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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12

번밀레(211.206) 2020.01.02 17: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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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정말 미안해요. 정말로요.”


“엘사 씨, 괜찮아요. 잠들면 그럴 수도 있죠.”


“별로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어요. 그런 짓 하면 안 되는데.”


“정말 괜찮았어요. 불편했으면 제가 깨웠겠죠.”


둘은 입국장을 향해 걸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건 그렇고 꽤 귀여웠거든요-”


한스다. 저기 서있네. 바보처럼 함박웃음 짓고서.


“이제야 왔네요!” 한스가 두 팔을 쭉 벌리며 말했다. 안나가 뛰어와서 안기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오늘 정말 최고에요!”


안나는 속이 불편했다. 아, 세상에, 어떻게 해야 하지? 저렇게 멋진 머리를 하고서 바보 같이 웃고 있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안녕, 한스.” 안나는 한스의 어깨 위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서는 대답했다. 지금 말할 수 없었다. 공항 로비에서는 할 수 없었다.


당장 안나와 엘사 뒤 좁은 통로에 늘어선 사람들이 두 사람이 어서 지나가길 기다리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안나는 앞으로 약간 움직였다. 엘사가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한스는 안나를 잡아당겨 꼭 끌어안고서는 정수리에 키스를 퍼부었다. “여행 재미있었어요?” 한스가 물었다.


안나의 시야에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는 엘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럼요.” 안나가 한스의 품에서 빠져나와서는 더플백의 끈을 고쳐 매며 말했다. “꽤 좋았어요. 차는 밖에 있어요? 엘사 씨가 집에 갈 준비가 됐나 봐요.”


“그렇죠….” 한스는 상처받은 것처럼 말했다.


멍청이. 상사한테 반해서 저 강아지를 뻥 차버리다니. 상사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면서.


안나는 차 안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자기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퀘벡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든 것이다. 안나는 오큰과 일가족에 대해 말하고 리조트와 도시와 스키장에 대해 떠들었다. 생각나는 것은 모두 말했다. 한스는 안나 해주는 스키 얘기에 웃음을 터뜨렸고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나니 한스는 안나가 자신의 배웅에 보인 성의 없는 반응을 어떻게든 극복했음이 틀림없었다. 안나는 한스더러 헤어지자고 하더라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엘사를 먼저 내려준 뒤, 안나는 더욱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하지만 다가올 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엘사가 차에서 내려 뒤로 돌자마자 한스는 손을 뻗어 안나의 머리를 넘겼다.


“그래서 오늘 무슨 영화 보고 싶어요?”


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게… 그냥 집에서 쉬는 건 어때요?”


한스는 당황한 듯 안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오늘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겁쟁이. 안나는 더 이상 말할 이야기도 떠오르지 않아 자기 자리에 앉아 집까지 가만히 왔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안나는 한스와 조금 거리를 두고선 앞서 걸어갔다. 한스가 자기 표정에서 불안함을 읽고 말을 거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불행히도 문이 걸림돌이었다. 멍청하기도 하지, 출장 가기 전에 꽁꽁 잠가놨으면서.


“그래서 무슨 문제에요?”


“문제요?” 안나가 되물었다. “문제 없어요… 전부 좋은 걸요….” 안나는 아주 어색하고 설득력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열쇠를 꽂고 돌리자 잠금이 풀렸고 안나는 문을 밀어 열었다.


한스가 안나를 붙잡고는 자기 쪽으로 향하게 돌렸다. 한스는 안나의 한 쪽 볼을 손으로 감싸고는 자기의 초록 눈으로 안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에요, 안나?”


“저는….” 안나는 시선을 피하며 한스의 손에서 얼굴을 뗐다. 지금이 바로 말해야 할 순간이야. 정신줄 놓기 전에 어서. “한스, 당신이랑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어요.”


안나는 계속 발끝만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가 풀리며 바닥이 질척거려 신발이 온통 지저분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나요?” 한스가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안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상처 받아 보였다.


아 세상에.


“당신 잘못은 없어요! 전부 제 잘못이죠. 완전 제 잘못이에요.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잘생겼고 재미도 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해요. 그냥….”


우와.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완전 얼간이 같네.


