란해 하는 엘사의 모습을 보며 차마 그런 말을 전할 수 없었지. 이젠 같이 살게 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해서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간거였어.
“주차하고 올라와요.”
일단은 초음파사진을 쥐어주고 올라가는 엘사야.
안나가 곧 올라오고 자리에 앉아. 두 사람 다 이 상황이 갑작스럽고 어색해. 엘사는 쇼파에 앉고 안나는 바닥에 내려가. 등을 뒤로 밀착한 채로 엘사는 안나를 내려다봐. 긴장이 되었거든.
하지만 아직 부르지 않은 배에 안나는 어디에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그런 안나를 보다가 엘사는 제 아랫배에 손을 올려주지. 옷 위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안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소중하다는 듯이 쓰다듬어봐. 엘사는 어쩐지 민망해 고개를 돌려.아직 자신도 태동을 느낄 시기가 아니기에 손을 얹은 안나도 뭔가를 느끼지 않을텐데... 꼭 무언가 느껴진다는 표정이야.
“안녕, 아가야.”
부드럽게 집안을 울리는 음성.
“부족한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
“우리는... 음. 우리 맞을거야.”
우리라는 말에 엘사가 안나를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듯 싱긋 웃더니 말은 이어져.
“너를 축복해.”
“내가, 여기 엘사 엄마랑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안나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그 손길을 느끼던 엘사에게 묘한 감각이 닿아. 새삼스럽게 자신의 안에 있는 아이가 느껴지고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느껴져.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내 뜻을 따라줘서 정말 고마워요.”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나고, 어느 새 배에서 손을 떼고 제 손을 잡아오며 눈을 맞추는 안나야. 늘 올곧은 눈빛을 유지하던 눈이었는데 오늘은 무언가 달라. 약간의 환희. 감사.
알 수 없게 빛나는 그 눈을 보면서 엘사는 그제서야 알아채. 안나의 눈이 녹색이 아니라는 걸. 그보다 청색 아니 그보다 녹색인가? 엘사는 뚫어져라 안나를 내려다 봐.
“왜 그렇게 빤히... 아. 엘사는 모르는구나. 얘기가 늦었네요. 별로 티 안나서 나도 깜빡하고 있었나봐요. 눈 색 조금... 이상하죠? 홍채 이색증이래요.”
“검사 받았는데 색깔이 이렇게 이상한 건 아이한테 유전될 수 있다는데 시력 저하나 그런 건 없을거래요. 이러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하지만 엘사가 안나를 빤히 들여다 본 건 멀리서 볼땐 흐릿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무시할 수 없는 흉터 때문이야. 안나의 얼굴에, 콧날에서 미간 사이에 찍힌 흉터가 있어. 저도 모르게 손이 닿아. 손가락으로 쓸어보지. 중간에 말을 멈춘 안나가 엘사의 손을 잡기 전까지 엘사도 제가 무엇을 하는 지 몰랐어. 하지만 안나에게서 비친, 순간적으로 지나간 표정에 놀라 손을 떼지 못하고 그저 안나만 바라봐. 안나를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건 슬픔과 고통에 가까운 표정이었어. 안나는 최대한 감춘다고 감춰보지만 순간적으로 흘려보낸 표정을 알기에 스스로 놀라 흠칫했지. 그렇게 두 사람이 아주 잠시 멈췄어. 먼저 정신을 차린 안나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한 번 웃어주곤 천천히 엘사의 손을 내려줘.
“미,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놀랐을뿐이예요.”
“그냥... 어릴 때 다칠 일이 있었어요. 개구쟁이였거든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긁으며 말하는 안나야. 약간 시선을 피한 채로.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에 아까전 보다 더 어색해진 두 사람이야. 또 다시 한참을 제 배를 들여다 보다가 안나가 눈을 떼고 엘사의 손을 잡아와. 다시 눈이 마주쳐. 엘사에게 아까와는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앞으로 힘든 일이 없다고는 못하겠어요. 그게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아이... 아니, 나 때문일거예요.”
말조차도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 사람.
“그럴 때마다 당신도 아이도 죄가 없으니, 나를 원망해주세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줄래요?”
아이들처럼 새끼 손가락을 걸어오는 안나에게 저도 모르게 맞춰 손가락 약속을 해. 이젠 초록기가 없는 파란 눈을 마주하려는데 어쩐지 제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기분이 느껴져. 엘사의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해. 안나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엘사는 멍하게 안나만을 바라봤어.
“그런데, 엘사. 난 아빠예요. 엄마예요?”
- 원래 겅쥬님 과거는 후반부 스토리라인이었는데 쪼매 떼옴... ㅎ
- 다른 파트랑은 다르게 7편은 다 합치면 a4 13장... 짤리는데 통합을 과연 할 수 있을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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