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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15

번밀레(211.206) 2020.01.10 03: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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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12편


13편


14편



월요일 엘사는 일찍 출근했다. 평소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아침마다 시계바늘이 가는 게 두려웠다. 출근할 시간이 되어 차에 타고 출근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싫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엘사는 시계를 뚫어져라 보며 바늘이 좀 더 빨리 움직여 안나를 볼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여덟시가 되자 엘사는 가방을 쥐고는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엘사 마음 한가득 행복이 차올랐다. 너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지 엘사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미소를 지었고 차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보안직원이 엘사를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렌델 회장님.” 직원이 말했다. 엘사는 직원이 충격 먹은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본다는 걸 깨달았다.


“어… 좋은 아침이에요.” 엘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엘사는 이 여자가 지난 이 년 동안 계속 아침인사를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지만 엘사는 아주 기본적인 대답만 해왔다. 아버지는 엘사가 그 무엇보다도 예의를 중시하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멈추어 서서 인사 건네는 사람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엘사가 물었다.


직원은 누가 봐도 충격 받은 것 같았다.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조- 좋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은 어떠세요?”


“저도 좋아요. 고마워요.” 엘사는 다시 미소 짓고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는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사 뒷통수로 직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했다.


엘사는 안나의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낼까 하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척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두 사람은 토요일에 하루 종일 껴안은 채로 안나가 고른 ‘파이어플라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둘은 안나가 무언가 볼일이 있을 때 빼고는 계속 찰싹 붙어있었다. 일요일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하루 밖에 안됐잖아. 엘사는 스스로를 꾸짖고는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혼자 질척거릴 필요는 없으니까.


안나 책상 위에서 안나를 계속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안절부절 하며 돌아다녔다.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안나가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안나가 출근할 때 어딘가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자기 사무실로 가는 중이거나 화장실에 가는 중이거나.


엘사는 사무실 앞을 빙글빙글 돌며 창문 밖을 흘끗거렸다. 혹시라도 안나가 역에서 나와 건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하며. 실제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엘사는 지금 건물 꼭대기에 있고 안나 머리가 아무리 붉다 해도 여기서는 눈에 띄지가 않으니 말이다.


세상에, 엘사는 문 앞을 돌면서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엘사는 손을 배배 꼬며 벽에 걸린 시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십 분 정도 지나자 안나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사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고 뱃속이 뒤틀렸다. 갑작스러운 공황이 엘사를 덮쳤다. 엘사는 가방을 급하게 쥐고는 자기 사무실로 후다닥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내가 왜 숨었지? 엘사도 알 수가 없었다. 엘사는 안나 사무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엘사?” 안나가 이름을 부르자 엘사는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침착하게 행동해. 엘사는 문을 열고는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안나는 책상 옆에 서서 책상 위에 티미스 커피 두 잔과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안나는 장식이 달린 꽃무늬 블라우스와 펜슬 스커트를 입었고 평소처럼 머리를 대충 묶고 있었다. 엘사를 보자 안나 얼굴이 해가 뜬 것처럼 밝아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나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엘사도 안나를 향해 걸어왔다. 속이 마구 뒤틀려 손이 배배 꼬일 것만 같아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좋은 아침.” 엘사 역시 두 팔을 뻗으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엘사는 도망가지 않은 점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했다.


안나는 엘사를 끌어당겨 꼭 껴안고는 따뜻하게 입을 맞추었다. 엘사는 안나 입술에서 박하맛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안나의 향을 맡았다.


“헬가 씨가 겁에 질렸던데요.” 안나가 키스를 멈추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두 팔은 아직 엘사 허리춤에 감고 있는 채였다.


“헬가요?”


“보안 직원이요. 오늘 눈 마주치고 아침인사 했다면서요. 안부도 묻고요. 제가 약이라도 탔냐고 묻던데요.”


엘사는 이 말을 듣고 화를 낼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안나의 웃음기 가득한 눈을 보고는 안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랬던 거 아니었어요?” 엘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안나에게 키스했다.


엘사는 키스를 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에 온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엘사는 안나가 자기에게 팔을 두를 때의 감촉과 몸을 붙이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키스를 할수록 엘사 마음속의 죄책감이 점점 줄었다. 이 관계가 잘못 됐을 리가 없지.