“말하기가 정말 어렵네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당신은 이런 취급 받을 사람이 아닌데. 일주일동안 출장 갔을 때 당신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어요. 그게- 정말 나쁜 얘기인 건 아는데요. 사실이에요. 당신이 완벽하고 재미있고 잘생긴데다가 저도 그걸 아는 데도요. 정말 사실이에요. 그래도 언젠가는 당신한테 어울리는 더 완벽한 사람을 만나-”


한스는 손을 들어 안나의 말을 막았다. “괜찮아요, 안나.” 한스가 부드럽고 침착하게 말했다. 한스는 유감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프랑스 남자한테 반하기라도 했어요?”


“아뇨….” 안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어요.”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안나는 다시 발끝을 보았다. 상황에 어울릴 법한 고리타분한 멘트들이 더 이상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안나는 한스가 뭐라도 말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친구로 지내는 건 괜찮죠?”


안나가 예상하던 말이 아니었다.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스는 한 줄기 희망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당신이랑 보낸 시간 정말 좋았거든요. 정말로요.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안나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과 헤어지다니. “저도 좋아요.” 안나가 말했다.


한스는 기쁜 듯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친구로서 제안할게요. 중국 음식 시켜 먹으면서 구린 영화 한 편 보는 건 어때요?”


“완전 좋죠.”



-



“그래서 그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얘기 해줄 거예요?” 한스가 안나를 밀어내고는 포춘 쿠키를 두 개 집더니 물었다. 한스는 안나에게 쿠키 하나를 건넸다.


“그럴 수 있을지를 모르겠네요.” 안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스는 회사 부사장이기도 하고 아무리 한스를 믿는다고 해도 사무실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 원치는 않으니까. 적어도 그 소문이 엘사 귀에 들어가길 원하지는 않으니까.


안나는 포춘 쿠키를 열고 안에 담긴 종이를 꺼냈다.


곧 인생에 재미가 더욱 넘칠 것이니.


격려 같으면서도 엄청 불길한 말이네.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찬 받을 것이니… 침대 위에서!”


“뭐라구요?” 안나가 비명을 지르며 물었다. 한스는 미친 사람처럼 마구 웃어댔다.


“그거 안 해봤어요? 포춘 쿠키에서 나온 운세 뒤에다 ‘침대 위에서’를 붙여 읽어봐요.”


안나는 자기 운세를 가만히 읽어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곧 인생에 재미가 더욱 넘칠 것이니… 침대 위에서!


“전 안 할래요.” 안나가 말했다.


“읽어 볼래요!”


안나는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말했다. “싫어요!”


영화가 끝나고 안나는 하품을 했다. 어쨌든 하루 동안 두 주(州)에서 시간을 보낸 셈이니까. 한스는 안나를 도와 뒤처리를 한 뒤 코트를 집었다. 한스는 데이트 상대보다는 친구로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한스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불편하지도 않고 같이 있으면 평소보다 더 웃음이 났다. 안나는 엘사와 퀘벡에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릴 때조차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한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신사였다.


“우리가 계속 친구라서 다행이에요, 안나.” 한스가 현관으로 나가며 말했다.


“저도요.”


한스는 문밖으로 나갔다. 안나는 한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친구라.


친구들끼리는 서로 비밀도 얘기하지.


“한스.”


한스가 안나를 돌아보았다.


“엘사에요.”


한스는 당황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안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엘사한테 반했다고요!”



-



안나는 한스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출장에서 있던 모든 사소한 일들과 안나가 엘사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 모두를. 한스는 가깝게 앉아 정말 완벽한 친구처럼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가장 정신 나간 점이 뭐냐면요, 전 엘사가 여자를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안나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시간을 보니 한밤중이었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행이지.


“사설탐정을 고용해볼까요?” 한스가 제안했다. 안나가 눈을 흘기자 한스는 낄낄 거렸다. 안나는 가볍게 한스의 팔을 때렸다.


“사설탐정 고용할 형편이 아니에요.”


“전 할 수 있어요.” 안나는 한스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렇다고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잖아요. 엘사 사생활을 파헤치지는 않을 거예요.” 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스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엘사를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묻는 건 어때요? 친구 누구 있어요?” 한스가 물었다.


