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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03

번밀레(211.206) 2019.12.02 00: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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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위즐턴 씨가 도착하기로 한 열두 시 반이 되기 전에야 비로소 자기가 머리 잘린 닭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안나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탐폰을 치우고 올라프나 크리스토프를 부르지 않고도 프로그램 세 개 다루는 법을 알아냈는데도 시간이 남아 위즐턴 사의 서류를 읽어봤다.


듀크 위즐턴은 위즐턴 주식회사의 소유주로, 이 회사는 북미와 유럽에 작은 규모로 호텔을 운영했다. 이 호텔의 고객은 휴가를 즐기는 동안 못 사는 사람들 같은 골칫거리에 신경 끄고 싶은 오만덩어리 부자들이었다. 실크로 된 시트, 리무진 서비스, 방마다 있는 욕조에, 개인 메이드까지. 안나는 하루 숙박비가 얼마인지를 읽다가 점심으로 먹던 샌드위치에 질식할 뻔했다. 일박만 해도 이 정도라니.


위즐턴 사의 실적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하냐고? 아니. 하여튼 아렌델 사와 위즐턴 사는 우호적 합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렌델 사는 위즐턴 사를 흡수하여 자사의 고급 호텔 체인의 여행 사업에 더 집중하려 하고 있다. 타국 문화에 더욱 녹아들고,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여행 패키지를 제공한다거나, 뭐, 그런 거. 현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보다 말이다. 오늘은 위즐턴 사의 초기 제안에 대한 윤곽을 잡고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모이는 첫 회의였다.


안나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준비를 위해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회의실 책상은 마흔 명이 앉아도 거뜬해보였고 바퀴달린 가죽의자는 등받이가 거대했다. 한 쪽 벽은 전체가 선팅된 유리였고,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보였다. 다른 한 쪽 벽은 전체가 스크린이었다.


회의실을 보아하니 여기서 현실 모노폴리를 할 게 아니라 비밀 안보 회의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안나는 스크린과 가까운 쪽에 앉아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해야 할 잡것들” 목록에 따르면, 문서를 스크린에 띄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그걸 넘기는 게 안나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안나는 노트북을 만지며 너무 쉽다고 생각했다. 안나가 이해하는 기술을 써먹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안나는 외계 행성에라도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나는 물 한 주전자를 가져와 커피를 내렸다. 스티로폼 컵 대신에 버들 무늬가 들어간 고급 사기잔이 있었다. 안나는 잔을 다섯 개 들고 와 테이블 한 쪽 끝에 늘어놓았다. 작은 회의라 자리마다 일일이 놓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프런트 데스크에서 온 누군가가 듀크 위즐턴과 두 비서를 회의실로 안내했을 때, 안나는 설탕과 크림을 꺼내던 참이었다.


위즐턴을 처음 보고 안나는 인간 요크셔 테리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염이 온 입을 다 가리고 있었으니. 위즐턴은 몸집은 작은데 코는 크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있었다. 안경이 얼굴을 옹졸해 보이게 하는 통에 코는 더욱 커보였다.


안나는 위즐턴이 요크셔 테리어처럼 짖어도 놀랄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안나는 악수를 청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저는 아렌델 씨의 비서인 안나 서머즈예요.” 안나는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 행동 자체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안나는 심지어 주말 동안 일을 준비하면서 어떤 뉴스도 읽거나 보지 않았다.


“좋은 오후군요!” 위즐턴은 내민 손을 덥석 잡고는 격렬하게 흔들어대며 안나의 손가락을 찌그러뜨렸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아렌델 씨 여기 계시나요?” 위즐턴은 엘사가 커튼 뒤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사무실에서 아직 업무 보고 계십니다. 곧 도착하실 거예요.”


안나는 이게 거짓이 아니길 빌었다. 아침 이후로 엘사를 보지 못했고, 점심시간에도 엘사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으니. 그래도 아직 약속까지 오 분이나 남았다… 안나는 불안한 듯 문을 흘겨보았다.


