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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09

번밀레(211.206) 2019.12.22 03: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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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안나를 데려가다니.


펜슬 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입은 안나는 상대하기 버거웠다. 정장을 입은 안나는 손 쓸 수조차 없었고.



청바지에 하늘거리고 다채로운 색 상의를 입은 안나라니?


안나는 오늘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왔다.


안나는 차에 기대서서는 머리 한 쪽 끝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멍하니 자기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어떻게 사복을 입었는데 더 매력 넘칠 수가 있지? 어떻게? 느리게 뛰던 엘사의 심장이 안나를 보고나서 마구 요동쳤다.


엘사는 이제야 겨우 안나 옆에서 평정심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지금부터 일주일 간 낯선 곳에서 안나와 함께 지내야 한다니. 안나는 분명 뭐라도 하길 바랄 것이다.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관광객스러운 일도 하고 싶어 할 게 뻔하다. 그것도 엘사와 함께. 분명 좋은 일이어야 했다.


하지만 엘사에겐 그렇지 않았다. 엘사가 안나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엘사는 자기 비서에 대해 부적절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될 테니까.


수영장에 놀러 간다면 안나는 무슨 수영복을 입을까, 같은 생각들을.


“아렌델 씨!”


엘사가 펄쩍 뛰었다. 자기 생각에 빠져 호텔 문을 막은 채 서있었다.


“엘사 씨,” 안나는 엘사를 발견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래 걸리셨네요.”


“가방 들어드리죠.” 안나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한스가 공항까지 둘을 태워주기로 한 것이다.


엘사는 자기가 직접 차를 몰고 공항에 가서 일주일 간 주차를 맡겨놔도 괜찮다고 주장했지만 안나가 기어코 한스에게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친절한 사람이니 당연히 수락했겠지. 특히 안나를 위해서라면.


엘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짜증이 났다.


“제가 넣을 수 있어요.” 엘사는 차갑게 대답하고서는 여행 가방을 끌고 가서 트렁크에 넣었다. 엘사 눈에 안나가 들고 온 핑크색 더플백이 들어왔다. 가방끈에는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다. 엘사는 그걸 보고는 방긋 웃었다.


“전부 다 실었나요, 아가씨들?” 한스는 선글라스를 꺼내더니 코 위에 걸치고는 말했다. “여기서 얼른 튀자구요.”


안나가 키득거렸다. 한스는 세상에서 제일 정중한 태도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엘사는 뒷 자석에 앉으며 한스를 차 문으로 갈기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평범하게 행동해. 네가 이럴 이유 없으니까 삼십 분만 현대 지성인처럼 행동하라고.


어쩐 일로 엘사는 평범하게 행동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한스가 안나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안나와 손을 잡아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수하물 검사가 수월하게 끝나고 남은 건 출국심사뿐이었다. 한스와 떨어지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저 까먹지 말아요, 안나.” 한스가 말했다.


“일주일인데요, 뭘.” 안나가 웃으며 말했지만 볼이 빨간 게 기뻐보였다.


그러더니 한스가 엘사 눈앞에서 안나에게 키스했다. 그것도 모자라 평생 그러고 있을 사람들처럼 격렬하게 포옹했다.


“우리 아기 잘 보살펴주세요.” 한스가 안나를 놓아주며 말했다. 안나는 숨이 찬 사람처럼 잠시 비틀거렸다. 엘사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엘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바닥에 깔린 타일 무늬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욕지기가 치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솔릭 씨, 일하러 가는 상황에 적절한 행동은 아닌 것 같군요.” 말보다는 으르렁 소리에 가까웠다.


“에이, 엘사 씨, 일주일이나 못 보잖아요. 제가 보기-” 엘사는 안나가 자기 어깨를 건드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확 뺐다.


“제가 보기에 둘 다 성인 맞는 것 같은데 공사 구분은 좀 했으면 좋겠네요.” 엘사는 자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더니 심사 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사는 자기가 우두커니 서있을 때와 둘에게서 멀어졌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했다.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엘사는 평소에 공공장소에서 누가 키스를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에 지장이 가지 않는 한 직장에서 키스를 한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나와 한스가 키스하는 건 정말, 정말로 신경 쓰였다. 한스가 안나 엉덩이에 못 돼먹은 손을 올리고선 작고 예쁜 입술을 멍텅구리 같은 입술로 덮다니.


