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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19)

ㅇㅇ(125.129) 2020.03.25 20:42:02
조회 664 추천 56 댓글 16


“너 미쳤어?!!”


한스의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엘사의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한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엘사에게 소리쳤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해?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여기서도 감옥이 그리워?”


한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엘사의 얼굴은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대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엘사의 발언은 완전히 자신의 계산을 빗나간 것이었다. 엘사는 절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을 떠나서 엘사가 왕위를 포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랬어? 왕위를 포기할 정도의 일이야?”


“…… .”


“폐하께서 너에게 근신 처분만 내렸다는게 놀라울 지경이다.”


“한스.”


한참만에 엘사가 입을 열자 한스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엘사의 눈에서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 명확하게 무슨 생각인지 보이지 않았다.

엘사는 달라졌다.


“내가 말 했지. 난 안나가 행복하길 원한다고.”


“너..”


“안나가 내가 없어서 행복하다면 난 떠날 수 있어. 얼마든지 보내줄거야. 만일 안나가 너에게 가고 싶어했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네 의견에 찬성했을거야.”


“…… .”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안나 옆에 있고 싶어. 그게 내가 왕위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거고.”


“엘사.”


“그리고 그걸 막는다면..”


“…… .”


“너라도 가만 안 둬.”


모종의 경고였다. 엘사의 짙은 푸른 색 눈은 그 어떠한 불보다 더 뜨거워 보였다. 한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당혹스러웠다. 대체 만난지 얼마 안 된 공주가 뭐라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자신의 신념을 내던진다고?


“네 부모님의 유언조차 저버릴 정도로?”


“…… .”


“그 정도로 그 공주가 좋아?”


한스의 말에 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서던을 떠나는 순간부터, 마차에서도, 왕궁에서도. 부모님의 유언을 잊었냐고?

아니. 오히려 더 생생히 다가왔다.

아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모님의 일은 항상 엘사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엘사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 때문에 상처입고 힘들어하는 안나를 보면서 지금껏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다.

안나와 같이 있으면 모든 시간이 행복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도 안나와 같이 있으므로 인해 행복이 되고 자신도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꾹꾹 눌러온 감정들이 안나가 만들어 놓은 작은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안나 앞에서 울 수 있었다.

여전히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안나와 함께 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는 엘사에게 구원이었다.


“그래, 좋아해. 그 정도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그 말에 한스는 더 이상 엘사를 잡지 않았다. 이젠 의미 없었다. 엘사도, 한스도 루나드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다.












손님들이 서던을 떠난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 따스했던 햇살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찬 공기를 머금었다. 며칠을 방안에서 꼬박 울던 안나도 이젠 조금씩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엘사가 없는 현실.

죽을 것만 같았던 시간은 지나고 상처에는 아주 조금씩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전히 문득문득 떠오르는 엘사가 보고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안나는 점점 야위고 있었다. 안나 자신은 모르고 있을지 몰라도 옆에서 보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보면서 점점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동생을 보며 당장 아렌델에 있는 엘사를 잡아오고 싶었다.


“안나, 요새 밥은 잘 먹어?”


크리스토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는 그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에게 더 신경 쓰라고 할게. 너무 야위었어.”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크리스토프는 이 상황이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안나는 별 다른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안나에게는 엘사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더 많은 것을 생각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으니까.

엘사와 있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엘사의 색으로 물들어갔고 이제는 영영 그 색을 볼 수 없었다.


“...보고싶어..”


“안나? 뭐라고 했어?”


안나의 중얼거림에 크리스토프가 되물었지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의 두근거림은 커다란 마음이 되고 자신은 거기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의 미소, 백금발의 머리,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보고싶었다.


엘사가 너무 보고싶었다.











루나드의 집무실은 아주 고요했다. 거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탁자에 차가 놓여있었지만 아무도 마시진 않았다. 루나드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폐하, 말씀하십시오.”


한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루나드가 자신을 부를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랐다. 그리고 엘사를 부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한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지만 루나드의 의중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려 말하는 건 싫으니 그냥 말하도록 하지.”


“예.”


“한스, 왜 공주에게 청혼하고 싶다고 했지?”


“제가 좋아하니까요.”


“엘사와 공주의 마음을 알고도?”


“예. 저도 진심입니다.”


“진심인지 계산이 끝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 .”


“넌 아마 내 대답을 알고 있겠지.”


루나드는 짜증난다는 듯 다리를 꼬고 고개를 돌렸다. 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루나드가 자신을 부른 것은 앞으로의 일 뿐만 아니라 엘사의 일도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루나드는 확실해질 때까지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가 번복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한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왕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루나드는 한스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나는 이 결혼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 .”


“왕으로서는 널 택해야 하고 손녀를 둔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엘사를 택할 수밖에 없어.”


“....폐하.”


“그러니 보고 정하겠다.”


“..?..”


“정식으로 서던의 공주를 아렌델로 초대할 테니 가서 데려와.”


“지금 그게 무슨..”


“너와 엘사를 이렇게까지 바꿔 놓은 그 공주를 내가 직접 만나야겠다. 나머지는 그 이후 정하도록 하지.”


“폐하?..”


“엘사에겐 알리지 말고 다녀오거라. 공주는 정중하게 데려오도록.”


한스는 루나드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루나드는 이미 모든 것을 정해 놓았다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이제 대화는 끝이란 뜻이었다.

한스는 마른 침을 삼키다 목례를 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정신이 없었다.

루나드가 무슨 의도로 일을 벌이는 건지 몰랐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안나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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