“있잖아요, 안나 씨를 보니 내가 예전에 만난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위즐턴은 안경 너머로 안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안나는 문을 노려보는 걸 멈추고는 위즐턴의 시선에 응대했다. 엘사는 아마 올 거야, 안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맞아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였죠. 제 호텔의 코트보관소 직원이었어요.”


“아하.” 안나는 영혼없이 말했다. 코트보관소 직원처럼 보인다는데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 아가씨를 코트아가씨라고들 불렀죠!” 위즐턴이 눈썹을 움찔대며 말했다.


안나는 웃어주었다. 끔찍한 농담이었지만 웃어야만 했다. 위즐턴은 그런 안나의 반응에 눈을 번뜩거렸다.


“아, 농담이 좀 먹혔나보군요? 난 늘 먹히는 농담만 한다니깐.”


위즐턴은 의자를 당기고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 뒤에서, 위즐턴의 두 비서가 동시에 눈을 굴렸다.


“사업을 하려면 웃길 줄도 알아야 하지요.” 위즐턴이 이어갔다. “우리 아버지가 몬트리올에 있는 호텔을 운영할 때 일입디다. 나는 손님들을 웃겨줬죠. 저녁마다 인기 폭발이었다니깐!”


“그러셨을 것 같아요.” 안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커피 주전자를 가져와 잔에 따랐다. 위즐턴은 자기 커피에 설탕을 아주 살짝, 한 스푼 넣었다. 넣기 전에 설탕을 유심히 관찰하는 건 덤이었다. 위즐턴은 양 방향으로 정확히 열 번 씩 휘젓고는 한 모금 홀짝 마셨다.


“한 신사가 호텔에 방문하기 전에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지요. 아가씨도 알겠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우편함도 널려있었고. 요새는 순 이메일에 문자 메시지에, 참나! 하여튼, 신사가 개를 데려가도 되냐고 물었지요. ‘제 개를 호텔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털 정돈도 잘 되어있고 얌전합니다.’라고 썼더군요.”


안나는 공손하게 들으며 의자에 편히 앉아 자기 커피에 설탕을 한없이 넣었다. 이런 일이 정말 싫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위즐턴이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비서 중 한 명은 머리를 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단숨에 답장을 써서 부쳤습니다. 당신 말로는, 호텔에 개를 데려와도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호텔을 운영해왔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는 타월, 이부자리, 은식기나 벽에 걸린 그림을 훔쳐가는 개를 잡은 적이 없었지요.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정신 나간 개를 쫓아낸 적도 없고요. 숙박비를 안내고 도망간 개도 없었지요. 그러니까 그 신사가 개를 데려오는 건 괜찮았던 겁니다. 대신 아버지는 덧붙였죠. 개가 주인을 보증하는 한, 주인도 호텔에 묵어도 괜찮을 거라고.”


위즐턴은 손을 마구 흔들어대며 말을 마쳤고 안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서, 머리를 괴고 있던 비서가 고개를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안나를 쳐다봤다. 다른 비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즐턴은 자기 농담에 자기가 웃고 있었다.


문이 열렸고, 모두들 엘사가 노트북과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은 오후입니다, 위즐턴 씨.” 엘사가 퉁명스럽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엘사는 준비해놓은 자리가 한 무더기였는데도 전부 무시하고는 테이블 반대편 끝에 앉았다.


“괜찮으시다면, 서류 십 쪽에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뭐라고요?” 위즐턴이 말을 끊고는 손을 모아 귓가에 가져다대었다. “들리지가 않는군요.”


엘사는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더 큰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서류에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하는데-”


“아렌델 씨, 이쪽에 앉으셔서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나는 자기 옆 자리를 툭툭 치며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엘사가 왜 저러는 거지?