엘사는 안나가 따라와 줄에 서는 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않고 줄을 서서는 심사를 끝내고 공항을 걸었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면세점을 통과하던 중에 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사는 발을 멈추고는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참이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엘사는 다시 한 번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렸고 이제 안나가 열 뻗칠 시간이었다. 안나가 왜 나랑 함께 있는 거지? 엘사는 얼음여왕이었고, 가시 돋친 말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컴퓨터쟁이하고나 지내는 게 어울렸다.


“받으세요.” 안나가 대답했다. 엘사는 안나가 커피잔과 도넛 상자를 들고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네?”


“초콜릿 도넛은 다 나갔대요. 오늘은 다시 보스턴 크림이에요.” 안나가 손에 든 것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화냈는데도 도넛을 사주네요.” 엘사가 말했다. 엘사는 자기가 왜 자꾸 짜증을 내는 지 알 수 없었다. 안나가 화도 안내고 초콜릿까지 사왔는데.


“정말로 화난 게 아닌 거 저도 알아요.”


“저 썅년이죠.” 엘사가 말했다. “저 같은 사람 계속 봐주면 안 돼요.”


안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나면 좀 착해질 걸요.”


안나는 엘사 손에 커피를 쥐어주었다. “얼른 마셔요. 비행기에 못 들고 탈 것 같거든요.”



-



엘사는 렌트카를 몰아 퀘벡 시 북쪽으로 향했다. 안나는 내내 창문에 코를 박고 구경 중이었다. 창밖으로 상록수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안나는 혹시라도 세인트 로렌스를 볼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었다. 엘사가 내륙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일 거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둘은 리조트를 향해 좁은 도로를 계속 달렸다. 강을 끼고 한참을 달리다 마침내 방향을 틀자 작은 호수와 이를 둘러싼 낮은 산등성이들이 보였다. 퀘벡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모퉁이를 전부 돌자 리조트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고 안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그 옆에서 엘사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리조트는 거대했다. 오래된 석조 건물은 크기가 성에 가까웠다. 북부여서 그런지 눈이 반짝거리는 담요처럼 모든 것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낡은 굴뚝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눈 틈새로 보이는 지붕은 녹슨 구릿빛이었다.


주 건물 주위로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신축 건물이지만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이라 꽤 옛날 건물처럼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 주인은 엘사였다. 비슷한 곳들도 마찬가지였고.


안나는 ‘부자’에 대한 개념을 고쳐먹었다.


엘사가 주 건물 앞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끄기 무섭게 남색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들이 차문을 열어주었다.


“아, 메르시 보꾸.” 엘사가 직원에게 열쇠를 넘겨주며 말했다. 엘사는 프랑스어로 빠르게 무어라 말했는데 안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직원은 아주 멋들어지게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운전석에 탔다.


“프랑스어도 해요?” 안나는 엘사의 새로운 모습에 감동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살짝 흥분할 정도였다. 프랑스어 하는 사람이 팔십 퍼센트 더 섹시하게 보인다는 건 증명된 사실이니까. 엘사는 이미 사무실에서부터 백 퍼센트 섹시했으니 이제는 치명적 매력을 뿜는 셈이었다.


 “그럼요. 프랑스어 몰라요?” 엘사는 안나가 알 수 없는 말이라도 한 양 쳐다보았다. 엘사는 직원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 프랑스어 수업 없었어요?”


“당연히 있었죠. 구 학년 지나서는 안 들었지만. 동사의 활용형을 일 년만 더 배웠으면 아마 부야베스(역: 프랑스 수프 요리) 접시에 코 박고 죽었을 걸요. 그걸 어떻게 견뎠어요?”


엘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정교사가 프랑스어를 엄청 잘했거든요. 사업 때문에 중국어도 배웠어요.”


“와, 아버님이 교육에 엄청 관심이 많았나 보네요.”


무슨 이유에선지 엘사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네.” 엘사는 그렇게 대답하고서는 더 빠르게 걸었다. 안나는 엘사를 따라가느라 거의 겅중겅중 뛰어야 했다.


“유후!”


안나의 눈에 밝은 색 부글부글한 줄무늬 벽이 한 가득 들어왔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벽은 한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남자는 안나가 본 사람 중 제일 거대해보였다. 남자는 다른 별에서라도 구해온 것 같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저는 오큰입니다. 라 퐁텐 드 텅퀼리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렌델 씨. 옆은 서머즈 씨 맞지요? 야?”


안나는 거대한 사나이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얼굴을 가로질러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큰의 악센트는 누가 들어도 스웨덴 사람 같았다. “안나라고 불러주세요.”


“직접 맞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큰 씨. 여기 경영을 아주 잘 하신다고 칭찬이 자자하시더군요.” 엘사가 말했다.


