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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06

번밀레(211.206) 2019.12.09 01: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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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다시 닫았다.


엘사가 다시 문을 열자 안나는 의자를 돌려 엘사를 바라 보았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안나는 혼란스러웠다.


“음… 아니에요.” 엘사는 문을 닫았다.


질문 하나 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들지? 단순한 생각이었다. 안나는 차가 없지만, 엘사는 있다. 위즐턴 사의 파티는 도시 반대편에서 열리고. 간단한 일인데. 보스답게 예의상 태워다줘도 되냐고 물으면 끝이다. 별일도 아니고 의례적인 일이다. 안나가 삼 일 연속 카페 모카를 사다줬으니 더욱.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지?


파티 때문이었다. 엘사는 늘 파티 생각만 하면 신경이 곤두섰다. 물론, 파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안다. 아버지가 끌고 다닌 덕분에. 정중한 태도로 웃고 경청하며 날씨에 대해 지루하게 떠드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엘사는 그럴 때마다 가면을 쓴 느낌이었다. 그리고 삼심 분 쯤 지나, 오늘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계속 떠들다가는 폭발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엘사. 저 문을 열고 단 오 초 만이라도 정상인처럼 구는 거야. 차로 태워다줘도 괜찮은지 물으면 돼.


어서 해.


엘사가 문을 열자 안나가 돌아보았다.


“괜찮으면오늘제차타고갈래요?”


부드럽게, 엘사, 부드럽게.


안나는 미간을 좁힌 채 눈만 끔뻑거렸다.


“그게- 원하면. 태워줄게요. 오늘 밤. 못 들은 걸로 해요-” 엘사는 뒤로 돌아 문을 닫으려 했다.


“오늘 밤에 뭐 있나요?” 안나가 물었다. 엘사는 어깨 너머로 안나를 힐끗거렸다. 안나는 머리를 긁어대고 있었다.


“기념식이요… 위즐턴 사 파티요.”


엘사는 안나의 표정이 혼란과 깨달음, 그리고 공포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안나는 손으로 짝, 소리 나게 얼굴을 덮었다. 뭉크의 ‘절규’가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왜 그래요?” 태워준다는 얘기가 저렇게까지 싫을 리는 없을 텐데.


“옷이요. 입을 게 하나도 없어요. 완전 까먹었어요. 파티가 언제 시작하죠?” 안나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네 시 반이었다.


“일곱시에요.”


안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탄식을 하더니 책상 위로 고개를 박았다. “일곱 시 안에 드레스 못 구해요. 세상에,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엘사는 사무실에서 나와 안나 곁으로 다가갔다. 빨간 머리가 허둥지둥 대는 통에 엘사는 사회부적응자였던 사실조차 까먹은 것 같았다. 엘사는 안나의 어깨라도 두드릴 것처럼 한 손을 들었지만, 이내 내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옷이 없나요?” 엘사가 물었다.


안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막 이사했는걸요. 옷이 전부 엄마네 집에 있어요.”


엘사가 멈추려고 하기도 전에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가 하나 있어요.”

잠깐- 뭐라고?


엘사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이 머릿속에서 그냥 나오다니.


안나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하나 있기는 했다. 아마 사이즈도 맞겠지. 하늘하늘한 부드러운 재질에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밝은 하늘색 드레스였다. 어깨끈 대신에 스팽글이 달린 새햐안 깃이 붙은 드레스. 아침에 옷을 고르다 그 드레스는 무시하고 훨씬 꽉 막히고 소매도 긴 드레스를 고른 참이었다. 안나가 그 드레스를 입는다면 눈도 돋보이고 머리는 마치 얼음 옆 불처럼 아름다워 보이겠지. 드레스가 트여있으니 평소에는 훔쳐보기만 했던 목과 어깨에 있는 주근깨도 훤히 드러날 것이다.


“정말요?” 안나는 기대하는 동시에 살짝 망설이며 물었다.