엘사는 주먹을 꽉 쥐었고 얼굴은 시뻘개졌다. 안나의 제안 때문에 몸이 아파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엘사는 자기 노트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엘사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더 크게 말했다. 거의 고함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십 쪽을 보시면, 직원 보상금에 대한 항목들이 있는데-”


안나는 한숨을 쉬며 위즐턴을 빠르게 훑었다.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참나, 엘사보다 이 회의를 더 망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반대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엘사의 의자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잠깐- 뭐에요?” 안나가 회의실을 따라 의자를 밀자 엘사는 자기 노트북을 꽉 붙잡았다. “서머즈 씨, 저기서도 괜찮다니까요…!” 안나는 그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는 자기 옆자리이자 위즐턴의 맞은편에 엘사를 데려다 놓았다.


“자, 여기가 나아요.” 안나가 자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안나를 쳐다보았다. 엘사는 아직도 품 안에 노트북을 끌어안고 있었다. 엘사는 아침과 똑같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안나는 자기 노트북으로 문서 위를 딸깍거리더니 위즐턴을 향해 말했다. “자, 위즐턴 씨. 스크린을 보시죠. 여기가 십 쪽입니다. 협상을 계속 진행하기 이전에 아렌델 사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들이 조금 있습니다.”


엘사는 회의 내내 긴장했다. 말 하나라도 해보라고 하면 생니라도 뽑는 사람처럼 굴었다. 안나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중을 하긴 했다. 위즐턴이 말할 때마다 노트북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지만 의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서로 자리를 바꿔서 엘사가 비서고 안나가 사장이라도 된 것 같았다. 끔찍하게도, 안나는 회사 경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지만.


엘사가 입을 열 때면, 위즐턴에게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는 것처럼 들렸다.


“교육 개선에 대해서는 아무 방책도 없으신가보네요.” 엘사는 위즐턴 사의 직원 복리후생을 훑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안나가 보기에도 아무 것도 없긴 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솔직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저리게 경험해봤으니까,


“당연하지요. 제가 받을 특혜가 아니니까요.” 위즐턴은 손가락을 탁 튕기고서는 쭉 뻗더니 과장스럽게 흔들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을 직원들이 흥청망청 쓰게 둘 수는 없지요.” 안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까지 위즐턴이 보인 활기찬 모습은 멀리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듯 했다.


엘사는 위즐턴을 노려보고는 노트북을 두드려댔다. 안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주요 쟁점은 말이죠,” 안나가 빠르게 말했다. 뭐 하는 짓이지? 안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엘사를 저 상태로 말하게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안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직장 내 업무 개선인 것 같습니다. 내부 승진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에 적격이니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직원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안나는 숨을 골랐고 엘사는 그런 안나를 바라봤다. 위즐턴은 집중하는 듯 이마를 구겼다.


“맞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서머즈 양. 맞아요. 그 부분에 대해 조율하면 되겠군요.”


안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엘사는 안나를 처음보기라도 하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어째… 감명 받은 듯 보였다. 어쩌면 빛 때문일지도 모르고.


회의 막바지 무렵, 안나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테니스 경기를 막 끝낸 기분이 들었다. 위즐턴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몸을 푸는 동안 엘사는 자기 노트북을 두드리기만 했다.


“서머즈 양, 이 말은 꼭 해야겠군요. 당신 아주 재능 넘치는 아가씨예요. 예쁜 건 두 말 할 것도 없지요.” 안나는 엘사가 키보드를 두드리다 순간 삐끗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안나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려요, 위즐턴 씨.”


“아렌델 양, 이번 금요일에 있을 파티에 이 보물을 꼭 데려오세요.” 엘사는 자판을 마구 누르며 고개를 확 쳐들었다. 엘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전 백스페이스를 마구 눌렀다.


“파티요?” 안나가 물었다.


“아, 위즐턴 사의 오십 번 째 창립 기념 파티지요. 축하할 일도 많고 공식적으로 합병 소식도 전해야 하니까요. 서머즈 양도 반드시 와야 해요.”