안나는 엘사가 예의를 차린다고 뻣뻣하고 어색한 말투로 말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오큰은 엘사와 악수하더니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안나가 건물 안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신난 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꼬마들이 둘을 덮쳤다.


“아빠, 이 사람이 사장이야?”


“빨간 머리야, 아님 노란 머리야?”


“금발 머리 같아. 저 사람이 사장일 거야.”


“맞아. 빨간 머리는 그냥 조수 같아.”


아이들 넷이 떼를 지어 세 사람을 둘러쌌다. 모두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이었다. 엘사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었다. 귀염둥이 자동차들 앞에 뛰어들은 사슴 엘사 같은 모습을 하고서.


“얘들아.” 오큰이 입을 열자 꼬마 넷이 일제히 물러나서는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렌델 씨, 안나 씨, 제 가족입니다. 얘들아, 인사하렴.”


꼬마들이 손을 흔들었다. “유후!”

안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아빠한테 가렴. 여기 있으면 손님들한테 방해된단다.” 아이들이 달려나갔다.


엘사는 아직 그 자리에 굳은 채 있었다. 안나가 엘사의 갈비뼈 부근을 쿡 찌르자 엘사가 펄쩍 뛰어올랐다.


“저희 방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사가 물었다. “공항에서 바로 왔더니 피곤하네요.”

“당연하죠, 아렌델 씨. 얼른 가서 열쇠만 들고 올게요.”


안나는 엘사의 표정을 보고선 킥킥 대며 말했다. “애들 정말 귀엽죠.” 


“애들이 너무 많아요.”


“한 명 데려가도 오큰 씨가 모를 것 같지 않아요?”


엘사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



“와, 세상에.”


안나는 현관에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엘사도 그 뒤에서 방을 엿보며 이번 ‘세상에’가 평소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평소 같은 ‘세상에’가 맞았다. 안나는 자기들이 묵게 될 스위트룸을 보고서는 굉장히 신이 나 발을 동동 굴렀다.


아주 멋진 객실이었다. 엘사가 살고 있는 스위트룸보다 넓었으며 인테리어도 훨씬 멋졌다. 안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안으로 달려갔다.


“수영장이 보여요! 삼월인데도 사람들이 수영을 해요! 진짜 모닥불도 있고! 와, 세상에, 거품 욕조도 있네!”


엘사는 안나더러 ‘세상에’ 좀 그만하라고 말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여기 퀘벡에서는 좋은 말이 아니었으니까. 안나는 침실로 달려가더니 킹 사이즈 침대를 보고는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엄청 신났네요, 야?” 오큰이 말했다. 엘사는 안나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에서 방방 뛰는 모습을 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래 보이죠.” 안나의 꽁지머리가 어깨 위에서 나풀거렸다. 안나는 어린애처럼 웃더니 뒤로 쓰러지며 침대에 몸을 묻었다. “여기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있어요.” 안나 목소리는 베개에 묻혀 작게 들렸다.


엘사는 등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 괜히 기침을 하며 오큰을 돌아보았다. “완벽하네요. 제 방은 어디에 있나요?”


오큰은 당황한 듯 보였다. “이 방입니다.”


“좋아요.” 엘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스위트룸이 여기니까. “안나 방은 어디죠?”


오큰의 눈이 순식간에 침대에 누운 안나를 향했다가 다시 엘사를 향해 돌아왔다. 오큰은 불안한 듯 자기 검지를 맞댔다. “…두 분 사이가…아, 어쩜.”


“아, 어쩜이라고요?” 엘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큰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았으니까.


“있죠, 두 분이 방을 함께 쓸 거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야?”


엘사는 빠르게 안나를 바라보았는데, 안나는 무슨 말이 오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고양이처럼 스트레칭하는 중이었으니까. 안나의 셔츠가 말려 올라가고 바지가 흘러내렸다. 엉덩이 주변에도 주근깨가 있었다.


엘사는 오큰의 팔을 붙잡고 조용히 끌고 나와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다른 방 하나만 주세요. 가장 싼 방이라도 상관 없으니까 제가 잘 방 하나만 달라는 말이에요.”


오큰은 얹짢은 듯 말했다. “아, 어쩜. 미안하지만 방이 없어요. 있죠, 수요와 공급의 문제이지요.”


“방이 없다니요? 여긴 호텔이잖아요. 방은 늘 남잖아요. 아니면 예약 취소된 방이나-”


“방은 없어요. 이번 주에 축제가 열렸고 이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호텔이 여기니까요.”


오큰을 바라보는 엘사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이건 말도 안 돼. 우주가 나서서 나한테 왜 이러지?