허리춤에 올려져있던 안나의 손이 포옹을 풀고는 갈팡질팡하다가 엘사의 등을 따라 올라갔다.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안나의 손길은 아주 부드러웠지만 엘사의 몸이 기쁨으로 흐물흐물해지기엔 충분했다.


안나의 혀가 엘사의 입술을 핥자 엘사는 다시 한 번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었다.


아, 세상에. 안나가 이럴 때마다 엘사는 놀랐다. 온 몸의 신경 하나하나에 자극이 도는 것만 같았다.


엘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렇게 쑥맥인데 대체 안나가 무엇을 보고 자기한테 반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안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안나의 손은 어느새 엘사의 어깨 위에 얹혀있었다. 안나는 한 쪽 손을 엘사 목으로 옮기더니 엘사의 머리를 헝클였다. 안나는 엘사의 윗입술을 혀로 훑으며 엘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엘사는 이 새로운 감각 때문에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엘사는 단지 안나와 키스했다고 이정도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안나는 엘사를 몸으로 누르며 책상 위로 이끌었다. 엘사도 안나를 따라 책상에 등을 기대고는 온전히 안나에게만 집중했다.


안나가 이번엔 엘사의 아랫입술을 탐했고 엘사는 대답 대신 입을 열어 안나의 혀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혀가 부드럽게 닿더니 서로를 맛보았다. 엘사는 안나의 블라우스를 움켜쥐었다. 이 모든 일에서 순전히 느껴지는 감촉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엘사의 머리를 쓸던 손이 엘사의 등 뒤로 향했다. 안나는 엘사의 재킷 아래로 손을 넣어 블라우스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블라우스가 엘사의 바지 속에서 끌려나왔다.


안나가 손을 넣어 엘사의 맨 등을 만지자 엘사는 펄쩍 뛰어올랐다. 엘사는 몸을 뒤로 빼고는 숨을 가쁘게 쉬었다.


안나는 멋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고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다. “미안해요. 분위기를 너무 탔네요.” 안나는 하나도 미안해보이지 않았다.


“으으음….” 엘사는 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알아차렸다. 엘사는 손을 등 뒤로 해 셔츠를 다시 바지 안에 찔러 넣었다. 손이 떨렸다. “오늘… 업무 해야죠. 다른 일도 있고요. 회의도요.”


“당연하죠.” 안나는 잊고 있던 티미 커피를 집으려 엘사 주위에서 폴짝 대고 있었다. 어떻게 안나는…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엘사는 아직도 책상을 부여잡고 있었다. 안나가 가방과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엘사는 그걸 받아들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하려 애썼다. 안나는 코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가 너무 세게 밀어붙였나요?” 안나가 가방 안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엘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전 그저… 음… 기대하던 거랑….”


안나는 작게 미소 짓더니 시선을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안 미안할 줄 알았어.


하지만 그건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엘사는 그저 너무 행복할 따름이었다.


“이건 뭐에요?” 엘사가 안나의 가방을 열고는 물었다. 안에는 도넛과 머핀, 그리고 포장된 샌드위치가 있었다. 엘사는 음식들을 꺼내서는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엘사 몫은 잡곡 베이글이었다.


“진짜 음식이요.” 안나가 자기 베이글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큰일을 앞두고선 든든히 먹어야죠.”


“안나도 알겠지만 진짜 계란을 쓴 것 같지는 않아요.” 엘사는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절대 계란으로 만든 맛은 아니네.


“그래도 단백질이 있잖아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해요. 모두에게 메시지를 보내놨어요. 열한 시에는 여기 올 거예요. 점심 겸 회의도 하면 더 편안하고 허물없을 테니까요.”


엘사는 베이컨을 삼키다가 질식할 뻔했다. 엘사는 기침을 마구 하고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모두한테요? 무슨 회의인데요?”


“어제 스케줄표에 넣어놨어요.” 안나가 사실대로 말했다. “이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요- 일단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만요. 위성으로 메시지 전송하는 건 따로 뭐가 필요하더라구요. 평소처럼 정리할 게 엄청 많았어요. 항공편 예약은 엄두도 안 나더라구요. 그래서 스카이프로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엘사는 안나가 한 말 하나하나를 들을수록 공황에 빠졌다.


“왜요?” 엘사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물었다. 샌드위치를 너무 꼭 쥐고 있느라 계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해요.” 안나가 말했다. 안나는 자기 베이글을 크게 한 입 물고는 카페모카로 목을 축이고 다시 이어나갔다. “이사회에서 당신이 좀 더 사교적이길 바라니까 높으신 분들부터 시작해야죠. 사람들에 대해서 각각 정리해놨으니까 당신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이라도 있는지 확인 해봐요. 애들은 잘 지내는지 묻고요.”