안나는 엘사를 흘끔 보았다. 본 적 없이 창백하고 굳은 표정이었다.


“가능하면 말이죠.” 엘사가 말했다.


안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꼭 가고 싶네요.”



-



다섯 시가 되자, 안나는 컴퓨터를 끄고 스트레칭을 했다.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미친 사람처럼 난리치는 걸 멈춘 뒤로는. 엘사는 첫 회의에서 자기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고. 거의 그랬지. 엘사는 다시 자기 사무실에 처박히기 전 딱딱하게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안나는 아직도 엘사가 감명을 받거나 웃기는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안나는 집에 가서 라비올리나 먹고 속옷 바람으로 영화나 보려고 했다. 기분이 내키면 짐이나 풀고. 아마 그럴 일 없겠지만.


전철을 타고 집에 반절 정도 갔을 무렵, 안나의 아이폰이 울렸다.


너무 지치지는 않았기를 바라요. 한 시간 내로 데리러 갈게요.


안나는 모르는 번호를 빤히 바라봤다. 한 시간 내로 데리러 온다고? 누군데-


한스다. 한 미모 하는 한스.


“미친!”


사람들이 안나를 쳐다보자 안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미안해요.” 안나는 핸드폰에 고개를 박았다.


기대되네요. 안나가 답신했다. 젠장, 완전히 있고 있었다.


역에 정차하자마자, 안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자기 아파트를 향해 질주했다.


까먹다니 믿을 수가 없네. 안나는 현관을 열려다가 열쇠, 핸드폰, 설탕 팩 세 개를 떨어뜨렸다.


거울을 바라보자 거울 속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사무직이야. 데이트 상대로 최악이라고.


머리를 대충 올리고 블라우스나 입은 자기를 매력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물론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을 입긴 했지만, 초록은 지루하니까.


머리를 풀고 열심히 빗었다.


결과물은 가끔 자기를 돋보이게 해주던 매끈한 생머리 대신 폭탄 맞은 머리였다. 사자갈기 같았다.


“으르렁.” 안나는 거울 속 자신에게 뿌루퉁하게 말하고는 시계를 봤다.


십오 분이 남았고 머리를 감을 시간도 없었다. 안나는 다시 머리를 올렸다.


안나는 옷이 든 상자를 잠시 쳐다봤다. 잘 나가는 임원이랑 데이트 하는 첫 날 뭘 입을 건데? 퇴근 후 할 일이 라비올라 통조림 까는 게 전부인 사람에게는 출근할 때나 입을 옷 밖에 없었다. 심지어 귀여운 속옷조차 없었으니까.


한스는 아마 예약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는 식당에 데려갈 것이다. 드레스코드를 맞춰야하고 메뉴판에 가격도 쓰여 있지 않은 곳으로. 들고 온 옷이라고는 일할 때 입을 옷과 트레이닝 바지뿐이었다. 안나가 모든 옷을 가져왔다고 해도 그 중 ‘세련된’ 옷이나 ‘어른스럽고 섹시한’ 옷은 없었을 것이다.


한스가 왜 데이트 신청을 했을까?


안나는 엘사의 절반만큼이라도 세련되기를 바랐다. 진짜, 제대로 입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니까. 위엄 있어 보이면서도 섹시하게 보였다. 안나는 엘사한테 다른 사람들을 피 말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칵테일 드레스와 이브닝 드레스가 한 트럭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안나는 섹시한 드레스를 입은 엘사를 상상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시계를 다시 보니 오 분밖에 남지 않았다.


안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검정 바지를 꿰어 입고 흰 탱크탑과 속이 비치는 짙은 보라색 레이스 재킷을 입었다. 벨이 울릴 때, 안나는 막 검은 힐에 발을 쑤셔 넣고 있었다. 재빨리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안나는 마치 “안녕, 나는 안나고 죽을 만큼 따분한 인간이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안나는 ‘사무직’ 딱지를 떼는 데는 성공했다. 안나는 가방을 쥐고 문을 확 열어재꼈다.