엘사는 기대에 찬 안나의 얼굴을 보고서는 말을 번복하려던 마음을 싹 뜯어고쳤다.


“네. 집에 같이 들리면….”


젠장. 메이드가 집 좀 정리했을까? 내가 브래지어를 아무데나 벗어놨었나?


안나는 혼란스러운 엘사의 마음도 모른 채 방긋 웃으며 앉아있었다.


“아, 정말 감사드려요! 파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가끔은 이렇게 답도 없어요.”


“삼십 분만 기다려요. 오늘은 좀 일찍 나가죠.” 엘사는 최대한 진정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엘사는 안나에게 제안을 던진 순간부터 일찍 퇴근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얼른 준비하고 정돈 좀 하기 위해서.


“좋아요. 저도 하던 일 얼른 끝낼게요.” 안나가 엄청나게 기쁜 듯이 대답했다. 엘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더니 후다닥 달려가 메이드에게 전화했다.



-



엘사는 문 틈 사이로 머리를 쑥 집어넣고서는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메이드가 정리를 했는지 몰래 살펴보았다. 엘사는 요상한 브라가 어디 널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에 사실 줄은 몰랐어요.” 안나는 이런 곳은 처음 본다는 듯 복도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둘이 있는 곳은 엘사 아버지가 생전 자랑으로 여기던, 한 층에 하나 뿐인 호텔 꼭대기 스위트룸이었다. 엘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으로 옮겼다. 그 넓은 집에 그토록 많은 추억이 담겨있을 줄은 몰랐기에.


“꽤 괜찮아요.” 엘사는 문을 열며 말했다. “회사도 가깝고요. 아파트보다는 괜찮죠.”


엘사는 안나가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주변을 살폈다. 엘사는 안나가 이곳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의 대부분은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듯 제대로 꾸며져 있었다. 엘사는 자기 (엑스박스와 잡동사니가 어두운 체리색 캐비닛으로 완전히 가려져있는) 놀이공간과 침실을 빼고는 디자이너 마음대로 꾸미도록 놔뒀다. 엘사는 안나가 침실로 가는 것만큼은 막았다.


안나는 신발을 걷어 차버리고는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엘사를 바라보았다.


어서, 엘사. 연습한 대로 해.


“차 좀 마실래요? 아니면 뭐 좀 시켜먹어도 괜찮고요. 원한다면요.”


“어차피 파티에서 잔뜩 먹을 거라 괜찮아요.” 안나는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하고는 큰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안나는 소파 위에 걸린 그림(엘사의 고조부의 작품이었다.)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세상에, 여기 완전 좋네요.”


엘사가 입을 막기도 전에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안나는 엘사를 쳐다보며 웃음을 막으려는 듯 입술을 잘근 물었다. 엘사는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럼 가서 드레스 가져올게요.”


“와. 우와.” 안나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말했다.


엘사는 안나의 반응에 동의했다. 드레스를 입은 안나의 엘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예쁘고 잘 맞았다.


엘사도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는 딱 맞는 치맛자락을 당겼다. 엘사가 입은 치마는 검정색에 한쪽 다리가 파여 무릎이 드러났다. 소매가 긴 하늘색 상의는 윗부분이 네모난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검은 치마와 상의가 맞물리는 부분의 레이스는 꼭 눈꽃처럼 보였고, 엘사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보세요, 저희 어울려요!” 안나가 말했다. 안나는 엘사에게 팔짱을 끼고는 자기 쪽으로 당겼다.


잘 어울리기는 했다. 안나의 파란 드레스와 엘사의 하늘색 상의가 마치 한 쌍처럼 보였다. 둘은 파티에 함께 놀러 온 친한 친구 사이나… 커플처럼 보였다. 아, 이런. 같이 있을 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지 않았어. 엘사는 드레스가 안나에게 아주 잘 어울리고, 옷이 제 주인을 찾은 것 같다는 점만 생각했다.


