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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15-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24 01: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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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길은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안나의 신인상 수상식이 있던 날. 소속사의 모든 배우들과 가수들이 모인 회식자리 속, 주인공이 된 안나는 부끄러워하며 여럿 선배들의 칭찬을 들었다. 그 자리에는 엘사 역시도 자리에 있었다. 엘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안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연신 내 덕분이라는 등 농담을 던지며 호탕한 웃음을 보냈다. 못말리겠다는 듯 동료들은 피식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안나와 엘사가 어떤 사이인지. 그렇기에 그들은 진심을 담아 축하한다는 말을 보내며 두 여자가 파티를 즐기게끔 자리를 비켜주었다.



달콤한 술에 살짝 달아오른 듯, 두 볼을 비비는 엘사를 안나는 거부하지 않고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엘사가 불편하지 않게 부축하고는 낑낑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밖 테라스에 나가 테이블 옆 의자에 엘사를 앉힌 뒤, 그녀의 옆에 앉아 이른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가로등의 불빛과 먼 야경과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 모두가 자신을 축하해주는 듯 했다.



취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같이 밤공기를 쐬던 엘사는 휘청거리며 안나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안나의 포근한 체향을 맡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안나는 능숙하게 엘사의 볼을 쓰다듬고 짧게 입맛춤했다. 작은 키스를 보내자 엘사는 피식 웃으며 반쯤 감긴 눈으로 안나를 훑었다.



“이젠 어른 다 됐네.”


“치, 누구 때문인데..”



안나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엘사를 보았다. 취한 모습도 예뻤다. 청바지와 검은 나시 티를 입고 잔 근육을 드러낸 팔과 육감적인 목선, 예전 자신이 선물해줬던 목걸이.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선선히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 안나는 행복했다, 더 없이 사랑했다. 소중한 지금 이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엘사를 만나고부터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불행했던 자신의 미래가 희망으로 조금씩 차올랐다. 엘사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주고 도와줬다. 힘든 일이 있다면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조금씩 그녀를 좋아 하게 되고, 같이 있고 싶어졌고, 사랑하게 되었다. 의지할 곳 없던 자신의 마음이 머무르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런 그녀가 안나와 몸을 섞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은 당연했다, 사랑했으니까.



어느새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바다 앞, 연회장 테라스에 여름빛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의 사이로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섞인 향취가 날아들었다. 엘사는 고양이처럼 작게 갸릉거리며 안나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더더욱 안나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힘들다.. 우리 그냥 다 내려놓고 도망칠까?”


“알아 그 마음, 하지만 안 돼.”



작고 가녀린 손으로 엘사의 등을 토닥였다. 단단하고 탄력적인 자신의 몸을 살짝 쓰다듬으며 고개를 젓는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먼 바다의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살짝 감긴다. 살랑이는 바람에 주황빛깔 머릿결이 흩날리고, 그녀의 몸에선 달콤한 과일의 향기가 난다. 잠시 안나의 얼굴 이곳저곳을 훑던 엘사는 픽, 실소를 내뱉었다.



“방금 또 반해버렸네, 나보다 어른스럽다니. 너가 언니해라.”


“언니~ 해봐”


“...이게..하란다고 진짜 하네..얍얍!”



거친 엘사의 손이 안나의 옆구리를 찌르며 얇은 허리를 감싸쥐었다.


“꺄악! 하,하지마아~”



엘사의 손길에 간지러운지 까르륵 거리며 몸을 배배 꼬던 안나는 취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의 두 어깨를 잡는 그녀에게 쓰러지듯 이끌렸다. 엘사는 자신의 품 안에 담긴 안나의 작은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부드러운 살결에 코를 묻어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어 눈 안에 안나의 모든 것이 담기도록 바라보는 듯 했다. 씨익 미소짓는 입꼬리, 그리고 작게 흔들리며 눈물이 맺혀있는 푸른빛 눈동자.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야”


“..응, 왜..?”


“나 사랑하는거 맞지?”

안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말 없는 대답에 엘사는 더욱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



“만약, 내가 너의 곁에 없게 되면. 나를 깨끗이 잊어줘. 나를 사랑한다면 말이야.”


“무슨 말이야..왜, 왜울어..?”


“수상 축하한다, 안나야.”


진한 입맞춤, 방금과는 다른. 무언가의 슬픔이 들어있는 떨리는 키스였다. 안나의 머릿결을 쓸고는 어깨를 강하게 잡아끄는 엘사의 행동은 안나의 의문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타액이 서로 오가고 야릇한 숨소리를 내뱉던 두 여인은 이윽고 떨어져서는 잠시 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어떤 물음도 하지 못한 채 말없이 엘사를 바라보던 안나는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을 건네는 엘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꼬깃꼬깃 접힌 작은 종이였다.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없게 된다면 읽어봐.”


“알..알았어..”

“그럼, 나 피곤하니까 먼저 가서 잔다. 잘자 내 사랑.”