안나가 침대 위에서 내려와서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둘 다 긴장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엘사는 오큰더러 상황을 설명하라는 듯 단단히 굳은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주 당연하게도 안나는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도 크잖아요. 같이 쓰면 되죠. 그렇죠, 엘사?”


엘사는 앓는 소리만 냈다. 안나와 오큰은 그 소리를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오늘 저녁에 개인적으로 식사를 대접하지요. 괜찮으시나요?” 오큰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듯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 불편한 건 없죠? 야?”


“너무 좋죠.” 안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미니 바를 보고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



“이쪽은 제 남편인 안드레입니다.”


안나는 갈색머리 근육질 청년이 브라우니 쟁반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안드레는 회색 정장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안나는 오큰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했어요, 오큰.”


“그렇죠? 야?” 오큰은 이번에도 엄청난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아주 고급처럼 보였다. 안드레는 식당으로 들어오며 오큰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리고 이쪽은 엠마누엘, 가브리엘, 엘리스입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와 정장바지에 셔츠를 입은 남자아이 둘이 각각 접시와 칼, 잔을 들고 안드레 뒤를 쫓아왔다.


“저희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큰 씨.” 엘사가 말했다. 안나 눈에는 엘사가 호텔에 도착한 이후 계속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게다가 파티처럼 보이지만 엘사가 화장실에 숨기라도 한다면 바로 알아챌 사람들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안드레가 만든 브라우니가 그나마 엘사의 숨통을 트였다.


오큰의 집은 주 건물 근처 통나무 오두막이었다. 집 크기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장정 둘도 모자라 아이들 넷이 주방과 식당을 뛰어다니니 좁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엘사와 안나는 안내받은 서재로 향해 앉아서 기다렸다. 오큰의 막내딸인 지지가 주인 노릇을 했다.


“둘이 결혼했어요? 애기 있어요? 같이 왔어요?” 엘사와 안나가 자리에 앉자마자 지지가 엄청난 기세로 질문을 쏟아냈다. 지지는 아이답게 혀 짧은 소리를 냈으며 프랑스 악센트도 섞여있었다. 안나는 유괴를 한다면 지지로 하자고 결심했다.


“아니, 우리 아직 애기는 없어요.” 안나가 말했다.


“에이.” 지지가 말했다. 안나는 깔깔 거리며 엘사를 살짝 엿보았다.


엘사는 아직도 자기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눈은 동그래지고 양손을 꽉 맞잡은 채로.


“저분들은 부부 아니란다, 마 슈.” 오큰이 말했다.


“하지만 아빠가 그랬잖아. 엘사가 사 쁘띠 아미랑 같이 올 거라고.”


수프 그릇을 들고 오던 안드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논, 마 슈, 손 아미. 아미.”


“그치만 아빠가-”


“손 아미.”


안나는 대화에서 튀어나온 프랑스어를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다. 안나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친구인지 작은 친구인지를 놓고 입씨름 중이었다. 안나는 나중에 엘사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지지는 입술이 댓 발 나와 말했다. “둘 다 이뻐요. 그니까 둘이 결혼해요.”


엘사의 귀가 타올랐다. 안나도 자기 얼굴이 빨개진 걸 알아챘다. 오큰은 주방에서 나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애들이란. 웃기죠? 야?”


안나도 억지로 웃었다.


“저녁 준비 끝났어요.” 안드레가 외쳤다. 엘사는 불 위에 앉은 사람처럼 튀어 오르더니 식탁에서는 안나와 제일 먼 자리를 골라 앉았다.



-



“이런, 완전 피곤해.” 안나는 허공에 기지개를 쭉 피며 하품을 했다. 상의가 딸려 올라가며 청바지 위쪽 맨살이 살짝 드러났다.


엘사는 가까스로 하품을 참았다. 엘사는 몸을 웅크리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안나와 같은 방에 들어가서 같이 잘 준비를 하며 누가 어디서 잘 건지 정할 걸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산책 좀 해야 겠어요.” 엘사가 빠르게 말했다. “제 호텔인데 지리 좀 익혀놔야죠.”


안나는 졸린 듯 끄덕거리더니 순식간에 엘사에게 기대어 제 팔로 엘사의 허리를 감았다. “잘 자요.” 안나의 숨결이 엘사의 목을 간질였다. 안나가 놓아주자 엘사는 몸서리를 쳤고 안나가 엘리베이터에 터덜터덜 타는 모습을 보며 팔을 옹송그렸다.