아니면 저 드레스 말고 다른 걸 입히자.


엘사가 속으로 끙끙 대거나 말거나, 안나는 빙글빙글 돌며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발목 언저리에서 나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무 예뻐요! 이거 맘에 쏙 들어요.”


갈아입으라고 말도 못 하겠네.


안나는 날아갈 것처럼 신이 나는지 행복에 겨운 눈으로 엘사를 바라보며 손뼉을 짝 쳤다.


“엄청 예쁘세요.” 안나가 엘사를 보고는 말했다. “제 말은, 늘 예쁘셨지만, 우와… 엘사, 제 말은, 아렌델 씨….” 안나의 볼이 물들었다. 엘사의 심장이 날뛰었다.


이제 나도 못 갈아입겠네.


“고마워요.” 엘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겨우 네 시간인데. 네 시간은 버틸 수 있지.


“오늘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안나가 다시 돌며 말했다. 치마가 올라가 안나의 섬세한 발목과 얇은 종아리가 드러났다.


네 시간이야.


안나가 빙글 돌다 멈추더니 자기 어깨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 깜빡했다.” 안나가 중얼거리더니 머리를 풀어서는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욕실 테이블 위에 있는 거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요.” 엘사가 물러나며 재빨리 말했다.


안나는 욕실로 향했고 엘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엘사는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운 고문 같았다. 문제는 엘사가 이 고문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사는 아픈 척이라도 해서 파티에서 일찍 나오면 어떨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제 그런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아, 제발! 오늘만이라도 좀 정상처럼 굴면 어디가 덧나?”


엘사는 손을 내렸다. 욕실 쪽에서 안나가 뭘 때려 부수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젠장 젠장 젠장….”


엘사는 일어서서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주저하며 욕실 문을 열었다.


안나는 머리에 박힌 빗을 미친 듯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엘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안나의 빨간 머리는 부풀어 올라 두 배 쯤 되어보였고, 사방팔방으로 마구 뻗쳐있었다.


“아야!”


“뭐 하는 거예요?”


안나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죄 지은 사람처럼 엘사를 바라보았다. “제 잘못이 아니라요, 제 머리 때문이에요. 빗을 먹어버렸어요!”


“머리 빗는 법 몰라요?”


“매번 엄마가 빗어줘서요. 제 말은, 똑바로 빗는 거나 묶는 건 대충 하는데, 그게 다에요.”


“저기 있는 오일 나한테 줘 봐요.” 엘사는 선반 위에 있는 수많은 병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요?”


“그 옆에요. 파란 병이요.”


안나는 까치발로 서서 병을 집고는 어깨 너머로 엘사에게 건네주었다. 엘사는 병을 건네받으면서 살짝 닿은 안나 손의 부드러운 감촉에 놀랐다. 엘사는 손바닥 위에 오일을 짜서는 양손에 묻혔다.


엘사는 자기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안나를 만지는 걸 넘어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다니.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나머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나는 엘사를 지켜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엘사는 보드란 빨간 머리 안으로 긴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빗질 하듯 안나의 두피를 살살 쓸었다. 안나는 눈을 감고는 아주 작게 한숨 쉬었다.


안나의 머리카락은 엘사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쌌다.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이었던 머리가 엘사의 능숙한 손길을 거치자 점점 매끄럽게 변해갔다.


엘사가 안나의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빗자 그 틈새로 안나의 긴 목이 드러났다. 엘사는 목을 너무 훔쳐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기 일에 집중했다.


엘사는 손 위에 오일을 더 많이 짰는데, 그 통에 오일이 손바닥에서 흘렀다. 엘사는 그게 드레스 위에 떨어질까 숨이 턱 막혔지만, 오일은 드레스가 아닌 안나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엘사는 볼 안쪽을 잘근 씹었다. 안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행복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엘사는 숨을 살짝 내쉬며 엄지로 안나의 어깨를 쓸었다. 손이 닿자, 안나가 움찔거렸다.