“아마 올라프한테 물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안나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봤을 때 올라프가 엘사를 제일 잘 알거든요.”


“봐요.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니까.”


안나는 한스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여자를 안 좋아하면 어떡해요? 그러면 나 다시 좋아해줄래요?”


“안나, 누가 당신을 안 좋아하겠어요. 이렇게 완벽한데.” 한스가 애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나는 대체 왜 자기 인생에 머릿결까지 완벽한 사람이 한 번에 둘이나 등장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공평하기도 하지.



-



안나는 주말을 사실상 건너뛰었다. 다시 엘사를 볼 생각에 신이 나서. 안나는 주말동안 보지 못 한 엘사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모습을 보고는 몹시 들떴다.


“으악!”


안나는 재빨리 뒤로 돌아 카페모카가 올려진 트레이를 붙잡았다. 트레이는 안나가 균형을 잡느라 도넛 상자 위에서 막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엘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침 일찍부터 이것저것 엎으면서 할당량 채우는 거예요?”


“아, 절 너무 잘 아네요. 잘 나가는 사람들은 다 이러잖아요.”


두 사람이 같이 미소 짓고 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안나는 다시 한 번 엘사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 엘사 곁에 가는 것만으로도 안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올라가요?” 엘사가 물었다.


“혹시 이것 좀 올려다 줄 수 있어요?” 안나는 엘사에게 도넛 상자를 내밀었다. “올라프한테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누가 비서인지 모르겠네요.” 엘사가 웃으며 묻자 안나는 재빨리 도망쳤다.



-



기술부서는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내려가려면 별도의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작은 방 안에 간이벽으로 분리된 공간 두 개가 있었고 엄청나게 어질러진 공용공간이 따로 있었다. 오래된 구식 컴퓨터부터 최신 노트북도 모자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무식하게 생긴 컴퓨터까지, 다양한 컴퓨터가 즐비했다. 선도 마구 늘어져 있었다.


“저기요?” 안나가 오래된 키보드가 마구 쌓인 박스를 넘으며 말했다.


낡은 의자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까운 간이벽 뒤에서 검은 머리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도와드릴 거 있나요?”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시멜로? 안나에요. 올라프 있나요?”


“마샬입니다.” 마시멜로가 덧붙였다.


“안나!”


안나는 선이 복잡하게 늘어져 있는데도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올라프가 자기 쪽 벽 뒤에서 튀어나오더니 안나가 깨닫기도 전에 품속으로 파고들어서는 안나를 포옹했다.


“나만의 비밀 공간에는 무슨 일이에요?” 올라프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올라프는 안나더러 따라오라 손짓하더니 자기가 튀어나온 벽 뒤로 사라졌다. 안나는 자기 발만 보며 올라프 뒤를 따라갔다. 마시멜로는 자기 공간으로 사라졌다.


“올라프, 엘사랑 제일 친한 사람이 당신 맞죠?” 안나가 물었다.


“넵.” 올라프는 시디 무더기와 디스크 뭉치를 의자에서 들어 구석에 구겨 넣었다. “여기 앉아요.”


안나는 자리에 앉아서는 불안한 듯 치맛자락을 정돈했다. “그래서….” 안나가 입을 열었다. “엄청 이상한 질문처럼 들리기는 하겠지만… 엘사가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올라프는 혼란스러운 듯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자기 앞머리만 매만졌다.


“그냥 엘사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서요.” 안나가 말했다.


올라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죠. 엘사가 안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안나는 엘사 친구고 여자잖아요.”


안나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억눌렀다.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아니, 제 말은… 여자를 사랑하냐구요.”


“아, 레즈비언인지요?” 올라프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님 바이라던지 판섹슈얼이라던지 그런 거요.” 안나가 한 술 더 떠 말했다. “범주 안에 제가 포함된 거면 되니까요.”


아이고.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너무 늦었네.


올라프는 꽤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아뇨. 몰라요. 물어봐야겠어요.”


“아니, 아뇨, 아뇨.” 안나가 재빨리 말했다. 안나는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안나 옆에 있던 상자에서 90년대에 나왔던 핸드폰들이 떨어졌다. “괜찮아요. 물어볼 필요 없어요.”