엘사는 공황을 다스리려 애쓰며 자기 샌드위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안나가 옳았다. 젠장. 엘사는 높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가능한 사람들과 친해져야 했다. 엘사는 안나의 계획에 감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턱까지 차오르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엘사는 평소에 회의 참석을 피했다. 엘사의 주요 업무는 서로 다른 부서에 보고서를 받는 것이었는데, 이는 엘사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인 메일로 진행되었다. 메일로 받으면 생각할 시간도 가질 수 있었고 방해도 받지 않았으니까. 혹시라도 회의를 해야 하면 일대일로 진행하여 후폭풍을 최소화했다.


엘사는 사람들이 앞에 있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다루어야 할 사안들이 있기는 했지만 체계화도 되지 않았고 모든 말을 기억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일을 망치면 망쳤지 좋게 풀어나가지는 못하겠지.


엘사는 걱정이 태산이라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 했다.


“저기요.” 안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안나는 엘사의 한쪽 손을 잡더니 엄지로 손등 위에 원을 그렸다. “오는 사람 개개인마다 노트랑 질문을 준비해놨어요. 알겠죠?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고요.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어서 서둘러야 해요.”


안나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놓은 것 같았다. 날 위해 잔뜩 준비하느라 일요일을 통째로 날렸겠지. 이렇게 착하고 완벽한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자기를 도우려고 한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저를 위해서 전부 준비했어요?” 엘사가 믿기지 않다는 듯 물었다.


“당연하죠.” 안나는 엘사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얼른 샌드위치 먹어치워요. 할 일이 많네요.”



-



안나는 방금 막 카페모카를 한 잔 마셔놓고도 회의실로 들어서며 새 커피 한 잔을 따랐다. 안나는 설탕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자기 커피에 또 설탕을 넣었다. 엘사를 위해 노트를 만드느라 어제 너무 늦게 잔 모양이었다. 안나의 원동력은 사랑과 카페인이었다.


빨래방에 앉아 엘사의 곤란한 처지에 대해 생각할 때 아이디어가 안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나는 엘사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사람들과 대화를 시켜야 했다. 아이디어에 대해 엘사와 상의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를 해봤자 엘사의 걱정만 심화시킬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할 만 했다. 엘사의 일을 도우는 건 진흙탕 속에서 보석을 꺼내 닦는 일처럼 느껴졌다. 일을 도울 때마다 안나는 엘사가 자길 평범한 돌덩이로 생각하느라 가려져왔던 광채를 발견해냈다.


야,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비유네. 안나는 미소 짓고는 일에 집중했다. 모든 자리에 머그잔을 놓고 자기가 직접 고른 쿠키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안나는 이번 회의가 격식 없는 자리로 느껴지길 바랐다. 아렌델 사의 ‘얼음여왕’말고, 안나가 아는 그 엘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점심 회의를 선택한 것이다. 먹을 때 기분 안 좋은 사람은 없으니까. 유일한 걱정은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뿐이었다.


한스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그 뒤로 크리스토프가 따라왔다. 크리스토프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쿠키 두 개를 해치웠다.


“한스! 자꾸 여기저기서 나타나네요.” 안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제 상사 분은 못 온다고 하시네요.” 한스가 안나 반대편 자리의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 한스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의미심장하게 윙크를 날렸다. “그건 그거고.” 한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친구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어요?”


안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한스는 대답 대신 얼굴을 활짝 폈다.


“좋아 보이네요. 엘사랑은 어떻게 됐어요?” 한스가 조용히 물었다.


안나가 전부 얘기하려는 찰나 엘사가 이사회실로 들어왔다. 엘사는 갈 곳 잃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안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아주 좋죠.” 안나는 한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엘사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앉아요.” 안나가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점심은 초밥 도시락이었다. 엘사는 자기 점심을 먹지는 않고 툭툭 건드리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들어왔다. 안나는 엘사를 쿡 찔러 한 명 한 명에게 웃으며 인사하라 시켰다. 안나는 임원들이 놀라움을 감추려 하는 모습을 보고 자부심을 느끼며 환하게 웃었다.


맞아. 얼음여왕은 없지. 걱정꾸러기는 있어도.


