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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엘사랑 바이올리니스트 안나랑 눈 맞았음 좋겠다(完)

ㅇㅇ(58.142) 2018.05.19 00:49:44
조회 1043 추천 27 댓글 8

지휘자 엘사랑 바이올리니스트 안나랑 눈 맞았음 좋겠다(상)

지휘자 엘사랑 바이올리니스트 안나랑 눈 맞았음 좋겠다(중)

지휘자 엘사랑 바이올리니스트 안나랑 눈 맞았음 좋겠다(하)







짙은 어둠이 내린 창밖은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흰 눈으로 조금씩 밝혀지고 있었어. 어슴프레한 침실은 넓은 침대의 절반은 텅 비어있는 채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안나의 새근대는 숨소리로만 가득 차있겠지. 최대한 순죽인 발소리로 살금살금, 반쯤 열린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사는 이미 코트까지 완전히 갖춰입은 상태야. 침대 끝에 살며시 앉으니, 등을 돌리고 누워 잠든 안나의 귀여운 뒷모습이 한 눈에 들어올거야. 주근깨 가득한 어깨에 살며시 입술을 갖다댄 다음, 행여 한기가 들까 싶은 염려에 이불을 목끝까지 덮어 잘 여며줘. 곤히 잠든 그 얼굴을 보니 절로 엷은 미소가 지어져, 그 뺨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보다가 다시 그 위에 살짝 입을 맞추겠지. 

"....메리 크리스마스, 안나."

아쉬운 듯 잠든 뒷모습을 잠시간 그렇게 바라보다가 손목시계를 한 번 바라보더니, 마침내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사라질거야.


1년 만에 돌아온 고향집은 지루할 정도로 그대로이지. 가족들, 친구들과도 간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자꾸 마음 속 한 귀퉁이는 누군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걸 느끼는 엘사일 거야. 함께 밤을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로부터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지만 안나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어. 내심 서운한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안나도 나름의 연말을 보내느라 바쁜 시간를 보내고 있겠지, 라고 애써 마음을 달랬지. 그리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 새해를 하루 앞둔 31일 밤. 부모님은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냈으니 새해는 커플끼리 맞겠다며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떠났고, 망할 언니 나부랭이도 애인이랑 보낸다고 집을 떠나버려 혼자 남겨진 엘사는 넓디 넓은 집에 고양이와 개 두 마리들과 덩그러니 남겨져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신세야. 창 밖으론 하루 종일 그치지도 않는 눈이 소록소록 쌓여가고만 있겠지. 친구들한테 연락이나 해볼까, 싶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주소록을 내려보지만 죄 연말연시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함께 할 제 짝들이 있는 녀석들 뿐이야. 스크롤을 쭉 내리던 손이 주소록의 마지막 페이지에 걸려 할 일을 잃은 그 순간, 갑자기 진동이 울리면서 전화가 걸려왔음을 알리는 창이 뜰거야. 저장된 번호도, 또 기억하는 번호도 아니면 대개는 전화를 받지 않지만, 이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직감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신 버튼을 눌러보겠지. 

"여, 여보세요? 엘사!"
"....안나? 당신이에요?"
"네, 맞아요! 와!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요!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지금 공중전화라서,"
"공중전화? 휴대폰은 어쩌고 공중전화예요?"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저기 엘사, 혹시....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무슨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게......나 좀, 데리러 올 수 있어요?"
"뭐....뭐라구요?" 

지금 베를린 중앙역이에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일단 공항에서 여기로 바로 오긴 했는데....휴대폰은 꺼지고, 눈은 오고, 길도 잘 몰라서.....계속 이어지는 안나의 말을 다 들을 새도 없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엘사가, 곧바로 코트와 차키를 찾아 들고 현관으로 다급히 달려갔어. 

"거기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이 무모한 여자가 정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관문을 박차고 급하게 코트를 쑤셔 입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엘사의 심장은 벅차게 뛰어오르기 시작해. 