“얼마 안 걸려요. 지금 전화 해볼게요!” 올라프가 자기 핸드폰을 집었다.


“지금 말고요!” 안나가 책상 위 핸드폰을 붙잡고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냥 잊어버려요. 알겠죠? 없던 걸로 해요?”


올라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시도는 할게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다시 일 하러 가볼게요.”



-



안나는 이상하게 행동했다. 방법이 두 가지 뿐인 것도 아닌데. 아, 아직도 엘사한테 말하고 있네. 세상에, 말을 하다니. 그렇지만 지금으로선 떠드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다. 안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어색하게 행동했다. 엘사가 안나에게 말을 걸 때마다 안나는 발을 헛디디고 무언가에 부딪혔다. 정신이 어딘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엘사 씨?” 


안나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엘사는 미소를 지었다. 안나는 플레어 스커트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엄청 예쁘면서도 전문적으로 보였다. 엘사는 안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안나를 친구로 여기려고 노력하면서도.


“무슨 일이에요?” 엘사가 물었다.


“이사회장님이 전화하셨어요. 금요일에 이사회와 회의 일정을 잡아줄 수 있냐면서요.”


엘사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이사회라고? “왜 저를 보고 싶대요?” 엘사가 물었다.


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합병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요.” 엘사가 확신 없이 대답했다.


이사회는 규모가 거대했으며 최대주주와 투자자들이 속해있었다. 이사회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정기회의 아니면 엄청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모였다. 엘사가 마지막으로 이사회를 본 건 아버지 사후 두 달 뒤, 엘사를 사장으로 임명하는 자리였다. 엄밀히 따졌을 때 자기 고용주인 사람들 앞에서 말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 도와줄 거죠?” 엘사가 농담 반으로 물었다. 안나는 미소 지었다.


“당연하죠.”



-



수요일 밤이었다. 엘사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드디어 살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게임에 접속했고 헤드셋을 끌어다 머리에 썼다.


“안녕, 엘사!” 채팅 채널이 열리자마자 올라프가 인사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럼.” 엘사는 게임 옵션을 조정하고 올라프와 마시멜로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내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번에 안나가 궁금하다고 물어봤는데 저더러 그냥 잊으라고 했거든요. 근데 못 잊었어요. 그래서 한 번 물어보려고요.”


“어?” 엘사가 말했다. 엘사는 잠시 동안 하던 일을 멈춘 채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안나가 올라프한테 물을 게 있다고 하더니 그 얘기인가? “뭘 물어봤었는데?”


“여자를 좋아해요?”


만약 그 순간 엘사가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더라면 전부 뿜었을 것이다. “뭐라고?”


올라프는 엘사가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게, 제가 엘사의 절친이니까 혹시 엘사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아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왜….” 갑자기 엘사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안나가… 어떻게? “왜 알고 싶다는데?” 엘사가 간신히 물었다.


“글쎄요, 그건 말 안 했어요.” 올라프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엘사가 좋아하는 사람 범주에 자기가 들어가면 엘사가 레즈비언인지 바이인지 판섹슈얼인지 무엇인지 상관없다고 했어요.”


엘사는 컨트롤러를 떨어뜨렸다.


뭐라고?


“어쨌든 안나가 엘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엘사는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엑스박스를 꺼버렸다.


엘사는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나가… 뭐라고?


엘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냐. 잘못 들었겠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엘사는 다시 핸드폰을 집더니 안나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그렇지만…


엘사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울렸다.


“엘사 씨, 안녕!” 밝고 기운 차고 행복한 안나의 목소리가 엘사 귓가를 울렸다.


엘사는 전화를 끊었다.



-



“엘사 씨, 안녕하세요. 지난밤에 저한테 전화했었어요?” 안나가 컴퓨터에서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엘사는 평소와 달리 지각을 했다. 요즘에는 일찍 오는 편이었는데. 안나는 아침시간에 엘사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다. 엘사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안나에게서 시선을 뗐다.


“아… 어… 네.” 엘사가 말했다. 엘사는 말 그대로 자기 사무실을 향해 줄행랑쳤다. “핸드폰이 좀 맛이 가서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냥….” 엘사는 등 뒤로 사무실 문을 닫았다.