-



엘사는 네 번째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 하는 중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엘사는 자기 때문에 술집 직원이 겁 먹었다는 걸 눈치 챘다. 엄밀히 따지면 자기는 고용주고 저 사람들은 고용인이니까. 아님 말고.


엘사는 고민했다. 그리고 안나를 피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엘사는 네 번째 잔을 끝냈을 쯤에 완전 솔직해졌다.


엘사는 아주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건 모두 사치코의 잘못이라고.


엘사는 나름 정상이었다. 책도 어느 정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조용하고, 행실도 꽤 바른 편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됐을 때. 아버지가 엘사를 성 윌리브로드 가톨릭 여학교에 보냈다. 엘사의 아버지는 딱히 신실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가치와 엘사와 사고 칠 남자애가 없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만약 그게 당신 걱정거리였다면, 차라리 남자만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게 나았을 텐데.


엘사가 사치코를 만났을 때였다. 사치코는 약간 반항적인데다가 아주 귀여웠다. 사치코는 담배도 피고 욕도 하고 쉴 새 없이 빈정거렸다. 첫 학기, 엘사는 사치코 옆에 앉았다. 엘사는 사치코가 수녀 눈에 걸리지 않고 자기 책상을 태울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사치코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엘사는 사치코가 좋았다. 비록 엘사가 ‘동성애’라는 말을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몸이 닿거나 사치코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엘사에게 음흉한 시선을 던질 때는 이미 동성애가 엘사를 집어삼킨 뒤였다.


엘사는 누가 먼저 키스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엘사는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선생님들과 아버지에게 반하는 행동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엘사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냥 엘사가 흥분한 열네 살짜리여서 그랬을지도.


어찌됐건, 엘사의 아버지가 집에 왔을 때, 둘은 윗도리를 벗고 있었다. 게다가 사치코가 엘사 침대 위에서 엘사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엘사의 아버지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침착하게 사치코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자퇴 수속을 밟더니 첫 가정교사를 데려왔다. 그 뒤 데려온 가정교사들 전부 오십 넘은 남선생이었다.


어쩌면 모두 사치코 잘못은 아닌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잘못일지도.


엘사의 아버지는 엘사를 자기 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기르면서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켰다. 일반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반인들로부터. 대학에 진학할 무렵, 엘사는 사회적 부적응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엘사가 연애는 고사하고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엘사는 여섯 번째 잔을 비웠다.


엘사의 아버지는 엘사를 사랑했고 엘사도 알고 있었다. 엘사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 사실에 계속 붙들려있었다.


아버지의 행동이 믿음 때문이란 사실도 알았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사악한 것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행동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엘사 역시 믿음을 가지기를 바랐다.


엘사는 믿었다.


다만….


믿지 않았을 뿐이지.


엘사는 오큰을 보고 “아주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안드레 역시 멋진 사람이었다. 요리도 잘하고 애들도…. 애들이 그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는 건가. 아주 완벽하고 행복한 가족이었고 엘사는 그 사람들을 ‘사악’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나.


안나.


안나 때문에 사치코 때보다 더 미칠 노릇이었다.


오큰은 차가운 카운터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엘사를 발견했다. 술집은 텅 비어있었고 엘사가 앉은 자리 말고는 모두 정리되어 있으며 불마저 대부분 꺼져 있었다.


“엘사 씨? 괜찮아요?”


엘사는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요?”


“우리 바텐더 집 좀 보내도 될까요? 야?”


엘사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였다.


“위로 모셔다 드릴까요? 야?”


엘사는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동의인지 거절인지 알 수 없었다. 오큰은 엘사를 로비로 데려갔다.


오큰이 최상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을 때 엘사는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기대어 서서 오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엘사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오큰-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오, 야, 당연하죠. 엘사 씨.”


“어떻게… 어… 남자한테 끌린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오큰이 웃었다. “제 남편 봤죠? 야?”


엘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있죠, 제 남편을 보고도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엘사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전 아니거든요. 제 생각에는.”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고 오큰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 있죠, 엘사 씨. 엘사 씨가 알아서 자기 질문에 대답을 한 것 같거든요, 야?”


“네?”


“제 남편을 보고도 끌리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남편을 보고도 끌리지 않을 텐데요.”


“아….”


엘사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며 슬쩍 침실을 보았다. 침대 위에 산발을 한 빨간 머리와 이불이 보였다. 엘사는 침대 위로 올라가 안나를 깨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혹은 안나에게 키스를 한다면 어떻게 될지.


안 좋은 생각이야. 아직 정신이 말짱한 부분이 엘사에게 말했다.


엘사는 소파로 다가가 털썩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가죽 커버에 얼굴을 묻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빠는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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