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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08~09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19 23:12:58
조회 809 추천 59 댓글 14


1화[유혈]


2화[고어]


3~4화[고어]


5~7화(1)


5~7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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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안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이두나는 안나에게 오로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 작업이 끝나면 그녀를 본사로 복귀시킬 것이라는 그녀의 정보였다. 그 목적으로 오로라는 안나에게 한껏 친절을 표시한 것이었다. 물론 서로 간에 거슬리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다만, 안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기에 마음이 걸렸다. 하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해진 안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탕비실 밖으로 나갔다. 카운터 데스크 밑에 하얗고 거대한 애벌레가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유전자 조작 실험의 실패로 태어난 장수풍뎅이의 애벌레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안나의 위장복을 한껏 껴입은 오로라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안나는 오로라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쌕, 쌕, 잠든 숨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감기라도 걸릴까 안나는 무의식적으로 오로라를 걱정했다. 안나는 고민하지 않고 오로라를 살짝 들어 탕비실 속 침대에 뉘였다. 오로라는 갓난아기처럼 잠도 깨지 않고 순순히 안나의 팔에 안긴다. 위장복에 물기가 남아있었지만 바닥은 전차의 표면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일반인이라면 뼈가 눌려 아침에 일어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얀 고치에 이불을 덮어주자 고치가 끙끙 소리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런 오로라를 뒤로 하고 안나는 카운터로 나와 부서진 라디오 잔해와 눈이 녹아 완전히 물바다가 된 현관을 번갈아 봤다. 아직 새벽 2시가 겨우 지나는, 아침이 오지 않은 진회색의 하늘이었다. 얼마 안 가 안나는 라디오 잔해를 모두 모아 쓰레기통에 쏟아부었고, 가게 뒤 편 창고에서 걸레와 눈삽을 찾아냈다.


누군가에겐 긴 밤이.

누군가에겐 짧은 밤이 눈보라에 섞여 사라졌다.




31.

눈을 떴을 때, 오로라는 그녀가 본 하늘이 어젯 밤 자신이 누웠던 카운터 구석의 갈색이 아닌 탕비실의 초록색 천장임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라디오는 꺼져 있지만 난로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스칼렛이 없었다. 벌써 떠난 건가? 아파트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설마 사장님이 알려주신 건가? 온갖 생각이 22구경 총알처럼 오로라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일어났어요?"

탕비실 문을 열고 눈삽을 든 안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입가엔 안개처럼 입김이 서려 있었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본 스웨터와 우모를 그대로 입고 있었지만, 곳곳에 눈이 젖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밖에 눈이 잠깐 그쳐서요. 그래서 눈을 좀 치웠어요."

"절 눕힌게 당신이에요?"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였다.

"몸은 괜찮아요? 새벽에 보니까 구석에서 자고 있으시던데."

"괜찮은데... 괜찮은데..."

정말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오로라는 안나를 물끄럼이 쳐다봤다. 고글 속의 눈은 어떤 빛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쓰고 있는 흰색 마스크도 그 안을 알 수 없었다.

"괜찮으면 일단 일어나서,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요. 힘 좀 썼더니 금방 배고프네요."

안나가 눈삽을 벽에 세워놓으며 오로라에게 말했다. 오로라는 위장복의 점퍼를 벗어 안나의 몸에 둘렀다.

"스칼렛, 몸이 얼음덩이에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케이크하고 커피 뎁혀 드릴 테니 방에서 쉬고 있어요."

위장 바지까지 벗어 안나에게 건낸 오로라는 씁쓸한 마음을 내심 감추면서 카운터로 나왔다. 잠깐 모습을 내민 햇살이 가게 안을 비추고 있었다. 라디오 잔해는 사라졌고, 바닥은 깨끗하게 말라 있었다. 창문 너머 거리의 적설은 어느새 거의 다 치워져 있었다. 약간의 눈 찌꺼기만 치워내면 차도 운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로라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곤 진열장 속의 케이크를 꺼냈다. 곧바로 커피 머신에 에스프레소 캡슐을 넣어 안나를 위한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2.

"빡빡하게 사시네요."

안나가 아파트 거실을 보며 흘린 첫 마디였다.

"곧 리모델링 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바뀌어서..."

오로라는 그 계획을 말하지 않았지만, 안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실은 민트색 벽지로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작은 상자형 텔레비전이 벽 앞에 놓여 있고, 이름모를 식물을 담은 화분이 옆에서 그들이 낸 잔바람에 흔들거렸다. 3인용 소파도 있었지만 텅 비어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에 상자들의 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총기부터 살펴보자구요. 판매측에서 총기들의 소음기를 공짜로 끼워줬어요." 오로라가 가장 위에 놓인 상자를 낑낑대며 열었다. 하얀 위장그물로 묶여진 총신이 긴 저격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샤이택 M-200이에요. 노마드 1050과 케스트럴 4500도 들어 있어요. 혹시 조작하실 줄 모르실까봐 Xactsystem 모듈도 같이 장착된 아이로 구해왔어요."