다들 자리에 앉아 쿠키를 먹으며 평범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더러 잡담에까지 끼어들라고 시키지는 않았다. 단지 듣기만 하며 때가 됐을 때 회의를 더 잘 이끌 수 있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했다. 안나는 엘사 옆에 앉아 한스와 주말동안 엘사와 무엇을 했는지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는 일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삼십 분이 지나고 사람들이 각자 점심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쯤 안나가 엘사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요?” 안나가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소곤 말했다. 엘사는 아직 남아있는 초밥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차 앞에 뛰어든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며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신 응원의 의미로 엘사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제 시작할 시간이었다. 안나는 몸을 숙이고 엘사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홀딱 벗었다고 생각하고 노트에 적힌 걸 따라해요.”


엘사의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엘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에구, 앞 말은 하지 말걸.


“저 사람들이 벗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엘사가 잠시 뒤 속삭이며 대답했다. 소리 죽여 웃는지 엘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안나도 씨익 웃었다.


“그럼 재미없잖아요. 맞죠?” 안나는 자기 자리에서 몸을 살짝 때고는 엘사의 목에 좀 더 손을 대고 있다가 뗐다.


엘사는 요란하게 목을 가다듬더니 자리에서 곧게 일어섰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엘사가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매월 정기 회의를 열기에 앞서 우선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이전에 이메일로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해왔지만 이렇게 직접 보고 대화하는 게 더 좋은 소통이라 생각해서요. 이 자리에서 각 부서에서 각자 보고서를 통해 문제가 무엇인지 자유롭게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렌델 사의 소통 능력을 더욱 성장시키면 좋겠지요.”


살짝은 사무적으로. 안나가 해냈다는 듯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효과가 있나봐. 임원과 부장들이 회의실 안에서 몰래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렌델 사의 CEO께서 ‘소통 능력’을 입에 올린 게 꽤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인사부의 카이만 제외하고. 카이는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는 듯 엘사에게 자부심 넘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스도. 한스는 테이블 위에 곱게 손을 올리고는 엘사의 말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서머즈 씨가 오늘 회의의 주제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자기 태블릿을 꺼내더니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우선, 한 분 한 분께 짧게 보고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각 부서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예전 성과, 아니면 무엇이더라도 좋으니 이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애로사항을 말해주세요.”


안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말을 받아 적었다. 그래도 엘사가 조리 있게 말을 하는 모습에 안도하며 편안하게 있었다. 안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집중하여 듣고는 엘사가 자기가 미리 건네 준 답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사는 아직도 긴장이 덜 풀린 상태였다. 등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꼿꼿했으며 두 손은 노트북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엘사는 잘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거기에 잘 응답하고 있었고.


모두들 보고를 끝마친 뒤, 임원들은 안심한 듯 더욱 시끄럽게 잡담을 나누었다. 엘사는 잠시 시선 밖으로 벗어나 눈을 감고는 심호흡을 했다. 안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핀 뒤 엘사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살이 닿자 엘사는 자기 자리에서 움찔거렸다. 한스가 궁금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았다.


“쥐 났어요.” 엘사가 얼굴을 물들이며 말했다. 한스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원래 나누던 대화로 돌아갔다.


엘사는 ‘행동 조심해’라고 하는 듯 안나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너무 예민해서 자기가 벗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네.


좋아, 시동 걸렸어.


하지만 안나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안나는 엘사의 무릎에서 손을 치웠다.


“그대로 해요.” 안나가 말했다. “완전 잘 하고 있어요.”


엘사는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위즐턴 사의 합병에 대해 우려하는 점이나 질문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안나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필기를 시작했다.




-



“사무실에 숨어 있을 거예요?” 안나가 엘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회의가 끝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는 각자 사무실로 돌아가려 홀을 가득 채웠다. 엘사는 기진맥진 해보였다. 그러면서도 만면에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안나가 부드러운 손길로 엘사의 등을 쓸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자기 물건을 정리하느라 남아있어 그 이상으로는 하지 못했지만. “너무 장해요.”


안나는 엘사의 눈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엘사의 눈 속에는 고마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건 물론이고 자기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나는 당장이라도 키스를 하고 싶었다. 안나는 엘사를 향해 빠르게 미소를 짓고는 커피잔과 샌드위치 포장지가 쌓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세상에, 고위급 임원들도 이 학년 애기들처럼 자리를 어지럽히다니. 안나는 쿠키 부스러기를 치우며 생각했다.