매일을 같은 침대에서 보냈다. 그런 그녀의 어색한 인사말. 안나는 자신 손 위에 놓여 진 종이를 바라보고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엘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눈동자 속에 들어있던 깊은 슬픔이 두려웠으니까. 처음 보는 눈빛 이였다. 애처로움, 차가운 한이 담긴 눈물이였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안나가 마지막으로 본 엘사 에델바이스의 모습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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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달콤한 가십거리의 먹잇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한 사람의 목숨이 되었던, 누군가의 깊은 슬픔 속에 이루어진 흔들리는 탑 위가 되었든. 미디어 믹스의 산물 속에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 갔다. 돌아가는 쳇바퀴처럼 패션의 유행이 돌 듯, 많은 기억들은 사람들 속에 섞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희미해졌다. 새로운 사람이 티비속에 나와 자신의 끼와 재주를 부리며 행복을 느낀다면 어딘가의 이름 모를 누군가는 천천히 언론의 잔혹한 짓밟힘 아래 대중들 사이에서 잊혀져 갔다. 돈을 가진 자는 그 가치를 이용 할 줄 알았고, 사람들의 무관심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중의 한명은 안나가 사랑하던 배우, 엘사 에델바이스 였다.



안나의 신인상 수상이 있기 한달 전, 돈을 가졌던 이들은 끝없는 쾌락의 절벽에서 자신들의 마르지 않을 성욕과 자본의 물줄기 사이에 허우적거리며 새로운 장난감을 찾고 있었다. 매일같이 비어지는 양주 병 들과 함께 누군가의 마음 속, 뜨겁게 타오르던 영혼의 생명역시 점점 공허하게 비어져갔다. 어떤 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지폐다발을 챙기며 축축한 손을 맞잡고는 뚱뚱하고 흐느적거리는 그들의 몸을 부축하며 조용히 둘만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어떤 이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어 신념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빈 영혼을 가졌던 그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존을 위한 값진 희생을 치러야 했다.



무관심 속에 잊혀지던 이, 엘사 에델바이스 역시 그러했다.



회사의 이사회는 어느 날 따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짤막한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계약을 파기하며 투자금의 손익분기점에 대한 환급조치, 자신은 잡아보지도 못했던 큰 액수의 돈이 적혀져있었다. 계약서 안의 글자 하나, 하나, 냉혹하게 적혀진 숫자들은 엘사의 마음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새로운 소속사로서의 이적계약서. 엘사의 연예계 생활동안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의 회사였다. 그리고 붙여진 계약조건.



이 계약에 관한 어떠한 발언도 금지할 것.

소속의 내용 명시는 ‘프로즌 엔터테인먼트’ 로 표기할 것.


계약의 파기 조건은 3년 뒤 상호 조약 후 실시할 것.



그녀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명백한 협박. 자신은 돈과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였다. 그들은 그녀의 면전에 대놓고 협박장을 들이 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합법적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정의 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에 차가운 만년필이 쥐어졌다. 멍하니 계약서의 두 장을 바라보는 엘사의 등을 토닥이던 검은 정장의 사람들은 조용히 그녀의 등을 지나쳐 회의실을 나갔다,



무언의 압박. 순식간에 찾아온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공허한 추위 속에서 엘사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가는 듯 했다. 무수한 생각들과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 기억들은 엘사의 하얗게 바랜 머릿속에서 흩날리고, 희미해지며, 연기처럼 잊혀져갔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았다. 안나.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버려지는 날이 온 것 이라면 언젠가는 안나에게도 그러하겠지. 이 작은 물음만이 엘사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속삭였던 맹세를 되새겼다.



엘사의 결정은 확고했다. 거침없이 그녀는 환불계약서를 찢었다. 그리곤 만년필의 뚜껑을 열어 펜촉을 확인했다. 우아하고 날카로웠다. 차갑게 날이 선 펜촉의 끝을 바라보던 그녀는 새로운 소속사와의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는 글씨와 함께 엘사의 뜨거운 심장에도 불같은 맹세가 찍혀 내려갔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겠다고. 그럼으로써 안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노라고.



완성된 계약서를 받아 든 이사회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그녀의 법적 증명서 속의 소속은 ‘서던 프로젝트 엔터테인먼트’ 로 변경되었다. 이윽고 계약금을 명목으로 천 단위가 넘는 돈을 일시불로 지불받았다. 또한, 그녀에게는 프로즌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외부 업체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이들이 같이 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일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방송 출연의 횟수가 조금씩 늘어갔고, 그녀를 위해 마련된 쳇바퀴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스케쥴과 함께 새벽마다 찾아오는 그들의 부름. 곤히 잠든 안나를 곁에 두고 몸을 옮겨야 하는 엘사의 뒷모습은 누구보다도 어둡고, 쓸쓸했다. 새벽의 종이 울리면 그들의 쾌락은 시작되었다. 형형색색의 불빛 아래서 모인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엘사는 누군가에게 술을 따라주고, 뜻 없을 노래를 부르며 거짓 행복을 부르짖어야 했다. 엘사의 몸과 마음은 천천히 그들의 손 안에 더럽혀 지고, 죽어갔다.



엘사는 하루, 하루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며 생명의 끝을 놓지 않았다. 안나라는 희망을. 그녀의 간곡한 요청 덕에 안나와의 생활을 약속받았던 그녀는 매일 매일을 안나의 얼굴을 보며 작은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그 초록빛깔 눈망울 속에 자신이 바라오고 꿈꿔오던 미래를 조금씩 차곡차곡 쌓아갔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짚어지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겠다는 희망 하나로.



안나의 신인상 수상이 있고 난 다음날. 도시 속 슬럼가의 깊은 곳, 초라한 입구를 가진 술집. 그곳에 엘사는 자신이 받았던 모든 계약금을 들고 찾아갔다. 작은 계획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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