안나가 샤이택을 꺼내 노리쇠와 방아쇠를 점검했다. 부드럽게 잘 조작되었고, 상자 속에서 탄약들을 꺼내 문질러 보았다. 상태가 좋았다. 계속 운용하기엔 무게 때문에 무리가 있지만 호이스트와 구 건물, 신 건물의 고지대에 있는 적을 저격할 때만 쓰면 될 터였다. 또한 킬플래시(두께있는 철망이 달린 원통)가 부착되어 있어 스코프의 반사광으로 적이 안나를 발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다. 안나가 샤이텍을 다시 상자 속에 넣었다.

"그 다음엔 부무장, 보조 무장이에요."

오로라가 휘청대며 샤이택이 든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엔 안나가 두 번째로 위에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AK-74, 현재 러시아의 제식 소총 중 하나죠. 하지만 이건 실내전을 대비해 총열을 줄인 데다가, 택티컬한 부품으로 세팅을 해놓았어요. 보조 가늠좌와 가늠쇠를 달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어요. 그리고 하이브리드 조준경과 수직 손잡이를 달아 전반적인 교전에 대처할 수 있게 했고....개머리판은 접철식으로 하되, 칙패드를 붙이도록 커스텀 해달라고 했죠."

오로라가 엣헴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안나는 잘했다는 듯이 오로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약간의 당근을 줘야 할 시간이었다.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잘 했어요 오로라. 사무직이셨던 거 같은데,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안나는 순간 오로라의 콧대가 피노키오처럼 더 오똑이 선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경로는 깨끗한 거죠?"

"당연하죠오... 따로 사람을 시켰거든요. 믿을 만한 친구들이에요."

"그럼 다행이고요. 보조 무장은 뭐에요?"

안나가 묻자, 오로라가 바닥에 놓인 작은 나무상자를 들고 뚜껑을 열었다. 검은 권총과 내장이 빠진 듯한 껍데기가 같이 들어 있었다.

"글록 17이에요, 글록 사 정품이고, 옆에 있는 건 4세대 로니 키트에요. 최신 버전으로 준비하고 싶었지만 총기 규제를 피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오로라가 말끝을 흐렸다. 규제용이라도 문제는 없지만 오로라의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친절함에 감사하며 안나가 글록 권총과 키트를 들어 서로 조합했다. 겨우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안나의 손에는 권총이 아닌 컴팩트한 기관단총이 들려 있었다. 잠깐 당텍의 말이 스쳤다. 결과적으로 그의 짧은 조언은 이치에 맞았다. 비슷한 위력에 장탄수가 더 많아야 했다. 어차피 T존을 맞춘다면 고통 없이 죽는 건 모든 무기에 있어 공통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던 콜트 권총을 포기하고 작전에 임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꽃폈다.

"오로라, 여기서 살아봤을 때 주변에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진 않죠?"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좀 외진 곳이다 보니까 무섭긴 해요. 왜요? 보디가드 해주시게요?"

안나는 매고 있던 가방에서 콜트 권총과 탄약 상자, 그리고 여분의 탄창 2개를 오로라에게 들려주었다.

"가지고 있어요. 선물이에요."

오로라가 당황스러워했다. 갑자기 이 여자는 내게 왜 총을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표정에 잔뜩 묻어 있었다.

"일단 이번 작전에선 글록과 로니 키트를 써야 하고, 샤이택과 74 소총도 포함해서 무장은 다 맞췄거든요. 방어 수단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있어요."

"저 총 한번도 안 쏴봤는데요...."

"출발하기 전에 간단하게 몇 가지만 알려 줄테니 숙지해 둬요. 다음 장비는 방탄복이겠죠?"

안나가 다음 상자를 열었다. 흰색으로 도색이 된 조끼형 방탄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탄복 위엔 체스트 리그(가슴에 두르는 탄입대)가 울퉁붕퉁 솟아 있었다.

"Crye Precision의 JPC 플레이트 캐리어에요. 눈이 많이 내리니까 하얀 색으로 따로 도색도 해 놓았고, 4개 들이 탄창 파우치, 카멜백(물을 담는 주머니), IFAK 구급낭(Individual First Aid kit- 개인 응급처치 키트)을 담아 두었어요. 혹시 몰라서 무전기도 따로 넣어 두었으니까 싸장...아니아니! 사장님하고 제때 통신하길 빌어요."