“감명 깊던 걸요.” 문가에서 누군가 느릿느릿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크리스토프가 회의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뭐가 감명 깊었는데요?”


“얼음여왕이요.” 크리스토프는 엘사가 빠져나간 문을 엄지로 홱 가리켰다. “거의 사람 같았어요.”


“엘사도 사람이에요.” 안나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냥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면 알 수 있어요.”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나 뒤에 있던 의자들을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제 말이 맞아요.”


“당연하죠. 당신이 하는 말인데 놀랄 일도 아니죠. 한스도 사람으로 보는 분인데.”


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시작이시네-”


“일단 들어봐요.” 크리스토프가 안나 앞으로 몸을 밀고는 자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한스가 무슨 계획인지 아직도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요, 얼음여왕이 연관된 건 확실해요. 어쩌면 당신을 통해서 엘사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걸지도 모르고요. 한스랑 키스를 하고-”


안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 중 어느 부분에서 제일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틀린 정보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제 한스랑 더 이상 키스 안하니까요.”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기뻐서 춤이라도 청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 다행이네요. 그 자식 술수에 넘어간 거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눈치 하나는 빠르니까-”


“크리스토프, 사실.” 안나가 말을 뚝 끊었다. “한스는 아직도 좋은 친구에요. 그거 알았으면 좋겠네요.” 안나는 눈을 가리던 앞머리를 넘기고는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 지금 엘사랑 사귀고 있어요.”


크리스토프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엘사요?!” 크리스토프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물었다.


안나가 입을 조심히 놀려야 할 차례였다. 미친, 저 얘기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안나는 몸을 돌렸다.


“엠마라고 했어요.” 안나는 최대한 어이없고 상처받은 것처럼 말하려 애썼다. 엘리베이터 쪽을 보았는데 아무도 크리스토프의 고함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처럼 보였다. “엠마요. 엘사가 아니라.” 안나는 차분한 듯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엘사라고 했잖아요.”


“아뇨. 안 그랬어요.”


크리스토프는 눈썹을 치켜떴다.


안나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붙잡고는 복도로 끌고나가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다. 안나는 사무실 문을 쾅 닫고는 말했다. “네. 맞아요. 엘사 맞아요.” 안나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다른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입 하나 뻥끗 하지 마요. 내가 당신을 치워버리지 않게 도와달라는-”


“저기, 저기요. 무생물한테도 말 안 할 거예요.” 크리스토프가 항복하는 듯 제스쳐를 취하더니 재빨리 선언했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벤은 빼고요. 스벤한텐 말해도 괜찮죠?”


안나는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요. 스벤은 말 안 하니까요.”


크리스토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스벤도 말해요.”


안나는 그 문제로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는 자기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가능한 한 빨리 오늘 회의한 내용을 문서로 옮겨야 했으니까.


“엘사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한스와 친하게 지내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건 알겠죠.”


“위험하지 않아요.”


“한스도 당신이랑 엘사 사이 밀회에 대해 알아요?”


안나는 크리스토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밀회가 아니에요. 당신이 신경 쓸 문제도 아니고.”


“좋아요. 내 말은 무시하던가요.” 크리스토프는 과장되게 숨을 내쉬었다. “가야겠어요. 한스가 요새 저랑 스벤은 접근조차 못하게 하고선 무언가 꾸미고 있거든요. 지금 회의 갔겠네요.” 크리스토프는 마치 비난이라도 하듯 말했따.


“다들 합병 때문에 바쁘잖아요. 한스는 부사장이기도 하고요. 합병에 돈이 빠질 수가 있나요.”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가보네요.”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사라질 때까지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를 보며 미친 듯이 노트북을 두드렸다. 비서에게도 비서가 있다니, 들어본 일 중에 가장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나의 손가락이 느려졌다. 그러면… 만약 나한테 비서가 있다면 엘사와 붙어있을 시간이 늘어나겠네. 안나는 자기 비서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엘사가 얼마나 예쁜지 떠들어대는 상상을 했다.


한스에게서 음성메시지를 받고 나자 안나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됐다. 첫째, 한스는 지금 회의 중이라 비서를 구해달라는 요청에 답신할 수 없다. 둘째, 엘사랑 키스를 하도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비서가 비서를 쓰는 건 이상한 일이 맞다.


안나는 업무 일람에 ‘엘사 눈 바라보기’를 추가한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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