“혹시… 혹시 추워요?” 엘사는 말을 더듬는 통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안나도 빨개진 건가? 아님 잘못 본 건가? “아뇨, 괜찮아요.”


엘사의 손은 다시 안나의 머리로 향했고, 귀에서부터 목까지 머리를 쓸어 한데 모았다.


안나가 끄응 소리를 냈다.


“매일 하루에 세 번 씩 이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엘사의 손이 멈췄다. 엘사는 이대로 가다간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늘어뜨리는 게 좋겠어요.” 엘사의 목소리는 떨렸고, 숨이 찬 듯 했다. 안나가 눈을 떴다.


안나는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까치집 같던 머리가 부드럽게 묶여 늘어져있었다. 안나는 손을 들어서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넘기지 않는 게 더 예뻐 보여요.” 엘사가 말했다.


엘사는 더 이상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다. 정말인지는 몰라도. 엘사는 안나를 향해 손을 뻗어 귀 뒤로 넘긴 머리를 다시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엘사의 손가락이 안나의 뺨을 쓸어내렸다. 엘사는 후다닥 손을 뗐다.


“아마 오 분만 있으면 까먹고 다시 넘길 것 같아요.”


엘사는 웃으며 스스로의 모습에 놀랐다. “다시 말해줄게요.”



-



차에 탈 때가 되자, 안나가 살짝 훔쳐보던 엘사의 행복한 표정이 사라졌다. 엘사는 운전대를 꽉 쥐고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렇게 긴장했지만, 엘사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잘 차려입은 엘사는 너무 섹시해서 보는 것 자체가 불법처럼 느껴졌다.


안나는 엘사를 흘낏 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한스가 자석처럼 끌렸다면, 엘사는 초강력자석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쇠붙이 말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 안나는 비유에 약했다.


그래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안나는 이성애자 여자한테 절대 끌리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으니까. 그래서 안나는 마음을 편안히 먹고 엘사를 그림 보듯 감상했다.


차가 멈추자 안나는 차에서 뛰쳐나왔다. 파티 장소인 골프클럽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멋진 건물이 서있었다. 안나는 코트자락을 붙잡고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내렸다. 그 뒤에서 엘사는 열쇠를 넘겨주며 주차를 부탁하고 있었다. 걸어오는 엘사의 모습이 어딘가 뻣뻣했다. 엘사는 숨을 깊게 쉬더니 입술을 질끈 물었다.


긴장했나? 안나는 엘사에게 다가가 졸업무도회에 갈 때 남자들이 하듯 엘사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엘사는 고개를 가로 젓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엘사는 부끄럽지 않았다. 사실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러나 분명 사교계 명사라는 직함이 편하지는 않았다. 엘사는 사람들에게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직장과 아이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까지 경청했다. 안나는 한번 아름답고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에 한눈이 팔렸다가 과묵해 보이는 노신사와 레스토랑 음식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엘사는 매번 대화가 끝날 때마다 겨우 살아난 사람처럼 한숨을 푸욱 쉬었다.


“괜찮으세요?” 안나가 물었다. 안나는 웨이터가 든 접시에서 음료 하나를 낚아채 엘사에게 건넸다. 엘사가 눈을 껌뻑였다.


“당연하죠. 제가 왜 안-”


“안나 양! 그리고 아렌델 씨! 이렇게 보니 참 좋군요.”


엘사가 펄쩍 뛰는 통에 샴페인이 잔에서 흘러넘쳤다. 안나는 한스가 자기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한스!” 안나는 한스에게 달려가 포옹하려다가 지금 상황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옹 대신 어색하게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솔릭 씨.” 엘사가 악수하며 꽤 사무적으로 말했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두 분 다 말이죠. 꼭 커플 같아 보여요.”