"NIJ 등급(미 법무부 지정 방탄복 방어력 등급)은 어떻게 되죠?"

안나가 캐리어를 들으며 물었다.

"레벨 3+니까.... AK계열 소총탄들은 충분히 방호할 수 있어요."

"잘 외워 뒀네요. 좋은 자세에요 오로라."

또다시 마음의 당근을 던지자 오로라는 헤실헤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요, 스칼렛.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답할 수 있는 선에선 답해 볼게요."

"소형 박격포는 왜 챙겨 가는 거에요?"

오로라의 손가락 끝은 가장 밑에 놓여 있던 나무 상자였다.

"또 뭐지.... 질산 칼륨하고 설탕, 소다는 어디에 쓰시려고..."

오로라는 스칼렛이 원했던 거의 모든 물건들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의 서비스를 더 추가했다. 스칼렛도 이견을 품지 않았다. 다만 박격포는 무엇이고, 저 세 가지의 가루는 대체 왜 카탈로그에 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로라가 생각했던 수행인의 작전은 조용히 처리하는 전쟁 영화 속 특수부대처럼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스칼렛을 보면 그녀는 교전이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해가 안 되실 거에요. 오로라, 객관성의 한계를 기억해요."

안나가 박격포가 든 상자를 열었다. 하얗게 도색된 박격포와 원격 조정 PDA와 전극형 부착 스위치, 그리고 하얀 포탄 세 발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저 포탄들은 소이탄이에요. 어제 제가 화학탄에 대해 잠깐 얘기했죠?"

오로라는 안나의 말을 기억했다. 그녀의 '선생님'이 속한 단체가 화학탄 테러의 누명을 뒤집어 썼으며, 이를 통해 알게 된 객관성의 한계란 개념을 잊을 수 없었다.

"저 소이탄의 폭발 반경에 들어서면 온 몸에 발화 물질이 들러 붙어서 피부를 불태워 녹아내리게 해요. 심하면 폐도 태워버려 죽게 만들죠. 엄청 비인도적이고, 무서운 무기죠. 핵폭탄은 상호확증파괴라는 개념이 깔려 있어 섣불리 핵가방을 열지 못하지만, 이건 규정만 있지, 실질적으로 막지는 못해요."

안나가 소이탄을 들어 오로라에게 보이자, 오로라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터지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이 안에 있는 발화 물질을 좀 덜은 다음, 세 가지 가루의 혼합물을 섞어서 넣을 거에요."

"예?"

"그 세 가지 가루로 연막탄을 만들거에요. 비인도적인 수준은 낮추고, 연막 효과를 추가시키는 거죠."

"그럼 연막 포탄을 주문해달라고 했음 됐잖아요."

오로라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화학탄의 케이스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안나는

"적의 장비들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어요. 아마 대부분 통일했겠지만... 설원이다 보니 체온을 통해 제 위치를 파악하려 할 거에요. 적어도 열화상 장비를 갖고 있을 게 분명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소이탄으로 열 감지를 못하게 하는 동시에 첨가해둔 연막으로 적이 저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이해가 됐어요? 오로라?"

오로라는 그제서야 안나의 의도를 이해했다.

"진짜 수행인은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해야 하는가봐요..."

"수행인까진 아니고, 이전에 속했던 조직 중 한 곳에서 억지로 배웠어요. 보통 작전이라면 팀을 이뤄서 행동하는데, 전 그게 더 힘들어서요. 혼자 바쁘게 하면 외롭지만, 신경 쓸 게 줄어들거든요."

이두나를 떠올리며 안나는 말을 마쳤다. 고립에 익숙해진 이두나를 위해 손을 내민 안나였지만, 정작 안나는 누군가가 내민 손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안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죽어버린 일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가면이었다. 안나는 눈 덮인 섬 속에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뭉개졌다. 또렷이 들리는 건 안나의 떨고 있는 숨소리 뿐이었다.

"....렛, 스...렛?"

귀에 물에 들어간 것처럼 들리는 발음이 부정확했다. 눈 앞도 흐려져 편두통이 온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만 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스칼렛, 괜찮아요? 스칼렛?"

오로라가 안나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때, 안나는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웠던 이 녹슬기 시작했다.

녹이 슨 자리에 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얼음물이 스며들었다.







33.

스칼렛, 진정이 됐어요?

...미안해요. 잠깐만 이러고 있어 줘요. 잠깐만.....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해요. 다 들어 줄게요.

괜찬...괜찮아요. 그냥... 잠깐 쉬게 해 줘요.

