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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15)

ㅇㅇ(125.129) 2020.03.17 23:56:23
조회 726 추천 72 댓글 14

엘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없을거라 믿었다. 전부 괜찮을거라고. 그저 아렌델로 돌아가서 루나드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뒤 안나에게 다시 갈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스의 말은 자신의 기대를 산산조각 낸 것 같았다.


나라 간의 국익, 그리고 엘사가 갖고 있는 신념. 어쩌면 강박.

엘사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아야 안나에게 갈 수 있다는 한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분이 왕족이기 때문에, 후계자이기 때문에 단순히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렌델은 유일한 후계자가 엘사 하나였으므로 선택권이 없었고, 사실 서던도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만일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큰 일을 당했을 때 안나 역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때문에 크리스토프 입장에서도 안나를 엘사에게 선뜻 보내 줄 수 없을 터였다.


“…… .”


엘사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떠나야 했다. 자신이 억지를 부려 며칠을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안나에게 주는 상처의 시간만 길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엘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떠날 수는 없었다.

안나에게 가야했다.













한스와 안나의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는 미처 예상하진 못했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 .”


“늦은 밤, 실례가 많았습니다.”


한스의 눈동자는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순수한 줄 알았던 공주였는데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안나 역시 한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스는 깨달았다. 공주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한스는 간단한 목례를 한 뒤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면서 안나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내가 만일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면..그건 당신이 아니라 엘사에게 들어야 해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엘사가 먼저 말해줄거에요..전 그렇게 믿어요.’


너무나 확고한 대답에 한스는 그 말을 꺼낸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안나는 엘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파고들 틈이 없는 것 같았다. 한스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원하는 단 하나조차...내어주지 않네..”


한스의 중얼거림은 허공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졌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필요하면 얼마든지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그가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유일한 친구인 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엘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안나는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스의 말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꼭 알고 싶었다. 엘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


아이러니하게도 엘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엘사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에겐 끝끝내 말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마저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그 말이 안나에겐 희망이었다.


똑똑똑.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안나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안나는 더 이상 낯선 손님을 원치 않았다. 이미 오늘 일어난 일들로 충분했다.


“돌아가세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안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낯선 손님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희미하게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백금발이 안나의 눈에 가득 찼다.


“엘사?..”


“안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안나는 엘사의 방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어딘가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엘사가 불안했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사는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문을 닫았다.

그런 엘사를 지켜보던 안나는 걱정된다는 듯 엘사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엘사? 괜찮아요?”


“…… .”


“무슨 일 있어요?”


안나의 말에 엘사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마음을 먹긴 했으나 막상 입을 떼려고 하니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른 침만 삼키며 불안해하는 엘사를 보며 안나는 안 되겠다는 듯 엘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심장소리에 안나는 천천히 엘사의 등을 쓸며 말했다.


“나 어디 안 가니까 편하게 말해요, 엘사. 당신이 원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 .”


그 말에 엘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안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엘사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더욱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자신을 안고 있는 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안나.”


“응, 여기 있어요.”


“...나는 곧 떠나요.”


“...알아요.”


대답과 함께 엘사를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축제도 끝났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원한다 해도 엘사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나.”


엘사는 안나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자신의 품 안에서 떼어냈다. 물기가 서린 녹색 눈이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해줄 말이 있어요. 내가..꼭 아렌델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


“…… .”


“당신이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엘사..”


“...나는..부모님을..죽였어요. 그리고...그게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요.”


한 단어마다 힘겹게 토해내는 엘사의 말은 안나의 심장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저 짙은 푸른 눈 너머로 넘실대는 어둠을 마주했을 때 안나는 처음으로 망설였다. 

과연 저 어둠 안에 있는 엘사를 자신이 찾을 수 있을까?

울고 있는 이 사람을 정말 내가 안아줘도 되는 걸까?


안나는 점점 어둡게 변해가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대답했다. 설령 닿지 못한다 해도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온 당신의 용기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보여주고 싶어.


“듣고 있어요, 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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