뭐지.


안나는 상황이 믿기지 않다는 듯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한 달 전으로 돌아간 건가?

안나는 자기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아냐. 오늘 날짜가 맞는데.


어쩌면 정말 중요한 전화가 있어서 그럴 수도.


내가 모르는 중요한 전화? 아니, 그런 건 없다. 안나는 엘사에게 중요한 전화가 있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엘사의 스케줄에 대해선 모든 것을 다 아니까. 안나는 자기 상사의 이상행동에 대한 증거라도 찾는 것처럼 사무실 이곳저곳을 살폈다.


카페모카도 안 들고 갔어.


무언가 잘못 됐다. 아주 잘못 됐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엘사는 어제 오후 여섯 시까지 안나와 함께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곧장 달려가… 콜 오브 듀티를 했겠지.


안 돼.


올라프가 그랬을 리가 없어.


하지만… 안나는 핸드폰을 들고는 IT부서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 버튼은 눌러봤어요?” 올라프는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대뜸 말했다.


“올라프, 어제 엘사한테 얘기했죠.” 안나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매주 수요일마다 얘기하는 걸요.”


이런 상황에서 안나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아뇨. 올라프한테 물어봤던 걸 엘사한테 말했냐는 말이에요.”


“아, 물론이죠!”


멍청한시발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까먹었어요?” 까먹지 않았겠지.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 시도는 해봤는데 기억에 남았어요.” 올라프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물어봤어요. 근데 대답은 안하더라고요. 인터넷이 문제였는지 게임을 나갔었어요. 전화도 안 받았고요.”


세상에세상에세상에세상에….


“한 번 다시 물어볼게요.”


“아니! 아뇨. 다시는 물어보지 말아요!” 안나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무슨 상황에서도 말하지 말아요.”


전화 반대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알겠어요.”


안나는 전화를 끊고 엘사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



엘사는 책상 아래에 숨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꾸 이상한 충동이 들었고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엘사는 회의 준비를 해야 하고 보고서를 검토해야 했으며 전화도 걸어야 했다. 안나와 일에 대해 상의해야 했다.


엘사는 안나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안나가 알고 있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게다가 날 좋아한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엘사는 준비되지 않았다. 엘사는 결코 준비된 적이 없었다. 준비할 수가 없었다.


안나와 함께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계속 완벽했다. 둘은 친구였고 엘사는 안나 곁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안나는 어떤 식으로든 엘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엘사는 이런 감정을 묻어 두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게 뭐지?


안나는 평범하지 않나? 오큰이나 안드레는?


엘사는 평범할 수 없다. 안나는 할 수 있고 오큰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엘사는 자기가 이상하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 안나더러 “사랑해요.”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기는 늘 이상할 테니까.


엘사는 노크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몸을 움츠렸다.


안돼안돼안돼, 아직 안 돼. 할 수 없어.


“엘사 씨….” 안나는 부드럽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올라프가 말했다는 거 들었어요.”


“저… 저 지금 바빠요!” 엘사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안나가 애원하듯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엘사가 말했다. 엘사는 배를 움켜잡았다. 긴장했는지 속이 마구 뒤틀렸다. 엘사는 할 수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문고리가 움직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은 잠겨있으니까.


“제발요, 엘사.” 안나는 절박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를 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 그러면 더 이상 숨을 수도 없고 엘사 인생에서 평범이라는 단어가 영영 사라질 것이다. 문고리가 다시 움직였다. “엘사….”


“저리 가, 안나!” 엘사는 갈라진 목으로 외쳤다. 문고리가 멈췄다. 짙은 침묵을 건너 시계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알겠어요.” 안나가 말했다. 문 너머로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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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닉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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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10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58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1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4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2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28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21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4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2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1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7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4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4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7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6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19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20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0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5 5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2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19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20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5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7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3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31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6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6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4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1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1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6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2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4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2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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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8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6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8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2 0
1123665 이럴 때 정신놓으면 갓반인 된다 [2] ㅇㅇ(223.62) 06.06 32 0
1123664 말라간다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5 0
1123663 단편이나 떡밥 내놔!!! ㅇㅇ(211.234) 06.06 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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