누구도 당신을 뭐라 하지 않아요.






34.

"정말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평정을 되찾은 안나는 소파에 앉아 샤이택의 총기번호와 각인을 사포로 문질러 지우고 있었다. 혹시 모를 분실과 거래 추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미국 내에서 했다간 연방법에 걸려 감옥으로 직행하 수도 있는 행위였다. 물론 표면상 적법이고 실상이 불법인 이 작업에 있어선 불법 속의 적법한 행위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사포질을 하는 안나를 오로라는 거실 한켠에 칸이 쳐진 작은 주방에서 안나가 알려준 대로 질산칼륨과 설탕을 냄비에 녹여 숟가락으로 섞고 있었다. 달콤함과 시큼함이 섞인 냄새가 냄비 속에서 거실을 배회하다 베란다의 열린 창으로 몸을 내민다. 오로라는 큼 큼 헛기침을 하면서 이따금 안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심리 치료는 받아 보셨어요?"

안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버텨오신 거에요?"

"작업에 방해될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어요."

"와..."

오로라는 안나의 무대포스러운 인생살이에 할 말을 잃었다. 수행인들은 죄다 이런 건가, 아니면 이 스칼렛이란 자 한명만 이러는 것인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오로라는 심리 치료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적절한 대화와 정서적인 공감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공감의 개념에 대해선 스칼렛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무너질 것 같더라고요. 작업을 할 때는 거의 한 가지 감정만 가지고 활동해야 하거든요. 동요를 띄면 안 돼요. 생각이 많아지니까요."

"생각이 많으면 힘든 건가요?"

"단순히 오늘 저녁 메뉴와 저녁 이후의 여가활동을 동시에 고르는 수준이 아니에요, 오로라."

안나가 실소를 흘렸다. 오로라가 정말로 안나가 말한대로 생각한 것인지 흠칫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리 치료는 모두 거부했어요. 쌓인걸 모두 풀으면 자칫하다간 독이 될 테니까요."

"쌓여도 어차피 안 좋아요..."

오로라가 혼합물이 든 냄비를 내려다보았다. 보글보글 끓고있는 끈적끈적한 갈색인 그것은 마치 진흙쿠키의 반죽같았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입에 넣고 싶지만 먹으면 안 되는 그런 음식. 오로라는 스칼렛의 인생이 진흙쿠키이자 혼합물 같다고 생각했다.

"약점이 될 지도 모를텐데요?"

"아, 스칼렛. 당신 진짜... 너무 답답한 거 알아요?"

오로라가 숟가락을 탕 하고 가스렌지의 삼발이에 내리쳤다. 사포질을 하던 손을 멈춘 안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오로라는 짜증과 답답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약점은 나중에 생각해도 돼요. 스칼렛,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뭘 하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요. 또 한계니 뭐니 할 것 같은데 그건 다 집어치워요. 저한테 털어 놓으셔도 되고 안 하셔도 돼요. 다만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요."

오로라가 소다 봉투를 열어 냄비에 넣으며 안나에게 말했다. 진흙더미 위의 하얀 가루는 금새 녹아 갈색으로 섞어들었다.

"그 일 끝나고 나면, 누군가에겐 속마음을 털기로 해요, 네?"

오로라는 혼합물이 든 냄비를 가져와 안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오로라의 손 안에서 안나의 손이 조금씩 꼼질거렸다.

"....노력은 해볼게요."

"노력 말고 약속이에요. 약속!"

"....약속."

오로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안나와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약속을 마쳤다. 안나는 하던 사포질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포탄을 분해해 발화 물질을 절반 정도 덜어 냈고, 오로라는 혼합물을 빈 자리에 덜어 넣었다. 둘은 남은 포탄의 개조를 마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포탄이 위험한 것이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것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였다.




35.

진눈깨비는 늦은 오후부터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께가 돼었을 때 눈보라로 자라기 전의 굵은 눈송이들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장비를 챙기고 위장복을 입은 안나는 아파트 뒤 창고에서 장비들을 실은 스노우모빌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샤이택과 74 소총, 지렛대는 등에 매어 있었고, 로니 키트를 장착한 글록은 오른쪽 전용 홀스터에, 왼쪽 칼집엔 오로라가 겨우 구한 발라스틱 나이프와 칼날이 들어 있었다.

"정말 괜찮죠?"

오로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끔 오는 거니까 괜찮아요. 한 나흘 정도는 멀쩡할 거니까 걱정 마요."

"힘들면 언제라도 와요! 그리고 이거!"

오로라가 안나의 배낭에 두 주먹만한 보따리를 쑤셔넣었다.

"뭐에요? 배낭 공간 부족한데..."