그리고 한스에게 부딪혔다. 한스는 복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죄송해요! 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 안나는 한스를 일으켜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한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안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한스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머리는 아침처럼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옷은 달라졌다. 잘 빠진 양복과 넥타이 대신 티셔츠 위에 캐주얼한 스포츠 재킷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었다. 칼 같이 어울렸다.


“와, 세상에. 정말 아름답네요.” 안나가 말했다. 젠장, 내가 왜 이렇게 말했지? “제 말은- 미안해요.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라요. 아름답지 않다는 말도 아니고, 제가 하려던 말은-”


한스는 손을 쥐고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안나 씨도 아름답네요.”


안나는 얼굴을 붉히며 삐져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한스의 티셔츠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예술적인 디자인인 줄 알았던 그림이 알고 보니 오리였다.


오리 옆에 프린팅된 문구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오린데?”


안나가 코웃음을 치자 한스는 안나의 시선을 따라갔다.


한스는 히죽 웃더니 의식하는 듯 자기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오늘 데이트에서 어떤 걸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스가 코를 긁으며 말했는데 당황한 모습도 귀여웠다. “오늘 밴드 공연이 있거든요. 들어보셨는지는 몰라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인데-”


한스는 재킷 주머니에서 표 두 장을 꺼냈다.


“말도 안 돼!” 안나는 한스의 팔을 붙잡고 더 가까이 다가가 표를 살폈다. “언페이스풀 타임라인(Unfaithful Timeline) 공연 표라고요?!”


안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 밴드의 팬이었다. 지역의 펑크 락 밴드였는데, 살짝은 터무니없었다. “들어보셨나요?” 한스가 물었다.


“장난해요?” 안나는 손뼉을 치더니 기쁨의 춤을 추었다. “최애에요!”


데이트는 동화처럼 완벽했다. 공연도 환상이었다. 한스는 재미있고 매력적이었으며 안나가 춤을 추다 얼굴을 후려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뒤 한스는 안나를 멋지고 허름한 술집으로 안내했는데, 거기서는 유기농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팔았다. 둘 다 클럽 샌드위치를 시키고서는 서로의 접시에서 음식을 훔쳐 먹었다.


“아직 아렌델 씨와 친하지는 않은가 봐요?”


“농담이죠? 그 분이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나 할까요. 정말 얼음여왕이라니까요.” 안나는 거의 다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안나는 한스가 한 입에 샌드위치 반의 반쪽을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고서는 요조숙녀처럼 먹기를 포기한 참이었다.


“아뇨. 경영진도 사람인 거 아시잖아요.” 한스는 안나의 샌드위치를 집으며 말했다. 안나는 한스가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걸 보고는 한스의 피클을 슬쩍했다.


“사교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니면 절 싫어하나 봐요.” 안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한스에게 이렇게 말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한스는 부사장이니까. 언제든 회사 꼭대기로 올라가 안나가 사장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퍼뜨릴 수 있으니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안나는 한스를 믿었다. 어쩌면 자기를 승진시켜서 일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떻게 말하는지 익히 알아서 일지도.


어쩌면 머리카락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머리가 멋진 사람을 어떻게 못 믿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엘사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좀 까다로울 뿐이죠.”


안나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며 남은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사를 상대할 만큼 괜찮은 사람이 될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안나는 한스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제가 그 자리에 적격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어요. 이 회사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그 자리거든요. 엘사를 참아 낼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한테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었어요. 당신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안나는 미소 지었다. 한스도 확실한 이유를 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으니까. 한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 샌드위치를 끝내고서는 돌아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스는 자기의 멋진 머리를 넘기고서는 화면을 보며 웃고는 안나를 돌아보았다.


안나는 자기가 한스를 멍청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한스 역시 똑같은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자꾸 한스랑 안나 꽁냥대는 내용만 나와 열받게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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