안나의 볼이 물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이게 엘- 아렌델 씨 드레스거든요.” 안나는 아름다운 치맛자락을 붙잡고 펼치며 사라락 소리를 냈다. “제 옷은 아직도 저 멀리 있어서요.”


“정말, 그렇게 입으니 공주나 다름없어 보이네요.”


안나는 까르륵 거리며 웃었다. 한스는 파티에 온 사람들을 가리키며 안나에게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뇨, 진짜 있던 일이에요. 그것도 개장 첫날에 다 일어났었죠.”


“어떻게 안 잘렸대요?”


“상속받았으니까요. 이쪽 업계에선 가족이 전부예요.”


안나는 웃음을 터뜨리다 너무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 입을 가렸다. “거짓말 같아요. 엘사 씨는-”


엘사는 없었다. 안나는 분명 엘사가 옆에서 조용히 한스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나는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엘사는 없었다. “어디 가셨지?”


“다른 분들이랑 대화 나누고 있겠죠. 바쁠 거예요.”


안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맞는 말이었다. 엘사가 저녁 내내 자기와 붙어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드레스를 빌리긴 했지만, 친구는 아니니까.


안나는 위즐턴이 등장하는 통에 생각을 멈췄다. “서머즈 양! 한스! 좋은 저녁이에요!” 위즐턴이 안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위즐턴은 안나의 손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더니 한스에게도 마찬가지로 했다. “대단한 파티죠? 그렇지 않나요? 제가 청년 시절 열었던 정원 파티가 생각나는군요.”


“정원 파티요?” 안나에게는 귀족들이나 할 일처럼 들렸다. 


“디제이한테 늘 소리쳤었죠.” 위즐턴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비틀어 주세요, 디제이!”


안나는 깔깔거렸고 한스는 음료를 코로 뿜으며 기침했다.


“아이고, 저런. 조심해요, 젊은 양반.” 위즐턴이 한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 유머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게 생겼군요. 자, 아렌델 씨는 어디 계시나요? 이제 슬슬 발표식 시작할 참인데!”


“제가 찾아볼게요.” 안나가 다시 걱정이 밀려오는 듯 말했다. 엘사는 어디 있을까?



-



엘사는 자세를 좀 편하게 하려고 몸의 중심을 옮겼다. 동시에 다시 똑바로 서서 파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이게 네 일이야, 엘사.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라고.


아니. 잘 안 될 거야.


평생 숨을 수는 없어. 위즐턴한테 인사도 안했으면서.


좋아. 내가 바라던 그대로네. 우월 콤플렉스에 취한 것도 모자라서 못난 가발까지 쓴 괴짜 노인네랑 대화하기 말이야.


엘사는 자기가 그 일을 꽤 잘 했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한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한테 웃어주는 일. 엘사는 안나 말을 듣는 것도 좋았다. 안나는 자기 말에 자기가 허둥대는데다가 샹들리에부터 샌드위치까지, 모든 것에 감동받는 사람인데. 심지어 엘사는 자발적으로 몇 번 웃기도 했다.


그러다 한스가 나타났다.


한스는 정말… 정말로… 수완이 좋았다. 말만해도 안나가 웃었는데 별로 생각하며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안나…. 한스를 보자 안나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 자기 비서가 사회성 모자란 상사 돌보는 데 지친 나머지 자길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사는 끙끙 대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었다. 자기가 무슨 상관인가. 안나가… “젠장할!”


“엘사 씨?” 화장실 문이 열렸다. 엘사는 문틈으로 파란 드레스자락이 보이자 속이 꼬이는 것 같았다. “엘사 씨, 안에 계세요?”


엘사는 얼어붙어서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가 대답하기를 바라는지 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안나의 하이힐과 복도에 깔린 석재 타일이 부딪혀 소리가 났다. “저기요, 엘사 씨….” 안나는 엘사가 있는 칸의 문을 두드렸다. 단 한 칸만 사람이 있었으니까. “엘사 씨 아니라면 죄송해요. 혹시 엘사 씨 못 보셨나요?”