"그냥 입가심으로 드시라고 초콜릿 좀 챙겼어요. 작업 할 때 잘 못 드신다면서요."

오로라가 헤실헤실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아... 잘 알고 있으시네요. 고마워요 오로라. 잘 챙겨 먹을게요."

"조심히 돌아와요!"

"아마 돌아오진 못할 거에요."

안나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오로라가 살짝 당황하자, 안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 뜻이 아니라 사전에 임무 수행 후 바로 탈출하도록 계획을 짜 두었거든요. 따로 탈출 포인트가 정해져 있어서 이쪽으로 올 일이 거의 없을 거란 뜻이에요. 설령 오게 된다면..."

"오게 된다면?"

"저와 오로라가 심각하게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얘기 안하고 가려 했는데... 뭐 이것도 나름 속풀이겠죠?"

안나는 검은 고글과 복면, 그리고 야간투시경이 장착된 하얀 옵스코어 헬멧을 쓰고 있었다. 샤슈카는 오로라에게 '친구'로써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오로라는 안나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조로 보아선 나름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나중엔 큰 일도 얘기할 수 있겠죠."

"당연하죠!"

오로라가 안나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조금 쌓인 눈더미가 허공에 터져 바닥에 떨어졌다.

"가볼게요. 그럼....아."

안나가 까먹은 게 있다는 듯 잠시 핸들에서 손을 뗐다.

"혹시 사람 좀 찾아줄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요?"

안나는 자신이 찾고자 사람의 머리 색깔과 이름을 알려 주었다. 오로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본 안나는 다시 핸들을 잡아 모빌의 엔진을 재촉했다. 거친 엔진음과 함께 안나를 태운 모빌은 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속으로 사라졌다. 요란한 소리도 어느덧 오로라에겐 희미해졌다. 오로라는 방금 안나가 설명해주고 간 그 사람의 생김새를 속으로 되뇌었다.

엘사, 그리고 백금발의 머리카락.

흔치 않은 이름과 머리색이었다. 찾을 수 있을 진 장담할 수 없었다. 어떤 것이든 아주 흔하거나, 아주 희귀하면 통계학적으로 도출하기 힘든 게 섭리였다.
그럼에도 오로라는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해준 처음의 부탁이기에, 힘 닿는데까지 뛰어보자고 오로라는 두 주먹을 꼭 쥐고 허공에 '아자!' 하고 외쳤다.

그 자신있는 외침은 메아리처럼 회색 도시의 작은 단말마가 되었다.




36.

"여기는 인디아1-1, 블랙퀸, 들리는가?"

굵은 눈송이가 나무 사이를 헤치며 안나의 고글에 부닥친다. 나무들은 쏜살같이 안나의 모빌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무음의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캐리어에 달린 무선 송신 버튼을 누르면서, 안나는 런던 본사에 있을 메가라에게 임무 전 상황 보고를 올리기로 했다. 그 떨떠름한 전 상관은 시차에 상관없이 깨어 있을 것이라고 농장에서의 경험이 확신을 품게 했다.

"...송신 완료. 그래서 무슨 일인데?"

"컷아웃과 접촉 후 장비 챙겨서 장소로 이동 중입니다."

"울프독 치곤 꽤 늦네. 게을러지기라도 한 거야?"

무전기 속 잡음 섞인 피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메가라였다.

"스칼렛이에요?"

희미하게 이두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의 반가움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넣어두기로 했다.

"I(이두나)곁에 잘 있어줘요. 여기까지 다 들리는구만. 제 상관이라도 이건 결국 흑색작전이니까 안 들리게 해둬요."

"알겠어. 며칠 걸릴 것 같아?"

"빠르면 이틀, 늦으면 평생이요."

안나가 약간의 농담을 던지자 무전기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지직거리며 귓가를 간질였다. 같은 농부의 위치에 있었기에 먹히는 농담이었다. 아마 이두나는 웃고 있지 않고 갸우뚱거리고 있는게 보이지 않을 뿐 눈 앞에 선했다.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을게."

"제 목숨 가지고 도박이나 하지 마요. I한테 도박같은거 알려주지 말고."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 무튼 패키지들은 적어도 하나는 확보시켜야 해. 확보 이후에 무전을 보내면 탈출 포인트'E'로 헬기를 보낼 테니까 잘 숙지해 둬."