늦은 시간까지도 역은 사람들로 북적였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안나는 역 구석에서 제 캐리어 위에 걸터 앉아있었지.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구경하면서, 과연 엘사가 자신을 어떻게 맞아줄지를 생각해봤어. 날 보고 반가워할까? 연락도 않고 무작정 왔다고 화를 내진 않을까? 아니면, 혹시 독일에 두고 온 애인이라도 있는 건 아니었을까? 날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살을 섞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 밤이 어느 정도 충동적이긴 했으니까. 분위기에 취해서 그만...실수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난 진심이었는데.... 자신을 깨우지도 않고, 인사도 없이 다음 날 아침 사라진 뒤로 엘사에게선 어떤 연락도 없었으니까. 여기서 꼼짝도 않고 있으라는 엘사와의 두 시간 전, 마지막 통화로부터 엘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자꾸만 불쑥 고개를 드는 불안감에 안나는 자꾸만 제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었지. 제 앞을 지나쳐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나의 두 눈 앞에, 하얀 눈이 덕지덕지 붙은 두 신발이 우뚝 멈춰서. 불현듯 고개를 들어올리자, 머리부터 외투에까지 채 녹지도, 털어내지도 않은 눈으로 뒤덮은 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서 있어. 그제야 벌떡, 일어나 눈을 마주하는 안나겠지. 

"여긴 어떻게 온 거에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 그간 연락도 없음에 야속해, 만나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니, 왜 반가움이 더 큰 걸까. 그리고, 왜 이리 떨리는 걸까. 

"...당신이 보고싶어서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워, 하고 싶었던 말을 내어주고 다시 발치로 눈을 내리깐 안나의 입술에 갑자기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발간 한 쪽 뺨을 감싸쥐는 조금은 서늘한 손, 허리께를 쥐어 꼭 끌어안는 단단한 팔, 하나하나 느껴지는 마지막 감각의 끝에는 짙게 입을 맞추고 있는 엘사의 부드러운 입술이 있음을 안나는 깨달을거야. 그제서야 엘사의 목을 꼭 껴안고, 제 끝없던 불안을 단번에 씻어내려주는 그 입맞춤에 몸을 맡기겠지.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듯 여운을 남기며 떨어져나오는 입술의 끝에서야 엷은 미소가 지어지는 엘사일거야. 덩달아 씨익 웃어보이는 안나의 한 손을 잡아 제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나의 캐리어를 잡고 눈 내리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겠지. 

"미리 연락이라도 주지. 내가 베를린에 없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엥?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아니었어요?"
"그러는 당신은 가족들은 내팽개치고요?"
"음, 그건, 그러니까...."
"내가 가족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은 시도도 말아요."
"왜요, 우린 이미 밤도 같이 보냈....그, 그리고 나 좋아한다면서요!"
"좋아한다고 했지, 가족이 되어 달라곤 안했어요..."
"그래서 내가 온 게 싫어요?"
".....싫다는 말도 한 적 없어요."

가족이 되어 달라곤 하지 않았다는 엘사의 말엔, 훗날 '아직'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덧붙여야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브란덴브루크 문 앞에서 사람들과 새해 카운트도 하고, 입맞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이겠지. 그리고 남은 2주간의 휴가를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께 보낼거야.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엘사 바우만과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브라운, 스페인서 밀회 포착....세기의 협연이 맺어준 세기의 연인>

"....밀회는 무슨 밀회야. 다 보라고 아주 대놓고 길거리에서 애정행각들이구먼."

두 사람이 거리에서 손 잡고 키스하고 다니는 사진과 열애 기사로 인터넷 뉴스가 도배된 어느 아침, 모닝 커피와 함께 스마트폰을 열어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벨의 알림창에 단원들이 앞다투어 보낸 메세지가 쏟아져 들어오겠지. 사실 단원들은 첫 연습 때 둘이 티격대는 거 보고, 둘이 언제 사귈지 내기를 걸었다고. 

그리고 [2주 정도 돌아다니다 올 거예요.] 라고 문자 메세지로만 가족들에게 통보했던 엘사는 결국 동행이 누군지 언론에 다 까발려지면서 본의 아니게 안나를 가족들에게 조기(?) 소개까지 해버리게 됐다고.



쨘! 관짝 또 뜯었다!
못질을 왜케 세게 해놨대 뜯기도 힘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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