잠시 드레스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과 문 틈새로 안나의 얼굴이 등장했다. “아하,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안나!” 엘사가 비명을 질렀다. 안나가 허리를 들자 얼굴이 사라졌다. “저 볼일 보잖아요.”


“옷을 다 입고요?”


“그럴 수도 있죠.”


“사라진지 삼십 분이 지났는데요. 아니잖아요.”


엘사는 말이 없었다. 엘사는 팔로 배를 감쌌다. 좋아. 이제 안나가 널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네.


이상한 사람 이상으로 심하게 보겠지.


“나올 수 있어요?”


엘사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딱히 맞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나는 문 앞에 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에요?” 안나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문제 없어요.”


“거짓말. 화장실에 숨어놓고선.”


“제가- 제가 말 할 이유는 없잖아요.” 엘사는 똑바로 서서는 화장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네. 없죠.” 안나가 간단히 말했다. “하지만 도와줄 수는 있어요. 파티는 두 시간이나 남았고 아직 문제를 고칠 기회는 많은데, 제가 보기에 혼자서는 못 할 것 같아서요.”


엘사는 걸음을 멈추고 안나를 돌아보았다. 안나는 팔짱을 끼고는 완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히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엘사의 어깨가 푹 주저앉았다. 엘사는 파티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는.


“파티가 싫어요.” 엘사가 말했다. 간결한 시작이었다. 안나는 웃지 않았다. 세면대에 기대어 서서는 듣고 있었다. “전엔 이렇지는 않았어요.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는요. 아버지 옆에 서서 점잖게 있으면 다였으니까. 한 시간 정도 버티다 나가면 됐죠. 지금은 다들 저랑 얘기하려고 해요. 다들 누군지도 모르는데. 전부 다 나한테서 무언가 바라고 있어요.”


“우리 엄마처럼 말하시네요.” 안나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내성적인데다 재미도 없어요.”


“그래도 저처럼 바보 같이 굴면서 화장실에 숨지는 않으시겠죠.”


내가 어쩌다 이렇게 솔직해졌지? 안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뇨. 그렇다고 엄마가 엄청 큰 회사의 대표인 건 아니니까요. 이런 큰 파티는 아예 얼씬도 안 하시죠.”


“전 그렇게 못 해요.”


“그렇죠. 그래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있어요.” 안나는 손으로 엘사의 뺨을 조심스레 덮으며 눈치를 살폈다.


“우리가 해야 할 게 있어요.” 일 분 쯤 지난 뒤, 안나가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요. 위즐턴 씨가 합병 소식을 발표한다고 했어요. 거기 서서 그냥 예쁘게 있어요. 그리고 저랑 둘이서 같이 다녀요. 고개 끄덕이면서 웃어줘요. 제가 대답을 할게요. 끝나면 집에 가서 월요일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쉬세요.”


엘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안나가 제시한 계획이 훨씬 괜찮게 들렸다. 좋은 계획 같았다. 엘사는 안나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안나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안정감을 줬다.


“그냥 제 옆에 딱 붙어있어요.” 안나는 엘사의 손을 놓기 전, 한번 꽉 쥐었다. “심호흡 해요. 다 괜찮아요.”


발표가 시작하며 방 안에 박수갈채가 가득했고 모든 시선이 엘사로 향했다. 엘사는 안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안나는 연단 맨 앞에서 엘사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조명이 안나 드레스의 스팽글과 빨간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안나는 더 크게 웃으며 귀 뒤로 머리를 넘겼다. 엘사는 손을 뻗어 머리를 다시 빼주었다. 엘사의 손이 더 오래 머물렀다. 안나는 필요 이상으로 길게 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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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퀘 극혐 ㅅㅄㅄㅂ 분량은 또 무슨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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