E포인트면 연구소로부터 남서쪽 10km에 위치한 협곡이었다. 그 협곡 사이의 와디같은 바닥에서 안나는 패키지와 함께 헬기에 탑승, 그곳을 최대한 멀리 빠져나와 CIA 지부에 패키지를 전달하면 100만 여 달러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공작 임무가 아니라 더 쉬운 작업을 수락하면서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엘사를 찾기 한층 쉬워질 터였다. 다만 안나만큼 먹게 된 나이를 고려하면 시간은 어느 정도걸려야 함을 안나는 미리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사람을 팔든 죽이든 이러한 행위는 임무, 그리고 돈이 시키는 것이었다. 안나는 그저 꼭두각시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대가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블랙퀸,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그러니."

"패키지2는 확실하게 신원 보장 할 거죠?"

무전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원래 고장난 무전기에 대고 말하는 PTSD에 빠져든 것 같았지만, 지금의 안나는 멀쩡했다.

"...확실해."

안나도 그녀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 5초 정도 지난 다음에야 안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만 믿어볼게요."

여전히 안나는 꼭두각시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마음을 가진 꼭두각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37.

안나는 연구소로부터 남서쪽으로 1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구릉에 저격 포인트를 잡았다. 숲이 우거져 있었지만 건물들과 적들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모듈의 영점을 조절하자 옥상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헬기장에 착륙해 있는 Mi-26은 반 뼘 짜리 스코프로 보아도 크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옥상에는 메가라의 말처럼 탐조등이 두 개 있었으며, 헬기장 주변으로 4명 정도의 병사가 옥상을 배회하고 있었다. 착용한 장비가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정규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국가 대 국가로 번지는 전쟁은 피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화학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이 찍혔고, 일대일로를 구상중이던 중국의 경우 일대영(0)로라는 희극으로 번질 수도 있으며, 러시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 정부의 낙하산 인사 개입으로 당장은 국내에 일어난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었다. 행여 전쟁의 분위기까지 흘러가도 안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메가라도, 오로라도 알지 못하게 바디캠을 하나 챙겨왔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시기에 언론사를 통해 영상 자료를 뿌려준다면 범지구적으로 총알과 포탄이 휘둘러지는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총과 칼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말과 행동은 마음을 죽일 수 있었다. 방탄에 EMP 차폐 기술까지 적용된 카메라는 훗날 있을지도 모를 큰 일에 대비한 보험이였다.

호이스트는 이미 철거가 완료된 상태였고, 완전히 지어진 새로운 건물은 기존의 연구소보다 한 층 낮은 4층의 석고색 건물이었다. 환경과 어우러지려고 색깔을 맞춘 듯 싶었지만, 현대미술 작품처럼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새로 신축된 건물은 일종의 초소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붕 위로 하얀 그물망이 깔려 있었으며, 초소 안에는 두 명의 병사가 있었다. 한 명은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거치된 기관총의 개머리판을 만지며 망원경을 가진 병사에게 이따금 말을 걸었다. 삐빅 하고 스코프의 붉은 점이 기관총 병사를 향했다. 스코프를 정조준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거리와 낙차를 측정해 표적을 추적하는 모듈이었다. 그 붉은 점을 좇아 스코프의 정중앙에 맞추면, 붉은 점 주변의 푸른 대각선들이 일제히 붉게 점등되어 발사할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이였다.

가져온 헤스트랄 4500과 노마드 1050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게 되자, 안나는 아예 배낭의 바깥 주머니에 두 전자기기를 넣었다. 방탄 배낭이라 걱정은 없겠으나, 혹시 모를 저지력에 대비하고 방탄 기능을 약간이라도 높이기 위한 안나의 계획이었다. 박격포는 위치를 잡기 전 PDA와 연동 시켜 연구소와 초소 앞의 지점에 포격하도록 원격으로 맞춰 놓았다. 안나의 왼손이 주먹을 쥐면, 엄지손가락에 붙은 스위치가 눌려 발사하도록 설계해 두었다. 단독 임무에 적합한 장비인 만큼, 오로라가 적지 않은 지출을 감당했음이 분명했다.

병사들은 두시간 마다 한 번씩 연구소의 출입구에 나있는 눈길을 따라 밑으로 스노우 모빌을 타고 순찰을 나가고 있었다. 한 분대만 그런 것이라고 처음 2시간을 관찰한 안나였지만, 3 개의 분대가 한번씩 순찰을 번갈아가면서 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현재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은 적들이 가장 긴장을 푸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정보로썬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적들의 탐조등은 안나가 있는 구릉을 비추지 못한다. 가장 먼저 샤이택으로 탐조등을 부순 다음 박격포를 작동시켜 연구소 일대를 가리게 한 다음, 자동 장전 장치를 통해 연달아 포탄을 발사해 연막 효과를 지속시키고, 그 때를 노려 방탄유리를 끼운 방독면을 써 초소, 그 다음은 연구소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패키지들을 회수하면 바로 이 구릉으로 돌아와 탈출 준비를 해야 했다. 안나는 잠시 스코프에서 눈을 뗀 다음, 배낭 속에서 작은 실린더들을 꺼냈다. 실린더 바깥으로 총알의 탄두가 뾰족하게 붙어 있었다. 바닥에 뇌관을 건들일 수 있는 작은 돌기가 붙어 있어 적들이 탄두 끝을 밟는다면 그 즉시 격발되어 발과 다리에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이것들을 구릉 주변에 안나만 알 수 있도록 매설시켜 보병의 추격을 늦춰야 했다.

또한 작업 개시 두 시간 전에 초소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눈길을 내려간 다음, 가로질러 나있는 숲의 나무들에 치즈 와이어를 묶어 스노 모빌 분대의 목을 잘라 조금이라도 수를 줄여야 했다. 어차피 회수를 기대할 수 없을 일회성 부비트랩들이었다. 안나는 개머리판을 접은 74소총과 실린더들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캐리어에 달린 카멜백에서 물을 쪽쪽 빨아 마신 안나는 옵스코어에 장착된 야간투시경을 내렸다. 안나의 눈 앞에 드넓은 청록색 빛이 가득 채워졌다.

사전 작업을 하러, 어둠 속으로 진입할 시간이었다.




38.

"스칼렛이 안부 전해 달라는군요."

무전을 마친 메가라가 돌아보며 말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작업 중인 샐리맨더 사의 협업 요청 문서를 꼼꼼히 읽고 있는 이두나가 있었다. 메가라는 사장실에서 이두나의 회사일을 돕고 있었다. 복귀하기 위한 비행편은 3일 뒤에 있었다. 그 때까지 사실상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가라는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업병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남이라면 두 손 들어 환영할 꿈 같은 시간을 보기 좋게 걷어차고 이두나의 비서를 자처했다. 이두나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곧 메가라의 요청을 수락했다.

"협업하는게 더 이득일 거에요. 나중에 우리 쪽에서 요구할 수 있는 메리트가 분명 있을 테니까요."

상이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략적으로 분석하면 군사기업의 일과 농장의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기업의 업무가 더 쉬울 정도였다. 어느 직원에게 누구를 소개하고, 어떤 장비와 무기를 지원할지, 해당 직원의 각 사격 코스는 몇 초 이내 주파를 하며, 어떤 작업에 어울리는지 분석하는 일들은 농장에서도 흔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다만 이곳은 농장과 달리 민영기관이라 직원 사망시 보험금 지급은 누구에게 해야 하고, 계약을 파기할 때 위약금 청산, 타 기업과 협업 및 파견 작업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농장과는 달랐다. 농장은 그저 임무를 전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 스무 명 정도 파견해 보려 하는데, 메가라 요원, 아니 비서 생각은 어때요?"

"베네수엘라 치안이 아무리 망가져도 멕시코 국경만큼 위험하진 않겠죠. 스무 명 정도 파견하되, NIJ 3+등급 방탄 조끼에 사용 무기는 AK계열로 기본 지급 해두죠. 그게 더 탄 수급이 좋으니까요."

메가라가 이두나의 제안을 빠르게 가공해 다시 이두나에게 전했다.

"그쪽 일이 힘들지 않아요?"

"남들에게 명령하는 입장이 되니까 지루하죠. 하지만 더 안전하니까 좋다고 해야 할까요."

메가라가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그건 이두나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메가라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실소를 흘렸다. 이두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방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두나가 보고서를 훑어 보고 메가라가 다시 확인하며, 이따금 수정할 사안들을 알려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메가라는 이두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일할 때 말이 적을지라도 자신 앞에선 말이 많았다고 스칼렛은 떠나기 전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래서 메가라는 스칼렛이라는 캐릭터를 기억하면서 그녀를 연기했다. 그럼에도 이두나는 일에 집중할 뿐 메가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두나?"

"무슨 일이죠."

"혹시 궁금한 거 있어요?"

이두나의 손 위에서 사각사각 움직이던 종이들이 멈췄다.

"질문 해봐요. 이미 기밀을 누설했어도, 더 얘기할 껀덕지는 있으니까요."

이두나가 책상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꼭 다문 입이 무언갈 뱉으려는 건지, 아니면 씹으려는 건지 알 수 없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스칼렛에겐 적절히 의심하되 적절히 수행하라고 일러 뒀어요. 그런데...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아, 그거요? 아시잖아요. 비윤리적 인체 실험에요. 하지만 소스를 더 드리자면, 겉으로는 인간의 선천적인 질환을 없애는 목적이지만 실상은 일종의 초능력자를 만들고 있죠."

"초능력자라 말하시면, 유리 겔라 같은 능력을 말하시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메가라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외모와는 다르게 청아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 하하.. 웃어서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말이에요. 그런 서커스같은 능력은 돈만 들잖아요. 생각해봐요. 가장 은밀한 곳에...초능력을 만든다. 슈퍼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면 쉬워요. 이제 점점 몸에 걸치는 장비로는 한계가 찾아올 거에요. 즉, 안보의 한계가 찾아올 거란 소리에요. 저희 측에선 그걸 예방하기 위해 최근 프로젝트를 하나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 길어봤자 30년짜리 일회성 프로젝트에요. 그게 시간 대비 실효성이 충분한지도 미지수고요. 그래서 소위 먹물이란 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탁상행론을 해가면서 구상한 게... 믿기 힘들겠지만 초능력이에요.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스칼렛이 향하고 있는 그 연구소를 저희 요원이 발견해 조사를 시작했고요. 그곳은 저희가 진행하는 것보다 10년 이상의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어요."

이두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메가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그곳에선 단순히 약물과 수술 같은 실험만 하는게 아니었어요. 사람도 복제하고 있더군요. 어디선가 구해온 DNA를 뽑아서 시험관에다 배양시키는 거에요. 그중에서 살아남은 아이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약물을 붓고, 온몸을 갈기갈기...와악!"

별안간 메가라가 두 손을 들어 이두나를 놀래켰다. 그 작전은 성공했다. 책상 위에 놓였던 종이들이 이두나의 놀람에 휘말려 바닥에 떨어졌다. 메가라가 웃으면서 종이들을 주워 책상 위에 놓았다.

"의외로 겁이 많으시네요?"

"놀리지 마세요..."

"아무튼, 계속 얘기해 보자면 그 약물과 수술을 통해 최종적으로 초능력을 낼 수 있는 아이들이 탄생했어요. 이걸 '개체'라고 명명해보죠. 여기까지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불을 쏜다거나, 눈과 얼음을 부린다거나 이런 걸 만드는 개체들이 있을 거에요. 또한 실험자들이 그들에게 특정한 숫자를 붙였고... 작은 수에 가까울수록 실험에 최적화 되어 있고, 그 능력을 더 잘 다룰 수 있을 거에요. 아니면 더 강하게 쓸 수 있다거나."

"그 아이들을 당신들이 무기화한다... 이말이에요?"

메가라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녀가 신경질을 부릴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무기화라... 일단 환경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아이들을 지도해볼 계획을 입안했어요. 아마 필요하다면...무기화도 가능할 거에요. 아이들의 마음은 빈 캔버스와 같아서 처음 색을 칠하면 노력해서 지우지 않는 이상 그 색깔을 그대로 따르죠. 이슬람 과격단체에서 일고여덟살 아이에게 폭탄 조끼를 씌울 때, 사람들은 코란의 구절을 읽어 줘요. 세뇌에는 차원이란 말이 무색해요. 사상, 이념. 일단 한 가지만 집어 넣으면 기계처럼 죽을 때까지 명령에 따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이들을...!"

이두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메가라의 얼굴엔 짜증이 사라져 있었다. 둘 사이에서 무거운 공기가 흘러내렸다.

"그게 애국이에요. 단지 한 두명이에요. 더 나은 세상 만들겠다고 소수를 존중해서 되겠어요? 당신과 내 나라는 다수결로 정책이 입안되고, 정치인을 뽑는 나라에요. 아, 물론 소수와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정책이 있긴 하죠. 그런데요. 이건 아주 희귀한 특수성에 해당되서, 그런 복지는 해당이 안 돼요. 이름도 없고, 국적도 없는 그 몇 명의 인생에 투자할 예산은 복지부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죠?"

이두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가라의 주장은 거친 느낌이 다분했지만 결론은 맞는 말이었다. 세상은 날로 따뜻해진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고 경고하지 않는다. 메가라의 의견에 감정적인 반대를 품는 이두나마저,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사장실의 의자에 앉아 연구소로 진입중인 스칼렛이 세상이 노리는 먹이들을 최대한 살려놓고 돌아오기를, 어머니였던 사람으로써 기도했다.


메가라가 강조한 애국(Patriot)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애국은 돼지들의 폭동(Fat riot)을 감추는 얉은 껍데기였다.



39.

연구소에 잠입했던 요원은 어떻게 되었죠?

궁금하세요? 정보 주고받는게 들켜서 버림당했어요.

상상 이상으로 매정한 사람이네요, 당신이란 사람은.

이 바닥에서 온기를 바라는 이상론자가 여기 계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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